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58화
제 158화
아주 오래전, 전생의 어린 시절에는 그랬던 기억도 있지만 말 그대로 먼 과거의 이야기일 뿐이다. 아무리 뛰어난 두뇌를 지니고 있다 한들 인간의 기억력이란 것에는 한계가 있는 법이었다.
하지만 전왕은 먼 과거에서부터, 지금까지도 그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가문에 쓸데없는 자존심을 세우고 그를 지키고자 외치는 것도 고지식한 가문의 수뇌부, 그러니까 강자들의 외침이란 거지요. 그를 조금 돌려 말하게 하면 됩니다. 남궁세가는 또 본래 하나의 가문이기도 하니…… 음, 피에 대해 연설하면 되겠군요. 어쨌든 전쟁이란 피와 상처가 남으니, 만금장과 손을 잡음으로써 우리는 소중한 혈족을 지키고자 한다. 이 말을 제법 고상하고 품위 있게 하라고 하면 됩니다. 아마 그쪽 양반들이 이런 쪽으로는 또 전문 아니겠습니까?”
“자존심이 아닌 실리를 챙기는 수뇌부의 행동이란 건가. 단지 그것으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납득한다고?”
“예. 어쩌면 수뇌부에 대한 신뢰와 감동마저 생길지도 모릅니다.”
조금은 의심스럽기도 했지만 어차피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사마정에게 그리하라 전할게.”
어차피 이쪽에서도 대대적인 준비를 하려면 시간이 조금 걸린다. 점점 더 사마정이 여유롭게 움직이라는 말대로 되어 가고 있는 셈이다.
“아, 그리고 또…… 이번 전쟁 아마 진짜로 남궁세가 혼자서는 힘들 겁니다.”
“나도 그런 느낌이 들긴 해. 명확한 이유는 모르겠지만. 직감이 꽤나 잘 맞는 편이거든.”
때문에 황준우는 급하게 움직이려 했었다.
“아마 이번 열화궁의 움직임에 활협단의 손길이 닿은 걸 느끼신 탓일 겁니다.”
“활협단? 진무영?”
또다시 듣게 된 이름에 황준우가 의문을 표했다.
천하를 아우르는 활협단의 실체를 생각한다면 열화궁과도 연관이 없을 것이라 보기는 힘들다. 달리 말하자면 꼭 연관이 있다고 볼 수도 없었다.
한데 전왕의 말에는 확신이 보였다.
“예, 활협단입니다. 남궁세가를 공격한 것도 아마 주공을 떠보기 위한 일일 확률이 높습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는 거야?”
“쉬운 추론입니다. 남궁세가가 열화궁에게 선전포고를 받았습니다. 여러모로 명분이 얽혀 있지만, 굳이 남궁세가를 비난할 만한 입장도 아니죠. 한데 같은 소속인 정의회에서는 어떠한 움직임도 보일 예정이 없습니다. 천하 어디에 있어 정의회 같은 단체를 저렇게 묶어 둘 수 있겠습니까? 무림맹은 못 합니다. 두 세력은 아무리 서로를 존중한다 하여도 내실 상으로 많은 부분이 좋지 않게 얽혀 있습니다. 남궁세가를 잃으면 정의회에 분명한 손해가 온다는 말이죠. 정의회 입장에서는 굳이 손해를 볼 필요 없고, 무림맹은 그 손해를 메워 주기 싫을 겁니다.”
잠시 말을 멈추고 물을 마신 전왕이 턱수염을 쓰다듬기 시작했다.
“결국 그런 손익과 상관없는 단체가 움직여야 되는데, 남는 건 두 곳 정도뿐이군요.”
“황궁과 활협단.”
“맞습니다. 그중 황궁이라면 열화궁이 움직일 리가 없지 않습니까?”
황준우는 저도 모르게 박수를 쳤다.
“맞아, 전왕 네 말대로야. 이건 활협단에서 움직인 경우로군.”
“아마 활협단에서는 이번 사건에 대해 정의회가 한동안 눈을 돌릴 수 있는 명분과, 보상을 약속했겠죠. 꽤나 많은 황금, 아니면 보물, 거기에 더해 승리할 경우…….”
“남기의 입지. 땅, 땅이로군.”
황준우의 말에 전왕이 조심스럽게 고개를 주억였다.
“맞습니다.”
만약 진무영이 협상을 했던 그 자리, 혹은 이 자리에 황제가 있었다면 당장에 반역죄를 물어 목을 베었을 수도 있는 일이다. 천하의 모든 땅은 황실, 그러니까 황제의 것이다.
한데 그를 놓고 무림의 세력이 협상을 벌였다. 우스운 일이지만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무림의 대가문과 대문파 등이 자신이 속한 지역에 미치는 영향력은 황궁을 넘어선다.
때문에 그 자리를 빼앗을 수 있다면 상당한 수익을 창출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남궁세가가 장악하고 있는 남기의 영역은 큽니다. 제일공로자인 열화궁의 배를 불리고도 충분히 정의회 사이에서 협상을 할 만큼의 영역이 남을 수 있죠.”
“승냥이 같은 자들이로군. 어차피 모른 체한다고 해서 손해 볼 것은 없다 생각하는 거야.”
정의회와 무림맹.
작금의 무림이 단순히 이 두 개의 세력으로 대표 되었다면 정의회는 아무리 진무영의 제안이 달콤해도 결단코 이번 일에 동의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그 뒤에서 모든 것을 아우르는 활협단의 존재다.
이제야 황준우는 전왕의 쉬운 추론이라는 말을 완전히 이해했다.
“그렇구나. 이번 일로 인해 활협단이 얻을 이득도 분명해. 천하를 아우르고 있음에도 쉽게 제어할 수 없던 남기를 손에 넣는다. 아마 남궁세가 다음은 자연스럽게 우리 만금장을 노렸겠지.”
적이 남궁세가 하나인 것과, 사방에 가득 풀려 있는 상황은 다르다.
물론 황석후가 이끄는 만금장이라면 쉽게 무너지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지만 어찌 됐든 싸움이 발생한다는 것 자체가 문제다.
이기적인 욕심일지 모르지만 황준우는 되도록 오랜 시간, 가능하면 평생토록 만금장이 평화롭기를 바랐다.
“전왕 역시 넌 대단해. 소식 하나로 이 큰 그림을 단숨에 꿰뚫었구나.”
“헤헤, 부끄러운 잔재주일 뿐입니다.”
쑥스러운 듯 얼굴을 붉힌 전왕이 뒷머리를 긁적인다.
그를 흐뭇하게 바라보던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찌 됐든, 네 말대로라면 지금부터 제법 거창하게 준비해야겠네. 사마정에게는 주변의 다른 움직임이 없는지 살펴보라고 할게. 이번 계기를 발판 삼아 남기 전체를 하나의 마음으로 통합할 수 있다면 천하 전체와 정면으로 맞서게 된다고 해도 두려울 게 없겠지.”
이어서 황준우는 다급한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갔다.
많은 준비를 하기 위해서는 시간이 없다.
만약 전왕의 말대로 활협단에서 뭔가 손을 쓴다면 남궁세가는 생각보다 많은 피를 흘려야 될지도 모른다. 욕심 많은 황준우는 자신의 품에 들어온 생명을 그렇게 쉽게 잃고 싶지 않았다.
일종의 책임감이다.
황준우가 떠나는 모습을 평소와 같이 헤실거리는 웃음으로 배웅한 전왕은 다시 자리에 주저앉았다.
이어서 나온 것은 깊은 한숨이다.
“에휴…… 대체 뭘까.”
황준우 앞에서는 표현하지 않았던 감정이 대번에 얼굴에 드러났다.
굉장히 착잡하고, 어딘지 모르게 찝찝한데 영 답을 모르겠다. 사실 방향조차 짐작이 되지 않았다.
정말 그냥 느낌뿐인지라 황준우한테 보고조차 못했다.
“분명 남궁세가를 노리고 움직인 건데, 찝찝하단 말이지. 뭔가, 뭔가 있는데 그걸 모르겠네.”
입맛을 다신 전왕은 책상에 앉아 한지를 펼친 후 묵과 붓을 잡았다.
“일단은 계속 생각해 보자고. 혹시 나중에라도 찾게 될지 모르니. 보자, 그러니까…….”
활협단, 정의회, 남기, 진무영, 주공, 남궁세가, 만금장, 열화궁…….
이번 사건에 연루된 단어를 마구잡이로 적어 넣으며 상관관계를 그리는 전왕의 머리가 빠르게 돌아갔다.
열화궁과 남궁세가.
남궁세가와 열화궁.
단순하게 이 두 세력만을 비교하면 세인들은 어느 쪽에 손을 들어 줄까? 눈앞에 앉은 사내, 진무영이 던진 질문에 오태악은 코웃음을 치며 대답했다.
“당연히 남궁세가라고 하겠지.”
“잘 알고 계시는군요.”
열화궁의 최정예인 폭렬단과 우내십존 중 하나인 오태악이 나섰다.
비록 그 숫자는 적지만 위력은 만만치 않았다.
폭렬단은 양강지기를 익힌 천하에서 가장 난폭하고 거친 무력집단이다. 설령 제 목숨을 잃더라도 홀로 적 열, 많게는 스무 명도 함께 이끌고 갈 수 있는 방법이 존재하는 것이다.
또한 현재 남궁세가에 공식적으로 밝혀진 우내십존급 무인이 없다.
심지어 그럴싸한 초인조차 없다고 알려져 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검제 남궁천이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나마 머지않아 경지에 오를 것이라 믿었던 남궁전혁은 얼마 전 불미스러운 소문이 잠시 떠도는가 싶더니 병사(病死)했다고 알려졌다.
세간의 지론은 오래토록 성세를 이어 왔던 남궁세가가 또 한 번 위기를 맞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남궁세가가 약하냐고 묻는다면 대다수가 아닌 전부가 고개를 내젓는다.
남궁세가는 강하다.
초인의 존재유무, 미래였던 남궁전혁의 몰락 정도는 ‘고작’으로 취급할 수 있는 전통과 역사가 있다.
단일 무력대로서 천하에서 손꼽히는 무애단과, 그에는 미치지 못하나 어지간한 중소문파의 무력을 보유한 창천단이 있다. 또한 남기 곳곳에 퍼져 있는 분가에는 명망 높은 고수들이 즐비하며, 기르는 제자도 많다.
아마 그들이 모두 모인다면 무림인들로만 오천에 가까운 무시무시한, 군대 수준의 병력이 탄생할 것이다.
이게 외당(外黨)이다.
내당(內堂)으로 들어가면 오래토록 남궁세가를 지탱한 원로원을 포함하여, 가주의 비밀호위집단이자 가문의 큰 위기가 아니면 나서지 않는다는 가문 최고수들의 집합소 제왕검대(帝王劍隊), 거기에 더해 남궁세가 최고의 재능을 모아 놓았다는 청룡대(靑龍隊)와 숫자만으로는 외당에 속한 창천단에 못지않은 호법단(護法團)까지 있다.
이러한 내당의 전 병력을 합치면 또 오백에서 일천 사이다.
외당에 비하자면 초라한 수준이지만 질적으로만 따지자면 결코 우습지 않다.
내당의 고수들 중 많은 이들이 일당십 이상의 고수다. 특히 원로원에 속한 이들 같은 경우는 이미 몇 번이고 전장을 겪은 적 있는 용사들이다.
결국 남궁세가의 모든 전력이 한자리에 모인다면 최소 오천 오백에서 많게는 육천, 어쩌면 칠천에 도달한다.
그리고 그중 삼백 명 정도는 일당십, 이십을 자랑하는 폭렬단과 동급 혹은 그를 압도하는 고수다.
이 모든 것이 남궁세가의 전통과 역사라 할 수 있었다.
오래토록 한 지역에 자리 잡은 채 성장해 온 가문의 힘인 것이다.
결국 열화궁 입장에서는 폭렬단 전원이 순수하게 이십 명씩을 죽여도 오천에 못 미치는 상황이었다.
여기서 변수가 될 수 있는 유일한 사항은 바로 폭존 오태악이다.
우내십존.
천하에서 가장 강력한 양강지기를 사용하는 무인.
그는 그야말로 일당백의 괴물이다. 무공이 가진 특성을 생각한다면 홀로 삼백 혹은 오백도 죽일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그래도 오천에 미치지 못한다.
아주 어쩌면, 수많은 행운이 맞물려 필사의 전력을 토해 낸다면 홀로 일천을 학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한 번의 전투에서 그만한 숫자와 싸워서 이긴 전적이 있는 무인은 근래 무림의 역사상 단 한 명, 칠야무신뿐이다. 쉽지 않은 일을 해내야 된다는 뜻이다.
한데 그렇게까지 해도 남궁세가는 남는다.
결국 이 싸움은 많은 피를 흘린다 한들 결국 남궁세가가 승리한다.
한데 어째서 열화궁은 폭렬단만을 이끌고 귀주를 떠났는가?
남궁세가에 비해 역사와 전통이 짧은 그들에게 있어서는 폭렬단이 곧 전력(全力)인 탓이다.
그 외로는 남궁세가처럼 짜내고 싶어도 짜낼 수가 없다. 열화궁을 활협단 측에서 지켜 준다고 하여도 차출할 수 있는 병력이 몇 없는 것이다.
그리고 그 몇 없는 병력은 열화궁의 미래였다.
고작 한 번의 전투에 미래마저 쏟아 넣을 수는 없는 노릇.
남궁세가 역시 크게 다를 바는 없겠지만 병력의 수 자체가 압도적이라는 사실만은 변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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