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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04화 (104/373)

학사재생 104화

제 104화

“무슨 생각을 한 게냐?”

“별생각 안 했어.”

“흠…… 고얀지고, 분명 이상한 생각을 한 것 같은데.”

“아니라니까. 네가 무슨 점쟁이야? 어떻게 사람 얼굴을 보고 알아?”

“그야 네 얼굴이지 않느냐? 자주 떠올리고, 그만큼 많이 그리기도 했…….”

말을 하던 도중, 어째서인지 뒷말을 접은 주연하가 헛기침을 흘렸다.

“큼, 큼.”

“너도 지금 얼굴 붉어졌다. 고얀 것. 대체 무슨 생각을 한 거야?”

“차, 착각이다.”

“얼굴만 척 봐도 알아. 어서 속마음을 불거라!”

“은근히 어투를 따라하지 말거라.”

“은근히 따라하고 싶구나.”

“…….”

괜히 말을 해 봐야 더 놀림당한다.

그 사실을 깨달은 주연하가 입을 닫았다.

“알았어, 안 할게.”

“믿어도 되겠느냐?”

“믿어도 되느니라.”

“나, 나도 놀릴 것이다.”

“놀려 보아라. 어떻게 할 것이냐?”

“…….”

이미 경호를 통해 사람 놀리기 신공을 대성(大成)한 황준우의 상대로 주연하는 너무나 역부족했다.

그저 분한 표정으로 양 볼에 바람을 가득 집어넣는 것이 그녀가 할 수 있는 전부였다.

“푸하하, 진짜 안 할게. 정말.”

“믿지 않느니라.”

“믿어 줘. 이번엔 진짜 약속.”

양손을 모은 황준우의 행동과 진실된 눈빛에 볼에 불어넣었던 바람을 살짝 푼 주연하가 팔짱을 꼈다.

“미리 말하지만 속는다고 생각하고 풀어 주는 것이다.”

“안 속인다니까. 난 남자답게 약속은 한 번만 어겨.”

“전혀 남자답지 못하다는 생각이 든다만은…….”

“중요하지 않은 건 넘어가자고.”

황준우의 너스레에 어이없는 웃음을 지은 주연하가 결국 웃음을 터트렸다.

“풋. 정말, 너란 녀석은 날이 갈수록 말재간이 느는구나.”

“그런가? 달라진 건 크게 없는데. 오히려 이렇게 놀리는데 좋아하는 네가 이상한 것 아닌가? 헉, 생각해 보니 변태 아냐?”

황준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지만 주연하는 콧방귀를 뀔 뿐이었다.

“더 이상은 안 통한다. 네 수법은 이미 간파했느니라.”

“또 점쟁이 놀이하네.”

“후훗.”

“혹시 해서 하는 말인데 황궁에서는 너 이렇게 안 놀려? 막, 정적(政敵)들이면 이런 식으로 도발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황준우는 정말 궁금했다.

주연하가 그의 장난을 즐기는 이유는 새롭기 때문이다. 고지식하고 딱딱하게 살아온 그녀에게 있어서는 상상도 못 할 경험들. 물론 황준우 역시 그런 반응을 보이는 주연하가 싫지는 않았다.

다만 정쟁이 한창이라고 하니 격장지계를 펼치는 상대가 이쯤은 하지 않을까 생각한 것이었다.

“음…… 글쎄, 격장지계를 부릴 때는 많다만 이렇게까지 저열한 수법을 펼치지는 않는다.”

“저열한 수법이라니…….”

황당한 표정의 황준우가 입맛을 다셨다.

“그러면 저열하지 않은 방법은 어떠신데?”

“음…… 괜히 상대의 외모나 걸음걸이를 비꼰다거나, 가족 관계에 대해 모욕을 주는 방법이 가장 많은 편이다. 아무래도 왕족이란 것이 혈족으로 계승되는 점이 많다 보니 말이다.”

“그건 저열하진 않아도 졸렬한데.”

“인정하는 바다.”

짧은 웃음을 흘린 주연하가 어깨를 으쓱였다.

“그러고 보니 만금장이 부럽구나. 아까 보니 여동생과 함께인 것 같던데, 적어도 형제자매끼리 그런…….”

잠시 망설이던 주연하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졸렬한 싸움은 하지 않지 않느냐.”

“너 졸렬하다는 말 처음 써 보지?”

“…….”

얼굴을 붉힌 주연하가 살짝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의 입장에서, 아니 황궁의 딱딱한 분위기에 있어 황준우가 사용하는 말의 대부분이 저열하게 취급되어 함부로 쓸 수가 없다. 그런 말 자체가 꼬투리가 되고 약점으로 돌아오는 탓이었다.

“얼마나 답답할까. 네가 고생이 많다.”

황준우가 그런 그녀의 심정을 반쯤 짐작하며 어깨를 두들겨 준다. 별것 아닌 그 행동에 어쩐지 모르게 힘이 난다고 느낀 주연하가 미소를 보였다.

“힘들지 않다면 거짓이겠구나. 하지만, 군주의 위(位)에 앉으려 한다면 여기서 무너져서도 안 되는 법이겠지. 내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된다.”

언제나 같은 씩씩한 모습이다.

황준우는 그런 주연하가 마음에 들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 외의 감정이 없는 것 또한 아니었다.

“넌…… 조금 바보 같아.”

“……네게만 두 번째로 듣는 말이로구나.”

“권리를 가지기 위해서는 힘든 시련도 이겨 내야 한다는 네 마음은 알겠어. 그래야지만 책임이란 것을 통감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늘 강할 필요가 있는 것도 아니라고 생각해.”

“무슨 말인지 알고 있다.”

“정말?”

황준우의 되물음에 씁쓸한 표정을 지은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가끔씩 투정을 부리고는 한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요청하기도 하지. 지금의 여정도…….”

“흐음…….”

딱딱한 줄만 알았는데 생각보다 융통성도 있다.

황준우는 내심 안도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모든 걱정이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지금의 여정도, 위험하지?”

“…….”

“어디까지 가는데? 동릉에 있는 걸 보니 배를 타야 되는 상황인 것 같긴 한데.”

“…….”

주연하에게서 망설이는 기색이 보였다.

너무 힘들 때는 누군가에게 손을 뻗기도 하지만, 되도록 하고 싶지 않은 일이다. 그런 그녀의 우직하다면 우직한, 고지식한 모습이 어딘지 모르게 동생같이도 보인다. 그래서일까? 황준우는 저도 모르게 주연하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리고는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

알 수 없는 짧은 탄성을 흘리며 얼굴을 붉힌 주연하가 살짝 몸을 꼰다.

“이, 이게 무슨 짓이냐…….”

타박하는 듯하지만 목소리에는 힘이 없다.

저도 모르게 시작한 일이지만, 굳이 멈출 생각도 없는 황준우가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거듭 말하지만 너무 혼자 떠안으려 할 필요도 없다. 네 말대로 친구로서 동등하게 서기 위해서 그런 자존심을 부리는 것이라면, 지금 한 번쯤은 접어 둬. 오히려 친구니까 한 번쯤은 부탁할 수도 있는 거야. 그리고 너도 알다시피, 나 제법 능력 있다고?”

그렇게 말한 후, 잠시 망설인 황준우가 뒷말을 덧붙였다.

“물론 우리 아버지가 더 능력 있지만.”

“푸훕.”

당황하던 주연하의 입가에서 다시 한 번 웃음이 터져 나왔다.

“깔깔깔!”

이후는 멈출 수 없다는 듯 커다란 웃음을 터트린다.

그렇게 한 손으로는 반쯤 입을 가리고 또 반대편 손으로는 배를 잡은 채 한참이나 웃던 주연하가 황준우를 향해 물었다.

“대체 너란 녀석은…… 푸하하!”

“어째서 이런 순간에도 끝까지 진지하지를 못한 게냐? 깔깔!”

“진지하면 밥 먹어야 해서.”

한참 웃음이 가득하던 주연하의 얼굴이 가볍게 굳어졌다. 자연스레 숲을 잔뜩 울리던 웃음소리도 사라졌다.

“미, 미안.”

“음…….”

민망한 사과와 짧은 침묵이 오갔다.

약 반 각 정도 흘렀을까?

괜히 민망한 마음에 황준우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그렇다면…… 한 번만 도와다오.”

주연하가 먼저 무겁게 입을 열었다.

“말해 봐.”

기다렸다는 듯 고개를 주억인 황준우가 답했다.

“장강을 타고 무한으로 가야만 한다. 그곳까지만 우리를 무사히 데려다주었으면 좋겠구나.”

마지막 말을 하는 순간까지도 주연하의 얼굴은 제법 힘겨워 보였다. 친구라고 생각했기에 더욱 힘든 일일지도 몰랐다.

때문에 황준우는 더욱 경쾌한 표정과 목소리로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접수했어. 시일은 언제쯤?”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

“빠를수록 좋다라…….”

잠시 황서연의 얼굴을 떠올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내일 다시 이야기하자. 급하다고 했으니까 오시(午時)전에 내가 찾아갈게. 괜찮지?”

“물론이다.”

“좋아, 그러면 이만 들어가서 쉬자고.”

“고맙다. 진심으로.”

잠시 굳어졌던 주연하의 입가로 다시 미소가 번졌다.

“별말씀을.”

황준우는 여전히 어깨를 으쓱거릴 뿐이었다.

다음 날 아침이 밝았다.

이른 새벽에 벌떡 일어난 황서연은 동릉을 둘러보겠다며 바깥으로 나가자고 재촉했다. 황준우 역시 주연하의 부탁도 들어주고, 황서연의 호기심도 채워 줄 겸 일찍부터 움직일 생각이었으니까 문제는 없었다.

다만 첫 시작이 즐거웠던 것과 다르게 시간이 갈수록 황서연의 얼굴에는 실망감이 가득했다.

“분위기가 이상해.”

시장을 벗어나 선착장에 들른 순간 그녀 역시 느낀 것이다.

이곳저곳에서 느껴지는 경계의 시선과, 이상할 정도로 팍팍한 검문.

즐겁게 놀기에는 숨이 막히는 풍경이다.

덕분일까? 양 볼에 바람을 많이 집어넣은 황서연은 황준우가 무슨 말을 꺼내기도 전에 먼저 말했다.

“여기 재미없어. 다른 곳으로 가자, 오빠.”

안 그래도 슬슬 이야기를 꺼내려던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차피 동릉은 나중에 돌아올 때 다시 구경해도 되니까.’

지금의 분위기는 확실히 관광을 하기는 너무 좋지 않았다. 수색이 좀처럼 되지 않자 조급한지, 선착장의 분위기가 시장에도 조금씩 번지고 있는 수준이었던 탓도 있었다.

‘그러면 이제 배를 골라야 하는데…….’

제일 좋은 건 장강에 널리고 널린 만금장 배를 타는 것이다. 황준우도 처음부터 이 방법을 가장 먼저 떠올렸다. 지속적으로 장강을 타고 거래를 하고 있는 만큼 만금장의 배는 괜한 의심을 받을 확률도 적었다.

하지만 생각해 보면 굳이 그럴 필요가 없었다.

이미 만금장의 지원은 충분할 정도로 받았다.

덕분에 세력의 기반을 어렵지 않게, 소리 소문 없이 쌓아 올린 것이다. 그리고 그 세력에는, 황준우가 저도 모르게 무시했을 뿐 어딜 가나 남기제일의 소리를 듣는 남궁세가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남궁세가 역시 나름대로의 살림을 위해 나름대로의 상권 활동을 하는 중이었다.

그 비중이 얼마 되지 않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동릉의 선착장에 배 한 대쯤은 충분히 있을 터였다.

‘아니, 세 대나 있네.’

심지어 그중 한 척은 오백 명이 넘는 승객을 수용 가능한 제법 큰 여객선이다. 굳이 목적이 없더라도 장강을 유람하고 싶은 사람이 제법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이 배로 하자.’

사실 배에 오르기까지는 걱정하지 않았다.

돈이야 많으니, 그냥 표를 끊고 승선하면 된다.

심지어 애초에 남궁세가의 배는 곧 황준우의 것. 돈을 써도 본인에게 돌아오는 것이다.

선착장에 가득한 감시자들? 황준우가 주연하를 데리고 몰래 배 위로 숨어들면 아무도 못 잡는다.

다만 배 위에서의 불시 검문 등은 조금 위험할 수도 있었는데, 그때에도 나름의 생각이 있는 황준우였다.

실상 여객선을 고른 이유는 두 가지.

첫째는 현재 동릉에 있는 남궁세가의 배 중 가장 빠른 출발 일정을 가지고 있다는 것.

두 번째로는 바로…….

“역시 여객선 방이 편하지.”

화물선이나 작은 수송선과 달리 여객선의 방은 제법 관리되어 있어 깨끗하고 편리하다. 황준우는 순수하게 그 기준에서 배를 고른 것뿐이다.

마음에 결정을 내린 황준우는 주연하를 만나 일행의 숫자를 확인한 후, 가벼운 발걸음으로 나가 표를 준비했다. 이후 다시 한 번 주연하를 만나 말했다.

“내일 당장 출발할 거야. 오늘 하루만 참고, 아침 일찍 이 방에 모두 모여 있어.”

“고맙구나.”

숨어 있는 것이라면 그리 어렵지 않다.

주연하는 고개를 주억이며 다시 한 번 감사를 표했다.

그리고 하룻밤이 흘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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