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40화
제 140화
이때를 기다렸다.
이날을 위해 살아왔다.
천마신교가 무림의 위에 군림하는 이 기분을 다시 만끽하기 위해, 오랜 시간을 걸었다. 생각보다 빠른 결과를 마주했지만 나쁘지 않다. 진무영이라는 인물은 작금 무림의 정점, 무당의 정상에 선 괴물이다. 그를 무릎 꿇리고 빌게 만든다면 응어리진 마음이 제법 풀어질 줄 알았는데 그 정도로는 부족했다.
완전히 망가트려야 한다.
그들이 천마신교의 아래임을.
‘나 용중호가 가장 높은 존재임을 깨닫게 해 주어야 하지.’
과연, 이번만큼은 진무영이라고 해도 쉽지 않은 듯했다.
“저를 버리는 건 어렵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문(師門)을 어찌 모욕한단 말이오? 나는 그럴 수 없습니다. 그럴 수는 없습니다.”
“그래? 그렇다면 모두 죽어라.”
흰자위 속, 붉은 핏줄이 꿈틀거리는 시선으로 진무영을 내려다보던 용중호가 검을 높이 들어 올리는 순간이었다.
“사, 살려 주시오! 우리는 한배를 탄 적도 있지 않소!?”
갑작스럽게 앞으로 뛰쳐나온 독고문이 무릎을 꿇고 목소리를 높였다. 붉어진 얼굴에는 다급함이 느껴졌다.
“흐음…….”
그를 흥미로운 시선으로 내려다보는 용중호의 입가로 조소가 떠올랐다.
“수로왕인가? 네놈 때문에 흑풍대주가 죽었지.”
독고문의 몸이 떨렸다.
흑풍대주 구휘가 죽었다고?
‘만금장 소장주를 사로잡은 게 아니라?’
당연한 일이라 생각해서 관심도 두지 않았다.
한데 눈치를 보아하니 정말로 구휘가 죽은 듯했다.
“사, 사, 살려 주시오. 내, 내가 흑풍대주를 죽인 건 아니지 않소? 그리고 우리 적룡수로채는 천마신교에도 큰 도움이 될 수 있을 게요.”
독고문이 양손을 모아 싹싹 빌며 빠르게 말문을 이어 나갔다.
“크하하, 천하의 수로왕도 별것 아니로구먼.”
멸부가 가소롭다는 듯 배를 잡고는 대소(大笑)를 터트렸다. 잠시 얼굴을 붉힌 독고문이 고개를 숙였지만 반발을 하는 모습은 없었다.
그는 불안한 듯 보였고, 어딘지 초조해도 보였다.
‘제 목숨이 걸려 있으니 어쩔 수 없겠지.’
그를 흥미롭다는 듯 내려다보던 용중호가 고개를 천천히 주억였다.
“흑풍대주의 목숨은 가볍지 않다.”
“수, 수로적룡채의 황금도 가볍지 않습니다.”
독고문의 말투가 바뀌었다.
위기를 느꼈는지 스스로를 용중호의 아래로 내린 것이다. 현재 천마신교에 황금이 부족하다는 사실도 제법 잘 꿰뚫었다.
안타까운 점은, 적어도 지금의 용중호는 황금에 관심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대신하여 원하는 것은 달리 있었다.
“죽여라.”
용중호의 곁눈질이 독고문을 지나쳐 진무영에게 향했다.
“……!!”
“피는 피로 갚을 수 있는 법. 네 각오를 보여라, 수로왕.”
독고문의 눈이 크게 떨렸다.
시선을 돌려 진무영을 바라보니, 어딘지 모르게 담담한 그의 두 눈이 보인다.
“제, 제길…….”
입술을 깨문 독고문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느릿하게 진무영을 향하는 발걸음은 무겁다.
“수로왕에게 죽은 검선의 제자라…… 아주 보기 좋구나.”
“나에게 굳이 이런 치욕까지 주어야 합니까?”
진무영이 입술을 깨물며 그런 용중호를 노려보았다.
동시에 용중호의 두 눈에서 불꽃이 튀겼다.
“치욕이라! 감히 누가 누구에게 하는 말인지 모르겠구나!”
“후회하게 될 겁니다. 나를 죽이는 순간 천하에, 천마신교가 진시황의 보물을 훔쳐 숨겨 놓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질 테니까요.”
진무영의 두 눈에서도 불꽃이 튀겼다.
제법 분노한 듯 입술을 깨무는 그의 모습은 용중호의 가슴을 더욱 설레게 했다.
“과연 진무영. 눈치가 빠르구나. 하지만 아무렴 어떻단 말이더냐? 어차피 천하는 곧 천마신교의 이름 앞에 무릎 꿇게 될 것인데 말이다.”
이를 간 진무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쉽게는 죽어 주지 않겠다는 듯했다.
“서, 선장.”
독고문이 그런 진무영을 부른다.
“죽여라.”
용중호는 날카로운 음색으로 독고문을 재촉했다.
이후 곧 조소를 보였다.
“하긴, 네게는 무리겠구나.”
잠시 무릎을 꿇고 있었을 뿐이지, 애초에 진무영은 독고문을 압도하는 고수다.
정면으로 싸우려 든다면 무리인 것이 당연했다.
“내가 놈을 다시 무릎 꿇려 주마. 네가 베어라.”
용중호가 여유롭게 검을 뽑아 들고 나선다.
마음속에는 자신감이 가득했다.
‘이로써 천마신교는 온전히 무당파를 뛰어넘는다.’
아니, 비공식적인 천하제일인을 짓누르고 천하라는 거산(巨山)의 정상에 우뚝 선다.
“하앗-!”
기합을 내지른 진무영의 선공이 시작되었다.
기회를 노린 깔끔한 솜씨.
하지만 그의 발끝이 움직이는 순간 이미 기색을 눈치채고 있던 용중호였다.
가볍게 천마신검을 들어 방어한 이후, 힘으로 진무영을 밀쳐 낸 용중호의 등 뒤로 어둠의 강기가 또다시 피어올랐다.
“그런 장난질로는 네 명을 단축할 뿐이다, 진무영.”
“글쎄요. 그건 아직 모르는 일 아닙니까? 상황이 조금 불리하긴 해도, 적은 고작 열등감 덩어리일 뿐이니까요.”
“……!!”
어두운 빛이 번쩍였다.
멸부와 마창의 합공이 오칠에게 쏟아진 것도 순식간이었다.
카가가강-!
더 이상 말은 없었다.
불꽃이 튀기고 화려한 강기가 빗발친다.
그 와중에 홀로 동떨어진 이는 독고문이었다.
‘저 너머로…….’
눈치를 보며 주변을 살피던 독고문의 걸음이 조금씩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다.
목표지는 용중호와 멸부, 마창이 나타난 입구.
‘저 너머에 진시황의 보물이 있다.’
두 눈에 욕심이 번쩍였다.
물론 혼자 다 가질 수는 없을 터였다.
다행인 것은 아직 그에게도 우군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지금입니다.]
기다렸다는 듯, 붉고 푸른 운무가 장내를 채우기 시작했다.
치이잉-!
긴 울음을 토하는 진무영의 두 번째 검이 뽑혔다.
독고문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리기 시작한 것도 동시였다.
“저놈이!”
놀란 멸부가 등을 돌리는 순간이었다.
그의 어깨에 오칠의 화살이 날카롭게 꽂혔다.
식은땀 가득 젖은, 지친 표정의 오칠이 미소를 보였다.
“어딜 가려고.”
순간 용중호의 몸에서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터졌다.
마의 관이라 명명된 동공이 흔들리고 천장이 무너지기 시작했다.
콧방귀를 뀐 독고문의 신영이 마치 물뱀처럼 바위 사이를 흘러 바깥으로 향했다.
출구가 무너졌지만 결국 독고문은 마의 관을 빠져나갔다.
“빌어먹을 놈들이! 나를 가지고 논 것이냐!”
흥분한 용중호가 침을 튀기며 진무영을 향해 소리쳤다.
“멍청한 열등감 덩어리를 속이는 일이야 어렵겠습니까. 덕분에 의심이 확신이 되었군요. 진시황의 보물, 모두 저 안에 숨겨 놓았습니까?”
진무영의 눈에도 탐욕이 깃들었다.
그는 명력을 가진 보물의 힘을 안다. 그 힘이 없었다면, 지금의 진무영은 존재하지 못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의 강력한 힘.
아마 용중호도 잘 알고 있을 터였다.
“흥, 글쎄.”
용중호는 분노한 와중에도 콧방귀를 뀌었다.
흥분한 마음에, 진무영에게 빈틈을 보였지만 더 이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확실히 성장하긴 했군요.’
그를 바라보는 진무영의 마음속 깊은 곳에는 경계심이 생겼다.
마음속에 품은 열등감이 오히려 촉진제가 된 기묘한 존재.
천마 용중호.
그는 예전과 다르게 강하다.
또한 열등감 속에 자신의 목적을 부합시킬 줄도 안다.
까다로운 적이 되어 나타났다.
‘정말…….’
내심 한숨을 쉰 진무영은 검을 쥔 손에 힘을 가득 주었다.
아무래도 오랜만에 최선을 다해야 할 듯했다.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기 시작했다.
앞으로 달려 나가던 황준우와 신아의 고개가 동시에 움직였다.
“저 둘이 싸운다고?”
신아의 눈이 반짝 빛난다.
“아무래도 이거 익숙한 기운들인데…….”
황준우는 입맛을 다셨다. 대충 얼굴들이 떠오른다. 그 때문에 더 놀라웠다.
‘어린 천마 놈도 제법 성장했네.’
게다가 자연지기를 벗어난 특이한 힘.
황준우는 이 느낌 역시 명확하게 알고 있었다.
‘명력을 가진 무구.’
최소 조화경 이상의 고수가 명력을 가진 무구를 가지고 충돌했다. 지켜본다면 제법 많은 호기심을 풀 수 있을 듯했다.
“기회다. 지금 만큼 좋은 때가 없어.”
마치 황준우의 생각을 눈치챈 듯 신아가 말한다.
물론 의미는 완전히 달랐지만 말이다.
‘뭐, 괜히 휘말릴 필요도 없으니까.’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저쯤 되는 기운의 충돌 사이에 파고들려면 기척 하나 남기지 않을 수는 없다. 예전이었다면 조금도 개의치 않았겠지만 지금은 조금 달랐다.
‘약자의 방식으로 싸운다.’
전왕이 말해 주었던 방법들.
강자가 아닌 약자의 싸움.
어둠 속에서 몸을 웅크리고 때를 노리는 일이다. 누군가는 비겁하다며 손가락질하겠지. 그건 상관없었다. 그로 인해 쓸데없는 소모를 하지 않는다면 아무리 욕을 먹어도 환영이다. 지금의 황준우는 사람의 소중함을 알았다.
‘나 혼자가 전부는 아니니까.’
황준우는 말없이 신아의 뒤를 따랐다.
신경 쓰이는 기운이라면 어차피 전면에도 있었다.
가까워질수록, 더욱 불쾌하게 느껴지는 탁한 기운.
‘혹시 멸망의 새가 관련되어 있을지도 몰라.’
인근에는 자연지기를 물들일 정도의 혼탁한 기운이 넘실거렸다. 이 안에서는 오히려 자연지기를 찾는 것이 더 힘들 정도다. 그 정도로 많은 탁기가, 천하에 산재한다면 어떻게 될까? 아마 살아남을 수 있는 생명체가 없을 것이다. 모든 생명체는 자연을 기반으로 탄생하고 자란다. 그 모든 것을 잃는다면 가히 멸망이라 하여도 과언이 아닐 일. 황준우는 자연스레 제갈량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짐작이라도 간다면 이쪽 역시 무시하기가 힘들다.
“다 왔다.”
신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내부에서부터 검은 구(球)가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
눈을 부릅뜬 신아가 부적을 꺼내 들었지만 황준우가 한 발자국 더 빨랐다.
슈욱- 쾅-!
검을 휘둘러 날아오던 기운을 가른 황준우의 눈이 어둠 너머 상대를 향했다.
당황한 표정이 뻔히 보일 정도다.
“너, 누구냐?”
황준우가 그를 향해 물었다.
이 모든 탁기의 근원이라 부를 수 있을 정도는 아니다.
하나 못지않은 탁기가 몸속과 주변에 넘실거린다.
일반적인 사람은 그의 가까이 다가가는 것만으로 지독한 병을 앓게 될지도 모를 수준이었다.
“…….”
상대, 대술사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은 채 뒷걸음질을 치기 시작했다.
생각지 못한 존재의 등장에 상황이 불리하다 판단한 것이다.
“대지를 일군 신농(神農)의 씨앗이여, 내 적의 길을 막아다오. 신벽(神壁)의 술(術)!”
쿠구궁-!
신아의 높은 목소리와 함께 어둠이 요동쳤다.
일부 틈새로 자연지기가 움직이며 물러나던 대술사의 뒤와 양옆을 막아 버린다.
인상을 찌푸린 대술사가 다시 지팡이를 들어 올릴 때였다.
“느려.”
황준우가 그의 앞으로 나타나 수왕검을 휘둘렀다.
지팡이의 머리가 잘려 나가고, 비틀거린 대술사의 안색이 하얗게 떠올랐다.
수왕검을 허공으로 던진 황준우가 손을 내뻗어 그의 마혈을 누른 것도 순식간이었다.
한데 느낌이 이상했다.
황준우가 묘한 신음을 흘리는 순간 대술사의 모습이 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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