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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24화 (124/373)

학사재생 124화

요괴(妖怪)혹은 악령(惡靈), 또는 영물(靈物)까지.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들으면 참으로 멀게 느껴지는 이야기다. 실제로 그런 존재를 보았다는 이들이 있기는 하지만 아주 극소수에 속할 뿐, 대다수는 그런 비슷한 존재와도 가까이한 적이 없다고 말한다.

일위도강(一葦渡江).

갈댓잎을 타고 한 번의 도약으로 강을 건널 수 있다는, 혹은 허공답보(虛空踏步)를 펼쳐 공중을 날아다닌다는 무림인의 이야기 역시 허무맹랑한 것은 마찬가지다.

지금 제갈량의 눈앞에 그 모든 허구가 현실로 벌어지고 있었다.

오백 년 넘게 묵은 거대한 요괴와, 그에 검 한 자루를 들고 맞서는 위대한 무인. 어딘가 익숙한 풍경인지라 그런지 절로 누군가의 얼굴이 그녀의 눈앞에 아른거렸다.

“나름대로 익숙해질 법도 한 풍경이건만…….”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으며 혀를 찬 제갈량이 백우선으로 얼굴의 절반을 가렸다.

“요괴는 그렇다 쳐도, 무인에게는 정말 익숙해지지가 않는다니까.”

[키에엑-!]

거대한 폭발음과 함께 괴성을 내지른 인면지주의 몸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쿠구궁-!

땅이 울며 거대한 먼지구름이 자욱이 피어난다.

그 사이로 번쩍이는 빛줄기와 거대한 그림자의 격돌은 끊임없이 이어졌다. 격전처럼 보이지만 인간의 검이 더 우세하다. 솔직히 두 눈으로 보면서도 믿기지 않을 정도였다.

“가주, 저분은 인면지주를 퇴(頹)하기 위하여 강림하신 신선(神仙)이십니까?”

인면지주를 봉인하기 위해 애쓰고 있던 제갈세가의 가인(家人)이 다가와 묻는다.

“아니, 인간이야.”

제갈량이 눈웃음 지으며 말했다.

그에게 인면지주의 처리를 부탁하였으나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아무리 그래도 인간인 이상 한계란 것은 명확하다 여긴 탓이다. 때문에 만약의 때에 대비해 그를 돕기 위한 수단을 몇 마련해 두었다. 펼쳐졌던 진법을 조금만 손보면 요괴, 인면지주의 힘을 오 할 이상 약화시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한데 굳이 필요가 없을 듯했다.

아직 어려 보이는 청년은 이미 입신(入神)의 경지에 오른 지고(至高)의 무인이다.

제갈량이 아는 무인들 모두를 꼽아도, 저 젊은 나이에 저토록 강했던 이는 아무도 없었다.

“기대했던 것 이상의 인간.”

제갈량의 밤하늘별을 닮은 눈이 반짝 빛나는 순간.

쐐에엑-!

도약한 황준우의 손이 앞을 향해 길게 뻗어지며 그의 의지를 따르는 검이 허공을 찢었다. 불꽃을 튀기고 심상(心想)의 힘이 쏟아져 나온다.

“관(貫)의 심상!”

제갈량의 외침에 모두의 시선이 황준우가 화살처럼 쏘아 보낸 검 끝에 맞닿은 인면지주의 두터운 갑피를 향한다.

관의 심상은 모든 것을 꿰뚫는 의지.

검 끝에 맞닿은 오백 년 묵은 요괴의 갑주가 깨어지는 소리와 함께 비명이 더욱 높아졌다.

이어서 보인 것은 길게 이어지는 불의 꼬리다.

대기를 찢고 쏘아져 나간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리는 관통의 힘이 허공을 돌아 다시 황준우의 손으로 돌아온 순간, 자욱했던 먼지구름이 걷혔다.

여덟 다리로 웅장하게 서 괴성을 내지르던 인면지주가 거짓말처럼 비명조차 없이 무너져 내렸다.

“후우…….”

떨리는 수왕검에 묻은 피를 털어 낸 황준우가 이마 위, 식은땀을 훔쳤다.

“요괴도 피는 붉네.”

고작 약관도 되지 않는 나이로서는 최초로 오백 년 묵은 인면지주를 홀로 격퇴한 위대한 무인의 첫 감상이었다.

허공을 답보하며 손짓만으로 검을 부리던 황준우가 지상으로 내려섰다.

“확실히 엄청 단단하네. 조금만 집중이 흐트러졌어도 뚫지 못할 뻔했어.”

“그게 전부?”

제갈량이 이전보다 더욱 짙어진 눈웃음을 지으며 묻는다.

“감상을 묻는 거야? 요괴 피도 붉다는 사실이 더 놀라웠어. 사실 단단한 건 덩치를 보는 순간 그쯤은 할 줄 알았거든.”

실제로 인면지주를 처음 보았을 때, 여유로운 척 말했지만 제법 놀란 황준우였다. 그도 그럴 게 굵직한 다리만 일 장이 넘었다. 어지간한 성인 장정 세 명쯤이 줄지어 서 있는 크기인 것이다. 두께는 또 어떤가? 황준우 세 사람이 서서 팔을 둘러야지 겨우 감싸 안을 수 있을 것 같은 수준이었다.

그런 다리가 여덟 개나 있었다.

조금 더 직설적으로 말해, 그게 고작 다리였다.

몸통은 어지간한 거목을 셋 이상 합쳐 놓은 것만큼 두터웠는데 길쭉길쭉 솟아난 털은 공격용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런 거대한 덩치를 보고 쉬울 것이라고 생각하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요괴 역시 하나의 생명이니까”

“거, 그렇게 말하니 좀 찝찝하긴 하네. 사람 머리가 열이나 달려 있던 놈인데.”

“오백 년이나 묵었으니, 오히려 봉인돼서 덜 큰 편이지.”

“그런 의미로 한 말은 아니다. 잠깐, 근데 저게 덜 큰 거라고?”

“실제 인세(人世)에서 오백 년을 넘게 산 인면지주라면 이미 대요괴급이 되어야 정상이거든 원래.”

“저건 대요괴 아니고?”

“겉모습만 크지, 대요괴라 불리기에는 부족함이 많지.”

입을 떡하니 벌린 황준우가 고개를 내저었다.

“궁금해하는 걸 제법 성실히 답변해 주니 오히려 적응 안 될 정도인데, 부담도 어마어마하게 되네. 멸망의 새라는 녀석은 대체 얼마나 무지막지할까?”

황준우의 농담 섞인 질문에 고민하듯 망설이던 제갈량의 붉은 입술이 장난기 가득한 모습으로 벌어졌다.

“글쎄. 눈에 담을 수 있는 모든 공간쯤?”

“…….”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의 말에서 느껴진 진의를 파악하기 위해서다.

“어찌 됐든 덕분에 살았어. 녀석을 다시 봉인하고 있는 데만 쏟던 진력도 보통이 아니었던 상황이었으니까. 게다가 혼자 잡은 덕에 돈이 더 굳었고.”

“무슨 말이야?”

“요괴를 약화시킬 수 있는 진법을 펼치려 했었거든. 제법 많은 황금이 쓰이는 일이라 아쉽기는 해도 인간이 잡을 수준은 아니니까.”

별것 아닌 말이었지만 그 속에서 황준우가 알 수 있는 사실은 제법 많았다.

‘모든 걸 아는 건 아니구나.’

제갈량의 시선은 언제나 사람의 머리 위에 있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말투, 행동, 표정 또한 그렇다.

하나 그녀도 모든 것을 알고 있는 것은 아니다.

황준우의 무공을 범상치 않게는 여겼지만 그 끝을 알지는 못했다.

“네 생각이 맞아. 나는 운이 좋아 오만한 재주를 가지게 된 한낱 인간일 뿐이니까. 신(神)이 아닌 이상 세상의 모든 것을 알 수는 없는 법이지.”

제갈량이 그런 황준우의 시선을 이해했다는 듯 말한 후 인면지주의 시체로 다가가, 거대한 요괴의 가슴 중앙에 뚫린 검은 흉터 속으로 손을 집어넣었다.

이후 살짝 풀어진 눈의 제갈량의 입에서 전혀 알아들을 수 없는 괴상한 언어가 흘러나온다.

“#(*@*$%#.”

무어라 표현해야 할까.

들리지만 읊을 수 없다. 신비한 느낌에 입 모양을 따라 움직이던 황준우가 고개를 절레절레 내저었다.

‘대체 무슨 원리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스스슥-!

처음 듣는 언어를 향해 귀를 기울이는 사이, 제갈량의 손끝에서 흘러나온 아지랑이를 닮은 기운이 인면지주의 몸속에서 붉고 둥근 무언가를 꺼내 들었다.

“오, 내단(內丹)?”

황준우의 입에서 깜짝 놀란 탄성이 터져 나왔다.

영물 혹은 요괴 중 일부만이 가지고 있다는 내단은 쉽게 말해 기(氣)의 덩어리였다. 애초에 황준우가 방금 죽인 인면지주만 해도 물리적인 힘만으로 움직이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신체 구조를 가진 괴물이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움직일 수는 있다.

하지만 내공을 이용하는, 과장 삼아 바람보다 빨리 달리는 황준우를 위협할 정도의 속도를 내는 것은 엄연히 불가능해야 정상이다. 그런 놀라운 일을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바로 내단이다.

비유하면 무림인의 단전과 같다 할 수 있었다.

물론 차이점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무림인의 단전은 영물의 내단처럼 저런 형태로 채취할 수 없다.

거기다 제일 중요하다고 볼 수 있는 사실이 하나 더 있었다.

황준우는 그를 확인하기 위해 물었다.

“일단 기의 응집도는 보통이 아닌 것 같은데. 내단을 먹으면 내력이 증가한다는 게 농담은 아닐 것 같은데?”

“경우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이쯤 되면 오염도도 높지 않고 충분히 영약(靈藥) 대신으로 쓰일 수 있겠지.”

자연스럽게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백 년이나 묵은 요괴의 것이라 그럴까?

제갈량의 손에 쥐어진 내단에서 느껴지는 내력은 인간의 기준으로 삼 갑자(일 갑자= 60년) 이상으로 느껴졌다. 기운의 질을 제외한, 총 양으로만 따지자면 황준우가 가진 이 갑자의 내력보다도 훨씬 많은 셈이었다.

“그거 반 떼서 우리 경호나 홍산한테 주고 싶네.”

“욕심나?”

“솔직히.”

황준우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본인은 이미 내공의 양이 큰 의미가 없는 경지에 올랐다고는 하지만 경호와 홍산 등은 아직 멀었다. 이제 제법 무림에서 내로라하는 고수가 된 두 사람이지만 황준우가 보기에는 여전히 어디서 맞고 올까 걱정되는 인물들인 것이다.

“후후, 미안하지만 이건 줄 수 없어.”

“그럴 것 같더라.”

“대신 약속한 보상은 확실히 챙겨 줄게.”

“그거 기대되는 걸. 내단 값 이상은 하는 거지?”

황준우의 농담 섞인 물음에 제갈량이 고개를 주억인다.

“아마?”

“그럼 그 보상은 언제쯤 주실까나?”

“지금 바로 주지 뭐.”

제갈량은 담담히 백우선을 휘저어 눈앞의 허공을 그었다. 그러자 놀랍게도 허공이 입을 벌리듯 틈새가 벌어졌다. 기운을 통해, 순수한 힘으로 대기를 찢어 버리는 것과는 다른 경계의 능력이다.

‘기운이 실이 어딘가로 연결되어 있는 것 같은데, 저건 대체 뭐야?’

또다시 처음 보는 진귀한 능력에 황준우의 눈이 반짝일 쯤, 틈새 속에 손을 집어넣었던 제갈량이 책 한 권을 꺼내 들었다.

“……!!”

설마하니 빈 허공을 휘저어 물건을 꺼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던 황준우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거 진짜 탐나는데, 술을 수련하면 나도 그런 것을 사용할 수 있나?”

“후훗. 미안하지만 이건 무슨 능력이 아니라 물건이라고 봐야 해서 말이야.”

“그게 물건이라고?”

믿기지 못할 이야기에 또 한 번 경악을 토한 황준우가 제갈량의 전신을 빠르게 훑었다.

평범한 문사복 차림에 백우선 하나가 전부인 그녀에게 저런 공간을 열 보물이 따로 있단 말인가?

“명력을 가진 무기보다 훨씬 탐나는데.”

“운이 좋으면 너도 가질 수 있을지 모르지.”

“오? 방법이 있긴 한가 보네?”

“네 덕이 하늘을 감동시킬 정도로 높아지면 누군가 선물을 해 줄 수도 있지?”

“신선?”

황준우의 질문에 제갈량은 또다시 입을 잠갔다.

대신하여 눈웃음을 그리며 꺼낸 책을 황준우에게로 건넨다.

“욕심내지 마. 네게 이것이 필요하다면 이치에 따라 언젠가 내 곁으로 도달할 테니까. 그리고 비록 사본(寫本)이지만 이 책도 귀한 거야. 아니, 어쩌면 더 큰 가치를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지.”

“팔괘술법서(八卦術法書)?”

책의 제목을 읽은 황준우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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