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21화
제 121화
황준우가 제갈세가를 찾았다.
비록 그림자뿐이지만 와룡의 후예들이라 볼 수 있는 제갈세가의 인물들과도 대화를 나누었다.
“바로 쫓겨났지만.”
간단한 설명과 함께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입맛을 다셨다.
“그래도 진짜 융중산에 제갈세가가 있긴 하군요.”
“솔직히 난 없는 줄 알았어.”
경호의 말을 황서연이 웃으며 받는다.
그들 세 사람도 며칠간 나름대로 이를 잡듯 찾았는데 정말 가문의 건물 하나쯤에 남을 법한 주춧돌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러고 나니 융중산에 제갈세가가 있다는 소문마저 거짓이 아닐까 고민하고 있던 차였는데, 황준우가 만났다고 한다.
“조금 삐진 것 같더라고. 내가 진법 찾겠다고 이것저것 헤치고 다녔으니 말이야.”
실상 제갈세가의 태도가 너무한다 싶은 것도 있지만, 황준우가 얌전히 물러선 이유였다.
“그러게 과격한 수법은 조금 자제하시지 그러셨습니까.”
“아니었으면 찾지도 못했을걸? 그리고 나름 사과도 했다고.”
“풀릴 것 같습니까?”
“풀게 해야지. 진법 겪고 나니까 더 제갈세가에 가 보고 싶더라고.”
황준우의 눈이 전에 없는 호기심으로 반짝였다.
조율이 아닌 유혹의 과정으로 자연지기를 움직인다는 것 자체가 이미 신비한 일. 황준우는 그 원리와 방법이 너무나 궁금했다.
“이번에도 방법은 따로 없으시죠?”
“계속 사과하면 받아 주지 않을까?”
“오히려 귀찮아 할 것 같은데.”
황준우의 말에 황서연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래?”
“소심한 사람들은 반복되는 사과가 진심도 없이 느껴지고, 귀찮다고만 생각할 수도 있거든. 차라리 선물이라든지 그쪽에서 흥미를 끌 만한 물건 같은 걸 보여 주는 게 어떨까?”
확실히 일리가 있었다.
진법을 헤쳤다고 대화조차 제대로 해주지 않으려는 인물들이니 소심하다는 생각도 제법 근거가 있어 보였고 말이다.
“선물?”
문제는 마땅히 선물할 것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황준우가 가진 것이야 무공, 그리고 금력 정도다.
“황금을 좋아할까?”
“글쎄. 솔직히 누가 돈 싫어하겠냐마는 그쪽에 먹히진 않을 것 같은데.”
“그렇지?”
신비가문이라는 인상 때문인지 몰라도 황금으로는 속을 달래기 힘들 듯했다. 물론 눈이 휘둥그레질 정도의 황금 마차라면 이야기가 다를지 모르지만, 당장 황준우가 그 정도의 재력을 부릴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아, 맞다. 호기심 끌 만한 물건은 있네.”
문득 황준우의 시선이 경호의 허리춤에 걸린 청홍검을 향했다.
“설마 줬다 뺏으시려는 겁니까?”
사실 처음 이야기가 나왔을 때부터 조마조마했던 경호가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물었다.
“뭘 뺏어. 그냥 흥미 정도나 끌어 보자는 거지.”
“…….”
“걱정 마. 신비가문이라는 놈들이 설마 쪼잔하게 청홍검을 통째로 달라고나 하겠냐. 걱정 마, 걱정 마.”
황준우가 경호를 달랬다.
짙은 운무 속 일행들과 함께 선 황준우를 향해 그림자가 말을 걸어왔다.
[청홍검을 우리에게 준다면 문을 열어 주겠다.]
“…….”
경호의 얼굴이 와락 일그러졌다.
황준우는 잠시 빌린 청홍검을 들고는 고민에 빠졌다.
[주지 못하겠다면 물러가라. 제갈세가는 외인을 반기지 않는다.]
제법 긴 시간이 흐르고, 결국 축객령이 떨어졌다.
“이거 말고 다른 건 안 될까? 내가 이미 우리 경호한테 줘서 말이야. 사과의 의미로 황금은 어때?”
솔직히 기대하고 한 말은 아니었다.
한데 운무가 일렁이는 것 같더니 예상외의 답이 돌아왔다.
[얼마만큼의 황금을 줄 수 있느냐?]
천하의 신비가문도 먹고는 살아야 되는 것 같았다.
“얼마만큼이라…….”
황준우는 잠시 고민에 빠졌다.
얼마나 줘야 상대가 만족할지 쉽게 감이 잡히지 않은 탓이었다.
[네가 부수고 다닌 진법을 복구하는 데 필요한 금액만 하여도 금자 삼만 문에 달한다.]
다행히 제갈세가 측에서 나름의 예시는 건네주었다.
물론 그 액수가 적지는 않았다.
“아, 그래?”
새삼스레 미안해진 황준우가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지만 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굳이 같은 말을 확인할 필요는 없다는 뜻이리라.
‘지금 내가 얼마 정도 남았더라?’
황준우의 머릿속이 재빨리 굴러가기 시작했다.
칠야무신의 무공서를 팔아서 제법 많은 황금을 손에 쥐었지만 대다수가 천조회를 키우는 데 사용되었다. 남은 돈으로는 제법 사치를 부렸고, 경호와 홍산 봉급도 주었다. 그러다 보니 이제 남은 금자가 사만 문에 살짝 못 미쳤다.
‘이거 주고 나면 거덜인데?’
돈 많다고 자랑하던 신세에서 순식간에 알거지가 되어 버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고민하는군. 썩 꺼져라. 또 한 번 찾아온다 한들 더 이상은 만나지 않겠다.]
상대도 꽤나 오랜 고민의 시간을 주었다 생각했는지 강경하게 나오기 시작했다.
결국 황준우가 무겁게 한숨을 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지금 내가 가진 게 얼마 없어서, 삼만 오천 문 정도가 한계일 것 같은데?”
이는 손해를 보았다는 삼만 문에, 나름대로 사과를 담은 황준우의 최선이었다.
[…….]
“나도 먹고살 돈 제외하면 거의 전부야. 내가 그렇게 많이 부쉈는지도 몰랐다고. 미안해.”
황준우는 거듭 진심을 다해 사과했다.
어찌 됐든 아무런 죄도 없는 상대에게 피해를 끼친 것이었으니 말이다.
[……내일 다시 찾아와라. 생각할 시간을 가지겠다.]
그 마음이 통한 것일까?
각박하던 목소리로부터 처음으로 제법 긍정적인 답이 돌아왔다.
그렇게 황준우 일행은 다음 날을 기약할 수밖에 없었다.
황금을 가지고 다시 찾아온 황준우 일행을 향해 운무가 펼쳐졌다.
[시험을 내겠다.]
“시험?”
[맞힌다면 네 사과를 받아 주겠다.]
[하지만 틀린다면 너는 평생 제갈세가의 문턱을 밟을 수 없을 것이다.]
다시 나타난 두 사람의 목소리에 황준우의 표정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시험이라니, 향시 이후로는 다시는 안 칠 줄 알았는데.’
그래도 어쩌겠는가?
현재 미안하고 아쉬운 입장은 황준우였다.
“좋아. 받아들이겠어.”
황준우가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동시에 운무가 더욱 짙어지는가 싶더니 주변에 함께 있던 일행들의 모습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변모였지만 딱히 적의(敵意)는 없었기에 황준우는 끝까지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그렇게 일행들이 모두 사라지고, 홀로 남은 황준우를 향해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시험은 혼자 보는 것이다.]
[그 누구의 지혜와 지식도 빌릴 수 없다.]
“그럼 지금 일행들은 어디로 간 거야?”
[진법 바깥으로 쫓아냈다.]
[피해는 주지 않았다.]
예상했던 답에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 그러면 시험 맞히면 금자는…….”
[금자는 시험을 보는 조건이다.]
[틀리든 맞히든, 너는 금자를 내놓아야만 한다.]
“와, 너무하네.”
도둑놈들이라는 말을 되도록 돌려 표현한 황준우였지만 두 개의 그림자는 전혀 신경을 쓰지 않고 있는 듯했다. 현재 상황에서 칼자루를 쥔 쪽은 분명했으니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확 그냥 엎어 버려?’
순간 황준우의 속에서 불길이 치솟았다.
몇 번 진법을 경험하며, 그 속의 허점을 찾아낸 황준우는 당장 마음을 먹는다면 이 운무조차 찢어 버릴 자신이 있었다. 다만 서로 기분이 상할 필요가 없다 생각하여 자제하고 있을 뿐이다.
[원치 않는다면 이만 물러나라.]
[물러난다면 우리도 금자를 탐하지 않겠다.]
“……거참, 교묘하게 터지지를 못하게 하네. 일단 문제 내 봐.”
만약 물러나는 것도 황금을 내놓으라 했다면 황준우는 지체 없이 진법을 망가트렸을지도 몰랐다. 한데 상대는 순수하게 시험을 보는 대가로 황금을 원하고 있었다. 이는 황준우의 입장에서도 충분히 납득 가능한 수준의 거래였다.
[시험 문제를 듣는 순간 금자는 더 이상 네 것이 아니다.]
[동의하는가?]
“동의하니까 문제 내라고 했겠지. 뜸 그만 들이고 시작하자.”
이후 황준우는 보란 듯이 들고 있던 금화 주머니를 바닥에 떨어트렸다.
거래에서 욕심은 필요 없었다.
[좋다.]
[시험 문제는 총 세 가지다.]
“설마 셋 다 맞혀야 되는 거야?”
[그렇다.]
[제갈세가는 지식이 없는 자를 원치 않는다.]
진짜 빡빡하기도 하다.
혀를 내두른 황준우는 고개를 저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나 이래봬도 향시 장원 합격자야. 시험에는 이골이 난 사람이라고. 시작해.”
황준우의 선언이 제법 놀라웠던 걸까?
잠시 운무가 크게 떨렸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상황이 바뀌지는 않았다.
[첫 번째 문제다.]
[지자(智者)와 인자(仁者)에 대하여 설명하라.]
“이거 진짜 학문 시험을 치는 것 같네.”
피식 웃은 황준우는 대답 대신 바닥에 두 글자를 적었다.
첫 번째 글은 물 수(水), 두 번째 글은 뫼 산(山)자다.
“지혜로운 이는 시대의 흐름에 따라 배움을 멈추지 않고 동(動 =움직이다)하기에 물이요, 어진 이는 도의를 알아 신중히 움직이기에 정적(靜寂)하니 태산과 같다. 지자락(智者樂), 인자수(仁者壽). 지자는 즐기는 물이요, 인자는 장수하는 산이다.”
우우웅-!
운무가 또 한 번 크게 떨렸다.
[과연…….]
[스스로를 거인(擧人)이라 칭하더니 헛말은 아니로다.]
“그럼 농담인 줄 알았나 봐?”
황준우는 콧대를 높였다.
[고작 첫 번째 문제를 맞혀 놓고 잘난 체라니…….]
[후회나 하지 않길 바라마.]
“두 번째 문제 내놔.”
운무 속에 침묵이 감돌았다.
‘설마 이제 와서 시험 문제를 고민하고 있나?’
영락 무인에다가 가벼운 행동의 황준우가 손쉽게 학문 문제를 맞히니 당황했을 확률이 높았다.
‘해 보자고.’
비록 엄청 좋아하지는 않았지만 얕게 파지만도 않았다.
황준우는 침착하게 목소리를 기다렸다.
[두 번째 문제다.]
반각여의 시간이 흐른 후, 다시 한 번 목소리가 들려왔다.
[공자께서 말씀하시길 배움의 경지에는 순서가 있다 하였다. 너는 이 순서를 능히 말할 수 있느냐?]
고민은 길었지만 오히려 첫 번째 문제보다 더 쉽다.
황준우는 자리에 앉은 채로 곧장 입을 열었다.
“지(知), 호(好), 락(樂). 다음 문제.”
알기만 하는 사람은 능숙한 이를 이기지 못하고, 능숙하다 한들 즐기는 달인(達人)만 못하다.
결국 공자가 말하는 배움에 있어 최고의 재능이란 락(樂)의 경지라 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문제는 쉽지 않을 것이다.]
[곧바로 내겠다.]
운무 속 제갈세가의 인물들도 기다렸다는 듯 답을 해 왔다.
마치 애초에 맞히라고 문제를 내준 듯 말이다.
[자시(子時)부터 묘시(卯時)까지는 네 발, 오시(午時)이후로는 두 발, 또 유시(酉時)가 넘어서는 세 발로 걷는 짐승이 있다.]
[너는 이것이 무엇인 줄 아느냐?]
“…….”
연속해서 이어지던 학문 문제에 당당한 얼굴을 보이던 황준우의 얼굴에 난감함이 어렸다.
‘이게 뭔 말이야?’
그간 읽었던 사서오경(四書五經)에서도 어디에서도 보지 못했던 이야기다.
‘어찌 시간마다 발의 숫자가 달라지지?’
혹시 제갈세가는 요괴나 영물 혹은 산신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단 말인가?
황준우의 머릿속 생각이 자연스레 산해경으로 향했다.
하나 그 지식 속에도 그런 기이한 요괴의 존재는 없었다.
여태껏 당당하게 답을 말했던 것과 다르게 깊은 고민이 이어졌다.
하나 한 시진이 흐르고, 더 시간이 흘러도 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머릿속은 복잡하게 엉키기만 하여 가슴이 답답할 뿐이었다.
“휴…….”
황준우는 결국 머리를 긁적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모르겠다. 빌어먹을. 내가 졌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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