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37화
제 137화
진무영은 우내십존에 속하지 않는다.
그가 세상에 나서는 것을 원하지 않고, 스스로의 이름을 떨치지 않기 때문이다.
때문에 세간에서는 그를 잘 알지 못한다.
하지만 진무영의 실제 무공이 천하제일에 가깝다는 사실은 무림의 정점에 가까운 모두가 알고 있다. 궁왕 오칠과 수로왕 독고문은 역시 그런 진무영과 공통점이 있었다.
실제 실력에 비해 명성이 얕게 알려진 것.
진무영이 의도적으로 자신을 숨겼다면 이 둘은 신분과 출신 때문에 다소 격하당한 편이었다.
실제 무공만 따지자면 ‘왕’이라 불리는 이들 중에도 우내십존에 못지않은 무인들이 몇 있었는데, 오칠은 물론 독고문 역시 이에 속했다.
결국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이 힘을 합치면, 구대문파 중 하나를 하룻밤 이내에 봉문시킬 수 있는 엄청난 전력이다.
걸음에 망설임이나 두려움은 없었다.
나름대로 호기심과 또 다른 목표도 있기에 귀찮다는 느낌도 크게 나지 않았다.
단호하고 빠르다.
무수히 많은 토병들의 대지를 뚫고 나타난 두 번째 동공은, 황궁을 본 따 만든 것 같은 엄청난 지하 궁궐이다.
“허…….”
“가짜치고 제법 잘 꾸며 놨구려.”
오칠이 헛웃음 흘리고 독고문이 감탄을 냈다.
띠리링-!
동시에 손님을 기다렸다는 듯 가야금 타는 소리를 시작으로 다양한 악기 소리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생기(生氣)는 느껴지지 않았지만 토병들과 달리 제법 사람처럼 빚어진 무용수들이 춤을 추기 시작한 것도 그때였다.
마치 별천지와 같은 모습에 오칠과 독고문 두 사람의 눈에 감탄과 경계가 연신 오간다.
이미 한 번 토병들에게 당한 전적이 있던지라 쉽게 방심할 수 없다 여긴 것이다.
반면 진무영은 차가운 눈으로 지하궁궐의 가장 아래를 내려다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
‘또 저 뱀인가.’
붉은 눈의 검은 뱀.
입구에서도 보았던 불쾌한 기운을 몸에 잔뜩 두른 흑영사를 바라보는 진무영의 손이 허리춤의 검을 두들긴다.
‘벨까?’
처음에는 정체를 몰라 놓아두고 왔다.
혹여 무덤에 무리를 줄 수도 있다고 생각한 탓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어차피 함정이라면 저 뱀을 미리 없애 놓는 게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베자.’
스르릉-!
결심을 내린 진무영의 허리춤에서 검 한 자루가 뽑혀져 나왔다.
화려한 장식 속에 가려져 있던 투박한 검의 형태가 드러난다. 검신은 길지만 날은 뭉툭한 느낌이다. 한데도 느껴지는 예기는 범상치 않다는 것은 또 모순(矛盾)적이다.
“선장?”
“금방 다녀오겠소.”
놀란 오칠이 의문을 표한 순간, 진무영의 신영이 흑영사의 앞으로 떨어졌다.
동시에 움직이지 않던 흑영사가 처음으로 반응을 보였다.
“……!?”
붉은 눈을 빛낸 흑영사에게서 촉수처럼 뻗어져 나온 탁기가 순식간에 진무영의 몸을 관통하려는 순간이었다.
“어딜 감히!”
진무영의 검이 사방으로 휘저어지자 기의 파도가 물결치며 탁기를 몰아낸다.
미처 자르지 못한 촉수는 떨리는 검에서부터 흩어져 나온 옅은 운무가 집어삼켜 흔적을 지웠다.
그 틈새, 붉은 눈의 뱀이 몸을 꿈틀거리며 거대한 궁궐내부로 모습을 감추었다.
“대체 무슨 일입니까!?”
“선장?”
흑영사를 보지 못하는 오칠과 독고문의 질문에 진무영이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놓쳤다고?’
느낌이 좋지 않다.
여태껏 움직이지 않던 흑영사가 갑자기 움직인 것에서부터 사라지기까지.
구구구-!
이어서 다시 한 번 기관이 움직이는 소리가 들리며 음악이 가득하던 궁궐이 무너져 내렸다.
이어서 그들의 주변을 둘러싼 것은 궁궐 속에 감춰져 있던 거대한 묵철의 벽.
가장 먼저 검을 뽑아 든 독고문이 붉은 강기를 실은 일격을 강하게 내리쳤다.
한데 오히려 역으로 튕겨져 나온다.
그 반동이 어찌나 강한지 자칫했으면 독고문이 검을 놓쳤을지도 모를 정도였다.
그를 지켜보며 활시위를 재고 있던 오칠이 손을 내렸다.
검과 다르게 한 번 날아간 화살이 튕겨져 날아오르면 제어할 방법이 몇 없다.
천장을 비롯하여 사방이 완전히 묵철로 된 감옥에 둘러싸이게 된 진무영이 어이없게 혀를 찼다.
“이건…….”
스스슥-!
묵철의 벽 너머를 자연스럽게 통과해 머리만 내민 흑영사가 그런 그들을 지켜본다.
진무영이 재빨리 검을 휘둘렀지만 흑영사가 머리를 감추는 속도는 더 빨랐다.
진무영의 검과 묵철의 벽이 부딪치며 큰 진동과 굉음이 일었다. 흔들렸다. 몇 번 더 힘을 준다면 충분히 무너트릴 수 있다고 생각한 진무영이 검을 들어 올렸다.
동시에 사방에서 흑영사의 검은 촉수가 엄청난 속도로 쏘아졌다.
푸부북-!
“뭐지?”
아무것도 모른 채 흑영사의 촉수에 관통당한 오칠과 독고문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우웅-!
동시에 검은 촉수가 무언가를 빨아들이듯 흔들렸고, 무너질 듯 흔들렸던 묵철의 벽이 검은 빛을 쏟아 낸다.
두 사람의 내기를 바탕으로 하여 벽을 더 강화시키고 있는 모양. 진무영이 빠르게 움직여 촉수를 끊어 내어도 새로이 나타나는 촉수가 더 많다. 아마 보았던 흑영사 한 마리뿐만이 아니라 또 다른 녀석들이 모두 이곳으로 몰려온 듯했다.
“내력이 조금씩 빠져나가는 기분인데.”
“선장은 이유를 알고 있소?”
독고문의 질문에 진무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난감한 상황입니다. 제가 벽을 무너트리면 두 분이 쓰러질 수도 있어요.”
오만상을 찌푸린 진무영의 두 눈에 고민이 깃들었다.
“이 벽이 내 기운을 먹고 강해지고 있단 말입니까?”
오칠의 질문에 진무영이 고개를 주억였다.
“대체 누가 이런 함정을…….”
“짐작 가는 자가 있긴 합니다.”
흑영사와 진시황릉.
이 두 가지만 보았을 때는 몰랐다.
하나 이 묵철의 벽을 보는 순간 근래 자주 떠올렸던 얼굴 하나가 곧장 생각났다.
‘용중호.’
묵철은 천마신교의 보물.
그 수가 매우 희귀하고 적어 순수한 묵철로 이루어진 검은 천마의 애병, 천마신검(天魔神劍)밖에 없다고 알려져 있다.
한데 어디서 이렇게나 많은 묵철을 구했을까?
‘놈이 진짜 진시황의 무덤을 발견한 걸까?’
최초로 천하를 통일하고 불사의 영약을 찾기 위해 세상의 모든 보물을 모으려 했다던 진시황제.
그의 보물고(寶物庫)를 찾았다면 이만한 묵철도 능히 이해가 된다.
‘아직 다 쓰지는 못했겠지.’
오히려 가득 남아 있을 확률이 높다.
섬서 서안, 이곳에 진시황의 무덤이 있을 것이라 내심 확신하고 있던 진무영이 진한 웃음을 지으며 입술을 핥았다. 아쉽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 끝이 아니지 않은가?
“이런 곳에 막혀 있을 수는 없지.”
결정을 내렸다.
진무영은 오칠과 독고문을 바라보며 어딘지 모르게 웃음기가 느껴지는 목소리를 흘렸다.
“두 분 다 조금만 참아 주세요.”
의문을 표할 틈도 없었다.
우우웅-!
손에 꽉 쥔 검에 심상을 담은 진무영의 태극혜검(太極慧劍)이 펼쳐지며 붉고 푸른빛의 짙은 운무가 마치 파도처럼 묵철과 맞닿는다.
동시에 무엇으로도 끄떡하지 않을 것 같던 묵철이 비명을 토했다.
“……!!”
“……!!”
두 사람의 기운이 갑작스럽게 훌러덩 빠져나간 것도 순식간.
위기감이 느껴지는 시점에 진무영의 입이 차갑게 벌어졌다.
“무너트려라. 의천(倚天).”
그 목소리에 따라 붉고 푸른 운무 속, 광활한 하늘이 펼쳐진 순간이었다.
결단코 무너지지 않을 것 같던 묵철의 벽이 터져 나갔다.
동시에 사방으로 흩어진 운무가 촉수를 내뻗고 있던 흑영사 다섯 마리를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스르륵-!
흑영사들은 아무런 반항조차 하지 못한 채 녹아내렸다.
그 틈새로는 마치 춤을 추듯 검을 휘두르는 진무영이 있었다.
“무슨 괴물들이 이렇게나 많이 모여 있어?”
무너진 토병들을 쌓아 올린 거대한 흙산.
그 정상에 선 어린 소녀, 신아가 입술을 삐죽 내밀며 투덜거렸다.
“또 누가 있습니까?”
“처음에는 한 놈인 줄 알았는데 하나 더 있네?”
“너무 강렬한 기운이 많아. 안 그래도 기척을 감추고 찾느라 힘든 지경인데, 이래서는 마술사의 흔적을 더 쫓기가 어려운데…….”
“제가 도울 수 있는 일은 없습니까?”
신일의 질문에 콧방귀를 뀐 신아가 매몰차게 답했다.
“부적이랑 지팡이나 내놔!”
“여기 있습니다. 귀여운 얼굴로 까칠하시기만 해서는.”
신일은 신아를 향해 부적과 나무 지팡이를 불퉁스러운 얼굴로 건넸다.
그러거나 말거나 왼손에 빈 부적을, 반대편 손에는 지팡이를 든 신아는 정신을 집중했다.
이후 오른손에 든 지팡이로는 태극(太極)을, 이어서 음양(陰陽)을 나눈 후 사상(四象)을, 이윽고 팔괘(八卦)에 달하여 곤괘(坤卦)와 손괘(巽卦)를 그려 낸 신아의 왼쪽 손에 들려 있던 부적이 하늘을 날았다.
마치 새가 날갯짓을 하듯 날아오른 부적에 그려 낸 괘의 문양이 새겨지는 순간 지팡이 끝자락으로 짚은 신아의 입이 열렸다.
“만물을 포용하는 위대한 여와(女?)의 고동이여, 흐름이여, 내게 대지의 길을 알려 다오. 추마(追魔)의 술.”
목소리는 평소의 신아답지 않게 낮고 무거웠다. 또한 그 울림은 웅장했다. 동시에 신아의 검은 눈자위가 사방을 빠르게 훑었다. 뻗어져 나간 대지의 기운이 그녀에게 방향을 일러준다.
귓가를 간지럽히는 바람의 소리가 속삭이며 명확한 길을 전해 주었다.
그렇게 방향을 잡고 길을 쫓아, 그 끝에 도달하여 본 검은 무언가와 눈을 마주한 신아가 미간을 크게 찌푸린 순간이었다.
“……!”
머릿속을 아리는 통증과 함께 펼쳤던 도술이 끊어진 것을 느낀 신아가 아랫입술을 깨물었다.
“찾았어.”
“우리도 들킨 것 아닙니까?”
“어쩔 수 없잖아. 지금 이 상태로 우리를 감추고 찾는다는 건 무리라고. 어서 가자. 늦으면 더 위험할 수도 있어.”
최대한 태연한 척 말하려 한 신아였지만, 목소리에 조급함을 숨길 수 없었다.
‘어째서 대마술사(大魔術師)급쯤 되는 놈이 여기 있는 거야?’
대마술사는 방향만 다를 뿐 도술사들이 목표로 삼는 신선의 경지 중 삼 단계, 지선(地仙)에 해당하는 실력자다.
신아, 그녀와 같다.
겉만 그럴싸할 뿐 인간의 탈을 한 꺼풀 벗어 던진 존재.
‘밀교(密敎)의 마술사 중에 저런 놈이 있었어?’
마술은 도술과 다르다.
태극과 음양을 기반으로 팔괘의 자연과 소통해 힘을 빌리는 것이 도술이라면 마술은 피, 그리고 생명을 기반으로 한 제물을 요구한다.
때문에 같은 등급에 있어서 위력은 마술 측이 더 강력하다. 다만 자연의 궤를 벗어나는 수단인 만큼 순수한 자연지기를 담은 도술에 쉽게 무너지기도 하지만, 상대가 대마술사급이면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도 있었다.
‘게다가 아무래도 저쪽 녀석과 손을 잡은 것 같은데.’
엄청난 기파가 연속으로 번졌던 동쪽.
방금 전 그 싸움이 끝났다.
기파의 충돌은 많았지만 애초부터 압도적으로 한쪽이 유리한 싸움이었기에 오래 걸리지 않는 것은 당연했다. 문제는 그 동쪽 싸움의 승자에게서 마술사의 흔적이 느껴진다는 부분이었다.
“위험해, 위험해.”
“그렇게나 위험합니까?”
오랜 시간 옆에 있었지만 단 한 번도 신아가 이토록 초조해하는 모습을 본 적이 없는 신일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우리 둘만으로는 죽을 확률이 높다.”
신아의 확신에 가득 찬 음성에 헛구역질을 삼킨 신일이 걸음을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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