소설리스트

학사재생-92화 (92/373)

학사재생 92화

어지간한 문파의 무력대(武力隊)라고 해도 믿을 판이었다.

“설마 이놈들 녹림(綠林)인가?”

경호의 작은 읊조림에 화답이라도 하듯, 주변을 쩌렁쩌렁 하게 하는 큰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감히 어떤 놈이 우리 녹림 풍마채(風馬砦)의 행사를 방해하는 것이냐!?”

“아무래도 녹림 같습니다, 은공.”

경호의 옆에 바싹 달라붙어 황서연을 지키는 홍산이 눈매를 찌푸리며 말한다.

정파에 구대문파와 오대세가가 있다면, 사파에는 녹림과 적룡(赤龍)이 있다고 하여 사도이문(邪道二門)이라 불린다.

실질적으로 정파 세력과 부딪치며 많은 피해를 보고는 하여 한 수 낮게 평가되지만, 그 험난한 풍진강호에서도 사도의 대표로 뽑힐 만큼의 저력을 무시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특히 각 사도이문을 대표하는 녹림왕(綠林王)과 수로왕(水?王)은 무림에 몇 없는 초인급, 조화경의 고수로도 이름이 높았다.

“풍마채라고 하는 걸 보니, 다행히 녹림왕의 대호채(大虎砦)는 아닌 것 같습니다.”

짧게 읊조리는 경호의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은 하나였다.

‘이걸 안도해야 하나?’

그가 알기로 풍마채는 녹림에 속한 칠십이채(七十二砦) 중 상징이자, 대표로 뽑히는 십팔채(十八砦)의 중간 순위 정도에 자리 잡은 산채였다.

아니, 실상 놈들은 산채라고 부를 수도 없었다. 녹림에 속해 있기에 채(砦)라는 이름이 붙었을 뿐이지. 실상 자신들의 구역에 속하는 산에 머물 때보다 그 이름처럼 대다수의 생활을 바람 따라, 구름 따라 말을 타고 움직이며 유랑하는 것으로 유명했으니 말이다.

구파일방과 오대세가에서 그런 풍마채를 잡고자 몇 번이고 토벌에 나섰지만, 큰 의미는 없었다.

산적 놈들 중에서도 그런 방랑벽 있는 놈들이 많은지, 하나의 풍마채를 박살내고 나면 두 번째 풍마채가 새로 나타난다. 두 번째 풍마채를 모두 죽여도 세 번째가 또 만들어진다. 환장할 노릇인 거다. 그래도 매번 녹림십팔채에 끼일 정도의 역량을 가지지는 못하는 것이 위안이라면 위안이었다.

물론 밝힌 바 있듯 이번 풍마채는 당당히 십팔채의 중간 순위로 이름을 올리고 있었다.

경호의 눈빛이 흔들리는 사이 마적, 아니지 이제는 정체를 밝힌 녹림도 사이로 커다란 태도(太刀)를 네 자루나 착용한 털이 가득한 두목이 모습을 드러냈다.

척 보아도 ‘아, 저놈이 산적 두목이겠구나’ 싶을 정도의 우스운 생김새였지만 경호와 홍산을 비롯한 자리에 위치한 누구도 웃음을 보이지 못했다.

“초절정고수입니다.”

홍산의 짧은 읊조림에, 경호가 고개를 주억인다.

그 역시 풍마채의 채주로 보이는 이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날카로운 기세가 범상치 않다는 사실을 잘 느끼고 있던 탓이었다.

“어디 보자. 네놈들이 우리 아우들을 떨게 한 놈들이렷다?”

위풍당당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풍마채의 채주 역시 쉽사리 몸을 움직이지는 못했다.

그 역시 만만치 않아 보이는 홍산과 경호의 기량을 느낀 탓이었다.

‘이거 재수 없으면 똥 밟으려나?’

풍마채주, 조란의 머릿속이 빠르게 회전하기 시작했다.

달리던 길에 마을이 보였고, 배가 고파서 약탈에 나섰다.

녹림도로서 훌륭한(?) 생활 방식을 고집하고 있는 그들이었지만 나름대로 규칙은 있었다. 풍마대가 전멸할 정도의 위기 때는 괜히 멋 부리지 말고 튀자. 전대 풍마대의 전철을 잘 알고 있는 그들은 누구보다도 손자의 병법 중 삼십육계(三十六計)를 가장 잘 실천하고 있는 이들이었다.

이번에도 조란은 영 아니다 싶으면 언제든지 퇴각 명령을 내릴 준비가 되어 있었다.

‘아, 이거 어떻게 하지. 바로 달려들지 않는 걸 보니 나름대로 걸리는 게 있는 것 같기도 하고…….’

나름대로 제법 오랜 시간 풍마채를 이끌어 오며 눈치만 늘어난 조란의 눈동자가 또르르 굴렀다.

느껴지는 대로 진짜 초절정고수 둘이라면 풍마채는 상대가 안 된다. 못해도 상위 삼강(三强)에 속한 산채 정도는 되어야 싸움이 되는 것이다.

‘그걸 모를 놈들이 아니고…….’

조란의 눈동자가 굴러가는 사이, 경호 역시 그의 기색이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끼며 앞으로 나섰다.

“무작정 싸우려 드는 것이 아니라면 이야기를 조금 해 봅시다.”

“헛소리!”

콧방귀를 크게 뀐 조란이었으나 마음속은 어느 정도 경호의 말에 동의하고 있었다.

단지 두목으로서의 체면을 최대한 세우고 싶을 뿐이었다.

그런 그의 눈에 문득 들어온 황서연의 모습은 또 한 번 머리를 뒤흔들었다.

“저, 저 어린년이 거 참 탐스럽게도 생겼네. 흐흐…….”

저도 모르게 침을 줄줄 흘리며 감탄을 흘린 조란의 아랫도리가 불끈 일어난다.

그 모습을 제 눈으로 확인한 경호의 두 눈에서 불길이 치솟은 것도 동시였다.

“이놈이! 감히 누굴 보고 음심(淫心)을 품는 것이냐!?”

“저년이 누구고 뭐고 내 알 바가 뭐야. 아, 이것 참. 졸라 꼴리네. 어떻게 하지. 네놈이 이렇게 나서는 걸 보니 분명 우리가 불리한 건 아닌데…….”

조란의 혼잣말에 정곡을 찔린 경호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거린 순간이었다.

날카롭게 솟아난 강기가 경호의 왼쪽 가슴을 향해 순식간에 날아든다. 헛바람을 집어삼킨 경호는 검을 뽑아 방어에 나섰지만 기껏해야 검기상인 정도로 강기의 힘을 막을 수는 없었다.

날카로운 쇳소리와 함께 경호가 검을 놓치며 비명을 내지른다.

“크앗-!”

안색을 어둡게 굳히며 다섯 걸음이나 물러난 경호의 입가에 맺힌 얇은 혈선이 턱 끝으로 흘러내렸다.

“호오……?”

조란의 눈이 가늘어졌다.

기회를 노린 상대 초절정고수를 향한 공격이 제법 잘 먹혔다. 어째서인지 상대는 강기를 쓰지 않았고 내상까지 입혔다.

이제 남은 상대는 두 자루 창을 들고 있는 초절정고수 하나. 그리고 엉성해 보이는 무인 열댓 명 정도다. 생각보다 승기를 쉽게 잡은 조란의 마음이 한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다.

“얘들아! 쳐라!”

와아아-!

기다렸다는 듯, 함성을 내지른 풍마채 마적들이 앞으로 뛰쳐나가며 무기를 휘두른다.

‘우선 한 놈……!’

그사이, 경호를 향한 조란의 다음 공격이 이어졌다.

아무리 부상을 입었어도 초절정고수.

회복할 기회를 주지 않기 위함이다.

하나 이번에는 그보다 더 빠른 창이 있었다.

창과 태도.

두 무기가 부딪치며 불꽃이 튀긴다.

카가가강-!

서로 강기를 휘감았기에 어느 한쪽이 크게 물러섬 없는 치열한 공방이 순식간에 이어졌다.

“어린놈이 제법이구나!”

아쉽게 기회를 놓친 조란이 볼을 씰룩이며 눈앞에 나타난 홍산을 노려본다.

묵묵히 두 자루 창을 각기 다른 길이로 부여잡은 홍산은 살기를 피어 올릴 뿐이었다.

‘홍 공자…….’

어렵사리 내상을 수습한 경호의 눈이 떨렸다.

본래 홍산은 한 자루 장창을 썼다.

스승으로부터 물려받은 오래된 창이다.

좋은 무기는 아니지만, 정과 인연이 있다. 때문에 홍산은 황준우로부터 새 창을 선물 받은 순간부터 쌍창술(雙槍術) 훈련에 나섰다.

‘애초에 도련님께서도 그런 점을 알아보고 선물하신 것이겠지만…….’

그런 황준우의 섬세한 시선은 놀랍다.

단순히 상대의 무공을 몇 번 본 것만으로 특징과 특성을 파악하고 더 발전될 수 있는 방향을 만들어 낸다. 때문에 홍산 역시 아무런 의심 없이 두 자루 창을 들 수 있던 것이다. 하나 아직 두 자루 창을 다룬 지 얼마 안 된 만큼 불안한 점과 약점이 많은 것도 사실이었다.

‘도와야 한다.’

둘이 힘을 합쳐 풍마채주를 단숨에 쓰러트리고, 기세를 제압하면 아무런 문제가 없는 싸움이다. 때문에 답은 간단하게 유추할 수 있었다.

하지만 어떻게?

“크하핫! 젊은 놈이 생각보다 제법이구나! 이 조란의 전력을 보이게 하다니!”

카가가강-!

강기와 강기가 휘날리는 순간, 등에 차고 있던 두 번째 태도를 뽑아 든 조란의 기세가 더욱 거세졌다.

두 자루 창과 두 자루 태도.

그리고 휘몰아치는 강기.

틈은 있다.

하나같은 강기가 아닌 검기상인으로 그를 파고들어 쓰러트릴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래도 내가 아니면 못 하는데…….’

고민하는 경호의 눈에 풍마채의 절정고수가 황서연에게로 달려드는 모습이 보였다.

“우선 네년 젖가슴부터 구경해 보자!”

명백하게 수치스러운 장소를 목표로 정하고 공격하는 모습이 날카롭다.

“안 돼!”

이를 악문 경호가 몸을 날렸다.

홍산도 위험하지만, 황서연을 그런 꼴에 처하게 만들 수는 없다.

하나 다급히 수습한 내력을 갑작스럽게 움직이며 보법이 엉켰다.

자연스레 속도가 느려지고 황서연에게 위기가 다가온 듯했다.

“이 재수 없는 나쁜 놈들이 자꾸 뭐라고 지껄이는 거야!”

한데 피한다.

마치 뒤에 눈이라도 달린 듯 자연스럽게 보법을 피하며 반격에까지 나선다.

“억-!”

오히려 마적 측이 당황한 듯 비명을 내지르고서는 말 아래로 떨어질 정도였다.

“죽어! 죽어!”

거칠게 말을 하며 검을 휘두르지만, 실상 황서연의 검에 목숨을 잃는 이는 없었다. 마지막 적을 쓰러트리는 순간 그녀의 검이 면으로 돌아서 타격만 가하는 탓이다.

아직까지 그녀에게 있어 살인이란 버거울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럼에도 강하다.

일류급 무인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그녀의 무력은 압도적이었다.

단순히 내공이라든가 초식의 위엄이 아니었다.

뭐랄까, 마치 사방 공간 전체에 그녀의 눈이 있는 듯 했다.

‘공간 자체를 장악하고 계신 것 같은…….’

한데 사람인 이상 그런 것이 가능할까?

‘도련님이라면…….’

그래, 황준우라면 이해하기 쉬울 터다.

동생인 황서연이라면…….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닌 건가.’

치열한 싸움터 속, 알 수 없는 자괴감이 차올랐다.

모자란 재능.

부족한 무공.

‘강해졌다고 착각이나 하고는…….’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다.

움켜쥔 두 주먹과 몸이 절로 떨린다.

전투는 점점 치열해지고 있었다.

유지량을 비롯한 표사들은 목숨을 내던지며 마을 사람들을 지키고 싸운다. 마적들 역시 필사적으로 무기를 내뻗는다. 무공 수위는 비슷하지만 숫자에서 밀리기에 위험해야 할 표사 일행이 황서연의 압도적 활약 속에서 꽃을 피운다.

“다들 조금만 힘내요! 우리가 이길 수 있어!”

“이길 수 있다!”

“아가씨를 따라라!”

매영검을 높이 추켜 든 황서연의 목소리에, 위험한 상황에서도 단단히 검을 움켜쥔 표사들의 표정이 밝다. 그들 모두의 두 눈동자는 적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마음은 황서연을 향해 있다.

초절정고수 두 사람의 압도적인 싸움보다, 그녀의 활약에 마음을 빼앗기는 것이다.

‘진짜 씨가 다른 건가…….’

경호의 입가로 허탈한 웃음이 흘렀다.

풍마채의 채주인 조란과 일대일 격전에서 한 발도 물러섬 없이 싸우고 있는 홍산.

그리고 압도적 재능과 놀라운 위엄으로 강호 초행임에도 불구하고 주변을 장악하고 힘을 불어넣는 황서연.

무력하고, 미약한 자신에 대한 한심함이 밀려온다.

답답함이 가슴 한가득 차오른다.

좌절, 절망이라는 단어가 절로 떠오르는 그 순간 경호는 웃어 버렸다.

‘그래. 뭐, 어쩔 수 있나.’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천재를 질투해서는 답을 찾을 수가 없다. 몇 번을 따져 보아도 괜한 슬픔만 몰려올 뿐이다. 그런 감정에 지느니 차라리 천재를 바라보지 않겠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