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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22화 (122/373)

학사재생 122화

제 122화

[흐흐흐.]

[이번 것은 못 맞힐 줄 알았다.]

황준우의 항복 선언에 기다렸다는 듯 운무 속 두 사람이 웃음을 터트렸다.

“거 정답이 뭐야? 진짜 궁금하네.”

[답은 인간(人間)이다.]

황준우가 당황한 음성을 흘리는 사이 짙은 운무가 천천히 갈라지며 그림자밖에 보이지 않던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간은 곧 인간의 일생을 비유한 것.”

그중 하나는 중년 남성이었다.

점잖은 인상에, 수염을 길게 기른 차분한 문사풍 얼굴을 한 그의 두 눈에는 득의양양한 기색이 가득했다.

“태어난 순간 아이일 때는 네 발로 걷고, 조금 더 자라면 두 발로 걸으며, 늙게 되어 허리가 휘면 지팡이를 짚고 세 발이 된다. 혹시 문제에 불만이 있는가?”

뒷말을 덧붙인 이는 여성이었다.

그것도 화장이 꽤나 짙은 젊은 미모의 여성이었는데, 깔끔하게 차려 입은 복장이 아니었다면 문사라기보다는 오히려 기녀(妓女)로 착각했을 것 같은 농염한 인상이었다.

“무림 고수는 늙어서도 두 발로 다니는데?”

황준우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건넸다.

“아무리 대단한 고수도 백수(白壽)가 넘어서서는 제 발로 서 있기가 힘들지.”

황준우의 앞으로 다가온 여성이 눈웃음치며 황금 주머니를 주워 들곤 말한다.

“아니라고 하려 해도, 어쨌든 인간이 세월을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니까.”

중년 남성이 설명을 덧붙이고,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인정해. 깔끔하게 졌다. 자신 있었는데 아쉽다.”

“어린 친구가 제법 대단한 무재와 지식을 갖춘 사실 자체는 우리도 인정해.”

“그래서 나름대로 선의로 얼굴이라도 보여 준 건가?”

“딱히. 오히려 따지자면 사과의 의미라고 할까.”

돈주머니를 주워 든 여인의 앞섶, 마치 수박을 떠올리게 하는 크기의 무언가가 황준우의 눈앞에서 출렁인다.

“사과의 의미?”

“네가 괘씸해서 말이야. 우리도 거짓말을 조금 했거든.”

그 말과 함께 옆에 선 여인이 자연스럽게 황준우의 팔짱을 낀다. 위협적인 기세도 아니었기에 그를 가만히 지켜본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흐릿한 웃음을 지은 중년 사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본래는 총 세 가지의 시험 문제 중, 하나만 맞혀도 합격이다.”

“허…….”

“덕분에 손해가 이만저만이 아니거든. 안 그래도 가문 상황이 그리 좋지 않은데 우리도 화가 나서 말이야.”

“그래도 정당한 거래를 속이는 것은 옳지 않으니까, 마지막에라도 솔직하게 말한 거지.”

“이거 오히려 내가 괘씸해해도 되는 건가?”

황준우의 질문에 여성이 묘한 미소를 그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뭐, 네가 그렇게 생각한다면 막을 수는 없겠지?”

“후우…… 조금 어이없는 건 사실이지만. 내가 잘못한 부분도 있으니까 말이야.”

황준우는 웃음을 지으며 양팔을 들었다.

이런 상황에서 굳이 서로 얼굴을 붉힐 필요는 없는 것이다.

“어쨌든 그럼 나, 이제 제갈세가에 들어갈 수 있는 건가?”

“물론이야. 우리 제갈세가는 지혜롭고 호학(好學)하는 사람을 좋아하거든. 보통 무인들 중에 그런 사람은 흔치 않지만.”

황준우 역시 전생까지는 다를 바 없었다.

재생에 있어서도 황석후의 기대와, 백교의 교육이 아니었다면 아마 무공밖에 몰랐을 확률이 높았다.

‘진짜 우리 백 스승님께 감사해야 될 일이 너무 많네.’

삶을 살아가다 보니 학문이란 것, 배우는 자세에 대해 생각할 일이 많다고는 느꼈다. 한데 또 이런 식으로 쓰일 줄은 몰랐다.

역시 알아 두어서 나쁜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일행들은?”

“각자 시험 치는 중.”

“어, 나만 치는 게 아니었어?”

“대가를 받았으니 기회는 공평하게.”

여인이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잠깐만, 공평한 게 아니지 않나. 만약 시험에서 떨어지면?”

“입가(入家)할 수 없다.”

중년 사내가 냉정하게 말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만큼은 확실히 선을 긋겠다는 의지가 느껴지는 모습이었다.

‘그 세 사람이 제갈세가의 시험 문제를 통과한다고?’

황준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불가능하 거야.’

이건 이미, 그른 일이었다.

예상대로 제갈세가의 시험 문제를 통과한 사람은 황준우 하나뿐이었다. 나름대로 억지로라도 이것저것 익힌 황서연, 무공 외에 필요한 글공부는 하지도 않은 경호와 홍산은 누구 하나 틀릴 것 없이 단 한 문제도 맞히지 못했다고 한다.

이미 예상했던 결과였는지라 딱히 놀라울 것은 없었다.

오히려 운무를 헤치고 들어난 제갈세가의 풍경이 더욱 황준우의 감탄을 자아냈다.

조용한 장원의 정문에는 현기가 느껴지는 글씨로 쓰여진 제갈세가라는 네 글자가 보인다. 내부에는 총 다섯 채의 건물이 있었는데, 상주하는 인물은 약 삼십에서 사십 명가량으로 보였다.

만금장에 비하자면 소박한 수준이지만, 그동안 이 거대한 장원의 주춧돌조차 찾을 수 없던 상황을 생각하자면 놀라운 일이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어딘지 모르게 서로 닮은 문사풍의 인물들이 황준우를 향해 말을 걸어왔다.

“한 사람이 입가하였다는 소식은 전해 주었다.”

“와룡촌에서 기다린다고 하더군.”

“방문을 환영한다.”

분명 처음 듣는 목소리들인데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실제로 시선 속에서 황준우를 처음 보는 느낌도 없었다.

“음, 우리 만난 적 있던가?”

황준우의 질문에 서로를 바라본 문사들이 닮은 미소를 짓는다.

“운무 속에서 몇 번이나 마주했었지.”

아무래도 운무 속에서 보았던 수십의 그림자는 진법의 효과라기보다, 실제로 이들 모두가 모인 일이었던 듯했다.

“잘생겼다고 생각했다.”

“귀여운 편이기도 하지.”

“조금 괘씸하기는 했지만, 입가하여 가까이서 얼굴을 보고 싶었다.”

한 번 물꼬를 튼 대화가 끊임없이 이어지는데 기분이 묘하다. 분명 여자들도 섞여 있었지만, 음성을 흘리는 대다수가 남성인 탓일 터였다.

“그만, 그만. 어찌 됐든 손님의 자격으로 온 사람이잖아? 계속 몰아붙이면 정신 사납다고.”

그런 황준우의 앞을 가로막은 여인의 말에, 둘러싸고 있던 제갈세가의 문인들이 뒷걸음질 치며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의 손님이라…….”

“반가워서 실례를 했군.”

“아, 괜찮아. 근데 오랜만의 손님이라고?”

황준우는 자연스레 이 개월 전, 먼저 융중산을 올랐던 주연하를 떠올렸다.

‘그녀는 제갈세가에 오지 못했나?’

다른 사람도 아니고 주연하라면 시험에서 떨어졌을 가능성은 낮았다. 차라리 융중산에서 제갈세가의 흔적을 찾지 못했다고 보는 편이 옳을 듯했다.

‘아쉽겠는데?’

질문을 하고 싶었지만 입을 열지는 않았다.

여기서 말을 꺼냈다가는 너무 많은 목소리가 나오는 탓이었다.

“안쪽으로.”

운무 속에서 제일 처음 황준우에게 모습을 드러냈던 중년 문사가 길을 안내했다.

“거참, 보면 볼수록 신기하네. 이걸 어떻게 못 찾았을까?”

신비한 운무가 주변을 감싸고 있는 풍경을 제외하자면 평범한 장원과 다를 바 없다. 주춧돌을 기반으로 나무 기둥을 세우고 건물이 서 있으며, 지붕도 넓게 펼쳐져 있다.

“어라, 연못도 있네?”

중간에는 작게나마 연못도 있었다.

내부에서 활기 넘치게 움직이는 물고기들을 보아하니 오래토록 방치한 모습은 아니었다. 그런 신비한 감상들을 풀어 놓으며 걷다 보니, 가장 안쪽에 위치한 가장 소박한 건물에 도달했다.

가주전(家主殿).

현판에 쓰인 글을 본 황준우의 입가로 살짝 웃음이 떠올랐다.

“큰 집이라는 글을 쓰기에는 너무 소박한 것 아니야?”

“가주가 머무는 곳이 곧 큰 집이라는 의미가 되기도 하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던 중년 사내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자, 들어가라.”

어쨌든 첫 시작부터 제갈세가의 가주와 만나게 된다.

황준우는 굳이 시간을 버리지 않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차피 내가 제갈세가와 하고 싶은 이야기는 질문이 대부분이니.’

다른 사람도 아닌 가주와 대화를 나눌 기회라면 오히려 환영이었다.

의문인 점은 그 넓은 가주전 내부에서 기척이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또 무슨 진법을 펼쳐 놓은 건가?’

자연지기의 흐름을 읽어 보았지만 펼쳐진 운무를 형성하는 흐름 외로는 별다른 이상이 느껴지지 않는다.

실제로 가주전 문을 열고 방 안에 들어섰지만 사람은 누구도 없다. 분명 가주가 앉아 업무를 보는 책상 같은 것과 온기는 느껴지는데도 말이다.

“기다리면 오려나?”

의문도 들었지만, 굳이 억지로 찾아낼 필요도 없다.

황준우는 자연스럽게 가주의 책상 맞은편에 앉았다.

그런 황준우의 뒤를 조용하게 쫓던 여인이 황준우의 곁을 스쳐 지나갔다.

“기다려 주었으니, 도착해야지.”

이후 웃음을 흘린 여인이 책이 가득 쌓인 가주의 책상 의자에 엉덩이를 붙인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번졌다.

“거참, 진짜 사람 놀리는 걸 좋아하는 집안이로군.”

“이번에는 딱히 그런 의도는 아니었지만 말이야. 어쨌든 반가워. 만금장 소장주. 나는 량(亮). 보시다시피, 제갈세가의 가주야.”

여인, 제갈세가의 가주 제갈량이 책상 위 백우선(白羽扇)을 들어 올리며 인사했다.

쓰읍. 후우-!

왼손으로는 백우선을 흔들고, 오른손으로는 기다란 연죽(煙竹)을 들어 깊게 빨아들이고 내쉰 제갈량이 눈웃음을 그렸다.

“궁금한 게 많지? 우선 내가 너를 어떻게 알고 있는 지 정도?”

황준우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솔직히 놀라기도 했지만 마음도 차분하게 가라앉혔다.

굳이 감정을 나타내지 않아도 모든 속내를 읽을 것 같은 제갈량의 눈빛이 부담스러운 탓도 있었다.

“네 친구가 얼마 전에 다녀갔어.”

“손님은 오랜만이라고 했는데?”

“그녀는 손님이 아니니까.”

“무슨 의미야?”

“그게 첫 번째 질문?”

제갈량의 눈가가 묘하게 휜다.

아니라고는 하지만 장난을 치는 것 같은 기색이 역력했다. 잠시 그 모습을 지긋이 바라보던 황준우가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오, 이렇게 깊게 생각하는 건 성향이 아닌데. 젠장. 이거 아무래도 질문을 많이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데.”

“오호…… 감이 좋은 건가?”

“젠장. 역시 그랬구먼. 할 수 있는 질문은 두 가지인가.”

황준우의 말에 제갈량의 눈이 더욱 반짝이는 빛을 토했다.

“어째서 그렇게 생각하는 거야?”

“내가 두 가지 문제를 맞혔으니까. 이걸 뭐라 해야 할까, 등가교환(等價交換)? 왠지 거래랑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후후, 정답. 기분이니까 이건 질문으로 쳐 주지 않을게.”

“당연한 것 아니야?”

제갈량이라고 하였던가?

만만치 않은 여인이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여태껏 황준우가 만난 사람들 중에 가장 까다롭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불투명한 진무영보다도 부담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보니 문득 떠오르는 생각은 역시 그녀의 이름에 관한 것이었다.

‘제갈량. 공명(孔明)과 이름이 같아.’

명력, 요괴, 신령에 이어 진법을 겪은 탓일까, 그저 동명이인에 불과할 확률이 높은데도 신경 쓰인다. 애초에 천 년도 더 넘은 과거의 인물이 아직까지 살아 있는 게 말이 되는가? 심지어 역사의 근간과 성별조차 다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은 모든 것을 꿰뚫는 것 같은 그녀의 눈동자와 더불어 느껴지는 알 수 없는 괴리감 탓이다.

‘무공은 기껏해야 절정 정도.’

돌려 말하면 마음먹는 순간 황준우가 이 자리에서 그녀를 죽일 수 있다는 뜻이다. 한데 실제로 행하려고 마음먹으면 꼭 그렇게 될 것 같지도 않다.

한데 다시 생각하면 충분히 죽일 수 있다.

제압도 가능할 것 같다.

‘대체 뭐지?’

동물보다 더 예리한 황준우의 직감이 혼란을 느끼고 있다. 이런 상대는 황준우로서도 태어나서 처음이라 할 수 있었다.

“질문 안 할 거야?”

제갈량이 다시금 물어왔다.

“고민 중이야.”

“지루하네.”

늘어지게 하품하며, 다시 한 번 연죽을 빨아들인 제갈량이 허공을 바라본다.

“쓸데없는 고민으로 시간을 버릴 필요는 없지 않아?”

이어서 나온 말은 참으로 핵심을 꿰뚫는 것 같다.

“그러게.”

그녀를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

사실 황준우에게 이는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어차피 죽일 생각이 없는데 고민해서 무엇 하랴?

놀라운 사실은 그녀가 그런 황준우의 심정을 한눈에 알아봤다는 것뿐이다.

황준우는 생각을 전환했다.

‘지금 중요한 건 무슨 질문을 하냐는 것.’

황준우는 이 만남이 일종의 기연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우연이 아닌 운명.

지금 당장 가장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것들을 물어야 한다.

“우선…… 명력에 대해 알려 줘.”

황준우는 그녀가 명력에 대해 알고 있는지를 묻지 않았다. 당연히 안다는 기준하에 질문을 건넸다. 그리고 그 선택은 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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