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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17화 (117/373)

학사재생 117화

제 117화

면사를 쓰고 있는 데다 딱히 위협적인 기세도 없는데 그렇게 되어 버렸다. 가만히 있는 상대에게서 풍겨져 나오는 어떠한 위엄이 보이는 것도 같았다.

‘어디서 본 것 같은데?’

황서연이 내심 당황하는 사이, 그보다 더 놀란 것 같은 목소리를 흘리는 인물이 있었다.

“도, 도련님. 저, 저분은? 아니죠?”

“맞아. 그 녀석.”

“녀, 녀석이라니요, 도련님! 무슨 천인공노할!”

대화가 채 끝나기도 전, 네 사람의 앞으로 다가온 면사의 여인이 죽립을 들어 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주연하다. 어린 시절 잠시 보았을 뿐인데, 정말 어여쁘게 컸구나.”

정확하게 황서연을 대상으로 한 인사.

‘그러니까 팔짱을 끼고.’

이미 풀어졌다.

‘콧대는 하늘로 높이고.’

내려왔다니까.

‘도, 도도한 눈빛으로…….’

애초에 황서연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무엇보다 면사를 걷어 올린 순간 주연하에게서 터져 나온 것 같은 휘광! 위엄!

‘그리고 주연하?’

황족이다.

잠시 굳었던 머리가 돌아가기 시작한 황서연이 재빨리 고개를 숙였다.

“마, 마마를 뵙습니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황서연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경호도 함께 외친다.

홍산도 재빨리 머리를 조아렸다.

“공주마마를 뵙습니다.”

“아, 근데 연하 지금 공주 아닌데?”

황준우가 그런 세 사람에게 너무나 태연하게 말했다.

“공주마마가 아니시라니요?”

굳어진 얼굴의 경호가 어서 고개 숙이라는 눈짓을 하며 말한다.

“얘, 지금 황녀야.”

짓궂은 표정을 한 황준우가 즐거운 목소리로 말한다.

“황녀마마를 뵙사옵나이다!”

동시에 경호의 목소리가 약 다섯 배가량 커졌다.

“황녀마마! 죄송합니다!”

황서연도 놀라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화, 황녀마마를 뵙습니다!”

담담해 보이는 홍산의 얼굴에도 땀이 뻘뻘 흘렀다.

“괜찮다. 나는 괜찮으니 그만하여라. 이곳은 궁이 아니지 않느냐.”

주연하가 손을 뻗어 경호의 어깨 위에 얹는다.

붉어진 얼굴의 경호가 고개를 들며 말했다.

“소, 송구스럽사옵니다, 마마.”

“그리고 연하.”

“예, 마마!”

“네 오빠와 나는 막역(莫逆)한 지기 사이란다.”

“어, 에…… 예.”

“하니, 너 역시 나를 큰 어려움 없이 언니처럼 따라 줬으면 좋겠구나.”

자애로운 음성으로 말하는 주연하의 얼굴이 활짝 피어나는 꽃, 아니 태양과 같았다.

그 순간 황서연은 생각했다.

‘도도는 개뿔, 콧대는 무슨!’

‘효령아, 넌 아마 안 될 것 같아.’

오빠의 여자는, 생각했던 수준을 벗어나 너무 강했다.

달리는 넓은 마차 안.

둘러앉은 사람은 넷이었다.

황서연과 소하는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반면 나머지 두 사람인 황준우와 주연하는 굉장히 익숙한 모습으로 대화를 나눈다.

“진 선장이 이미 말해 줬었다니, 그래서 별로 안 놀랐구먼.”

황준우는 본래 주연하에게 자신의 합류를 전하지 않았다. 때문에 나타나면 놀랄 거라 생각했는데 꽤나 태연하게 받아들였다. 단순히 그녀의 성정 탓이라고도 생각했는데 이미 알고 있었던 것이다.

“따로 볼일이 있으나 함께 간다고 하더구나. 나도 어제 아쉽게 헤어진 것 같아 아침에 따로 연락을 취해 보려 생각하고 있던 차였는데, 차라리 잘되었다 싶더구나.”

“하긴, 진 선장 일도 있고 해서 조금 정신이 없었지.”

“네 응원은 큰 힘이 되었다.”

“뭐, 그 정도로…….”

황준우가 어깨를 으쓱한다.

“진 선장, 일단 좋은 사람 같더라.”

첫 만남이었지만 무언가 괴상한 낌새는 없었다.

침착하고 안정적이고, 결국 밝혀진 사실만을 보자면 황준우가 할 수 있는 말은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서신에서 느껴진 그대로의 사람이었다. 다만…….”

“다만?”

황준우가 주연하를 직시한다.

“아니, 잊어다오.”

주연하는 싱긋 웃으며 손을 내저었다.

‘설마 저 녀석도 뭔가 묘한 느낌을 받은 건가?’

황준우가 알기에, 주연하 또한 육감이 꽤나 발달한 편이었다. 하니 황준우가 느낀 알 수 없는 위화감에 대해서 알 수도 있다. 다만 이런 도움을 받고 있는 와중이고, 의심할 것도 없는 상황에 함부로 말하기도 힘든 것일 터다. 어찌 됐든 지금의 주연하에게 있어 진무영은 큰 도움을 준 은인이었으니 말이다.

“그래도, 주의는 하자고.”

황준우는 그녀를 대신하여 자신의 마음을 밝힌 이후 창 바깥으로 시선을 던졌다.

주연하는 아무런 답이 없었고, 마차에는 침묵이 내려앉은 듯했다.

“저…….”

아까부터, 바지 자락 위에 양손을 모은 채 손가락만 꼼지락거리던 황서연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언니?”

힘겹게 말을 마친 순간 소하의 눈살이 화살처럼 황서연에게 쏘아졌다. 덕분에 잠시 움찔한 황서연이었으니, 다행히 주연하가 태연하게 그녀의 말을 받아 주었다.

“말해 보거라.”

“진짜 이렇게 불러도 돼요?”

“여아일언 중천금(女兒一言 重千金). 어찌 여장부 말이 가벼울 수 있단 말이더냐. 걱정 말고 편히 하도록 하여라.”

“어, 그거…….”

무언가 반대된 말이 맞는데도 주연하가 하니까 그럴싸하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멋있다는 생각도 한 황서연의 얼굴이 붉어졌다.

“여아일언 중천금, 멋져요.”

“세간의 시선에 연연하지 말고 스스로가 믿는 것을 듣고 보고 펼치면 될 일. 바람처럼 흔들리는 마음이란 남과 여의 차이가 아니라 내 스스로 마음의 몫이란다. 왠지 너에게 이 말을 해 주고 싶구나.”

“아…… 마음의 몫. 스스로가 생각하기 나름…….”

주연하의 말에 또 한 번 감격을 받은 듯 읊조리던 황서연의 눈이 미묘하게 변했다. 동시에 그녀의 몸 바깥으로 작은 내력의 진동이 퍼져 나오기 시작했다.

“뭐야, 설마?”

당황한 황준우가 재빨리 기운을 펼쳐 그녀를 보호했다.

지금의 황서연은 무아지경의 상태.

일류의 벽을 헤치고 절정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생각지 못한 변화에 주연하와 소하 역시 놀란 시선을 흘렸다.

“얼마 전부터 벽에 막혀 있었는데 네 말에서 얻은 게 있는 것 같아.”

“아…….”

황준우의 설명에 주연하가 짧게 고개를 주억였다.

해 주고 싶은 말이라 내뱉었는데, 그것이 또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기쁜 일이다.

“좋기는 한데, 참 민망하구나. 말만 하는 가벼운 인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걱정도 했는데…….”

“뭐, 진심은 늘 전달되는 법이니까. 어쨌든 나도 고마워. 이 녀석, 아마 이 벽을 넘고 나면 연하 너랑 비슷해질 테니까. 조금 더 안심할 수 있겠지.”

“……!!”

황준우의 말에 주연하와 소하 두 사람이 동시에 놀란 시선으로 황서연을 바라본다.

깨달음을 통해 경지를 넘어서는 모습이 범상치 않다고는 여겼지만 설마 절정에 이르는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그도 그럴 게, 고작 열여섯 살의 여자아이다. 겉으로 느껴지는 기세와 내력의 깊이가 범상치 않다고는 했지만 너무나 상식 밖이었기에 생각을 못했었다.

확실히 시녀인 소하보다는 주연하가 감정을 수습하는 것이 빨랐다.

“네가 직접 무공을 가르친 것이냐?”

흔들림을 완전히 지운 주연하의 시선이 황준우를 직시한다.

“응. 근데 생각보다 빨리 받아들이네. 솔직히 동생 자랑 좀 한 건데. 하하.”

“놀라기는 했다만, 이미 나는 그보다 더한 천재를 알고 있지 않느냐.”

“아…….”

주연하가 말하는 황서연보다 더한 천재야 멀리 갈 것도 없었다.

“솔직히 난 논외지.”

이미 천하제일인이었던 전생의 기억을 가진 황준우와 비교하면 어느 누가 와도 감히 천재라는 수식어를 쓸 수가 없다.

때문에 황준우는 전생이라면 모를까, 현생에서는 천재의 범위에서 자신을 제외해야 한다고 여겼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전생의 스스로가 천재임을 부정할 생각 또한 없었다.

“예전부터 궁금했다만, 지금 네 무공 경지는 어찌 되는 게냐?”

주연하의 눈이 호기심으로 반짝인다.

여태껏 그녀가 보아 온 황준우는 달리 표현할 바 없는 극강 천재였다. 하나 보여진 것이 전부라고 생각하지도 않았다.

그런 주연하의 질문에 뻔히 답해 줄 수 있는 황준우였지만, 어째서인지 장난기가 돈다.

“음…… 글쎄.”

때문에 두루뭉술하게 대답하고는 창문 밖을 바라보며 딴청을 피웠다.

“알려 주지 않을 생각인 게냐?”

“때가 되면 알게 되겠지, 뭐.”

“흐음…….”

짧은 신음을 흘리며 어딘지 심통이 난 것 같은 주연하의 표정이 귀엽다.

그를 곁눈질로 잠시 살펴본 황준우의 눈이 웃음을 그렸다.

‘왠지 아버지의 마음을 더 알 것 같은 기분인데…….’

그 아버지에 그 아들.

다를 바 없는 두 부자(父子)였다.

작은 사건이 있었지만, 어쨌든 덕분에 황서연은 절정지경의 무인이 되었다.

스스로에 대한 확고함을 가지게 된 그녀의 무공 실력은, 초입(初入)임에도 불구하고 이미 절정지경에 올랐던 주연하마저 단숨에 뛰어넘었다.

그런 강함을 스스로 깨달은 덕에 더욱 무공 수련에 재미가 들린 황서연은 주연하에게 감사를 표하고는 마차 바깥에서의 생활을 시작했다. 아무래도 수련을 하기는 그 편이 편한 탓이었다. 그런 황서연의 발전은 주연하에게도 좋은 자극이 된 듯했다. 어딘지 모르게 복잡한 생각이 가득해 보이던 주연하 역시 시간이 남을 때면 무공 수련으로 잡념을 떨쳐 내기 시작한 것이다.

“좋은 상황이지.”

서로에게 자극을 받아 더욱 성장해 나간다.

그를 보며 느긋하게 말하는 황준우 역시 자극을 받고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영소, 진무영.’

역시 상대가 있어야지만 무공 수련에도 더욱 의욕이 붙는 법.

마차에 앉아 멍한 것만 같은 황준우의 머릿속은 늘 수많은 심상 수련을 반복하고 있었다. 제갈세가를 만나기 전까지는 답을 찾기 힘든 술을 대신하여 당장 황준우 본인이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것.

그중 첫 번째로 뽑힌 게 바로 봉(棒)을 익히는 것이었다.

이유는 두 가지였다.

첫째로, 따지자면 봉은 모든 무기의 기본이라 할 수 있었다.

검의 찌르기와 도의 베기, 창의 길이를 모두 가진 기본형.

다만 날이 없기에 그 위력이 모자라다는 평이 있지만 그런 말조차도 제대로 된 봉법의 고수와 만나게 되면 싹 사라져 버린다. 본래 황준우는 병장기에 의존하는 무공을 굉장히 싫어하는 편이었지만, 수왕검의 사건 이후 확실히 생각이 많이 바뀌었다. 주객(主客)이 전도되지만 않는다면 무기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런 의미에 있어 봉은 너무나 좋은 선택이었다. 이미 말한 바 있듯 모든 무기의 근원에 가까운 기본형 아닌가? 모든 무공의 근원지라는 소림에서 괜히 봉을 주 무기로 삼는 것이 아니었다.

결국 황준우는 봉을 들어 무기라는 것을 제대로 배우기로 결심한 것이었다.

‘학사(學士)란 게 별건가.’

황준우가 학문을 익히는 동안 백교로부터 들은 이야기 중 근래 들어 가장 마음에 와 닿는 말이 있었다. 학문이란 것을 어렵지 않게 여기기 위해서는 우선 학사를 알아야 한다.

그렇다면 백교가 말하는 학사란 무엇인가?

이름 그대로 익히고 배우는 사람이다.

굳이 학문과 무공의 경계를 나눌 필요가 없다.

세상 모든 배움에 깨달음이 존재할진대 어찌 하나의 과정에 국한하여 학사라는 명호를 붙여 준단 말인가? 처음 들었을 당시에는 단순히 학문을 게을리하지 말고 무공과 똑같이 보라는 말인 줄로만 알았다.

한데 그 말을 되새기고, 또 되새기다 보니 느껴지는 현묘함이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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