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4화
제 164화
“누가 오랑캐와 다를 바 없는 저능인들 아니랄까 봐 흥분한 모습을 보아하니 굳이 큰 도발도 필요 없겠군.”
남궁호욱은 전방에 서 양손에 거대한 화염을 피어 올리며 달려오는 오태악을 향해 비웃음을 흘렸다. 저돌적으로 달려드는 그의 모습이 남궁호욱의 눈에는 마치 산에 사는 멧돼지처럼 보였다.
“어리석은 놈.”
코웃음 치는 그의 눈이 경악에 휩싸인 것은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은 뒤였다.
오태악의 양손에 타오르는 화염이 점점 크기를 불려 가는가 싶더니, 사람 하나를 넘어 어지간한 거목 크기까지 순식간에 치솟는다. 오태악은 그 거대한 화염을 거칠게 사방으로 흩뿌렸다.
콰과과광-!
산의 입구로부터 폭발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나무를 불태우며 순식간에 산 위로 차오르기 시작했다.
뒤를 따라는 열화궁의 무인들이 신이 난다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것이 들려왔다.
“미, 미친! 물러나라! 물러나!”
열화궁의 무공 특성상 화공은 예정된 바였다.
때문에 주변의 산 중에서도 불이 옮겨 붙을 만한 나무가 얼마 없는 곳을 택하였고, 남은 시간에 벌목 작업도 하였다. 한데 워낙 거대한 불이 움직이기 시작하니 산 전체가 순식간에 불타오르기 시작해 버린다.
고작 오태악 한 명의 불꽃에 의해 말이다.
이는 남궁호욱과 남궁호량 또한 예상치 못한 사태였다.
남궁호욱의 외침에 진영을 유지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산 아래로부터 시선을 돌리고 빠르게 뒷걸음질 치기 시작했다.
불이 옮겨 붙는 속도는 빠르지만, 일반적인 병사가 아닌 무인들의 움직임도 신속했다.
남궁세가의 선봉대는 단숨에 산의 정상에서부터 아래를 향해 뛰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콰과광-!
뒤로는 폭음과 함께 뜨거운 열기가 계속해서 부풀어 올랐다.
“무식한 놈! 쓸데없는 데 힘을 낭비하고 있군!”
처음에는 그 위력에 크게 놀란 남궁호욱이었지만 지금은 달랐다. 이미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주변 주민들이 이름 붙인 광제산(曠堤山)을 버리고 달아나기 시작했다.
아무리 불이 옮겨 붙는 속도가 빨라도 오태악 본인이 앞질러 뛰어오지 않는 한 그들을 쫓아올 수는 없는 노릇이다. 오히려 오태악의 거친 행동에 의해 초원 기병들의 움직임이 제한되었다고도 볼 수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문제도 있었다.
뒤에 숨겨 두었던 매복 병력을 운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산이 저렇게 불타서야 매복 병력이라 하여도 적의 뒤를 포위하기가 힘들 수밖에 없다. 하나 상관없었다. 이미 오태악이 저질러 놓은 방화로 인해 적들은 달아날 곳을 잃었다.
아무리 열화궁의 무인들이 열기에 강하다고 하여도 저처럼 거친 불길을 견뎌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본인, 폭존 오태악이나 견딜 수 있을 정도일 것이다.
‘이건 우리가 이겼다.’
아직 직접적인 격돌에 들어가지 않았음에도 남궁호욱은 승리를 확신했다.
선봉대가 머물고 있던 정상의 아래쪽에는 호수가 자리 잡고 있다. 때문에 광제산이다. 주변 산에 비해 비교적 황량한 이 산은 호수의 물이 불어날 때에 둑의 역할도 하고 있는 것이다.
남궁세가는 열화궁의 양강지기에 가장 대항하기에 좋은 지형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싸우기 전에 승리를 위한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그런 상황에 적들은 스스로 퇴로를 막고 지원 병력마저 끊으며 무지막지하게 돌격만을 하고 있다. 패배를 떠올릴 이유가 없었다.
도망치듯 다급하게 산의 아래까지 뛰어 내려온 남궁호욱이 상기된 표정으로 본영의 앞으로 나와 있는 남궁호량을 바라보며 외쳤다.
“가주, 폭존 놈이 아주 제대로 흥분하여 달려들고 있습니다. 마치 성난 멧돼지 같구랴. 하하!”
“생각보다 거칠게 움직이는군. 퇴로는 생각하지 않는가?”
남궁호량이 미간을 찌푸리며 거대한 불길에 사로잡힌 광제산을 바라보았다. 그 모습은 이미 광제산이라는 이름이 어울리지 않았다.
“이야기 속 화염산이 꼭 저러할까…….”
나찰녀(羅刹女)의 파초선(芭蕉扇)이 아니면 도저히 꺼트릴 수 없을 것 같은 거대한 화염이 몇 남지 않은 광제산의 수목을 태우며 거칠게 피어오른다.
그 누구의 접근도 허용치 않는 것 같은 그 모습에 남궁호량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팼다.
“열화궁의 무인들은 저런 열기 속에서도 움직일 수 있는가?”
“그야…….”
당연하다는 듯 대답하려던 남궁호욱의 시선이 이제는 이름을 바꾸어야 할 화염산을 향한 이후 말끝이 흐려진다.
열기가 어찌나 지독한지, 호수를 등진 본영에까지 화끈하게 느껴졌다. 꿈쩍 없이 자리를 지키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조차 조금씩 뒷걸음질을 치고 있었다.
“이상합니다. 아무래도 느낌이 좋지 않아요.”
“본영을 더 물려야겠군.”
남궁호량의 판단에 남궁호욱의 얼굴에 망설이는 기색이 떠올랐다. 오므리고 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던 입술에서는 힘겹게 만들어진 말이 흘러나왔다.
“완전히 빠지는 건 어떻겠습니까?”
“뭐? 아직도 회전을 피하자는 헛소리나 하고 있는가?”
남궁호량의 두 눈이 붉어졌다. 콧김에는 거친 숨소리가 섞여 나왔다.
가주라는 직책 덕에 되도록 침착하게 남궁세가를 이끌었지만 그 역시 본래 성정이 과격한 편에 속했다. 의견을 나누는 자리도 아니고, 이미 정해진 일인 회전을 전장 한복판에서 돌리자고 하는 말까지 참을 이유는 없었다.
“그런 뜻이 아닙니다. 다만 뭔가 이상합니다. 피해야 할 때입니다. 이럴 때의 제 직감은 제법 잘 맞는다는 걸 아시지 않습니까?”
남궁호욱은 여느 때에 볼 수 없는 창백한 얼굴이 되어 다급하게 말했다.
젊은 시절 두 사람은 함께 강호를 종횡한 경험도 있었다. 그들 역시 한때 남궁의 미래라 불리던 시절이었던 때였다. 당시의 두 사람은 지금과 같이 갈라져 있지 않았다. 젊은 두 사람은 서로를 존중했고, 의지했다. 서로가 합심하여 훌륭한 남궁세가를 만들자는 꿈을 꾸던 그 시절, 남궁호욱은 기이할 정도의 위기 감지 능력을 몇 번이나 선보이곤 했다.
그가 위험하다고 느낀 일에서는 분명 탈이 생겼다.
때문에 당시 함께 다니던 젊은 협객들은 남궁호욱의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언사와, 그를 믿는 남궁호량을 비웃고는 했다.
그리고 결과적으로, 말했다시피 탈은 비웃음을 보였던 협객들의 몫이었다.
당시 두 사람을 무시했던 젊은 협객 중 지금까지 살아남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 그 증거였다.
“급합니다, 가주!”
남궁호욱이 불안한 눈빛으로 주변을 살피고는 다급히 외쳤다.
그를 바라보는 남궁호량의 머릿속에는 오만가지 생각이 떠올랐다.
‘놈이 수작을 부리는 것인가?’
젊은 시절 남궁호욱의 직감에 의존해 목숨을 건진 기억이 많은 남궁호량이었다. 이번에도 그런 경우라면 뜻을 따르는 게 맞다.
하나 과연 그런 것일까? 지금 남궁호욱은 자신의 뜻이 관철되지 않아 괜한 심통을 부리는 중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적과 손을…….’
아니, 그럴 리는 없다.
남궁호욱의 몸에는 고독이 존재한다. 황준우를 배신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형님!”
남궁호욱이 다급한 표정으로 또 한 번 소리쳤다.
“언제는 아우라고 부르지 말라더니…….”
“급합니다. 제발!”
“빌어먹을, 이딴 계산을 하게 되는 것이 세월이란 놈인가. 독인지, 약인지 모르겠군.”
남궁호량의 두 눈에 결단이 떠올랐다.
“후퇴한다! 후퇴해라!”
내공이 섞인 그의 거친 외침에 뜨거운 열기를 피해 조금씩 뒷걸음질 치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놀란 시선을 보낸다.
“가주! 완전히 빠집니까?”
“매복조는…….”
“후퇴한다! 매복조도 저 불을 봤다면 저 화염산 속으로 뛰어들 생각은 하지 않을 것이다!”
“알겠습니다!”
남궁호량의 결단에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가볍게 짐을 챙긴 후 재빨리 등을 돌려 경공을 펼치기 시작했다. 일반적인 병졸들에 비해 몇 배나 빠르게 이어진 퇴각은 얼핏 안정적으로 보였다.
“네 뜻대로 되고 있는데 왜 표정이 좋지 않은 게냐?”
남궁호량이 남궁호욱을 향해 물었다.
“아직 느낌이 좋지 않습니다. 뭔가, 더 있는데…….”
남궁호욱의 시선이 어느덧 정상에 올라서 온몸을 불태우며 광기를 비추고 있는 오태악을 바라본다.
두두두두-!
지면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가 들려온 것은 그때였다.
“기마병!? 대체 어느 틈에!?”
왼쪽, 거친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달려오는 초원전사들의 모습에 남궁호량이 경악을 토했다.
거친 투레질을 하며 달려오는 말의 속도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다.
그를 바라보는 남궁호량의 등 뒤로 식은땀이 흘렀다.
만약 호수를 믿고 처음 진영을 그대로 유지했다면 순식간에 옆과 앞에서 적을 맞이해야 됐을지도 몰랐다. 남궁호욱의 불길한 예감이 또 맞은 것이다.
“빌어먹을! 어쩐지 불안하더라니!”
“접근 속도가 너무 빠르다. 회전을 완전히 피할 수는 없을 것 같군.”
작은 산이라지만 광제산을 빙글 돌아 남궁세가의 뒤꽁무니까지 빠르게 쫓아온 기마병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친 모습이나 힘겨운 기색은 없었다.
계획해 두었던 매복은 물 건너가고 오히려 적에게 둘러싸일지도 모를 상황.
그렇다고 해서 마냥 물러나는 것만이 상책은 아니었다.
‘수는 우리가 두 배다. 그리고 남궁세가의 무인들은 약하지 않아.’
남궁호욱의 직감은 맞았지만 그의 공포는 의아할 정도로 과했다. 남궁호량은 이 순간에는 남궁세가를 믿어야 된다고 생각했다.
“적의 수는 기껏해야 일천 내외다! 남궁세가의 저력을 보여 줘라!”
판단은 빨랐다.
남궁호량이 외치며 전방으로 뛰어들었다.
‘위기는 곧 기회!’
어쩌면 이번이 적의 기마병을 따로 잘라 낼 수 있는 기회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한 그의 공격을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뒤따랐다.
“무애단은 가주님을 따라라!”
“창천단, 검을 뽑아라!”
“본가(本家)의 가주님을 엄호하라!”
순식간에 기세를 피어 올리며 함성을 내지른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빠르게 경공을 펼쳤다.
그런 그들을 맞이한 것은 말 위에 앉아 있던 초원 전사들이 아니었다.
파바바밧-!
하늘을 수놓는 일천의 화살!
남궁세가의 접근을 본 순간, 허리춤에 매달고 있던 활을 뽑아 든 초원전사들의 선공에 기세를 올리며 뛰어가던 무인들의 얼굴에 당황이 어렸다.
“차앗-! 이깟 화살이 우리를 막을쏘냐!”
기합을 내뱉은 남궁호량이 허공으로 떠올라 강기를 흩뿌리며 수십 자루의 화살을 순식간에 쳐내고, 부러트렸다.
놀란 것은 그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그를 표현할 수는 없었다. 후퇴를 명할 수도 없었다. 화살은 등을 돌린 적을 몇 배는 좋아했으니 말이다.
답은 단 하나뿐.
뚫고 나간다.
채채챙-!
다행히 남궁세가의 무인들 역시 개개인 적으로 화살에 대해 방비를 잘해 냈다.
머리를 덮는 검은 그림자의 수가 많아 아득하다고도 느낄 수 있지만 결국 자신을 노리는 화살만 쳐내면 될 일이다.
물론 그조차도 인지하지 못하거나, 부담감에 무너져 쓰러진 내린 무인들도 있었다.
하나 기껏해야 일백이 채 되지 않는다. 당황스러운 상황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첫 공격의 피해는 그리 크지 않았다.
“남궁의 창천들이여, 적의 심장에 우리의 이름을 새겨 주자!”
기세를 꺼트리지 않게 다시 한 번 소리를 지른 남궁호량이 정면으로 뛰어나간다. 동시에 무섭게 다가오던 기마병들이 갑작스럽게 말고삐를 낚아채고는 등을 돌려 달아나가 시작했다.
도주는 아니었다.
기마병들은 말고삐를 돌린 자세 그대로 상체만을 돌려 다시 활시위를 겨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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