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55화
제 155화
불문(佛門)에 전해진다는 무공 중 하나인 사자후(獅子吼)를 떠올리게 만드는 위력이다. 황준우는 그 기세를 흘려보내기 위해 두 걸음 물러섰다.
동시에 공간을 확보한 여선위의 강기를 두른 방천화극이 황준우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살짝 물러났다고는 하지만 여전히 검이 더 유리한 거리다. 방어에 성공한 황준우는 다음 역습을 하려 했다.
한데 맞붙은 수왕검과 방천화극이 마치 접착제라도 맞붙은 듯 함께 움직인다. 이래서야 공격 혹은 방어 모두가 제한적인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다.
‘내 움직임을 읽고 있는 건가?’
황준우가 놀라 여선위를 바라보았다.
이런 상태로 동작을 따른다면, 곧 상대의 힘을 이용해 역습을 가할 수도 있다.
무리(武理)에서도 상승에 속하는 이화접목(移花接木)의 수인 것이다.
‘아니야.’
움직임을 더욱 가속화하였지만 여전히 끈질기게 따라 붙는 방천화극을 보며 황준우는 내심 고개를 저었다.
상당히 유능하고, 강력한 무리임에도 이화접목의 수를 실전에서 보기 드문 이유는 제법 어려운 두 가지 조건 중 최소 하나를 충족해야 되는 데에 있었다.
그중 첫째는 바로 압도적인 육감(六感)이다. 초인 이상쯤 되는 고수의 싸움은 안력을 벗어나 육감에 의지하는 부분이 많다. 인체로 따라갈 수 없는, 형용할 도리 없는 움직임을 좇기 위해서는 필수적인 부분이다.
때문에 아무리 높은 성취를 이룬 무인도 스스로의 감각을 잃어버리는 순간 이빨 빠진 범이 되어 버린다.
두 번째 조건은 상대의 무공을 뛰어넘는 초상승의 절학이다.
아쉽게도 여선위는 두 가지 경우에 모두 해당되지 않았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육감은 뛰어났으나, 황준우를 뛰어넘어 압도할 수준이 되지 못한다.
황준우는 답을 방천화극에서 빛을 내뿜고 있는 우윳빛 강기에서 찾았다.
‘재미있는 특성이네.’
초절정고수 이상의 무인이 다루는 강기에는 특성이 있다. 초인 이상의 고수는 그 특성을 감출 수도 있지만, 여선위는 첫 공격에서부터 적나라하게 자신의 전력을 보였다.
‘접착(接着)이라니……. 실상 극을 다루는 고수에게는 효율적이지 않아.’
따라붙는 방천화극을 떼어 내기 위해, 미련 없이 수왕검을 떼어 놓은 황준우가 더욱 품으로 파고들며 주먹을 말아 쥔다. 묘한 감각을 주기는 했지만 장병기인 극의 약점은 여전히 극복되지 않았다.
주먹과 주먹.
생각지 못한 근거리 격돌이 있기 전까지는 황준우도 그렇게 생각했다.
“권각술?”
놀란 황준우가 물었고, 여선위가 아쉬운 듯 혀를 차며 발을 내뻗는다.
전혀 예상치 못했던 일에 놀란 황준우가 물러나려 했지만 동작이 늦었다.
정확하게는 맞닿은 주먹에서 피어난 여선위의 접착 강기가 황준우를 강제로 당긴 탓이다.
“대단해!”
경탄을 토한 황준우가 반대편 팔을 들어 여선위의 다리를 막았다.
동시에 또다시 접착의 강기가 황준우의 팔을 옭아맸다.
이로써 황준우는 양팔이 완전히 봉인되었다.
여선위 역시 한쪽 팔과 한쪽 다리가 봉인되었지만, 여유로운 표정이다. 실제로 움직임에 막힘이 없었다.
기다렸다는 듯 공중으로 도약하는가 싶더니, 빠르게 선회하여 황준우의 관자를 나머지 다리로 쏘아붙이듯 때린다.
재생하여 성장한 이후, 처음으로 일격을 허용한 황준우의 몸이 휘청 인다.
극이라는 장병기로 허(虛)를 만들고 진짜 이빨을 갈고닦아 왔던 한 수다.
자신보다 강자를 이겨 낼 수 있는 이 단 한순간을 위해 여선위가 어떤 마음으로 준비를 했을지는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건 인정할 수밖에 없네.’
간단하고, 위력이 강렬하지는 않지만 황준우가 상대했던 그 어떤 무공보다 훨씬 더 능동적인 데다 효율적이다.
기다렸다는 듯 접착의 특성을 떼어 놓고, 다음 공격으로 복부를 노리는 수법까지 완벽하다.
이 순간, 조금의 여유가 더 있었다면 황준우는 웃음을 터트렸을 터였다.
하나 지금은 작은 미소를 보일 시간밖에 없었다.
벌써 배의 바로 앞까지 다가온 여선위의 주먹에서 기파가 물결처럼 번져 나오고 있다.
복부에 닿는 순간 내가중수법이 펼쳐져 단숨에 속내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 거기까지 가면, 아무리 황준우라고 해도 견딜 수 없다.
그러니 막는다.
생각한 순간, 황준우의 손바닥이 여선위의 무거운 주먹을 가로막았다. 퍼져 나오던 기파가 사방으로 흩어지는 것도 순식간이다.
“……!!”
훨씬 더 빨랐고, 먼저 움직였다.
때문에 자신이 막힐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던 여선위가 눈을 부릅떴다.
“뒤에서 출발해도 먼저 도착할 수 있어.”
여선위는 황준우의 말을 이해했다.
이화접목과 마찬가지로, 무도의 고위 묘리 중 하나인 후발선제(後發先制)다.
고개를 들며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반대쪽 손이 여선위의 어깨에 닿았다.
손에서부터 터지듯이 방출된 기파가 여선위의 몸을 한껏 밀어냈다.
거리가 순식간에 다시 멀어졌다.
여선위의 손에는 휘두르던 방천화극이 없었다.
반면 황준우는 가벼운 손동작으로 바닥에 놓여 있던 검을 허공으로 띄워 낚아챈다.
쫓아갈 새도 없는 빠른 움직임에 이어, 황준우의 신형이 사라졌다.
자신이 움직임을 놓쳤다는 걸 깨달은 순간 여선위의 몸 위로 우윳빛 강기가 갑주처럼 둘러지는 순간이었다.
“그만.”
황준우의 짧은 목소리와 함께 여선위의 강기가 흩어지고, 목 뒤로는 서늘한 감촉이 닿았다.
전력을 다한 이후의 패배였다.
재빨리 등을 돌린 여선위가 공수를 취했다.
“본 표두가 졌소이다, 소장주.”
깔끔히 인정한 그의 표정에는 어떤 분함도, 서러움도 느껴지지 않았다. 미련도 남지 않았다. 그동안 그토록 궁금했던 의문이 모두 해결됐다. 전력을 다한 싸움에는 후회가 남지 않는다.
황준우는 그런 여선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또한 여선위가 만금장의 수호장(守護將)이나 다름없는 대표두의 위치에 있다는 사실에 한없이 안도하고, 뿌듯했다.
“졌지. 그건 사실이지만, 당신은 훌륭해. 그거 알아? 천하의 천마도 내 머리카락 하나 스쳐 보지 못했어.”
황준우가 아직도 저릿한 자신의 관자놀이를 검지로 두들긴다.
“혹시라도 행운이라거나, 그런 말 하지 마. 나 정말 놀랐다고. 방심도 안 하고, 제대로 준비했는데 한 방 먹은 건 여러 의미로 처음이란 말이야.”
원공에게 당했을 때에도, 조금도 방심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린 시절 구황에게 한 칼 먹은 것은 육체가 완숙하지 못해서였다. 이번에 여선위를 상대함에 있어, 황준우는 그런 불리함 중 무엇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진심으로 상대를 직시했고, 온 힘을 다해 무너트릴 생각을 하고 있었다.
한데도 한 방 먹었다.
여선위가 준비한 수는 그만큼이나 대단했고, 놀라웠다.
명력이 깃든 무구 혹은 보패조차 없이 전력 상태의 황준우를 이토록 몰아세운 이는 단연코 여선위가 최초였다.
“그런 말 하지 않소. 설령 행운이었다 한들 그 역시 엄연한 무인의 실력이라 생각하오.”
여선위는 어깨를 피며 당당히 말했다.
“하하하!”
황준우는 대소를 터트렸다.
그가 가진 자신감, 자긍심, 무엇 하나 모자라지 않다.
“당신이 만금장 소속이라 정말 다행이야.”
황준우가 진심을 다해 말하자 여선위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나도 소장주가 우리 소장주라 다행이라 생각하오. 만약에라도 적으로 만났다면…… 끔찍했겠지.”
“아마 우리는 적이 되기도 쉽지 않았을 거야.”
“동감이오. 아, 소장주. 혹시 술 좋아하시오?”
전생에는 싫어하지 않았다.
현생도 여전히 싫어하는 편은 아니었다.
“아쉽게도, 약속했거든. 더 이상 술은 마시지 않기로.”
“음, 아쉽구려. 사내의 낭만 중 하나이거늘.”
“대신 차가 있으니까.”
그간 말이 없던 여선위의 입이 열렸다.
묵혀 둔 감정이 그만큼이나 많았다는 뜻이다.
한 번 사내답게 회포를 풀고 싶은 심정은 이해했다.
“같이 마셔 주지는 못해도, 옆에서 취한 듯 놀아 줄 수는 있어.”
“아쉽지만 그것으로 만족하겠소. 당장 자리를 옮기는 건…….”
“좋지!”
황준우는 시원하게 대답했고, 못지않게 시원스러운 웃음을 보인 여선위가 바닥에 떨어진 방천화극을 주워 들고는 앞장서 나갔다.
성큼성큼 걸어 나가는 뒷모습으로 말은 남기지 않았지만, 따라오라는 의미만큼은 분명히 전했다.
“그런 의미로, 난 오늘 대표두랑 바쁠 예정이야. 다들 열심히 해.”
그 뒷모습을 쫓기 전, 여러 가지 의미로 충격과 경악에 빠진 세 사람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은 황준우도 연무장을 떠났다.
“대표두님이면, 우리 만금장 내 최고수 아니신가? 강호 전체에 내놓아도 부족하시지 않을 텐데 도련님이 이토록 압도적으로 이길 줄이야…….”
경호는 황준우가 여선위를 압도한 데에서 놀랐다.
“대표두 아저씨 대단해. 난 오빠가 맞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어.”
“저 역시 주공이 당하는 모습은 상상한 적이 없었습니다. 과연 한때의 무외삼제, 공경심이 드는군요.”
반면 황서연과 홍산, 두 사람은 여선위를 향해 경탄을 토했다.
“말씀대로 한때 무외삼제…… 지금도 실력이 어마하시다고 알고 있는데 보통 반대가 되어야 되는 것 아닐까요?”
경호가 그런 두 사람을 향해 의문을 표한다.
이후 똑같은 표정을 지은 두 사람의 시선을 빠르게 회피했다.
“큰일 났네. 우리 순진한 경호 아저씨. 아직까지도 오빠를 그렇게 모르나?”
“은공의 순수함은 아름답다 못해 숭고하기까지 합니다. 다른 의미로 존경하고 싶군요.”
“…….”
어딘지 모르게 세상에 홀로만 적응하지 못하는 느낌을 받는 경호였다.
그날, 여선위는 약 십 년이 넘는 세월 만에 코가 비뚤어질 정도로 술을 마시고 취했다.
황준우는 약속대로 취한 듯 그와 어울렸다. 늦은 밤 만금장으로 돌아올 때에는 두 사람은 마치 오래된 친구처럼 어깨동무를 한 상태였다.
실제로 황준우는 그날 너무나 즐거웠다.
여선위의 마음에 묵혀져 있던 이야기는 대다수 순수한 무에 관한 것이어서,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가 깊었다.
우직하게만 보이는 그가 상대의 눈을 속이기 위해 방천화극이라는 무기를 들고 다닌다는 점도 황준우에게는 너무나 즐거운 이야깃거리였다.
그런 즐거운 날이 지나고 며칠 후.
황준우는 신아가 절로 알게 되리라는 늠군의 관에 대한 효능 중 하나를 깨달았다.
화려한 것은 없었다.
그저, 하단전의 내력이 상단전으로 이동하는 데 있어 효율이 상승했다.
정도를 따지자면, 이제는 광구의 술을 펼치고 반의 반 각쯤은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전까지의 노력에 비하면 그야말로 장족의 발전을 이룬 것이다.
그 외 다른 것은 여전히 알아낼 수 없었지만 신아의 보증대로 재능의 차이를 메워 주는 효능을 보여 주었으니 황준우는 그것만으로도 상당히 만족했다.
마치 여선위의 무공처럼 화려한 것은 없지만 실속만큼은 대단한 보패가 바로 늠군의 관인 것이다.
모순적인 상황을 뽑자면 그로 인해 생겨난 고민이 하나 있기도 했다.
‘나는 순수한 무를 숭상한다. 한데 술을 익히려 하고 있어.’
타고난 무인.
그와 여선위는 닮았다.
때문에 긴 시간 동안 묵혀 두었던 감정을 털어 내고 짧은 시간 내에 가까워질 수 있던 것이다.
팔괘술의 대단함은 신아의 설명으로 인해 알았다.
늠군의 관이 가진 효능도 확인했으니 막혀 있던 벽도 쭉쭉 뚫고 나갈 터였다.
그런데도 마음에 걸린다.
여태까지 그런 사실 자체에 의문을 안 가진 게 신기할 정도로 이제 와서야 떠오른 생각이다.
황준우는 그 대답을, 찾아온 손님을 통해 들었다.
“그야 술이 또 하나의 무의 길에 있어 이정표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해서 아니었을까요? 왜 만류귀종이라고 하고, 무술(武術)이라는 말도 있지 않습니까?”
“전왕, 넌 진짜 천재야.”
언제나 느끼지만 복잡한 문제를 간단하게 해결해 주는 전왕은 황준우에게 있어 생각 외의 복이었다.
헤실거리며 웃는 그의 어깨를 두들긴 황준우가 말했다.
“먼 길 오느라 고생했는데, 밥이라도 든든히 먹어. 당장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 정도가 최선이네. 아, 그리고 이제부터는 너도 나를 소장주라고 불러.”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왕은 의문을 달지 않았다.
무신이라는 명칭이 어떤 오해를 불러올지 알고 있는 탓이다. 눈치 빠른 사내다운 처세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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