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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65화 (165/373)

학사재생 165화

제 165화

“억!?”

남궁호량이 저도 모르게 비명을 내질렀고, 또 한 번 화살비가 쏟아졌다.

“막아라! 막아!”

다행히도 두 번째 화살비 역시 남궁세가에 큰 피해를 주지는 못했다. 적을 명확히 주시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더욱 능동적으로 화살을 쳐낸 탓이었다. 당황은 하였다 한들 쉽게 무너지지는 않는다. 남궁호량은 저도 모르게 든든한 마음이 되어 뒤를 따르는 무인들을 곁눈질로 바라보았다.

‘이번 공격에 피해를 입은 무인은 고작해야 오십 내외인가.’

이 오십과, 첫 공격의 백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었다.

우선 사망자는 그리 많지 않다.

대부분이 경상에서 중상이라는 뜻이다.

두 번째로는 그들 전원이 남궁세가 무인들 중에서도 아직 강호 경험이 많지 않은 젊은 층이라는 것이었다. 죽지만 않는다면 그들 모두가 지금의 경험을 발판삼아 한층 성장할 수 있을 것이다.

‘다행히 미래는 남았는가!’

무엇보다 남궁호량의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이들은 남궁진위를 비롯한 남궁오래였다.

남궁가의 미래라 불리던 젊은이들이지만, 부족한 점이 더 많았던 그들은 황준우와의 사건을 계기로 바뀌었다.

강호의 무서움과 자신들의 부족함을 깨달은 그들은 절치부심하여 스스로를 바꾸길 원했고, 그 결과가 이 전장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비록 치욕스러운 사건이었지만 그로 인해 성장할 수 있었다면 그조차 나쁘지 않다.

때문에 적어도 지금 이 순간만큼은 남궁호량 역시 권력에 눈이 먼 욕심꾸러기가 아닌 전장에 선 용장(勇將)이 되었다.

마음에 불을 품고 눈을 부릅뜨며 검을 추켜세웠다.

“우리는 지지 않는다! 우리는 남궁이다!”

남궁은 이 자리에 모인 이들 대다수의 이름에 새겨진 글자다.

그래서일까?

별것 아닌 그 두 글자가 누구보다 이들의 마음에 불똥을 튀기게끔 만들었다. 선봉에서 거침없이 뛰어나가는 남궁호량의 모습은 거대한 불을 지폈다.

“나가자! 싸우자! 이기자! 우리는 남궁이다! 남궁은 불패(不敗)한다!”

누군가가 외쳤고, 뒤를 따라 모두가 하나가 된 듯 외쳤다.

남궁은 불패한다!

오태악을 비롯한 열화궁 무인들이 남궁세가 매복자들이 접근할 수 없게끔 방화를 하며 시선을 끌고, 기동력이 좋은 바얀테무르의 초원전사들이 남궁세가를 급습한다. 이 전략은 바얀테무르가 제안했고, 오태악이 승인한 부분이었다.

기실 이런 전략을 생각한 데에는 바얀테무르의 자신감도 없지 않아 있었다.

남궁세가는 강하지만, 초원의 전사들이라면 충분히 적을 농락할 수 있다.

말 위에서 활을 든 그들은 한때 북부 전장에 있어 사신(死神)이라는 별명으로도 불렸던 입장으로서, 남궁세가에 못지않은 결집력을 가진 집단을 무수히 무너트린 전적이 있었다.

“과연 대(大) 남궁세가…….”

연속되는 화살 공격에도 굴하지 않고 무섭게 쫓아오는 남궁세가를 보며, 바얀테무르는 저도 모르게 감탄을 흘렸다.

“채 삼백을 줄이지 못했는가?”

어느새 두 부대 사이의 거리는 가까워져 있었다.

제일 선봉에 선 흉악한 인상의 남궁호량은 두어 번의 도약이면 초원전사들의 말 등을 벨 수 있을 만큼 가까워진 상태였다.

말이 느린 것이 아니다.

남궁세가 무인들의 발이 빨랐다.

집착과 오기가 강했다.

‘물론 고의적으로 속도를 조절한 것도 있지만.’

예상을 한참이나 벗어났다는 사실도 부정할 수 없었다.

오태악만이 아니라, 바얀테무르 본인도 남궁세가를 한참이나 얕보고 있었다.

“차앗-!”

기합과 함께 남궁호량이 허공으로 도약하는 모습이 보인다.

어느덧 두 번의 도약이었던 거리가 한 번으로 줄은 것이다.

“아직은 안 되지.”

혀를 찬 바얀테무르가 재빨리 시위를 겨누었다.

화살이 그의 손을 떠나 허공을 찢으며 남궁호량의 미간을 향해 날아간다.

“감히!”

검과 기운이 섞인 화살이 부딪치며 말발굽조차 묻어 버리는 제법 큰 소리가 전장에 울려 퍼졌다. 결국 남궁호량을 죽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도약의 기세는 줄였다.

“크아아-!”

허공에서 떨어지며 검을 크게 휘둘렀지만 아슬아슬하게 말의 엉덩이조차 베지 못한 남궁호량이 괴성을 내질렀다.

‘섬뜩하군.’

바얀테무르는 오랜만에 이마 위로 식은땀이 맺히는 것을 느꼈다. 고삐를 쥔 손에도 축축한 감촉이 가득 베었다.

만약 적들에게 말이 있었다면 어땠을까를 생각하니 헛웃음마저 나올 정도였다.

“초원의 전사들이라고 자랑하기 부끄러워질 정도로군.”

“그러게 말입니다. 대장, 이제는 진짜 위험할 수도 있겠는데요.”

바얀테무르의 혼잣말에 그를 십 년이 넘게 쫓아다니는 부관 역시 제법 오랜만에 앓는 소리를 해 왔다.

괴성을 내지른 남궁호량은 지치지도 않는지 후미를 또다시 따라붙고 있었다. 그야말로 괴물 같은 성정에, 체력이다.

다른 남궁세가의 무인들이라고 해서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들 모두가 지치는 것을 잊은 것 같은 모습이었다.

“어쩌겠나, 최대한 버텨 봐야지.”

바얀테무르는 또 한 번 혀를 차며 시위를 겨누었다.

남궁호량이 도약을 재 시도하는 순간이었다.

화살이 다시 한 번 대기를 찢고 날았다.

마치 미리 재 놓은 것같이, 이전과 다를 바 없는 모습이다.

다만 이번에는 남궁호량의 입가에 웃음이 보이는 듯했다.

그리고 화살이 남궁호량의 왼쪽 어깨를 반쯤 꿰뚫었다.

동시에 바얀테무르는 가슴이 철렁하는 감정을 느꼈다.

‘기로 막(膜)을 만들어 화살의 위력을 줄였다.’

또한 검을 휘두르기보다는 몸이 앞으로 뛰어나가는 추진력에는 힘을 더 얹었다.

남궁호량은 자신의 몸을 도외시하지 않고 뛰어들어 단숨에 제일 후미에 있던 초원전사의 말 위로 올라탔다.

초원전사 한 명이 비명조차 지르지 못한 채 눈을 부릅뜬 상태로 목이 날아갔다.

시체가 된 초원전사를 발로 찬 남궁호량이 말고삐를 훔쳐 쥐었다.

주변에서 시위를 재고 있던 또 다른 전사들이 재빨리 허리춤에서 대도(大刀)를 뽑아 들었지만 남궁호량은 그보다 더 빨랐다.

검이 마치 춤을 추듯 사방으로 움직이며 피의 꽃을 피워 올린다.

“으아아아-!”

막아서고, 피하던 이들도 남궁호량이 내뿜는 사나운 기세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한 순간 목이 날아갔다.

작은 하나의 시작이 큰 파란(波瀾)을 불러오기 시작했다. 남궁호량이 진영을 흐트러트리며 후미가 주춤했고, 그사이 하나의 파도와 같이 남궁세가가 덮쳐들었다. 순식간에 오십에 가까운 초원전사들의 비명이 허공에 울려 퍼졌다.

“제가 가겠…….”

“아니, 선두는 속도를 높여라. 저자는 강자다. 내가 직접 간다!”

나서려는 부관을 말린 바얀테무르가 인상을 찌푸리고는 대도를 뽑아 들어 달려 나갔다. 지금 그의 마음에는 뜨거운 불이 솟고 있었다.

강자를 향한 호승심 따위가 아니었다.

그 감정은 명백하게 단 하나, 분노를 말하고 있었다.

‘왜 이렇게 늦는가! 폭존이여!’

“네놈이 수장이로구나!”

성난 이리처럼 달려 나간 바얀테무르의 대도와 남궁호량의 검이 부딪치며 폭음을 일으킨다.

눈을 부릅뜬 남궁호량이 호쾌하다는 듯 웃었다.

“으하하하! 제법이군, 제법이야!”

왼쪽 어깨의 상처 정도는 아랑곳 않는 거친 공격을 바얀테무르는 침착하게 막아섰다. 순수하게 무공 실력만 치자면 그와 남궁호량은 동급에 가까웠다.

그러니까 따지자면, 남궁호량의 어깨가 다쳤으니 바얀테무르가 우위를 점해야 옳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방어를 하는 것조차 급급한 모습이다.

무공의 고하(高下)나 체력의 문제를 뛰어넘은 근본적인 이유가 있었다.

‘기세를 탔다.’

남궁호량은 이미 가진 바 체력과 실력 이상의 무공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적은 평소에 비해 두 배 이상 상대하기 까다롭다.

남궁호량뿐만이 아니었다.

이곳까지 쫓아온 남궁세가의 무인들 모두가 이와 같은 기세를 피어 올리고 있었다.

알고 있었음에도 바얀테무르가 나선 것은 이 방법이 초원전사들의 피해를 가장 최소화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꼬리를 물렸으니 거리가 벌어지는 동안 최대한 버틴 후 달아난다.

쉽지는 않겠지만 바얀테무르 한 몸 정도는 충분히 건사할 수 있었다.

다만 꼬리에 해당한 수많은 초원전사들이 목숨을 잃으리라. 버려지는 것이다.

어쩔 수 없는 판단에 가슴으로는 피눈물을 쏟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바얀테무르의 표정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전사로 태어나 전장에서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슬픔과는 상반되게 그는 현실을 직시하고 있었다.

그렇게 격전이 이어지는 사이로 무겁고 거대한 음성 하나가 화약이 뭉친 폭탄처럼 떨어졌다.

전장을 지배하던 남궁세가의 무인들의 기세를 억누르는 거대한 목소리였다.

한참 웃음을 흘리던 남궁호량, 그리고 바얀테무르를 비롯한 초원전사들의 고개가 동시에 우측을 향했다.

그곳에는 큰 부상을 입고 피를 쏟고 있는 남궁호욱을 한 손에 물건처럼 들고 선 거대한 사내와 그를 따르는 오십의 무인들이 있었다.

“늦어서 미안하다, 바얀테무르.”

짧지만 귀를 때리는 무거운 목소리와 함께 그의 신형이 기세를 피어 올리고 있는 남궁세가의 우측 진영을 강하게 때렸다.

화르륵-!

“끄아아악-!”

“뜨거워!”

화염이 피어올랐고 혼비백산한 남궁세가의 무인들 수십이 단 한 순간에 죽어 나갔다.

“폭존!”

남궁호량이 이를 갈며 외쳤다.

오태악의 등장이었다.

바얀테무르가 내놓은 작전은 단순한 초원전사들의 급습으로 끝이 아니었다.

아무리 자신감이 넘친다 한들 고작 그 정도로 남궁세가를 쓰러트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지는 않았다.

수를 줄여 놓고, 상대를 약 오르게 할 수 있다면 성공이다. 이후 다른 방향에서 도착한 열화궁과 함께 남궁세가를 일거에 박살 낸다. 본래 남궁세가가 준비해 두었던 작전을 역으로 이용하는 것이 바얀테무르의 계획이었다. 일부러 말의 속도를 조절한 것 또한 그러한 작전의 한 부분이었다.

남궁호량의 기세가 올라 꼬리까지 쫓아 붙은 것과, 예정되었던 오태악의 도착이 미뤄진 것은 그야말로 예상외의 일이다.

“위험했지 않습니까.”

방금 전까지 오태악을 향해 달구었던 분노를 꺼트린 바얀테무르가 덤덤한 음성으로 말했다.

“생각보다 질기게 버티는 놈이 하나 있어서 말이야.”

한 손에는 화염을 피어 올리며, 반대 쪽 손에 피투성이가 된 남궁호욱을 들어 올린 오태악이 이빨을 보이며 웃음을 흘린다.

“내당주!”

남궁호량이 그를 불렀지만 대답은 없었다.

“이 빌어먹을 호욱 놈아! 죽은 게냐!”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였지만 여전히 늘어진 남궁호욱에게는 반응이 보이지 않는다.

“죽이지는 않았다. 쓸모가 있어 보여서 말이지.”

대답을 대신 한 것은 오태악이었다.

“보아하니 잘못 고른 것 같지는 않군. 남기의 남익덕, 남궁세가주께서 이리 흥분하신 걸 보니 말이야.”

미소를 보인 오태악이 마치 장난감처럼 남궁호욱의 몸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빌어먹을 폭존!”

목소리를 높인 남궁호량이 뛰어나가려는 순간이었다.

화르륵-!

양손에 불을 피어올린 오태악의 손이 남궁호욱의 머리를 향했다.

“그만, 거 내당주가 죽는 꼴을 보고 싶은 건가?”

“죽든 말든! 그딴 쓸모없는 새끼! 오히려 원하는 바다!”

남궁호량은 이를 갈며 외쳤지만 결국 두어 걸음 더 내딛는 것이 최선이었다.

걸음을 멈춘 그가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었다.

핏물의 비릿한 맛이 그의 이성을 붙잡는다.

‘여기서 내당주의 죽음을 도외시하면 비난이 잇따른다.’

참으로 우스운 일이다.

이 순간에 떠오른 이성은 정치적인 이유를 앞세웠을 뿐이니 말이다.

‘아니, 단순히 그뿐인가?’

감정과 이성, 그 사이에서 잠시 혼란을 느낀 남궁호량이 큰 숨을 내쉬고는 오태악을 바라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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