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06화
제 106화
당장 눈앞의 수적들을 혼내 주는 일쯤이야 너무나 쉽다. 조금 번거롭기는 해도 적룡수로채의 본진을 찾아가 초토화시키는 일 역시 황준우에게는 그리 어렵지 않았다. 다만 그 이후에 벌어질 파생 여파에 대해서는 난감했다.
일단 본진을 친다고 해서 적룡수로채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일단 장강으로만 한정 지어서도 적룡의 후예라고 떠벌리는 놈들이 어디 한둘인 줄 아는가? 굳이 안 세어 봐서 그렇지 열 사람 손가락이 모자랄 터였다.
심지어 적룡수로채는 장강에 본진을 두었을 뿐 천하의 모든 물길에 적(籍)을 둔 거대 수적단이다. 일단 중원천하의 강에 들어왔고, 칼 들고 도적질 시작하면 스스로가 적룡채라고 말하는 놈들이 태반이다. 어이없는 일이지만 적룡수로채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묵과한다. 적어도 그들에게 반하지 않는다는 점과, 최소한의 관행을 어기지만 않으면 아무렴 상관없는 탓이다.
그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우습게도, 그런 적룡채의 정책 탓에 배운 것 없는 도적놈들이라고 해도 막무가내로 나서지는 못한다.
말한 바 있듯 관행 이상의 무리한 요구를 하지 않는 것이다.
결국 천하의 강길에 수적들이 더 늘어나도, 적룡채가 있는 이상 상인들과 오대세가, 구파일방 등에서는 이어지던 관행을 지켜 주기만 하면 될 뿐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적룡채의 본단이 무너지면 어떻게 될까?
스스로 적룡의 후예라 외치던 놈들이 계속 같은 방식을 고수해 올까?
절대 아니다.
배운 게 없는지라 겁도 없어 서로 새로운 적룡의 머리가 되겠다고 아수라장이 될 것이다. 당연히 관행도 없어질 것이고 정도도 벗어나게 된다. 이쯤 되면 구파일방이나 오대세가 입장에서 검을 뽑고 피를 봐야만 한다. 고작 수적 떼라고 무시하기에는 장강이라는 물길에서 그들이 가진 이점이 많다는 사실을 알기에 모두가 꺼려 하는 부분이었다.
심지어 그렇게 해서 장강의 수적을 싹 정리한다고 해도 새로운 적룡의 후예라고 외치는 놈들이 나타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일 년은커녕 몇 달이 되지 않아 또 나타나는 것이 도적 떼란 놈들이다.
그래서 아직까지 장강을 비롯한 회하, 황하 등의 천하의 수로에는 적룡수로채가, 땅에는 녹림이 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일시적인 싸움이 붙고 속한 수채나 산채 중 하나가 사라지고는 해도 딱 거기서 끝나는 싸움인 것이다.
의미 없는 싸움에, 소모적인 피를 희생하고 싶은 이는 누구도 없었다. 장강의 지배자인 수로왕과, 녹림의 우두머리인 녹림왕은 가지고 있는 이권을 놓을 이유가 없다.
결국 관행이란 이름의 편의는 서로의 이해득실을 따진 나름대로 훌륭한 관계인 셈이다.
상인인 만금장의 자식이자, 남궁세가의 숨겨진 주인인 황준우 역시 굳이 그런 관계를 깨려 할 필요가 없었다.
아니꼽긴 하지만 적룡수로채와 녹림칠십이채 모두 이 세상에 있는 필요 악(惡).
음지의 정의(正義)인 셈이다.
‘참 모순적이지.’
코웃음을 친 황준우는 관행대로 이어지는 적룡수로채 수적들과, 여객선 선장과의 대화를 묵묵히 지켜봤다. 제 돈 나가는 심정이라 배 아프지만 참는다.
‘놈들은 필요악이다, 필요악.’
몇 번이고 마음으로 되뇌며 시선을 외면할 쯤.
관행상의 거래가 끝난 이후 물러설 줄로만 알았던 수적 두목 놈이 갑자기 눈알을 부라리며 도를 뽑아 들었다.
차가운 은빛 예기가 흐르는 도를 뽑아 든 그의 모습에, 선장의 얼굴이 굳고 곳곳에서 준비를 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 역시 검을 뽑아 들었다.
자연스레 여객선에 탑승한 사람들의 분위기 전체가 술렁였다.
“무슨 짓이오. 이미 통행료는 건네주었지 않소?”
당황한 선장이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물었다.
“아, 그게. 통행료는 받았는데 아직 볼일이 남아서 말이지.”
수적 두목은 어딘지 모르게 징그러운 미소를 지어 보이며 승객들을 천천히 훑어보기 시작했다.
‘저놈, 저 새끼. 내 장사 망치려고 하는 거 봐.’
저도 모르게 격분한 탓에 잠시 꼭지가 돌 뻔했던 황준우는 곧 침착한 생각에 빠져들었다.
‘근데 저거 하는 짓이 꼭 사람 찾고 있는 것 같지.’
곧장 떠오른 생각은 주연하다.
누군가에게 쫓기는 상황이었고, 그 상대는 아무래도 황궁의 권력자일 확률이 높았다. 황금만 있으면 마음껏 부릴 수 있는 수적 떼를 매수하는 일은 권력자에게 있어 어려운 일도 아닐 터였다.
“흐음…….”
짧은 콧바람을 흘리는 수적 두목의 시선이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 잠시, 면사를 쓴 주연하와 그 일행에게 닿았다. 황준우와 비슷한 생각을 했는지 어딘지 모르게 긴장한 기색이 역력한 그들의 모습이었지만, 곧 수적 두목의 두꺼운 도는 그들을 스쳐 지나갔다.
“쩝, 얼굴도 안 보이는데도 몸매만으로 가 버리겠네.”
지나가는 와중 남긴 한마디가 호위무사들의 가슴을 크게 흔들었지만, 책임감 없이 무작정 나설 정도의 멍청이는 없던 덕인지 조용히 흘러갔다.
‘아무 일 없겠네.’
만약 주연하가 들켰을 경우를 대비한 작전을 생각하던 황준우가 여유롭게 팔짱을 끼고 미소를 지을 때였다.
“찾았다.”
황준우를 향해 도 끝을 세운 수적 두목 놈이 징그럽게 웃는다.
덕분에 잠시 당황한 황준우가 자신을 검지로 가리켜야만 했다.
“그래, 네놈 말이다. 흐흐, 척 보면 척이지. 네놈. 만금장 소장주가 아니더냐? 그리고 옆에 있는 계집은 네 동생이고.”
“어…….”
아무래도 상대를 잘못 짚은 기색은 아니었다.
명확하게 황준우와 황서연을 짚으며 말을 이어 나가고 있었으니 말이다.
“우리는 남궁세가와 싸울 생각이 없다. 얌전히 만금장 소장주와 그 동생을 넘겨주면 이만 물러가겠다.”
곧 수적 두목은 선장을 향해 웃음을 그리며 말했다.
아무래도 남궁세가와 만금장에 대한 세간에 알려진 좋지 않은 소문이 그의 의기양양한 행동을 한몫 거들었을 터였다.
그리고 실제로 내부의 사정을 알지 못하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의 기세가 크게 흔들렸다.
견원지간이나 마찬가지인 만금장의 식솔들을 구하고자 피를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은 탓이었다.
“이것들이, 진짜 고용주도 못 알아보고.”
물론 영원히 못 알아보기를 바란다.
방금 전 한 말은 그저 작은 투덜거림에 불과했다.
다만 그것을 벗어나서라도 할 말은 해야 했다.
“어이, 남궁세가.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돈 내고 탄 승객을 수적 놈들한테 넘기려고? 아무리 우리 사이가 좋지 않아도, 상도덕이 있지. 이건 잘못됐지 않아?”
“닥쳐라! 네놈이 본가에 입힌 손해를 생각하면 아직도 치가 떨린다!”
황준우의 말은 논리적으로 분명 옳다.
하나 남궁세가가 황준우라는 소악마에게 입은 손해를 잘 알고 있는 무인들은 이성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
‘음…… 내가 좀 너무하긴 했나.’
잠시 아쉬운 듯 입맛을 다신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여 수적 두목을 바라보았다.
“적어도 어중이떠중이는 아닙니다.”
옆에 선 경호가 경계한 음색으로 청홍검의 손잡이를 문지르며 말했다.
“그러네.”
우습게 보고 말했지만, 이름도 모를 수적 두목 놈은 자그마치 초절정의 고수다. 저쯤 되는 인물이라면 장강에 널리고 널린 가짜 적룡수로채의 인물이 아닌, 진짜라고 봐야 한다.
상황상 두목이라 부르고 있지만 실질적으로 치자면 적룡수로채의 중진(重鎭)쯤은 먹어 주는 놈일 터였다.
“너, 이름이 뭐냐?”
문득 궁금해진 황준우의 질문에 두목 놈이 허리춤에 손을 올리고는 호탕한 웃음을 흘렸다.
“푸하하하! 이 몸으로 말하실 것 같으면 위대한 적룡의 후예 중 다섯 번째 아들, 전왕님이시다!”
황준우는 저도 모르게 깜짝 놀란 신음을 흘렸다.
“흐흐, 내 이름을 들어 보았나 보지?”
“어, 그게…… 아무래도 모르지는 않네.”
분명 같은 이름을 가진, 전혀 다른 동명이인(同名異人)은 알고 있었다.
황준우, 정확하게 말하자면 칠야무신의 추종자인 천재 문인, 전왕하고 이름이 똑같았으니 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쯤 황궁으로 잘 돌아갔겠지?’
걱정이란 것을 해 볼까 했지만, 왠지 전왕이라면 무사할 것 같다는 생각이 더 많이 들었다.
“아무리 만금장 소장주라 하여도 내 위대한 이름 앞에서는 어쩔 수 없겠지. 항복하고 순순히 오라를 받아라. 죽이지는 않으마.”
수적 주제에, 관군이나 할 법한 소리를 하는 전왕을 보며 어이없는 웃음을 흘린 황준우의 손이 까딱였다.
“가라, 경호! 가서 놈들을 무찔러 버려!”
긴장한 표정으로 청홍검 손잡이를 꼭 쥐고 있던 경호가 잠시 당황한 음성을 흘렸다.
“뭐 해? 가서 처리하라니까.”
“어, 저, 그게…… 혼자 말입니까?”
눈앞의 전왕은 초절정고수.
느껴지는 기세도 제법 흉험하다.
황준우의 입장에서야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만, 지금의 경호로서는 승부를 장담할 수 없는 상대였다.
아니, 열 번 싸우면 여덟은 진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제가 도울까요?”
“나도 할래.”
홍산과 황서연이 동시에 말했다.
“아아, 그러지 마. 우리 경호도 가끔 활약해 줘야지. 어서 가서 일해라, 경호! 받는 돈 값을 하란 말이야!”
“…….”
고용주인 황준우의 논리적인 설명에 조금 탐탁지 않은 표정을 한 경호가 앞으로 한 걸음 나섰다.
“가랏, 경호! 적들을 박살내는 거야!”
뒤에서 어딘지 모르게 힘 빠지는 응원이 들려왔지만 그래도 대책이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청홍검…….”
이름을 부른 순간 기다렸다는 듯 떨림을 토하는 검을 뽑아 든 경호의 눈빛이 변했다.
“하, 실력이 제법이긴 하다만 네놈으로는 안 된다는 걸 알 텐데?”
당당하게 말하고 있었지만 경호와 홍산 등 눈에 보이는 초절정고수 두 사람을 경계하고 있던 전왕이 짧은 경고를 보냈다.
동시에 중앙 범선으로부터 두 개의 신형이 더 떨어졌다.
“형님 혼자 하시려니 애새끼들이 겁 없이 나대는 것 아니우.”
“함께합시다.”
그들의 등장에 선장을 비롯한 남궁세가 무인들 사이에 큰 술렁임이 일었다.
“적룡삼조(赤龍三爪)가 모두…….”
“으음…….”
적룡수로채의 고수들 중 수위를 다투는 전왕과 그의 형제들 적룡삼조는 누구 하나 빠질 것 없는 초절정고수였다.
그런 그들이 한자리에 모습을 드러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자면 어려운 상황이다.
“그래도 바보는 아니라고 여럿이서 왔네.”
상대가 만금장 소장주라고 생각한 만큼 나름 만반의 준비를 갖춰 왔다.
물론 그조차도 황준우를 얕본 것이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여전히 황준우는 본인이 직접 싸울 마음이 없었으니 말이다.
“……저 진짜 혼자 합니까?”
세 사람이나 되는 초절정고수의 등장에, 잔뜩 굳혔던 표정을 풀고 울 것 같은 인상이 된 경호가 돌아보며 물었다.
“힘내, 경호! 넌 할 수 있어!”
“끙…….”
앓는 소리를 낸 경호가 다시 정면을 바라본다.
‘설마하니 도련님이 날 죽이려고 음모를 짜신 거겠어?’
아무리 지독한 장난꾸러기에, 어디로 튈지 모르는 성격이라지만 그러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겠지?’
아주 잠시 의문을 품은 경호를 향해 전왕을 비롯한 적룡삼조 형제들의 살기가 파고들었다.
“건방진 놈. 정말 혼자서 덤빌 셈이냐?”
“제 명줄을 재촉하는구나.”
경호는 솔직히 웃거나, 울고 싶었다.
적룡삼조라 불리는 세 사람이 덤벼들면 솔직히 십 초도 버틸 자신이 없는 탓이다.
하지만 이미 전투의 분위기는 형성되었고 약한 모습을 보일 수도 없다.
‘선수필승(先手必勝).’
방법이 있다면 먼저 나서 세 사람 중 하나라도 죽이는 것이다. 그 뒤를 따라올 수적 부하들도 곤란했지만 그쯤은 황준우 혹은 홍산이나 황서연이 어떻게 해 줄 것이다.
‘진짜 양심적으로 그건 해 주실 거야.’
청홍검을 처음 잡았을 때의 자신감을 다시금 일으키며, 기운을 북돋은 경호의 눈이 예리하게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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