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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93화 (93/373)

학사재생 93화

‘나는 둔재(鈍才)야.’

모자라는 사람은 모자라는 사람만의 방식이 있다.

이미 황준우가 알려 주지 않았던가?

‘느리지만 확실히 나아가자.’

기준만 흔들리지 않는다면 둔재도 해낼 수 있다.

천재를 바라보고 질투하고, 시기하고, 절망하고 포기해 버린다면 그저 그런 둔재로 끝날 뿐이다.

‘도련님은 그런 나도 믿어 주셨어.’

해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분명 풍마채가 들이닥치기 전, 그는 정답에 가까이 다가갔었다.

‘할 수 있다.’

전장 한복판 갑작스럽게 달려드는 풍마채 무인 하나를 베어 넘긴 경호의 눈에 강렬한 의지가 피어올랐다. 치솟듯 뻗어 나온 검연은 홍산이 그러했듯 추풍낙엽처럼 수많은 풍마채의 무인들을 쓸어 넘긴다.

“경 무사님이 합류하셨다!”

그를 본 유지량이 목소리를 높인다.

“아저씨, 내상 회복했구나!”

황서연도 반가운 목소리를 냈다.

경호가 없이도 결코 밀리지 않던 상황, 이로써 전투의 승기가 확실히 잡히기 시작했다.

‘나는 이미 알고 있다. 이미 내 몸은 초절정의 경지에 들어서 있어.’

하나 경호에게는 그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떠오르는 말은 다시 되짚어 간다는 단서.

피어오르다 못해 활활 타오르기 시작한 의지는 느리지만 무거우면서도 확실한 일보(一步)를 내딛기 시작한다.

‘회전하고 엮어서 하나의 바퀴를 만든다.’

우우웅-!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른 검연이 춤을 추듯 그의 의지를 따라 움직인다.

엉키고 엮이고, 때론 풀어지지만 형태를 갖추어 가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내딛은 일보와 내뻗는 검은 무겁고, 단단하다.

아주 짧은 순간이지만, 세상 무엇에도 밀리지 않고, 또한 무엇이라도 벨 수 있다는 자신감이 경호의 가슴 한편에 가득 차오르는 순간이었다.

살을 뚫는 예리한 감촉과 함께, 믿겨지지 않는다는 듯한 부릅뜬 두 눈동자를 목격한다.

“네……놈이…… 어떻게…… 쿠엑-!”

왼쪽 가슴 중앙, 정확하게 검이 꽂힌 조란이 피를 쏟으며 무너진다.

“내가 언제 여기에?”

놀라기는 경호도 마찬가지였다.

몽롱한 가운데 몸이 움직였고, 의지에 따라 검을 내뻗었다. 그리고 무언가 깨어지고 새로운 것이 피어났다 싶은 순간 그의 검이 조란의 심장을 꿰뚫고 있었다.

“은공……!”

지친 표정의 홍산 역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무아지경에 빠져 있던 경호와 다르게 그는 방금 전의 상황을 두 눈으로 똑똑히 목격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이 자리에 있던 모두가 경호를 바라보았다.

검연을 이용해 무수히 많은 풍마채 마적들을 벤 경호가 강기를 머금은 검을 내뻗었고, 놀란 조란이 홍산을 향해 한 자루 태도를 던지고, 또 한 자루를 뽑아 들며 강기를 피어 올려 반격에 나섰다.

그렇게 검과 태도가 격돌했다.

적지 않은 기파(氣波)가 일어났다.

그리고 무거운 태도가 하늘을 향해 치솟았고, 경호의 검은 물 흐르듯 자연스럽게 조란의 가슴을 꿰뚫었다.

홍산이 고전하던 상대를 일격에 죽인 그는 곧 자신이 무슨 짓을 했는지 어렵지 않게 깨달을 수 있었다.

“나…… 강기를 만들어 버렸네요.”

차가운 은빛이 감도는 기륜을 가득 머금은 강기가 조란의 심장을 꿰뚫고 있다.

감격과 감탄. 그 이후 차오른 감정은 하나였다.

어째서인지 검을 들고 있기가 평소에 비해 몇 배는 힘겨웠다. 팔 끝이 떨리고 당장에라도 검을 놓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갑작스러운 전황의 붕괴와 정적 속.

당황하는 풍마채 마적들을 향해 끝을 알려야 했다.

서걱, 휙-!

무거운 검이 조란의 가슴을 뚫고 나오더니 단숨에 목까지 베어 버린다.

허망하고 처참하게 떨어지는 채주의 목을 보는 풍마채 마적들의 얼굴이 삽시간에 굳어졌다.

그런 그들을 향해 경호가 선포하듯 외쳤다.

“당장 무기를 버리고 항복하면 살려 주마! 그렇지 않으면 내 검이 가만히 있지 않을 것이다!”

“지, 지랄!”

경호의 외침에, 반박한 누군가가 말고삐를 잡고 달아나려는 순간이었다.

파앗- 퍼벅!

화살처럼 쏘아진 홍산의 창이 달아나는 마적의 머리통을 꿰뚫어 버렸다.

그 서늘하고 무서운 광경에 마찬가지로 달아날 준비를 하던 마적들의 얼굴이 크게 굳어졌다.

“장담하는데, 달아나는 놈 중 하나는 반드시 죽는다.”

아직 남은 한 자루 창을 번쩍 든 홍산이 싸늘하게 말했다.

남은 마적의 숫자는 이십가량.

다 같이 도망간다면 확률적으로 살아날 가능성이 더 높지만, 목숨을 걸고 그 도박에 뛰어들고 싶은 사람은 그 중 누구도 없었다.

터더더덩-!

들고 있던 무기를 떨어트리고, 말 아래로 내려선 마적들이 무릎을 꿇었다.

“사, 살려 주십시오.”

경호의 느린 걸음이 승리의 쾌거를 일구어 낸 순간이었다.

황서연을 비롯한 표사들, 그리고 경호와 홍산 모두는 그야말로 마을의 구세주가 되었다. 마을의 촌장이 나와 머리 숙여 감사를 표시했으며, 객점의 주인은 머무는 동안 음식과 숙박을 공짜로 대접하겠다고 약속했다.

뿐만이 아니라 수많은 마을 사람들이 찾아와 그들에게 감사 인사를 하며 선물을 주고는 했다.

처음 겪어 보는 상황에 유지량과 표사들은 당황하면서도 헛웃음을 흘리고, 또 즐겼으며 홍산은 언제나와 같이 묵묵한 모습으로 고개를 주억일 뿐이었다.

경호 역시 평소였다면 그사이에서 나름대로 즐길 수 있었을 터였다.

하나 지금 그는 그를 즐길 여유가 없었다.

검 위로 피어오른 은빛 강기가 차갑다.

또한 묵직하다.

처음에는 무아지경을 통한 무리한 강기의 발현 이후 벌어진 문제라고 생각했지만 지금은 달랐다. 전투가 끝난 지 하루 이상이 지났고, 몸 상태는 최상이다. 한데도 너무나 검이 무겁다.

“이거 대체 왜 이러는 거야?”

혹시나 남들 강기도 모두 이런가 싶어 홍산에게 질문을 했더니 그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고 하였다.

하긴, 애초부터 강기란 것이 모두 이렇게 무거우면 홍산이 아무리 재능이 뛰어나도 갑작스럽게 두 자루 창을 쓸 수는 없었을 터였다.

“환장하겠네.”

고민은 하나 더 있었다.

바로 황서연.

어제의 전투 이후, 살아남은 풍마채는 현의 관아에 모두 넘겨졌다.

그리고 죽은 시체 역시 관병들과 마을 사람들이 모두 처리했다.

몰랐었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멀쩡해 보이던 황서연이, 객점에 들어온 순간 허물어지듯 쓰러졌다. 놀란 경호가 그런 황서연을 받치며 이마에 손을 대보니 열이 무섭게 끓고 있었다. 깜짝 놀라 관에 부탁해 의원을 불렀기에 큰 위기는 없었지만 그 이후로도 황서연의 몸 상태가 더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의원은 몸에는 큰 문제가 없다며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고 말이다.

경호는 나름대로 그 이유를 짐작할 수 있었다.

‘그렇게 용감해 보이셨지만, 결국 아직 어린 아가씨일 뿐이다.’

황준우를 닮은 것 같은 무시무시한 재능과 위엄.

과연 만금장의 자식이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을 뛰어난 모습을 보였지만 이제 고작 열여섯의 어린 여자아이다. 그런 황서연이 갑작스럽게 마적 떼의 침공을 받고, 말로 다 할 수 없는 치욕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꿋꿋이 싸웠고, 모두를 이끌며 목소리를 높였다. 피가 난무하고, 살점이 튀기고, 끔찍한 풍경이 가득 찬 전투 속에서 그녀는 더욱 아름답게 피어난 것이다.

대단하고 자랑스럽다.

하나 그를 견뎌 내는 것은 또 별개의 일이다.

설령 제 손으로 살인을 하지 않았다고 하여도, 황서연이 이런 심리적 위기를 홀로 이겨 내는 것은 쉽지만은 않을 터였다. 나름대로 둔재로서의 방법을 찾고, 절망도 거두어 내었지만 여전히 분위기를 즐기지 못하는 데에는 이런 황서연이 걱정되는 탓이 가장 컸다.

‘이럴 때 도련님이 곁에 계셔야 되는데…….’

합비로 간다고 하였던 황준우는 아직도 돌아오지 않았다.

‘대체 무얼 하고 계신 겁니까?’

경호의 시선이 자연스레 합비가 있는 북쪽을 향했다.

6. 해후(邂逅)

경정산 초입에서 출발한 황준우가 합비로 가기까지는 고작 이 주야의 시간밖에 걸리지 않았다. 그것도 경정산 내에 있다는 요괴, 영소를 찾아보기 위해 주변을 둘러본 덕에 그만큼이나 걸린 것이다.

‘결국 영소를 보지는 못했지만…….’

역시 소문은 소문일 뿐일까?

의문을 남긴 황준우가 전력으로 달린 시간은 기껏해야 일 주야 정도.

그 짧은 시간 만에 합비, 남궁세가의 심처까지 도착한 황준우는 곧장 사마정을 만났다.

“놈들이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이후 들려온 소식에 황준우는 뒷머리를 긁적였다.

생각해 보니 서신을 받자마자 출발했으니 황준우가 너무 빨랐다. 그리운 얼굴을 보기 위해서는 하루, 혹은 두 번 정도의 밤낮이 더 남은 것이다. 그렇다고 다시 경정산 주변으로 돌아가기도 묘한 시간. 황준우는 이참에 사마정과 같이 어둠 속에 녹아 남궁세가를 천천히 돌아보았다.

“다행히 두 사람 모두 다른 생각은 보이지 않습니다. 고독이 어지간히도 무섭나 보더군요.”

“그렇겠지.”

“남궁세가를 기반으로 한 천조회(天操會) 융성 임무는 큰 막힘없이 진행되고 있습니다. 아마 내년쯤이면 남기 일대 전체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고작 일 년.

남궁세가를 기반으로 두었다지만 남기 전체에 그만한 영향력을 가진 또 다른 단체를 만들어 낼 수 있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사마정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뜻이었다.

하나 황준우가 관심을 보인 것은 다른 쪽이었다.

“천조회?”

“무신의 무공이 천조칠무라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사마정의 조심스러운 목소리에 어이없는 표정을 지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그래, 마음대로 해.”

“알겠습니다.”

“백노랑 흑노는?”

“소식을 전했으니 지금쯤 오고 있는 중일 것입니다. 둘 모두 전해 주신 무공을 익힌다고 요즘 잔뜩 신이 나 있습니다.”

그럴 만도 하다.

두 사람이 외모에 의해 받은 핍박, 설움을 생각하자면 그 간절함은 수준을 달리할 테니 말이다.

“너는?”

“너도 익히라고 했는데, 잊었어?”

“아…… 예. 나름대로 시간 날 때마다 계속 수련 중입니다.”

“흐음…….”

눈을 가늘게 뜬 황준우가 당황한 표정의 사마정을 뚫어져라 바라본다. 어둠 속에 자란 만큼 누군가의 시선에 익숙하지 않은 사마정의 목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아직 세월의 흔적이 많이 남아 있네. 더 열심히 익혀.”

“…….”

“오래 일해야지, 오래. 빚 다 갚으려면 아직 멀었다, 사마정.”

“알고 있습니다.”

“좋아. 너는 딴생각…….”

“흑아 도착!”

“백아도 도착!”

경고라도 하듯 날카롭게 말하던 황준우의 눈앞에 두 사람의 신영이 번개처럼 떨어졌다.

“그사이 무공이 조금 더 늘었는데? 생각보다 빠르잖아.”

두 사람이 남궁세가의 초입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기척을 느끼고 있던 황준우가 짧은 감탄을 흘렸다. 이후 그의 눈빛이 날카로워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그나저나 너희 둘, 내가 그 자칭 어떻게 하라고 안 했냐?”

“히끅!”

“배, 백아는 아니 백노는 아니, 안 했습니다!”

헛구역질을 하며 시선을 피하고, 재빨리 고개를 내젓는 두 사람의 모습이 이젠 제법 귀엽게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저도 모르게 눈을 풀며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했다.

“됐다, 마음대로 해라. 대신 나도 니들 마음대로 부를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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