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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08화 (108/373)

학사재생 108화

제 108화

그런 수로왕의 맞은편, 검은 도포를 온몸에 감은 채 묵빛이 감도는 죽립을 깊게 눌러쓴 사내가 고개를 저으며 수로왕을 위로한다.

“아니지, 만금장 소장주쯤 되니 그런 호위무사가 있을 수도 있지.”

“멀리 나간 생각이시오. 알려지기로는 만금장에는 위휘봉선을 제외한 초인이 없지 않소?”

“알려지기로는 그렇지. 하나 천하 강호 일이 언제 보이는 대로만 흘러간 적이 있소? 만금장쯤 되면 감춰 둔 한 수가 있다고 생각해야 되는 것이 옳았던 게요.”

“그래서 적룡삼조를 모두 보낸 것 아니오.”

“내가 직접 갔어야 했지.”

무거운 목소리로 술잔을 한 번 더 비운 수로왕을 향해 검은 사내가 혀를 찬다.

적룡수로채에 있어 화가 난 수로왕을 이토록 당당하게 마주하여 위로하며 혀를 찰 수 있는 인물이 몇이나 될까? 설령 천하를 따져 보아도 몇 없을 터다.

하나 온몸을 검은색으로 감싼 사내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애초부터 그는 본래 수적이 아니었다.

당연하지만 적룡의 후예라 불리는 인물들도 아니다.

누군가 그에 대해 들어 보거나, 한 번쯤 본 사람이 있다면 이 자리에서 곧장 소리 쳤을 것이다.

천마신교, 교주 직속 제일무력대 흑풍대주 구휘!

그 역시 초인이라 불리는 조화의 영역에 이른 엄청난 고수였다. 심지어 수로왕이 말했듯 강호 무림에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하듯 그의 실력은 많이 축소되어 있었다.

실질적으로 칠야의 난 이후 가장 많은 피해를 입은 천마신교가 신강, 십만대산에 은거한 탓에 잘 알려지지 않았을 뿐.

강호에 마음먹고 이름을 새기고자 한다면 능히 현재 우내십존의 이름 위치를 바꿔먹을 수 있는 실력자가 바로 구휘인 것이다.

“아쉽지만 우리가 해 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요. 나는 더 이상 내 형제들을 잃고 싶지 않소.”

쓴웃음을 지은 수로왕은 또 한 번 술잔을 채우고, 비우며 입을 닫았다.

그 앞에 앉아 함께 잔을 기울인 구휘의 고개가 무겁게 끄덕여졌다.

적룡수로채에서 달리 적룡의 후예라 불리는 이들을 빼고 난다면 실질적으로 나설 수 있는 인물은 수로왕 본인뿐이다. 문제는 그가 나선다면 일이 진짜 커진다는 사실이었다. 이미 만금장 소장주를 노렸다는 사실만으로도 큰 부담을 안은 상황에, 무거운 엉덩이를 들어 올려 판을 키운다.

만금장주 황석후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다.

무외삼제에 속하였던 위휘봉선을 비롯한 만금표국이 움직일 것이고, 그의 황금이 닿는 권력과 무림세가가 움직이게 될 터였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와 대단한 무공을 보유한 수로왕이라고 하여도 목숨을 장담할 자신이 없었다.

“이해하오.”

구휘는 고개를 주억인 후, 한 번도 비우지 않았던 술잔을 삼키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이제부터는 우리 흑풍대가 직접 나서겠소. 배만 빌려 주시오.”

그쯤이야 무에 어렵겠는가.

“그리하리다.”

수로왕이 고개를 주억이고, 구휘가 검은 도포를 휘날리며 적룡영토를 벗어났다.

조용한 적막이 깔린 방 안, 붉어진 얼굴에 팔자 눈썹을 하고 있던 수로왕의 두 눈에서는 차가운 빛을 흘렸다.

“선장의 말을 따르기를 잘했군. 천마신교가 벌써 저만큼이나 성세를 회복했을 줄이야.”

수로왕은 처음 구휘를 보았을 때 깜짝 놀랐다.

한 세대 전의 실질적 천하제일고수였던 전대천마와 그를 따르는 오대마종(五代魔宗)이 칠야무신 황준우와의 오 일 밤낮의 싸움 끝에 죽은 이후, 단일 세력으로 무림 제일이라 칭해지던 천마신교의 성세는 대외적으로 끝을 맺었다.

전대 천마의 혈족이었던 젊은 천재가 새로이 검을 들고 마교의 정점을 선언했지만 아직 젊은 피일 뿐이었다.

새로이 오대마종의 이름을 계승한 이들도 사람이 없어 어찌어찌 자리를 메운 이들. 그런 그들마저도 칠야무신에게 대다수를 잃어야만 했다.

칠야의 난이 끝난 이후, 많은 힘을 잃은 젊은 천마가 신강의 십만대산으로 돌아가겠다며 봉문을 선언한 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 역시 칠야의 난을 함께 이겨 낸 용사라 불릴 수 있었지만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칠야무신이 있기 이전에는 근본적으로 강호 무림 전체가 두려워하던 천마신교의 교주라는 직책과 위험성. 만약을 대비하기 위해서라도 그에게 힘을 실어 주기를 원하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힘없는 젊은 천마와 뒤를 따르는 마교의 세력을 고이 돌려보내 준 일이 최소한의 양심이었다고 볼 수 있는 셈이다.

그렇게 천마신교가 사라진 이후, 무림에는 새로이 마(魔)의 이름을 건 세력이 나타났다.

지마교(地魔敎).

하늘에 천마가 있다면 땅에 지마가 있다는 이론으로 무장하여 새로운 신을 떠받들며 일어난 포부는 원대했으나, 결국 지마교는 새로운 강자로 올라서지 못했다.

천마신교를 따라한 그저 그런 가짜에 불과한 세력.

애초부터 마중고수(魔中高手)라 불릴 수 있는 이들은 모두 젊은 천마와 함께 십만대산에 은거하였으니, 지마교가 아무리 대단한 논리와 이론을 무장했다고 하여 날개를 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심지어 그 논리마저 천마신교의 것을 따다 베낀 수준밖에 안 되니 지마교의 몰락은 예정되어 있던 일.

그나마 지금까지 이름을 유지하고, 남아 있는 마중 세력을 이끌 수 있는 것도 정, 사의 보이지 않은 지원이 있었던 덕이었다.

결국 지마교는 어디까지나 천마신교가 새로이 발호했을 때를 대비한 마중지란(魔中芝蘭)을 일으키기 위한 포석으로서 살아남은 것일 뿐. 숨을 죽이고 있다 하여도 진정한 마의 정점에 위치한 세력은 오로지 천마신교뿐이라는 사실을 강호의 지배자들은 모두가 알고 있었다.

때문에 강호의 권력을 쥔 군주들은 언제나 그들을 경계하고, 견제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달리 승선 모임이라 불리는 무한의 활협단 집회에도 이러한 부분에 대한 이야기는 자주 나오곤 했다.

한데 계산하고 있던 것보다 천마신교의 성세 회복이 생각보다 빠르다.

천마신교 제일무력대의 대주라고는 하지만, 결국 천마의 수하일 뿐이고 오대마종에 비해서도 한끝 밀리는 위치가 바로 흑풍대주다. 그런 그의 실력이 강호의 우내십존을 위협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는 천마신교가 왕년의 성세를 모두 회복했을 뿐 아니라, 넘어서기 시작했을지도 모른다는 위기 징조였다.

다행히 그런 낌새를 눈치챈 이가 활협단 내에 누구도 없던 것은 아니었다.

자리에 앉아 천하를 굽어보는 혜안(慧眼)이라도 가진 듯한 선장은 수로왕에게 천마신교의 위험성을 알리고, 곧 그들이 접근하여 어떤 부탁을 할지도 모른다는 사실마저 일러두었다.

수로왕의 선택은 둘 중 하나였다.

이참에 힘을 되찾은 천마신교와 손을 잡고 나아가느냐, 이미 강호의 정점에 위치한 군주들과 계속해서 사이를 이어 가느냐. 답은 정해져 있었다.

굳이 이미 닦아 놓은 길을 놓아두고 돌아갈 필요가 없다.

심지어 천마신교는 너무 위험하다.

음흉하지만 기본적인 도리(道理)를 지키는 티라도 내는 지금의 활협단과 다르게 천마신교는 그야말로 마의 무리. 그들이 무림의 정점에 군림한다면 적룡수로채의 입장에서도 아쉬울 일이 많았다.

그래서 선장의 말을 따라, 도와주는 척 천마신교의 의중을 재 보기만 하였다.

흑풍대주 구휘가 워낙 말수가 적고 감정 표현이 적은 인물이라 알아낼 수 있는 것은 거의 없었지만, 그래도 가장 중요한 사실 하나는 얻어냈다.

천마신교가 만금장을 노린다는 것.

아마 황금이 많이 필요한 탓일 것이다.

짧은 시간에 많은 고수를 육성하였으니 어찌 보자면 당연한 일.

‘선장은 지금쯤 만금장과 접촉을 하고 있겠군.’

수로왕은 흑풍대가 직접 나선다고 하였으니 만금장 소장주가 사로잡히는 것은 이미 예정되었다고 보았다. 호위무사의 숨겨진 실력이 놀랍게도 초인의 영역에 달했으나, 흑풍대주 구휘 역시 같은 경지. 느껴지는 숙련도로 따지자면 놀라울 정도다. 조화경의 고수들 중, 우내십존에 뽑히는 인물이 단 열 명뿐인 것도 조화경 내에서도 실력 차이가 분명한 탓이다.

‘또 한 명의 초인이 있지 않는 한은 이 싸움은 불 보듯 뻔하지.’

그렇게 되면 본래 적룡수로채를 향했을지도 모르는 만금장의 힘은 천마신교를 향하게 된다. 활협단은 거기에 한 팔을 거들 것이고, 세상에 다시 나올 눈치를 보고 있는 천마신교를 다시 십만대산에 가둘 것이다.

잠시, 생각을 정리하던 수로왕의 몸이 떨렸다.

“선장, 무서운 자야.”

놀랍게도 선장이라 불린 이는 이런 상황을 예측하고 있었다. 천마신교가 황금을 필요로 할 것이라는 사실과, 만금장 측을 노릴 것. 수로왕에게 접근하리라는 사실까지 모두 꿰뚫어 보고 있던 것이다. 때문에 수로왕은 갑작스러운 구휘의 방문에도 당황하지 않을 수 있었고 어렵지 않게 그를 돕는 척을 해낼 수 있었다. 물론 그 대단한 선장이나, 수로왕 모두가 예상치 못한 일도 있었다.

“그나저나 녀석들, 적당히 눈치 보고 도망치라고 했더니 모두가 죽을 줄이야…….”

또 한 번 술잔을 기울이는 입맛이 쓰다.

적룡삼조는 적룡수로채에 있어서 몇 안 되는 초절정고수. 그러니까 진짜배기 전력들이었다. 그런 그들을 모두 보낸 것은 일종의 허식, 나름대로 천마신교에 대한 예우를 차려 주었다는 수로왕의 잔꾀였다.

가능성은 적지만 혹시라도 활협단이 천마신교에게 당하게 될 때에도 빌붙을 언덕 정도는 남겨 놓아야 하는 법이니 말이다.

한데 생각지 못한 조화경 고수의 등장에 의해 모두 살해당했다.

이는 너무 뼈아픈 손실이란 사실을 부정할 수 없었다.

“녀석들, 딱히 의리랄 것 까진 없지만 살아 있는 동안 고생했다. 저승에서는 푹 쉬거라.”

다시 한 번 술잔을 채워 하늘을 향해 들어 올린 수로왕의 작은 목소리가 전각의 방 안을 낮게 울렸다.

수로왕이 내어 준 배에 삼십의 흑풍대와, 대주 구휘가 올라탔다. 적룡수로채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적룡이 그려진 돛이 당당히 걸린 모습을 본 구휘의 입가로는 조소(嘲笑)가 흘렀다.

“어차피 개나 소나 마음대로 사용하는 문양이란 것이지.”

마지막까지 천마신교에 생색을 내고 있는 셈이다. 만약 화살이 재수 없게 돌아와도 자신들은 아니라고 발뺌을 하면 된다는 수로왕의 잔꾀가 눈앞에 보인다. 귀엽기도 하면서도, 이런 생색을 뻔히 알면서도 넘어가야 하는 사실 자체가 답답하다.

“교가 다시 세상을 향해 나아가기만 한다면 이런 잔꾀나 부리는 녀석들은 모두 숙청할 수 있겠지.”

불쾌한 감정을 억누른 구휘의 손짓에 기다리고 있던 흑풍대원들이 배를 몰기 시작했다. 수로왕이 약속대로 배는 내어주었지만 사람은 주지 않은 탓이다.

마찬가지로 불쾌하지만 상관없었다.

어차피 사람들을 내어주었어도, 또다시 눈에 보이는 잔꾀에 더 기분이 나빠졌을 터였다.

구휘는 수로왕에 대한 생각을 털기로 했다.

음흉하고, 생각이 깊은 인물로 경계를 해야 하지만 아직은 때가 아니다.

지금 당장 생각해야 될 일은 단 하나.

“속도를 올려라. 놈이 아직 장강에 있을 때 잡아야 한다.”

만금장 소장주를 사로잡는 것.

지금은 그 임무 하나만이 중요한 때였다.

여객선은 빠르지는 않지만 고요히 나아간다.

장강의 물길을 따라 들르는 선착장이 제법 많아 더 시간이 오래 걸리기도 하지만, 그만큼 나름의 즐거움도 있었다. 작은 섬마을에서부터, 항구가 달린 큰 도시까지 잠깐이나마 구경을 나가고 둘러볼 수 있는 여유도 있으니 여행의 참 재미를 느끼기에는 부족함이 없는 것이다.

처음에는 즐거워했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예정된 지겨움에 몸부림치던 황서연의 입장에서는 더욱 고마운 일이었다.

“오빠, 나 잠깐 다녀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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