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94화
“원래 그러셨지 않습니까?”
“처음부터 막 부르셨지 말입니다.”
“시끄러. 검둥이, 흰둥이. 그래도 가르쳐 준 건 진짜 열심히 익혔나 보네. 오 년은 젊어 보여.”
농담이 아니라, 생각보다 두 사람의 성취가 더욱 빨랐다. 일 년 내내 익혀야 십 년은 젊어 보일 정도가 한계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무공을 전한 지 얼마 안 됐는데 오 년은 젊어 보인다.
이 기세면 삼 년 뒤쯤에는 완전히 젊은이의 모습을 하게 될지도 몰랐다.
“헤헤, 그랬습니까? 안 그래도 요즘 피부가 탱탱해진 기분입니다.”
“젊음은 좋지 말입니다.”
자신들이 동네 강아지처럼 불린다는 것 정도는 아랑곳하지 않은 흑노와 백노가 번갈아 가며 말을 주고받은 후 미소를 그렸다. 동시에 두 사람이 약속이라도 한 듯 한쪽 무릎을 꿇으며 부복한다.
“어쨌든 주군, 무신을 뵙습니다!”
“무신을 뵙습니다!”
“인사가 늦어.”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실제로 불쾌한 느낌은 아니다.
가볍게 손을 내젓고 미소를 짓는 두 사람과 마주한 황준우가 짐짓 엄격한 듯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나저나, 둘 다 무공 익힌다고 본업에는 허술한 것 아니지?”
“흑아는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백아는 발에 땀띠가 다 났습니다.”
“사실입니다.”
흑백쌍노의 동시 반발을 사마정이 거들었다.
‘이건 뭐…….’
사마정을 감시하라고 둘을 붙여 놨더니, 오히려 반대가 된 것 같은 상황이다. 심지어 사마정이 비호를 해 주고 있기까지 하다.
‘이러면 안 되는데…….’
싸늘하게 얼은 마음이 제멋대로 녹아내리려 한다.
저도 모르게 위기감을 느낀 황준우의 얼굴이 단숨에 굳어졌다.
“잊지 마. 너희 임무 중에는 사마정을 감시하는 것도 있다는 걸.”
“그것도 안 잊었습니다. 흑아가 봤을 때 사마정 착합니다.”
“백아가 봤을 때도 나쁜 짓은 안 했나? 어쨌든 배신은 안 합니다!”
“시끄러, 알고 있으니까.”
알고 있긴 쥐뿔, 이제 막 들었으면서.
스스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굳이 표현하지는 않은 황준우가 문득 세 사람을 돌아본다.
“셋 다 초절정이지.”
강호 전체를 통틀어 고수라 불릴 영역.
당연한 말이지만 셋 모두 재능이 있기에 이 경지까지 오른 것이다.
‘이 셋을 조화경으로 만들어 볼까?’
기본적으로 재능이 있으니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하나 경호와 홍산처럼 무작정 밀어붙일 수는 없다.
셋 다 나이도 있고, 이미 들인 나쁜 습관도 너무 많다.
무엇보다 조화경의 벽은 황준우로서도 쉽게 말할 수 있는 종류가 아니었다. 재능에 노력 천운까지 따라야 초인의 영역에 도달한다. 강제로 끌어올려 봤자 경호만도 못한 반쪽짜리가 될 터였다.
‘아니, 내가 얘네를 신경 써 줄 필요가 없잖아?’
어차피 언제 배시할지 모를 음지의 존재들.
황준우는 또 한 번 흔들리는 마음을 굳히고 억지로 시선을 정면으로 끌었다.
“어쨌든 이제 나 혼자 돌아볼 테니까 다들 본래 임무로 돌아가. 그리고, 배신하면 지옥 끝까지 쫓아갈 거야. 잊지 마.”
“따르겠습니다.”
먼저 사마정이 고개를 숙이고 모습을 감췄다.
“절대 배신 안 합니다!”
“이 좋고 재밌는 걸 왜 그만둡니까. 우히히.”
이후 장난처럼 미소 지은 흑백쌍노도 모습을 감춘다.
그런 그들이 사라지는 모습을 곁눈질로 바라본 황준우가 손바닥으로 자신의 입을 연신 두들겼다.
“하여간에 요 입, 요 입이 방정이야. 쓸데없는 말만 많아서는.”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자기 반성회를 가지는 시간이었다.
남궁호량, 남궁호욱과 접촉해 상청원의 방을 내어 받고 나름의 시간을 보내며 이 주야가 흘렀고, 약속된 방문자들이 찾아왔다.
황준우가 박살낸 덕에 새로 만든 청천원에 든 세 사람의 표정은 여유로웠다.
그중 가운데 자리.
가장 나이가 많아 보이는 인물이 짧은 염소수염을 쓸어 넘기며 입을 열었다.
“남궁세가는 변한 게 없구먼, 변한 게 없어. 지금 실권자가 남궁호량이라고 했나?”
왜소한 체구에 남자치고는 가녀리기까지 한 음성을 흘리는 노인이었지만 각자 좌우에 위치한 두 사람은 그런 노인의 눈치를 보기 바빴다.
“들리는 소문으로는 남궁호욱이라는 형제와 다툼이 한창이라더군요.”
좌측, 넓은 어깨에 다부진 인상을 한 중년인이 조심스러운 음성을 흘린다.
“어차피 진짜는 검제일 텐데, 보여 주기 수준이겠지요. 원원존(圓元尊)께서 심려하실 일은 아닙니다. 헤헤.”
우측에 위치한, 이 자리에 조금은 어울리지 않는 젊은 청년이 양 손을 모은 채 싹싹 비비며 웃음을 흘렸다.
그 말처럼, 중앙에 앉은 노인이 바로 원원존 천우량이기 때문이다.
지금은 사라진 원원도문(圓元道門)이라는 고대 도가 문파의 전승자인 그는, 도가의 인물답지 않게 정사지간(正邪之間)에 속한 우내십존 중 일인(一人)이었다.
성정은 괴팍하고 기이하며 제멋대로다.
그래서 달리 우내십존 중에서도 이괴(二怪)로 분류되어 원원괴존(圓元怪尊)이라는 이름으로 더 유명하기도 했다. 물론 원원존 본인 앞에서 그 별호를 부를 수 있는 이들은 몇 없었다. 함부로 입을 놀렸다가는 제멋대로인 그의 성정이 어디로 날뛸지 모르니, 심장이 여럿이 아닌 이상 그보다 하수라고 볼 수 있는 이가 어찌 함부로 입을 놀리겠는가?
덕분에 정파와 사파 양측 모두 골머리를 앓게 하고는 하지만 함부로 그의 목을 베겠다고 나서는 측은 어디에도 없었다. 한때 무림을 공포로 몰아넣었던 칠야의 난에서의 공로와 명성, 전체 우내십존 중에서도 상위 다섯 명 안에 드는 것이 분명한 그의 무공 실력을 부담되게 여기는 탓이다.
그것은 강호사대무관(江湖四大武館) 중 하나인 태원무관의 관주인 우측 사내, 산붕도장(山崩刀將) 관기태라고 해도 다르지 않았다.
그는 나름대로 강호에서 이름 높은 무관의 관주이자 무인으로서 자부심을 가지고 어깨를 피려 하지만, 실질적으로 자신이 원원존의 상대가 안 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대범한 척하지만, 기회주의자에 가까운 관기태는 성정상 감히 원원존을 향해 기세를 세울 수가 없었다.
쉽게 말해, 관기태는 당장 이 자리에서 원원존 천우량이 손속을 뿌린다면 당해 낼 자신이 없었다.
그래서 알아서 눈치를 살피는 것이다.
좌측 사내, 전왕의 경우는 더 심했다.
이름은 왕이지만, 왕하고는 거리가 먼 그는 무인이 아닌 관인(官人)이었다. 정확하게는 종 팔 품의 조교(助敎)로서 국자감(國子監)의 총장(總長)이라 볼 수 있는 제주(祭州)의 명령에 따라 이 자리에 오게 되었다. 그가 해야 할 일은 두 사람을 비롯한 남궁세가의 협의와 협력을 돕고, 기록을 남기는 일이었다.
물론 말이 협의와 협력을 돕지 무인도 아닌 관인이 그런 일을 해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단지 그는 관인들 중 무림에 대해 제법 잘 안다는 이유 덕에, 이 자리에 앉아 계약을 체결하는 모습을 확인하고 증빙을 남겨서 전달하는 역할을 맡게 된 것이다. 물론 이번 일을 잘 처리하고 입을 다무는 조건으로 제법 많은 추가 봉급을 받기로 하였지만, 이 일에 원원괴존이라든지 남궁세가가 연관되었다면 결코 가담하지 않았을 터였다. 물론 이야기를 듣는 순간 이미 물러날 수 없는 입장이 되었지만 말이다.
‘아, 빨리 끝내고 헤어지고 싶다.’
원원괴존에 남궁세가, 거기에 이어 마찬가지로 권위적으로 유명한 산붕도장까지.
‘나 같은 문인은 이런 데서 보름 이상 있으면 숨 막혀서 죽을지도 모른다고.’
중간에 만나서 움직인 덕에 그나마 보름이 다 채워지지 않았지만, 조금 더 있으면 약속된(?) 시간이 다가온다. 스스로가 심장이 약하다고 믿는 관기태는 어서 빨리 이 자리가 끝나기만을 빌고, 또 빌었다.
“크흠!”
그런 그의 바람을 알았다는 듯, 헛기침 소리와 함께 닫혀 있던 방문이 예상보다 빨리 열렸다.
이어서 모습을 드러낸 이는 현재 남궁세가의 일인자라 불리는 남궁호량이다.
부리부리한 두 눈에 턱을 가득 메운 수북한 털과 험상궂고 새빨간 얼굴. 그러한 외형 탓에 남궁호량은 강호무림 전체에 공식적으로 알려진 철혈검(鐵血劍)이라는 별호보다 남익덕(南益德)이라는 두 번째 별칭으로 더 자주 불리고는 했다.
부릅뜬 남궁호량과 두 눈을 마주한 전왕이 저도 모르게 튀어 오르려는 딸꾹질을 억지로 집어삼켰다. 괜히 겁먹은 모습을 보였다가 옆자리에 위치한 원원괴존이나 관기태의 자존심이 상하면 피 보는 사람은 힘없는 자신뿐이었다.
“혼자 온 게냐? 남궁세가에 인물이 없긴 없나 보구나. 너 같은 애송이가 이런 자리까지 나오고. 흐흐.”
다행히, 잠시 시선이 몰리기는 했지만 곧 세 사람의 관심이 거두어지고 서로를 향한 기세 싸움이 시작되었다.
먼저 입을 연 원원괴존의 뻔히 보이는 격장지계는 우스울 수준이었지만, 남궁호량이 남기의 장비 익덕이라 불리는 외모와 어울릴 만큼 다급한 성격이란 걸 생각하면 나쁘지 않다.
이는 남궁호량이 현재의 남궁세가 가주라는 직책에 있다는 사실이 한몫을 더 거들었다. 아무리 원원괴존이 강호 배분이 높고, 무공 실력이 높다 하여도 오대세가 중 하나의 장(將)을 대놓고 이리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말을 한 원원괴존과 관기태, 그리고 눈치를 보던 전왕마저 그가 곧 붉은 얼굴을 더욱 빨갛게 물들이며 노발대발할 것이라 의심치 않았다.
“일단은 혼자 왔습니다만…….”
한데 침착하다.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 행동과 목소리에는 언뜻 두려움마저 느껴졌다. 세 사람의 머릿속에 동시에 든 생각은 조금씩 달랐지만 공통적이었다.
‘남궁세가주가 원원괴존을 무서워하는구나!’
자연스레 원원괴존의 입가에는 자신만만한 미소가, 관기태와 전왕의 얼굴에는 안도의 빛이 어렸다.
남궁세가와 협상을 하러 온 이 자리에서, 일단은 가주라는 직책을 맡고 있는 남궁호량이 대놓고 한 수 접고 들어왔다. 일이 쉽게 풀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먼저 드는 것이 당연했다.
“네놈이 나설 자리가 안 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썩 꺼지고, 진짜 이 자리에 와야 될 분을 모셔 오거라.”
오만하기만 하던 원원괴존의 말이 뒤로 갈수록 조금이지만 조심스러워졌다.
이미 알고 있다시피 그가 생각하는 남궁세가의 진짜 실세는 검제 남궁천.
비록 오랜 잠적 시간이 지나 그 이름을 잊은 이가 많다고 하지만 실제 실력과 배분 모두 원원괴존에 비해 크게 밀린다고 볼 수 없다.
‘당연히 실제로 싸우면 내가 이기겠지만.’
여기는 남궁세가가 아닌가?
개도 제집에서 싸우면 반은 먹어 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안에서 괜히 남궁천과 얼굴을 붉힐 필요가 없다는 사실쯤은 아무리 오만한 원원괴존이라고 해도 잘 알고 있었다.
“그게…… 두 분을 모셔 오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뭐? 직접 안 오고?”
이번 남궁호량의 말에는 세 사람의 생각이 갈렸다.
원원괴존은 불쾌감을 먼저 느꼈다.
아무리 대우를 해 준다고 하여도, 검제 남궁천이 그를 오라 가라 할 수준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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