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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53화 (153/373)

학사재생 153화

제 153화

“걱정은 알겠다. 다만, 네 생각만한 일은 아닐 거다. 애초부터 난 늠군의 관을 양도한다고 한 적이 없지 않느냐. 빌려 줄 뿐인 게다.”

“빌려 준다고? 그런 행위로 보패의 대가를 떨어트릴 수도 있는 건가.”

빛나는 황준우의 눈을 보며 신아는 침을 삼켰다.

‘어린놈이, 진짜 천재라는 말이 아깝지 않구나.’

하나를 알려 주면 둘 이상을 안다.

처음 대화를 나눌 때부터 그러했지만, 지금도 다르지 않았다. 황준우는 늠군의 관의 대가가 바로 신아가 일전에 비유를 든 적 있던 팔괘술법서의 불운과 연관된다는 사실을 눈치챈 것이다.

“맞다. 늠군의 관은 네가 가진 팔괘술법서 사본에 못지않은 아니, 사실상 더 귀한 곤륜의 보패다. 완전히 양도하게 된다면 우주의 섭리에 따라서라도 복잡한 인과가 생겨나게 되겠지. 아마도, 네가 그 대가를 모두 치르려 한다면 정말 천하를 구원할 정도의 일을 해야 될지도 모른다.”

역시, 불안한 예감은 빗나가지 않는다.

달리 말해 생각한 바가 맞아떨어지기도 했다.

“그래, 네 생각이 맞다. 대여라는 행위를 통해 인과의 대가를 대폭으로 줄일 수도 있다는 뜻이지.”

신아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녀는 실상 지금 황준우와의 대화가 제법 즐거웠다.

오랜만에 이토록 말이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

‘조금 건방지기는 하지만…….’

바깥 세상에 잘 나오지 않는 신아의 입장에서는 유쾌한 경험이었다.

“이 팔괘술법서는 사본이라 그런지 읽은 부분은 타 버리니, 애초에 대여가 불가능했던 거구나.”

“하나를 알려 주면 열을 아는지고.”

“좋아. 거래하자.”

긴 이야기가 오간 끝에, 황준우는 간단하게 결론을 내렸다.

신아는 굳이 하지 않았어도 될 설명을 길게 풀어내서 황준우에게 상황을 알려 주었다.

애초부터 누군가를 기만할 성격은 못 되는 것 같지만, 스스로의 솔직함을 보여 주기 위한 행위이기도 했을 터였다.

실상 황준우도 그런 신아가 싫지 않았다.

‘게다가 부려먹겠다는 것도 아니고, 엄연한 거래니까.’

황준우는 상인은 아니지만 상가의 자식이다. 그래서일까? 거래라는 단어를 그리 싫어하지 않았다. 서로의 합의하에 합당한 대가를 주고받는 것. 냉철하다 할 수 있지만 인간관계에 있어 이보다 합리적인 행위는 몇 없다.

“고맙다는 말은 하지 않으마. 어차피 거래니까.”

“나도 마찬가지야.”

두 사람이 어딘지 닮은 듯한 웃음을 짓는다.

“늠군의 관은 내일 정오쯤에 넘겨주도록 하마. 그 전까지 대여를 위해 해야 될 일도 있으니까.”

“좋아.”

대화가 끝났다.

“휴우, 그럼 난 이만 가 보마. 사실 이것도 제법 힘든 일이라 말이다.”

한참을 공중에 떠 있던 신아가, 농담이 아니라는 듯 이마를 짚고는 천천히 지상으로 내려선다.

이후 황준우를 올려다보고는, 가볍게 손을 내저은 신아가 멀어진다.

황준우는 그런 신아의 뒷모습을 잠시 지켜보다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어차피 안 된다고는 하지만, 나도 오기는 있으니까 말이야.”

딱 오늘 밤까지만 찾아보는 거다.

그렇게 결심한 황준우의 몸이 더욱 날래게 움직였다.

사내의 오기란 것은 때론 쓸데없을 정도의 힘을 내기도 한다.

분명 밤까지만 찾겠다고 결심했던 것이, 약속한 시간인 정오가 가까워진 뒤에야 황준우는 양손을 들고 포기를 선언했다.

“진짜 못 찾겠다.”

깊은 한숨을 내쉬는 황준우가 뒷머리를 긁적였다.

생각 같아서는 더 찾아보고도 싶었지만 이미 약속한 시간이 다 되었다. 괜한 오기도 여기까지인 셈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어?”

더 찾아볼 수 있을까 싶어서 고민하던 차, 황준우의 눈에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높은 나무 위에 올라 있던 황준우의 신형이 빠르게 움직여 다급하게 뛰고 있는 두 사람의 앞으로 불쑥 솟아난다.

“경호, 홍산!”

“도련님!?”

“주공!”

갑작스러운 황준우의 등장에 두 사람이 재빨리 걸음을 멈추었다.

표정에는 놀란 감정이 가득하다.

“아, 너무 갑작스럽게 나타났나?”

“아닙니다. 그보다 장주님은?”

경호는 고개를 저으며 물었다.

놀란 것도 사실이지만, 그 역시 더 급한 일을 우선시 둔 탓이다.

“무사하셔. 지금 같이 있고.”

황준우의 말에 경호와 홍산, 두 사람의 표정에 동시에 안도감이 스쳐 지나갔다.

“다행입니다.”

“그래도 늦지 않게 도착했네. 혹시 중간에 무슨 일 생겼나 걱정했다고.”

지금은 웃으면서 말하고 있지만 생각보다 도착이 늦는 두 사람을 생각하며 내심 걱정했던 황준우였다.

어찌 됐든 경호와 홍산이라면 먼 거리도 마다 않고 쫓아올 것이 분명해 보였으니 말이다.

“별일 없었습니다. 이상하게 도련님이 없으니 여정도 순탄하던데요. 이런 경험은 또 처음이라 신기할 정도였습니다.”

경호 역시 제법 안도를 한 것인지 농담을 흘린다.

“그거 왠지 나 기분 나쁘라고 한 말 같은데?”

경호가 어깨를 으쓱했다.

“설마요.”

황준우는 눈을 가늘게 떴다.

“하긴, 천하의 거기검에게 누가 함부로 덤비겠어.”

“윽…….”

저도 모르게 아픈 신음을 내며 뒷걸음질 친 경호가 한숨을 내쉬었다.

“여기서 그 말이 왜 나옵니까!”

“그러니까 함부로 덤비지 말란 거지. 흐흐.”

음흉하게 웃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어찌 됐든 무사히 도착해서 다행이다. 나 약속이 있기도 해서, 바로 아버지 있는 쪽으로 갈 것 같은데 따라와.”

언제나처럼 막무가내로 다음 행동을 결정한 황준우가 등을 돌리고, 경호와 홍산은 뒤를 따른다.

‘별것 아닌데 괜히 등이 든든해지는 기분이네.’

뒤에서 쫓아오는 기척을 느끼며 미소를 짓는 황준우였다.

황준우 일행이 청하루로 들어서자, 이미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지 책상에 둘러앉은 신아와 황석후의 시선이 동시에 움직였다.

“어린놈이 약속 시간에 늦으면 어떻게 하자는 거냐.”

첫 투덜거림은 신아였다.

“오, 두 분도 함께 오셨군요.”

황석후는 오랜만에 보는 경호와 홍산을 반겼다.

“장주님을 뵙습니다!”

하나가 된 듯 동시에 공수를 취한 두 사람이 같은 말을 흘린다.

“괜찮습니다. 예를 갖추는 자리가 아니지 않습니까.”

황석후의 말에 두 사람이 조심스럽게 공수를 푼다.

표정에는 잔잔한 미소가 어렸다.

말을 듣기는 했지만, 황석후의 얼굴을 보니 더욱더 마음이 안도되는 듯했다.

“뭔가 나를 대할 때랑 다른 기분이지만, 착각이겠지.”

“그거야 도련님이…….”

“됐어, 경호. 난 변명하는 남자 싫어해.”

“…….”

짧은 침묵이 흐르고 잠시 경직된 표정을 한 경호가 황석후를 향해 재빨리 손을 내저었다.

“오, 오해하시면 안 됩니다. 저건 그냥 도련님의…….”

“무슨 오해할 거리가 있었나요?”

“저 녀석도 내 제자랑 닮은 것 같군.”

황석후가 고개를 갸웃거리고, 신아의 신랄한 비판이 이어졌다.

“거기서 제 이야기는 왜 나옵니까.”

구석에 조용히 앉아 숨을 죽이고 있던 신일이 투덜거렸지만 들어주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아주 짧은 시간 경호와 신일 사이의 동지애가 느껴지는 시선은 오갔지만 말이다.

“일단 다들 앉으시지요.”

황석후의 말에 옆으로 황준우가 잽싸게 가서 앉는다.

경호와 홍산은 고개를 저은 후 황준우의 뒤편에 섰다.

황석후의 뒤편에 선 여선위를 흘낏 바라보는 시선에는 옅은 경쟁심이 엇비친다.

“호위무사가 자리에 앉아 있을 수는 없습니다.”

“주공의 뒤를 지키겠습니다.”

나쁘지 않다.

여선위는 강한 무인이다.

단순한 무력을 벗어나 인간 자체가 단단하다는 뜻이다. 그런 여선위를 향해 경쟁심을 불태우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두 사람이 그만큼이나 강해졌으며, 높은 목표를 바라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웬일로 듬직하네. 그래도 무리할 필요는 없어. 여기까지 달려왔잖아.”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말했지만, 두 사람의 태도에는 변함이 없었다.

잠시 그를 어딘지 모르게 부러운 듯 바라보던 신아가 말했다.

“멍청한 제자 놈보다는 나은 것 같네.”

“스승님…….”

“큼, 어쨌든. 석후와는 이미 이야기를 끝내 놓았다.”

“거래에 대해 전부 다?”

“알 자격이 있다고 생각했으니까.”

“물론이지.”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상대는 그에게 아버지다.

굳이 몰라야 될 이유가 없었다.

그래도 신비한 기분이다.

‘아버지 이름을 저렇게 막 부르는 녀석이라니…….’

불만을 표하고 싶지만, 불합리하다 생각해서 그만두었다. 아마 황준우가 신선들의 이름을 멋대로 부를 때 신아가 느끼는 감정도 비슷하지 않겠는가?

애초부터 둘의 관계가 기묘한 것이었다.

“시간도 없고, 이야기를 길게 끌 필요도 없겠지.”

신아가 품에서부터 늠군의 관을 꺼내 식탁 위로 올려놓았다.

“다음에 만날 때까지는 네 것이다.”

“다음? 어디 가려고?”

왠지 같이 다닐 것만 같던 신아의 말에 황준우가 놀라 물었다.

“우리도 본산으로 돌아가 봐야 할 것 아니냐. 이번 일 자체도 아직 마무리되지 않았으니 생각보다 보고나 준비를 해야 될 것이 많다.”

“도술 중에 막 멀리서 연락하고 그런 건 없나 봐.”

“없지는 않다만, 절차란 것이 있으니 말이다.”

“복잡하게 사네. 도사들이라고 해서 다를 건 없나. 하긴, 규율이니 뭐니에 얽매이는 것 보면 신선들도 다르지 않은 것 같긴 하네.”

“흥. 건방진 놈.”

콧방귀를 뀐 신아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바로 가려고?”

“시간이 없다고 했지 않느냐.”

“설명은…….”

“가지고 있으면 알아서 알게 된다.”

“아, 그래?”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굳이 알아서 알게 될 것까지 신아가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

황준우를 보고는 고개를 주억인 신아의 시선이 이번에는 황석후를 향했다.

“이미 경고해 두었다만, 언령은 더 이상은 사용하면 안 되느니라.”

“…….”

황석후는 말없이 미소를 보였다.

“약속하여라.”

“……노력하겠습니다.”

“말의 힘을 알고 있는 네 녀석이니까, 믿겠다.”

신아는 더 이상 황석후를 재촉하지 않았다.

그런다고 될 인물이 아니란 사실도 잘 알았고, 나름대로 믿는 바도 있었다.

“네가 잘해야 할 게다. 네 아버지 일찍 여의고 싶지 않으면.”

황준우 역시 걱정되는 부분이었던 만큼, 이번에는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제야 만족한 듯 미소를 그린 신아가 의자 위에서 뛰어내리듯 지면을 디뎠다.

“끙챠.”

“힘들어 보인다.”

“전혀. 그럼 다음에 보자.”

냉정하게 말한 신아가 앞으로 걸어 나간다.

등 뒤에 놓았던 짐을 부랴부랴 멘 신일이 빠르게 그 뒤를 쫓았다.

“그, 그러면 다음에 뵙겠습니다. 소주대인, 아 그리고…….”

가는 와중에도 황석후를 향해 꾸벅 인사한 후, 황준우를 바라본 신일이 입을 우물쭈물거린다.

“편한 대로 불러. 편한 대로.”

“아, 그러면 황 공자. 다음에…….”

“빨리 오거라! 늦겠다!”

신아의 호통에 화들짝 놀란 표정이 된 신일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시 한 번 고개를 숙인 후 뛰어간다.

그렇게 신아와 신일이 떠났다.

“스승이 괴팍한 성격이라 힘들겠네요.”

황준우의 말에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괴팍해 보이지만 정도 많으신 분이다. 애초부터 저 친구도 산적들에게 묶여 노예로 팔려갈 뻔한 것을 구해 주어 인연을 맺었다더구나.”

“노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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