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15화
제 115화
그들은 마치 십만대산에 은거한 천마신교처럼, 아니 그보다 더 은밀하게 스스로를 감추기 위해 융중산 전체에 진을 쳐 버리고는, 완전히 모습을 감추었다. 만약 반백년 전의 그 짧은 활동조차 없었다면 세상은 아직까지도 제갈세가의 존재를 알지조차 못했을지도 몰랐다.
그런 제갈세가를 주연하가 찾아간다.
“딱히 감추려 했던 것은 아니다. 다만 네게 부담을 주기 싫었을 뿐이다.”
“뭐야, 딱히 뭔가 약속이 되어 있는 건 아니고?”
“제갈세가와 약속이라니…….”
쓴웃음을 지은 주연하가 고개를 젓는다.
하긴 가당치도 않은 말이다.
선약을 잡을 수 있을 정도의 곳이었다면 무림제일의 신비가문(神?家門)이라는 명칭도 생기지 않았을 터였다.
“별 소득 없이 쫓겨나도 좋다. 하나 해낼 수만 있다면…….”
“흠, 제갈세가라…….”
황준우는 턱을 궤고 고개를 주억였다.
단순한 소문 혹은 기대일 뿐일지도 모르지만 제갈세가에는 세상을 떠들썩하게 할 천재 군사, 와룡이 늘 주인을 기다리고 있다는 말이 있다.
그 와룡을 얻는다면 촉한의 군주 유비가 그러했듯 능히 일국의 군주가 될 수 있는 길을 제시하리라.
마치 전설 같은 오랜 구전에 불과하지만 지금 그녀의 입장에서는 굉장히 탐이 나는 이야기일 터였다.
‘그만큼이나 절박하기도 하다는 뜻이고.’
단 한 번의 지략, 단 하나의 꾀라도 좋다.
아마 주연하는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지도 몰랐다.
“두 분 사이가 생각보다 막역하신 것 같군요.”
그런 두 사람의 대화를 역시나 흥미로운 눈으로 지켜보던 진무영이 말을 건네왔다.
황준우의 거리낌 없는 태도와 주연하의 언행에서 두 사람의 사이가 생각보다 가깝다는 사실을 느낀 탓이었다.
“친구니까.”
“나의 친구이니라.”
동시에 나온 대답에 두 사람이 잠시 민망한 듯 얼굴을 붉힌다.
반면 진무영은 더욱 짙은 미소를 그렸다.
“부럽습니다. 이런 세상에 두 분과 같은 우정이 존재할 수 있다니.”
“진 선장도 친구가 많을 것 같아 보이네만…….”
“동지는 많죠. 하나 친구는 생각보다 적습니다.”
잠시 입가로 씁쓸한 웃음을 지었던 진무영이 빠르게 손을 내저었다.
“어찌 되었든 오늘은 그런 쓸쓸한 이야기를 하려고 모인 자리가 아니지요. 이미 준비는 끝났고, 황녀마마는 떠나시기만 하면 됩니다. 추적자들은 없을 터이니 걱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 진 모가 이름을 걸고 장담하겠습니다. 그냥 오늘은 말 그대로, 무한의 밤을 즐겨 주시면 됩니다.”
“즐기면 된다라…….”
주연하의 시선이 다시 한 번 황학루 바깥 불빛이 번뜩이는 무한의 거리로 향했다.
생각보다 더 아름답고, 화려하다.
그녀가 늘 기거하는 자금성에 비교하자면 태양 앞의 반딧불과 같은 풍경일지도 모르는데 이상할 정도로 마음을 울리는 모습이었다. 한참을, 멍하니 그 모습을 바라보던 주연하가 쓴웃음을 지은 채 고개를 저었다.
“쉽지는 않겠구나.”
아직은 어울리지 않는다.
표정 가득 그런 마음을 담은 주연하를 의외의 손이 이끌었다.
“구경 정도는 괜찮잖아. 너무 긴장하지 말고.”
아무렇지도 않게 그녀의 손을 잡고 창가 가까이 세운 황준우가 옆에 서 말했다.
“외면하지 말고 잘 봐 둬. 만약 황제가 되면 이 모든 것을 네가 지켜야 되는 거야.”
“아……?”
“그러니까 꼭 기억해 놔. 네가 지배를 하려 든다면 이 아름다운 평화가 언제든 깨질 수 있어. 하지만 진정한 군주로서 군림한다면 이 모습을 지킬 수 있게 되겠지. 어쩌면 더 번창할 수도 있고. 그게 앞으로 네가 해야 될 일이야.”
“…….”
말 없는 주연하의 눈이 떨린다.
아주 어린 시절, 이와 비슷한 말을 들은 기억이 있었다. 바로 그녀의 친아버지인 영왕에게서 들은 이야기다. 그때에도 비슷하게 와 닿았지만 지금처럼 힘든 때가 아니어서일까? 이토록 벅차오르지는 않았다.
“힘내자, 주연하. 넌 할 수 있어.”
황준우의 큰 손이 그녀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어내린다.
마냥 부러운 시선 혹은 부담되는 기분으로 바깥 풍경을 바라보던 그녀의 눈에 의지가 타오른다. 꽉 쥔 두 주먹에는 힘이 들어갔다.
“고맙구나, 두 사람 모두. 덕분에 큰 힘을 얻었다.”
무한의 바깥 풍경을 한참이나 바라보던 주연하는 시간이 되자 황준우와 진무영 모두를 향해 공수를 표했다. 진심으로 감사를 표하는 그녀의 모습에 진무영은 잠시 당황한 듯했지만, 곧 웃으면서 고개를 주억였다.
황준우의 행동과 두 사람의 관계를 보며 주연하라는 황녀가 별나다는 사실을 이미 깨달은 덕이었다.
“대단하신 분이로군요. 서신으로도 느끼고 있었지만 이로써 전 황녀께서 꼭 제위에 오르시기를 바라게 되었습니다.”
“꽤나 마음고생을 많이 하지만, 자신의 책임을 확실히 알고 있는 성격이니까. 어중간한 위로보다 아까 같은 조언으로 더 큰 힘을 받은 것도 그런 탓일 테고.”
“두 분은 정말 서로를 아끼시는군요.”
“친구잖아?”
“글쎄요, 남들이 보기에는 그보다 훨씬 가까워 보입니다.”
“그런가?”
피식 웃은 황준우가 진무영을 느긋이 바라본다.
“그런데 솔직히 말해서, 그쪽도 대단하네.”
“아니. 큰 의미는 없고, 그냥 하나만 묻고 싶은데. 검은 왜 두 자루야?”
“아, 이것 말입니까? 하나는 말 그대로 장식입니다. 나이를 먹어도 겉멋만 가득 들어서는 하하…….”
실제로 진무영은 왼쪽 허리춤에 투박한 검집과, 보석으로 장식된 화려한 검집을 동시에 착용하고 있었다.
“이름을 물어도 될까?”
황준우의 질문에 진무영의 눈이 반짝 빛난다.
“제 이름이라면…….”
“기억해, 진 선장. 당신 말고, 두 자루 검 말야.”
“아, 아직…….”
“직접 지어 준 이름은 없다는 건가?”
황준우의 질문에 진무영은 아무런 답을 하지 않았다.
“뭐, 상관없지. 아, 참. 하나 더. 부탁하고 싶은 일이 있는데.”
“말씀하십시오.”
“연하의 융중산 행. 사람 몇 더해도 괜찮을까?”
“소협께서도 융중에 가시려 하시는 것입니까? 황녀마마를 돕기 위해?”
“아니, 그건 아니고.”
황준우는 고개를 내저었다.
“내 위로와 응원은 이쯤으로 충분한 것 같아서 말이야. 그냥…… 내 나름대로의 볼일 때문이라고 해 두자.”
주연하에게 직접 듣기 전 까지는 생각도 못했던 이름이다.
제갈세가.
그만큼이나 꼭꼭 감춰져 있고, 세간에 알려지는 것조차 희미하다. 한데 만약 그들이 소문대로 뛰어난 오성을 갖춘 천재들의 모임이라면, 신비의 맥(脈)을 잇고 있다면 알고 있지 않을까?
‘명력, 주문, 언령.’
최근 황준우의 머릿속을 떠도는 수많은 의문들에 대한 답.
왠지 제갈세가라면 알고 있을 것 같은 기분이다.
때문에 황준우 역시 융중산행을 택한 것이다.
“굳이 주연하랑 같이 갈 필요 없어. 따로 움직여도 돼.”
“예? 그러면 왜 저한테 부탁이라고?”
“준비해 놓았다니까, 왠지 근사하고 편안한 걸 만들어 놨을 것 같거든.”
“…….”
“친구 좋은 게 뭐라고, 좀 얹혀 가 보려는 거지. 이미 좋은 게 준비되어 있으면 힘겹게 내 발로 뛰거나, 내 돈 내고 마차를 탈 필요가 없잖아?”
“그, 그렇군요. 천하의 만금장 소장주께서 돈 걱정을…….”
“원래 아껴야 잘 사는 법이야. 그리고 나도 내가 돈이 많은 줄 알았는데, 나름 펑펑 쓰다 보니까 생각만큼 여유롭지는 않더라고. 생각보다 나가는 데도 많고, 써야 될 곳도 남아 있고. 어쨌든 어때?”
“뭐, 말씀대로 좋은 것들로 준비는 해 놓았습니다, 자리도 넉넉하고…….”
“좋아. 그러면 나도 내일 같이 출발해야겠다.”
황준우는 대수롭지 않게 이야기했고, 진무영의 얼굴에는 잠시 어이없는 표정이 떠올랐지만 그뿐이었다.
“알겠습니다. 함께 이동할 수 있게 준비하라 일러 놓겠습니다.”
“고마워, 진 선장. 이걸로 우리 빚은 없는 걸로 하자고.”
그 말과 함께 손을 휘휘 내저은 황준우가 멀어진다.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던 진무영의 눈매가 굳어졌다.
“빚은 없는 걸로 치자고?”
마치 낭인을 닮은 듯 기세는 강렬하고, 신분에 어울리는 귀공자답게 행동하는데, 또 괴인처럼 제멋대로다. 내뱉는 말 중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것들도 제법 많았다.
“그렇다고 해도 탐이 나는군.”
뛰어난 재능에 버금가는 통찰력.
특히 그의 두 자루 검을 알아보았을 때에는 정말 깜짝 놀랐다. 설령 우내십존이라도 쉽게 눈치채지 못하게 적당히 숨겨 놓았는데도 한눈에 간파당한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정말, 칠야의 난 이후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했던 전율이 그의 등 뒤를 관통했었다.
“저 이름에 특별한 힘이라도 있는 것인가? 황준우, 황준우.”
몇 번이고 그 이름을 읊던 진무영이 곧 호탕한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거 봐. 역시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온다니까.”
가는 호선을 그리는 두 눈에는 평소의 그에게 어울리지 않는 탐욕이라는 두 글자가 떠올랐다.
“황준우. 넌 내가 가질 것이다, 꼭.”
목이 말랐다.
진무영이 그를 보고 놀랐듯, 황준우 역시 마찬가지의 기분을 느꼈다.
“도대체 뭐지, 저놈. 분명 예전에 봤을 때는 저 정도가 아니었는데.”
황학루의 입구에 도착한 순간 느껴진 갈무리된 기세가 거의 조화 경지의 마지막 단계급. 전생의 황준우 본인과 비교해도 기껏해야 한 수 정도밖에 안 밀릴 수준이었다. 만약 칠야의 난 당시 진무영과 같은 고수가 있었다면 황준우는 당시처럼 날뛰지 못했을 터였다.
한 수 차이란 것은 어디까지나 환경과 상황에 따라 언제든 뒤집을 수 있는 수준. 결국 현재의 진무영은 한때 고금제일의 평을 받던 황준우의 실력에 비해 부족하지 않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분명 얼굴은 기억나. 제법 무골이라고 생각해서 눈여겨보기도 했었고…… 그러니까, 검선의 제자였었지?”
당시 우내십존 중 제일을 다투던 검선과 불성.
진무영은 그 두 사람 중 검선의 제자였다.
그렇다고 하여도 눈에 뜨이는 편은 아니었다.
검선에게는 그를 제외하고 다섯이나 되는 제자가 있었고, 진무영은 그들 중에서 제법 기가 죽어 보이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눈에 뜨이는 무재를 가지고 있었으니 충분히 강해질 수 있다고 생각했지만, 이건 상상 이상이다.
설마하니 전생의 본인과 대등한 수준까지 치고 올라왔을 줄이야.
‘당시에 이미 무언가를 감추고 있었나?’
아니면 지난 이십 년간 황준우가 몰랐던 사이 중원무림의 수준이 크게 상향되었을지도 모른다. 본래 비온 뒤 땅이 더 단단하게 굳는 법이라고, 칠야의 난이라는 큰 시련 후에 그들 역시 더욱 강해지기 위해 부단하게 노력했을 테니 말이다.
어쨌든 덕분에 황준우마저 놀라서 기세 중 일부를 흘려버렸다. 재빨리 갈무리하여 크게 표시가 나지는 않았지만 또래에 비해서는 제법 특출 나 보였을 터다.
‘거기에 그 화려한 장식의 검.’
그저 멋이라고 하였지만, 아니다.
이미 청홍검을 보았던 덕일까? 황준우는 그 검을 바라본 순간 알 수 있었다.
‘명력이 깃든 무기였어.’
과연 진무영은 그 검을 얼마나 다룰 수 있을까?
황준우처럼 한계에 봉착한 수준이라면 큰 위협은 아닐 터다.
그의 말대로 멋 수준에 끝나겠지.
하나 다른 가능성을 열고 있다면?
“한번 붙어 보고 싶기도 한데.”
뭔가 찝찝하다.
좋은 인상에, 주연하를 향한 선의와, 깔끔한 행동까지 분명 나무랄 데가 없는데 이상하게 기분이 묘했다. 재생 이후 처음으로 상대에게 자신을 읽혀서는 좋지 않을 것 같은 직감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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