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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60화 (160/373)

학사재생 160화

제 160화

바얀테무르는 생김새와 어울리지 않는 쑥스러워 보이는 표정으로 미소를 짓는다.

서로를 향한 도발에서 시작된 방금 전 결투로 인해 불화가 발생할 수도 있었던 두 병력이 자연스럽게 오태악의 위엄 앞에 하나가 되었다. 애초부터 장내를 휘어잡을 정도의 위엄이 오태악에게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겠지만, 바얀테무르는 진무영이 그쯤도 되지 않는 인물에게 자신들을 맡길 것이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제대로 된 정황 파악이 아닌, 가슴이 시키는 대로 움직인 것에 불과한 하후령은 여전히 바얀테무르를 향해 짐승을 닮은 울음소리를 흘렸지만 오태악을 무시하고 뛰쳐나갈 정도는 아니었다.

“어떻게, 이쯤이면 제 말이 완전히 믿어지십니까?”

본론으로 돌아온 진무영이 오태악을 향해 묻는다.

“물론이다.”

오태악이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초원의 전사들을 보고 그 누가 무당파를 떠올리겠는가? 대체 어찌 황궁의 허락을 받아 이들을 중원 깊숙한 곳까지 들였는지는 모를 일이지만 굳이 의문을 표하지는 않았다.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을 이끌고 남궁세가와의 싸움에서 어떻게 승리할지 궁리하는 것이었다.

“좋은 선물을 받았군. 이 전쟁은 우리 열화궁이 반드시 승리한다.”

오태악의 가슴에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바얀테무르가 이끄는 초원의 전사들과 함께 열화궁의 병력이 떠났다.

홀로 남은 진무영은 그 뒷모습을 한참을 바라보다 못해, 떠나고 난 잔영까지 쫓듯 한 자리에 서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다 미소를 그렸다.

“열화궁과 초원의 전사들이라……. 설령 검제가 돌아온다 한들 남궁세가를 상대하기에는 부족함이 없겠지요.”

아직 오태악은 잘 모르고 있지만 초원 전사들의 진짜 실력은 전쟁, 그중에서도 활을 들었을 때 발휘된다. 별다른 이변이 없는 한 첫 전투에서 남궁세가는 아마 처음 겪어 보는 초원 전사들의 전술에 깜짝 놀라 엉덩이가 뜨거운 불에 덴 듯 줄행랑을 칠 터였다.

그리고 별 탈이 없다면 열화궁은 그 상태로 무난히 승리하게 될 것이다.

중원의 콧대 높은 무인들은 잘 모르지만, 초원의 전사들에게도 남궁세가 못지않은 전통의 힘이 있다. 무서운 사실은 그러한 전통이 대다수 전투로 점철되어 있다는 것이다. 초원에서 그들은 늘 무언가와 싸워야만 했다. 싸우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생존의 역경 속에서 쌓은 역사의 무게는 열화궁에게는 없는 단점을 메워 주고도 능히 남을 것이다.

기실 진무영은 이제 와서는 열화궁과 남궁세가, 두 세력 간의 싸움에서 패배라는 두 글자를 떠올리지 않았다.

하나 모순(矛盾)적으로도 승리할 수 있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단둘만의 싸움이라면 말이죠.”

기실 진무영은 이번 싸움이 열화궁과 남궁세가의 싸움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멀리 돌아갈 것도 없이 진무영 본인이 끼어들었다.

이미 두 세력 간의 싸움을 넘어섰다.

그리고 그 이전에 분명 황준우가 나선다.

“아니, 이걸 기회 삼아 만금장이 직접 움직일 수도 있겠죠.”

그렇게 되면 안 그래도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남기가 하나가 된다. 활협단의 입장에서는 비교적 영향력을 발휘하기 힘든 지역을 벗어나, 중원 천하에 있어 아주 손을 쓸 수 없는 유일한 지역이 되는 것이다. 진무영은 결코 이번 싸움이 굳이 남궁세가 아니, 남기 전체에 나쁜 영향을 준다고만 생각하지 않았다.

“우리 활협단의 입장에서도 나쁘지 않고…….”

짧지 않은 세월이었다.

칠야무신의 공포라는 이름 아래 뭉쳤던 활협단이라는 거대한 수레바퀴는 어느덧 녹이 슬어 가고 있었다. 모임을 가질 때마다 그의 귀에는 삐걱거리는 쇳소리가 크게 들려오는 듯했다.

남기라는 공통 된 적은 이 시점에 있어 오히려 활협단에 윤활유가 되어 줄 수 있을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표면적인 이유다.

활협단에 몸담은 고지식한 인물들을 설득하기 위해서는 이런 변명도 존재해야 하는 법이었다.

하나 내심 진무영이 눈을 두고 있는 관점은 단 하나뿐이었다.

“황준우, 이번에야말로 그를 제대로 볼 수 있겠군요.”

고작 두 번의 만남.

그뿐이지만 만날 때마다 그에게 큰 충격을 안겨 준 인물의 끝을 보고 싶다.

열화궁과 초원 전사들이라면 해낼 수 있을까?

심정적으로 어렵다는 결론이 먼저 내려진다.

‘그래도 어느 정도는 바닥을 긁어낼 수 있겠죠.’

운이 좋아서, 오태악이 준비한 한 수가 매섭다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가지기 위해서는 상대를 알아야 한다.

‘아니, 거짓은 필요 없습니다.’

진무영은 인정했다.

그는 그저 황준우의 모든 것을 알고 싶었다.

단지 그 욕심을 채울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이번 일의 성과가 어떻든 만족스러울 터였다.

“흐흐흥~”

절로 콧노래가 흘러나왔다.

그로 인해, 시대의 물결이 급변하며 출렁였다.

4. 회전(會戰)

황석후의 승인하에 만금장의 병력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 수가 많지는 않았다.

기껏해야 이백가량.

무가(武家)의 기준에서 보자면 보잘것없는 숫자다.

하나 이 숫자가 표행을 나가는 표사들과 집안을 지키는 호위 병력을 제외한, 상가에서 차출된 경우라는 사실을 생각하면 결코 적지 않았다. 오히려 어마어마하게 많은 편이었다.

그러나 또 달리 말해, 부족하지 않은 행차이지만 이 상태로 남궁세가를 지원하겠다고 선언하면 생색내기에 불과하다는 평을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이다.

황석후는 서류 몇 장에 가볍게 도장을 몇 번 찍음으로써 그런 잡소리를 일거에 종식시 켜 버렸다.

전쟁이란 무릇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피가 흐르는 거대한 싸움인 만큼 생각 외의 이해관계나 문제가 얽힐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 복잡한 문제들 중, 가장 단순하면서도 골머리가 아픈 부분이 바로 금전적 문제다.

전쟁이 벌어질 때면 권력자들의 마음을 가장 간지럽히는 부분을, 황석후가 시원하게 긁어 준 것이다.

소주에 모인 이백 명의 무인은 만금장의 깃발을 들었다.

선두에는 다음 대 만금장의 주인인 소장주 황준우가 섰다.

그리고 그 뒤편으로는 만금철방에서 만든 검 수백자루와, 식량, 금화가 담긴 마차가 줄을 지었다.

어지간한 대 가문의 인물들조차 침이 꿀꺽 넘어갈 어마어마한 돈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과연 소주대인의 마음이 하해와 같다며 칭송을 금치 않았다. 사이가 좋지 않은 남궁세가를 향해 만금장이 먼저 손을 내밀었다.

말하기 좋아하는 이들의 입에서는 행렬이 준비되는 순간부터 자연스럽게 만금장과 소주대인, 그리고 이번 지원의 전두지휘를 맡은 황준우의 이름이 칭찬으로 가득 채워 방아 찧듯 오르내렸다.

“승전하고 돌아오십시오!”

“소장주님 멋있습니다!”

“힘내십시오!”

출발 행렬 주변으로 모여 꽃을 뿌리는 사람들의 환호성 속, 어색한 웃음을 지은 황준우가 손을 흔든다.

“이건 뭐랄까, 벌써 승리하고 돌아오는 것 같은 기분이군요.”

경호 역시 황준우의 옆에 말을 타고 앉아 어색한 웃음을 흘리며 말한다.

“이런 환송은 처음이니까. 홍산 표정 봐봐. 아주 어색해서 죽으려하는 것 안 보여?”

아닌 게 아니라, 황준우의 곁에서 살짝 물러나 있는 홍산의 표정은 창백하다 못해 안쓰러울 지경이었다. 아무래도 많은 사람들의 관심이 그에게는 굉장히 부담스러운 듯했다.

“홍산도 훌륭한 무림인 될 상은 못 되나 봐. 그놈의 관심을 받고자 명성이니, 별호니 찾아 나서며 칼 춤 추는 게 무림인이란 작자들인데 말이야. 그런 의미에 있어 우리 경호는 뿌듯하겠어. 나도 없는 별호가 벌써 떡하니 천하에 소문나고 있잖아.”

“거기검!”

“거기검 경호다!”

때마침 사람들의 환호성 속 경호를 부르짖는 목소리가 귓가에 파고든다.

민망하게 얼굴을 붉힌 경호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으으, 아무래도 저도 무림인은 못 될 상인가 봅니다. 별호라도 바뀌었으면 어찌해 보련만…….”

“더 힘내서 무언가 업적을 남기면 가능성이 있지 않으려나? 왜 그런 것 있잖아. 십만대산에 들어가 마인들을 잔뜩 잡고 다니면 참마검(斬魔劍)이라든지 그런 멋들어진 별호 붙여 주잖아.”

“저 이번 전쟁 끝나고 나면 한동안 십만대산에 들어가 살다 오렵니다.”

“큭큭.”

“농담 아니에요. 진담이에요.”

“그러든지.”

“……섭섭하게 그렇다고 바로 승낙하십니까.”

“난 농담이거든, 흐흐. 슬슬 가자.”

이미 행렬에 합류하기 전 가족들과의 인사는 끝내 놓았다.

때문에 투덜거리는 경호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긴 황준우는 여유롭게 출발을 선언했다.

고삐를 가볍게 내리치자 거친 콧김을 내뿜은 황준우의 말이 선두에서 서서 나아간다.

“와아아-!”

사람들의 환호성이 더 커지고, 뒤이은 경호의 출발하자는 외침에 행렬 전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쏟아지는 꽃비 속 느긋하게 걸음을 옮기던 황준우가 문득 자신의 좌측에 위치한 전왕을 바라본다.

“어쨌든 덕분에 진귀한 경험도 하고 있네. 우리 입장에서야 바라는 바가 있으니까 화려하게 꾸민 것뿐인데, 칭찬도 듣고. 기분 좋은데?”

“그런 게 정치라는 겁지요. 헤헤.”

“정치, 정치라……. 나쁜 의도로만 사용되지 않는다면 참 좋을 텐데 말이야.”

본래 정치란 좋은 의도로 사용되기 위해 만들어진 말이다. 하나 이 시대에 있어 그 단어는 좋기보다, 나쁜 용도로 더 많이 사용된다.

때문에 황준우는 그 말을 그저 입 안에 씹고 다시 내뱉었다. 실제로 옆에 전왕이라는 전문가도 생겼으니, 굳이 그가 깊게 생각하려 들 필요도 없었다.

더 큰 문제의 정치를 말하자면, 주연하를 믿고 있었다. 진시황릉 이후 소식조차 듣지 못하고 있었지만 언제 어디서나 그녀가 자신의 일을 훌륭히 해내고 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굳건했다.

‘결국 전문적인 일은 전문가에게 맡겨야지.’

전투가 황준우의 전문이니, 나가서 싸우는 것은 충실히 하듯 말이다. 오히려 지금 황준우가 신경 쓰이는 사실은 따로 있었다.

“그나저나 표정이 좋지 않네. 무슨 걱정이라도 있는 거야?”

며칠 동안 출정을 준비한다고 바빠서 몰랐는데 전왕의 얼굴이 많이 수척해져 있었다. 눈 밑에 진 기미도 평소에 비해 몇 배는 어두워 보이는 모습이다.

“고민이 조금 있어서 밤잠을 설쳤더니 말입니다. 헤헤.”

“고민?”

“예. 분명 생각대로 움직이고 있는데 계속 찝찝함이 남아서 말이지요. 확신 하나 없이 말씀드리기가 어려워 말을 아끼고 있는 상황입니다.”

“이번 전쟁에 대해서 말이야?”

“예. 음, 그러니까…… 목적의 문제랄까요. 아시겠지만 이번 전쟁 말입니다. 열화궁 그리고 활협단, 정의회와 무림맹까지 제법 많은 이해관계가 얽혀 있는 상황이거든요. 각자 얻을 수 있는 이득도 분명하고 말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정리를 하고 나니, 진무영이 남습니다.”

“진무영?”

“예, 진무영입니다. 이렇게까지 전쟁을 만들어서 그는 어떤 이득을 얻게 되는 것일까……. 바로 이 부분이 문제입니다.”

“아까 전왕 네가 활협단을 말했잖아. 활협단의 득을 만들기 위해 진무영이 움직인 것 아니야?”

“기본적으로 생각하자면 그렇습니다만. 이 활협단이라는 단체가 지금에 와서는 그리 탄탄하지 않다는 것도 사실이란 말이지요. 또한 진무영이라는 사내가 자신이 속한 단체를 위해 살신성인(殺身成仁)하는 성정으로 보이지는 않고 크…… 머리 아픕니다.”

며칠간 골머리를 싸매게 했던 고민을 털어놓은 전왕이 고개를 내저으며 한숨을 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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