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09화 (109/373)

학사재생 109화

제 109화

작은 섬마을.

총 인구가 백도 안 되어 보이는 곳에 여객선이 잠시 멈춘 순간 황서연이 목소리를 높이며 앞으로 뛰쳐나간다. 애초부터 목적지가 마을이었던 사람들은 하나둘씩 짐을 싸서 내리기 시작했다.

“빨리 와, 배 금방 출발한다.”

“그냥 어떤 곳인지만 둘러보고 올 거야!”

경신술을 펼치면서 힘차게 목소리를 높인 황서연의 뒤를 황준우와 시선을 마주친 후, 고개를 주억인 홍산이 따른다.

혹시 모를 위협이나 상황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누가 내 생각 하나?”

“전 아닙니다.”

“응? 난 우리 경호라고 한 적 없는데? 혹시 찔려?”

“…….”

경호는 대답하지 않는다.

잠시 황당한 얼굴을 한 황준우였지만, 거기검 사건의 여파가 아직 남아 있음을 알았기에 굳이 더 추궁하지도 않았다.

평소처럼 놀리지도 않았다.

“에헤이, 안 알려 줘서 미안하대도. 내륙에 가면 내가 진짜 맛있는 밥 살게. 그리고 솔직히 별호가 생긴 것 자체는 나쁜 것 아니잖아?”

무인에게 있어 별호가 생기기 전과 후는 엄연하게 차이가 갈린다.

별호가 있는 무인은 어디 가서 그의 이름을 밝히지 않아도 상대가 알아봐 줄 때가 있고, 그 실력과 명성에 걸맞은 대우를 받는다. 제법 큰 상가와 세가에서는 그런 명성 있는 무인들을 빈객(賓客)으로 모셔 놓고 선물이라는 명목으로 봉급까지 주며 가문의 힘을 키우기도 할 정도였다.

그러니 분명 별호가 생긴 것은 좋다.

거기검이라는 이름도 사실 나쁜 것만은 아니다.

“이상하게 생각하는 놈들은 그냥 그, 뭐랄까. 변태…….”

말을 하다 말고 잠시 망설이며 경호의 눈치를 본 황준우가 재빨리 뒷말을 바꾸었다.

“에, 그러니까…… 이상한 게 아니라 음, 단지 훌륭한 변태일 뿐이지 않을까?”

“그렇군요. 저는 훌륭한 변태로군요.”

“어…… 그게, 미안 경호.”

나름 위로를 하려고 했는데 어째서인지 말실수를 해 버린 황준우가 민망함에 얼굴을 붉혔다.

“괜찮습니다. 이번 건 진심으로 놀리겠다는 게 안 느껴졌거든요.”

“그건 또 다행이네.”

그렇게 경호와 단둘이 배의 난간에 서 잡담을 나누고 있는 사이, 저 멀리 주연하가 손짓하는 모습이 보였다.

할 말이 있는 듯 보였다.

“나도 잠시 다녀올게.”

“지금 말씀이십니까?”

“배 안에 있을 거야.”

“변소 가시는 길이군요.”

“거참…….”

아니라고 하기는 딱히 달리 할 말도 없기에 혀를 차며 경호를 향해 눈을 흘긴 황준우가 주연하를 향해 다가갔다.

주연하는 그가 다가오는 모습을 본 순간부터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신의 방 안으로 자연스럽게 들어간다. 황준우 역시 내색하지 않고 그 뒤를 따랐다.

방문이 닫히고, 단둘만이 남은 여객선 방 내에서 주연하가 면사를 들어올렸다.

“후우…….”

“그거 많이 답답한가 보네.”

“아무래도……. 한번 써 보겠느냐?”

“사양할게.”

황준우는 냉정히 손을 내젓고는 방 주변을 둘러보더니 침상에 털썩 주저앉는다.

“그래도 그렇지 너도 대단하다. 어떻게 시집도 안 간 처녀가 외간 남자를 혼자 있는 제 방에 막 들이냐?”

“그 처녀의 침대에 마음대로 엉덩이를 붙이는 네가 할 말은 아니라고 생각한다만.”

“아, 그랬지. 미안, 너무 편해서. 어차피 서로에게 마음이 없다면 약관의 나이에 함께 앉아도 상관없는 거잖냐?”

어깨를 으쓱하며 능청스러운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주연하를 직시한다. 어딘지 모르게 약간 달뜬 숨소리를 흘린 그녀가 시선을 피하며 고개를 주억였다.

“후우…… 맞는 말이다.”

“그래서, 갑자기 날 찾은 이유는?”

“여기가 어디쯤인지 감이 안 잡히는구나. 혹시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는 게냐?”

“왜 없어, 선장한테 물어보면 되지.”

“아……?”

“이거 은근히 허당일세. 너 배 처음 타 봐?”

“처음은 아니다만…….”

언제나 궁에서 내어 주는 배에 몸을 싣고 그저 편안하게 기다리기만 하면 알아서 목적지에 도달하고는 했다.

적어도 황궁에 들기 전까지만 하여도 그녀는 괜한 의심을 할 일도, 필요도 없었기 때문이었다.

“어쨌든 중요한 건 대충 무한까지 남은 시간이 궁금한 것 아니야? 앞으로 한 보름 정도 더 가면 되겠네.”

주연하와 다르게 배를 자주 타 보고, 나름대로 장강의 물길도 몇 번 겪은 황준우가 말했다.

“보름…….”

“확실한 건 선장한테 묻는 게 최고고.”

“아니, 예측으로도 충분하다.”

가볍게 손을 내저은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드디어 보름이면 무한인가…….”

“한데 무한에 가면 무슨 방도가 생기는 거야? 아, 그보다 너 왜 황녀가 된 거냐? 공주 아니야?”

스치듯 들었던 말이었는데, 잊고 있다가 문득 생각이 났다.

황준우의 질문에 주연하의 입가로 묘한 조소가 번졌다.

“황제폐하의 은총이 바다를 닮아 넓어, 이 부족한 재능을 어여삐 여겨 주신 덕이다.”

“흐음…… 본래라면 본래 나쁜 의도는 없었다는 거네.”

“…….”

주연하는 말없이 미소와 함께 고개를 주억였다.

상황이 꼬여 이런 모습이 되었지만, 애초에 현 황제인 영락제는 그녀를 곤란하게 하려는 의도는 없었다.

‘진짜 그럴까?’

황준우는 영락제에 대해 잘 알지 못했다.

하나 들리는 소문 정도는 안다.

그는 본래 황족이 아니었으며, 제위 찬탈을 하여 제국의 정상을 차지한 인물이다. 그쯤 되는 음흉한 이가 과연 이런 상황을 예지하지 못했을까? 황준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물론 주연하 앞에서 그런 감정을 모두 드러낼 필요는 없었다.

“근데 보통 황녀가 된 것만으로 이런 상황이 벌어지지는 않잖아?”

원래라면 그렇다.

하나 황준우의 생각과 다른 아주 큰 사연이 존재했다.

“폐하께서 나를 점찍으셨다.”

“뭐, 뭐?”

겁 없고, 대범한 황준우도 이 말에서만큼은 잠시 당황했다.

“다음 제위에 나를…….”

“대놓고 물 먹이려는 것 아니야?”

“폐하께서는 그럴 분이 아니다.”

저도 모르게 나온 본심에 주연하의 날카로운 목소리가 날아든다.

손을 들어 휘저어 그런 주연하를 안도시킨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 알겠어. 그러면 예전에 대학사가 널 죽이려 했던 것도?”

“아마 이런 일을 예견한 탓이겠지.”

쓸데없는 황궁의 소란을 만들기 싫었거나, 다른 제위권자를 지지하기에 벌어진 일.

이렇게 생각하니 지금의 상황에 대한 그림이 모두 맞춰진다.

‘근데 공주인 연하를 황녀로 삼은 것도 모자라서, 제위(帝位)까지 선언했다고?’

남자도 아니고 여자.

그리고 본래 공주였던 인물.

황준우는 영락제의 생각을 도저히 짐작할 수 없었다.

왕족 출신이 황제가 되었으니, 그와 비슷한 역사를 이루어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순수하게 그만큼이나 주연하를 높게 평가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뭐, 어떤 의미에 있어서든 그녀가 상당히 피곤한 상황이라는 사실만은 분명했다.

어째서인지 그녀가 늘 자신의 어깨에 짐을 매달고 사는 것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지도 잘 알 것 같았다.

“너, 엄청 책임감 느끼고 있겠구나.”

“폐하께서 어여삐 여겨 주시니, 실망시켜 드릴 수가 없구나.”

“허허…… 이러다 진짜 네가 황제가 되면 무측천(武則天) 이후 두 번째가 되는 거 아냐? 굉장하네.”

황준우는 농담으로라도 그녀가 황제가 되지 못할 경우의 가정을 꺼내지 못했다. 당대인 영락제가 보여 주었듯, 제위를 향한 싸움은 혈족의 정(情)조차 따지지 않는다.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지금 주연하의 상황에서 보이듯, 황제가 되지 못한 그녀에게 남게 될 것은 죽음뿐일 터였다.

“노력해야겠지.”

“꼭 그렇게 됐으면 좋겠다.”

진지하게 바람을 담은 황준우의 말에 주연하의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휘어졌다.

“믿어 줘서 고맙구나.”

“친구니까.”

“그래, 친구니까.”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말이 없었다.

어딘지 모르게 안정된 것 같으면서도, 들뜬 호흡이 몇 번 지나갔을 무렵 황준우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래서, 최종 목적지가 무한?”

“아니, 무한에서는 일차 조력자를 만날 계획이다. 진짜는 다른 곳에 있지.”

주연하는 황준우에게 굳이 최종 목적지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또 다른 부담을 주기 싫어서였다.

“그렇군. 그 조력자는 믿을 만한 사람?”

황준우의 질문에 주연하가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나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다만, 몇 번 서신을 교환하며 대화를 나누며 짐작은 할 수 있었다. 그는 지혜롭고 또한 정의로운 사람일 것이다.”

“짐작 정도가 아니라, 확신하는 것 아니야?”

“위엄할 수도 있겠지. 하나 정의롭지 않은 사람이 활협단이라는 이름을 가진 세력의 수장으로서 활동하지는 않지 않겠느냐?”

“활협단이라…… 이름 한 번 참 직설적이네.”

“만나 봐야 더 자세히 알고, 확신을 가질 수 있겠지만 지금까지는 나쁜 기분만은 아니다.”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야, 그나저나 활협단이라 왠지 나도 한 번 만나 보고 싶네.”

“괜찮지 않겠느냐? 네 안목의 힘도 빌려 볼 수 있고 말이다.”

다행히 주연하는 이 부분을 부담스럽지 않게 여겼다.

정말로 활협단주를 크게 의심하지 않고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러지, 뭐. 어차피 서연이는 무한에 내리면 또 한동안 구경한다고 난리 칠 테니까.”

“귀엽게 잘 컸더구나.”

두 사람 모두 황서연을 떠올리느라 조금 멍하던 차.

“……엄청 예뻐.”

잠시 뜸을 들인 후 들려온 황준우의 말에 주연하가 검지로 자신을 가리켰다.

이후 민망한 표정이 되어 얼굴을 붉히고는 재빨리 외쳤다.

“무, 무, 물론 아주 예쁘게 컸더구나! 너를 닮은 것도 같고…….”

다행히 황준우 역시 잠시 동생 생각에 빠져 있었던지라 주연하의 민망한 모습을 보지 못했다.

“당연히 닮았지. 오빠 동생 사이잖냐.”

“그, 그렇겠지. 크흠.”

헛기침을 한 주연하가 손부채로 얼굴의 땀을 식혔다.

딱히 더운 날도 아닌데 이상하게 온몸이 축축해지는 기분이었다.

“어쨌든 대화는 참 의미가 깊었던 것 같네. 네 현재 상황도 알 수 있었고 말이지.”

“굳이 크게 알리고 싶지는 않았다.”

주연하는 조금 민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 역시 힘들다거나, 어렵다는 투정을 잘 부리지 못하는 성격이라 그렇다.

“너무 신경 안 쓸게. 그러니까 걱정 마.”

황준우는 이런 사람에게 해 주는 위로로 이만한 것도 없다고 생각했다.

“고맙구나.”

웃음을 보인 주연하가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섬마을에 배가 정착했던 시간은 기껏 해야 삼 각가량, 그 짧은 시간 내에 나름대로 둘러보기는 했는지 배로 돌아온 황서연의 입가로는 만족의 미소가 가득했다.

“어떻게 사람들이 이런 작은 섬에서도 살 수 있나 했더니, 어딜 가도 필요한 건 다 있더라. 너무 신기한 것 같아.”

“그러니까 수적 놈들이 강 위에 수채를 만들고 다니지.”

황준우의 말에 얼마 전 적룡수로채 때의 일을 떠올린 황서연이 입맛을 다셨다. 사건이 끝난 뒤, 황준우는 황서연에게 그들의 필요 이유라든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해 주었다. 당시 황서연은 지금과 비슷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였다.

“필요악이라든지, 오빠 말은 이해했어. 그래도 역시 도적 떼를 보는 게 그리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누구나 그래.”

특히 황서연처럼 감정에 휘둘리기 좋은 나이 때에는 더 받아들이기 힘들 터였다. 때문에 황준우는 당장 모든 것을 이해하라고 재촉하지 않았다. 영특하고 생각이 많은 아이니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그런 부분도 이해하게 될 것이라 믿었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