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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10화 (110/373)

학사재생 110화

제 110화

그렇게 장강의 물결을 밀고 또다시 배가 나아가기 시작한 이후 두 시진가량이 흘렀다.

밝았던 낮이 지나가고, 이른 저녁이 찾아온다.

배 위에서의 가벼운 식사를 마친 일행들은 직접적인 수련을 할 수 없기에 각자의 침상에 앉아 심상수련(心想修練)에 빠져들었다. 실상 벽을 마주쳤을 때에는 오히려직접 몸을 움직이는 것보다 이런 수련이 더 큰 도움이 되고는 한다.

때문에 매번, 매순간이 벽과 마주치는 것과 다르지 않는 초절정 이상의 고수라면 이런 심상 수련을 자주 하게 되는 것이다.

황준우라고 해서 다르지 않았다.

‘칠단공으로 가는 길이 너무 요원하네.’

얼마 전 스쳐 지나가듯 영소를 본 이후, 황준우는 다시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심정으로 수련에 크게 매진하고 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답이 보이지는 않는다. 마치 망망대해 혹은 모래만 가득한 사막 위에 홀로 동떨어진 느낌. 벽은커녕 가야 할 방향조차 보이지 않는다.

당연한 일이라고는 생각했다.

애초부터 육단공에 오른 황준우의 무공은 인간을 벗어난 초인의 영역에서도 최정점에 오른 수준이다.

고금 이래로 닿은 사람이 몇 없거나, 아무도 없을지 모를 수준. 누군가 알려 줄 수도 없고 배울 도리도 없다.

하나 황준우는 그런 사실을 개의치 않았다.

애초부터 지금의 자리까지도 누구의 도움이나 가르침 없이 홀로 도달했다.

전생에서부터 이어진 현생에까지, 천재라는 수식어조차 부족한 황준우의 오성(悟性)은 그런 수준인 것이다. 오히려 쓸데없는 가르침이 있었다면 그의 넓은 시야만 헤쳤을지도 모른다.

‘어떻게 해야 할까. 검을 쥐고 육단공을 열었으니, 새로운 수련을 또 시작해 보아야 하나?’

황준우가 생각하기에, 천조칠무를 셋 이상 익히고 천조신공의 경지가 오단공에 달하면 무림에서 말하는 초인의 영역, 조화경의 최정상이라 볼 수 있는 경지에 오르게 된다. 이미 이단공에 있어 조화의 영역에 입문하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결과였다.

그 조화경지의 궁극이란, 주변의 대기와 공조(共助)하여 천지만물의 기운과 하나가 되어 버리는 일. 강호의 초인들 중 조화의 경지에 올랐지만 진짜 조화를 이룬 이는 황준우가 본 인물들 중 현재까지는 본인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없었다.

이런 조화경, 그러니까 천조신공의 오단공 경지가 극에 이르게 되면 실상 내력 혹은 기의 수발 능력으로만 치자면 더 이상 나아갈 길이 없게 된다. 대신하여 새로운 방향이 생기기는 했다.

그 길이 바로 육단공.

지금의 황준우다. 천지만물의 기운의 조화를 넘어서 조율할 수 있는 경지. 하나가 되는 수준을 벗어나 원하는 대로 힘을 이끌어낼 수 있다는 수준이다. 때문에 천지만물의 기운 중 일부를 뽑아내어 상대에게 전달하거나, 직접적으로 쏘아 보낼 수 있다.

육단공에 이르기 전 상단전의 개통이 필요한 가장 큰 이유였다.

인체 전체를 따져 상단전만큼 기운을 조율하기 편리한 기관이 없는 탓.

가설을 세웠고, 거기에 따른 때를 만드는 노력과, 빛나는 오성이 있었기에 황준우는 결국 육단공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칠단공은 어떻게 나아가야 한단 말인가?

이미 조화를 이루어 조율의 경지까지 올라 버렸다.

실상 천조신공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성과라 볼 수 있다.

한데 칠단공과 팔단공, 그 위의 경지까지 있을 것이라는 생각이 계속해서 들었다. 이런 생각은 얼마 전 영소의 흔적을 놓치며 더욱 확실해졌다.

‘조율 이상의 무언가. 대체 무엇일까?’

단서를 찾아야 한다.

어쩌면 천조신공의 벽은 정말 육단공이 끝일지 모르지만, 무언가 답을 찾는다면 그조차 초월하여 새로운 경계에 들어설지 모른다.

장고(長考)가 이어졌다.

검을 잡으면서 열려 있던 상단전으로 조율의 경지를 이끌어 낸 황준우가 할 수 있는 생각은 새로운 것을 익히는 방법이 가장 빠르다는 생각도 들었다.

‘새로운 배움의 단서가 있을지도 몰라.’

그렇다면 천조칠무의 오무(五武), 선술(仙術)을 익혀야 한다.

“끙…….”

황준우의 입에서 저절로 앓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사실 선술이란 고려의 삼대무파(三代武波) 중 하나인 조의선인들에게 알려진 비기(秘技)로써 그 이름처럼 무(武)보다는 술(術)에 가까운 능력이었다.

황준우 역시 어린 시절 스승으로부터 이 부분에 대하여 듣고, 배웠다. 다만 기본적으로 상단전을 열고 제대로 다룰 수 있는 경지가 되어서나 수련이 가능한 일이었기에 어린 시절의 황준우는 정식으로 길을 놓지는 못했다.

때문에 지금도 천조칠무의 한가락으로 만들어 놓기는 했지만 명확한 수련법을 확정 지을 수가 없었다.

‘분명 언령(言令)과 연관이 되어 있을 텐데…….’

그나마 백교와의 학문 공부 덕에 말의 힘이란 것을 깨달았기에 선술에서 말하는 주문(呪文)이란 것에 대한 이해는 있었다.

결국 지금 황준우가 가진 단서란 선술과 그에 관련된 말의 힘.

이것들이 그를 다음 단계로 이끌 수 있는 수단이라 볼 수 있었다.

“말의 힘, 말의 힘이라…….”

계속 같은 말을 반복하다 보니 문득, 언령과 명력이 닮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름이 불리기에 힘이 더해진다는 건, 이 역시 언령과 관련이 있지 않나?”

어쩌면 청홍검의 힘이 황준우에게 있어서는 아쉬운 수준밖에 안 되는 것도 이 부분에 답이 있을지 모른다. 망망대해와 같던 막막함 속에서 작은 실마리를 잡아낸 황준우의 표정이 자연스럽게 조금 밝아졌다. 본래 단서란 이렇게 꼬리에, 꼬리를 잡아가다 보면 잡히기 마련인 것이다.

“적룡수로채다!”

“또야! 다들 준비해!”

황준우의 집중을 깬 것은 갑작스러운 외침이었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또 적룡수로채.

집중이 깨어지고, 경계심이 생기는 순간 황준우는 다가오는 배의 기척을 느꼈다.

‘수로왕이 직접 오기라도 했나?’

느껴지는 기운들이 범상치 않다.

지금 배에 타고 있는 삼십 명가량의 무인들만 풀더라도 강호사대무관쯤 하나는 쑥대밭으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었다. 다만 이상한 것은, 수적들이라 보기에 그 기운이 기묘하다는 점이었다.

“흠…….”

황준우는 짧은 신음을 흘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문이 열리고 경호와 황서연이 동시에 뛰어 들어왔다.

“오빠, 수적이야!”

“도련님, 또 놈들입니다!”

“알고 있어.”

열린 방문으로 나아가, 다가오는 적룡수로채의 배를 보는 황준우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생각보다 배가 작네.”

삼십 명가량이 기척의 전부더라니, 배도 딱 그 정도 인원을 수용할 수준이다.

하나 사실 그런 것쯤은 문제가 아니었다.

“저거 수적 놈들 아닌 것 같지?”

직접 두 눈으로 보고, 가까이서 기운을 읽어 보니 의구심이 확신이 된다.

하나 그런 황준우의 질문을 이해한 이는 이 자리에 누구도 없었다.

“저게 수적이 아니면 뭡니까?”

경호가 물었다.

“뻔히 적룡수로채의 배인데…….”

황서연도 고개를 갸웃거린다.

“빌렸을 수도 있지. 아니면 훔쳤거나. 어쨌든 긴장해. 저놈들, 마인(魔人)이다.”

“예!?”

“뭐!?”

마인이라는 말에 두 사람을 비롯한, 홍산마저 안색이 변했다.

배에 탄 승객들의 표정은 아주 죽을상이다.

수적에 이어 마인이라니.

후자에 비하자면 차라리 전자가 나았다.

마인들은 흔히 세간에 알려지길 피도 눈물도 없는 끔찍한 악마와 같다. 수적들과 같은 융통성을 기대하는 것조차 무리라는 뜻이었다.

“으아앙-!”

승객들 중에 섞여 있던 아이들은 울음을 토했다.

마인이라는 칭호는 마치 호랑이처럼 어린아이를 겁줄 때 사용되기도 하는 탓이었다.

“진짜 마인이오?”

다가오는 검은 범선과 주변을 무겁게 내리누르는 기운.

침을 꿀꺽 삼킨 남궁세가의 무인이 황준우에게로 다가와 물었다.

“진짜야. 척 보면 딱이지. 천하 어디를 가든 내공이 이렇게 끈적끈적한 느낌을 주는 녀석들은 마교인들밖에 없어.”

“지마교가 여기에 왜…….”

남궁세가의 무인이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하지만 그리 긴장한 표정은 아니다. 세간의 소문과 달리, 지금의 마인들은 그리 위협적이지 않다는 사실을 오대세가의 인물인 그는 잘 알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마인들의 행차가 불쾌하고, 의문이 남기에 걱정을 하는 것뿐이다.

“지마교? 아니야. 저놈들, 저거. 천마신교야. 정확하게는 흑풍대다.”

칠야의 난 시절, 천마신교와도 죽도록 치고받은 시절이 있는 황준우가 확신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느껴지는 기운과 기척, 그리고 끈적한 내력 사이에 섞인 거친 움직임까지. 명백히 천마신교의 무공이다.

흑풍대를 알아본 것은 그들의 복장 탓이었다.

“천마신교? 흑풍대? 지금 장난하는 것이오? 그들은 저 십만대산 내에…….”

휘리릭-!

남궁세가 무인의 말이 채 끝을 맺기도 전, 검은 바람을 닮은 흑풍대 무인들이 허공으로 도약해 단숨에 여객선 위로 올라탔다.

마교로 분류되지만 제대로 된 고수가 없는 지마교의 인물들과는 엄연히 다른 느낌.

자연스레 남궁세가 무인의 입이 굳게 닫혔다.

얼굴에는 이전과 다른 긴장감과 공포가 어렸다.

그 역시 한때 단일 세력으로 강호제일로 군림한 천마신교의 위용을 잘 알기 때문이었다.

“그대가 만금장 소장주요?”

올라선 흑풍대의 중심, 전면으로 나선 구휘가 황준우를 바라보며 물었다.

“뭐야, 니들도 나 찾아온 거야?”

흑풍대를 알아보았지만 목적은 알지 못했던 황준우가 의문을 표한다.

이후 무언가를 깨닫고는 박수를 쳤다.

“아, 그러니까 원래부터 날 찾은 게 적룡수로채가 아니라 천마신교로구나.”

황준우의 말에 미간을 꿈틀거린 구휘의 검이 뽑혔다.

“지금 소장주는 입에 담아선 안 될 이름을 읊었소. 덕분에 죄 없는 이들마저 목숨을 내놓아야 할 터이니, 속죄하시오.”

구휘의 음성은 서늘하고, 차분했다.

이미 확정 지어진 일을 결정하는 사신(死神)의 음성이다.

“으아앙-!”

“사, 살려 주시오! 오늘 우리가 들은 것은 모두 잊겠소!”

아이의 울음소리가 더욱 커졌고, 승객들은 다급히 목소리를 높였다. 하나 구휘는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입을 굳게 다물고 있을 뿐이다.

“이 배는 남궁세가의 것이오. 아무리 천마신교라 하여도…….”

황준우에게 질문을 건넸던 남궁세가의 무인이 앞으로 나서 말하는 순간이었다.

파바밧-!

그야말로 검은 바람을 닮은 구휘의 신형이 앞으로 쏘아져 나왔다. 휘둘러지는 검은 남궁세가 무인의 몸을 순식간에 난자하여 분할시켜 버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위력이다. 아마 이 자리에 위치한 대다수는 그의 움직임조차 보지 못했을 터다. 남궁세가 무인도 본인이 어떻게 죽었는지조차 몰라야 정상이었다.

“그만. 나는 내 것에 손대는 걸 굉장히 싫어해.”

어느새 남궁세가 무인의 앞에 나타난 황준우가 알 수 없는 말을 하며 구휘의 검을 검지와 엄지로 잡은 채 웃음을 비춘다.

“…….”

구휘는 재빨리 검을 빼고는 뒤로 물러나며 미간을 찌푸렸다.

‘너무 얕보았나?’

아니, 그는 토끼를 잡을 때도 최선을 다하는 범으로 키워진 사내였다. 오히려 방금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해 힘을 더 쓰려고도 했다.

한데 막혔다.

심지어 황준우는 검을 뽑지도 않은 채였다.

“그런데 요즘 천마신교 사정이 좋나 봐. 아니면 네가 특별한 건가? 이 정도면 원원괴존 그 영감 못지않은데?”

우내십존 중에서도 상위 다섯 안에 뽑히는 원원괴존의 이름을 아무렇지도 않게 읊은 황준우가 구휘를 노려보았다.

“왜지? 왜 천마신교가 갑자기 만금장을 노리는 거야?”

“문답무용.”

구휘는 짤막한 대답과 함께 손짓을 가했다.

황준우가 생각 외의 고수지만 물러날 수는 없다.

그는 교의 막중한 임무를 부여 받았고, 어떻게 해서든 완수해 내야만 할 책임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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