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66화 (166/373)

학사재생 166화

제 166화

“원하는 게 무엇이냐?”

그가 아는 오태악은 아니, 열화궁 무인들은 전원이 과격파다. 인질을 잡고 대화하는 행동을 하기보다는 차라리 첫 등장 때처럼 무차별로 학살하는 쪽이 어울린다. 실제로 폭존 오태악은 그럴 만한 힘을 갖춘 자였다.

만약 그가 마음먹고 이곳에서 힘을 썼다면 남궁세가 무인들 중 대다수가 죽거나 불구가 되었을 터였다.

기실 온몸이 화상자국과 피로 얼룩진 남궁호욱의 경우도 현재 정상적인 모습으로 돌아오기는 힘들어 보일 정도였다.

한데 그런 상대를 가지고 대화를 청해온다.

오태악스럽지 않았다.

“이자를 넘기겠다. 약조대로 하후령을 내놓아라.”

인상을 와락 찌푸린 오태악이 이를 갈며 말한다.

자연스레 남궁호량은 의문을 느꼈다.

“하후령…… 폭렬단주 말인가?”

그녀를 왜 갑자기 그에게서 찾는단 말인가?

실제로 오태악의 시선은 남궁호량을 향해 있지 않았다. 그보다 조금 더 먼 곳, 남궁세가의 후미를 향해 있었고, 그곳에서 세 사람의 기척이 움직인 것도 동시였다.

“거래를 하고자 보기에는 너무 과격한 행동 아닙니까. 폭존, 대체 몇 명을 죽인 겁니까?”

사마정의 목소리다.

이성보다는 본능 그 자체에 각인 된 음성에 남궁호량의 몸이 잠시 굳어졌다.

‘저자의 정체는 뭐기에 남궁세가주가 긴장한 것이지? 칸이 주시하고자 하시던 인물인가?’

그 사실을 눈치챈 이는 장내에서 단 한 명, 바얀테무르 뿐이었다.

“빌어먹을 쥐새끼 놈, 감히 본좌를 우롱하려 드는 것이냐?”

범이 낮게 우는 듯한 소리를 흘린 오태악의 눈에는 붉은 핏줄기가 가득 서 있었다. 이성으로 억지로 분노를 자제하고 있는 것 같은 모습이다.

“우롱이라니요. 그저 저는 조금 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어쨌든, 이런 자리에서 뵙게 되어 참으로 아쉽습니다. 폭존.”

사마정은 느긋한 목소리를 흘리며 흑백쌍노와 함께 남궁호량을 지나쳤다. 한 손에는 만신창이가 된 하후령의 목덜미를 움켜쥔 채다.

의식을 잃은 채 늘어진 그녀를 보는 오태악의 눈이 더욱 뜨겁게 타오른다.

암중(暗中)에 숨어있기로만 계획되었던 사마정이 전면에 나섰다.

그리고…….

열화궁의 뒤편, 먼지 구름과 함께 다급한 표정을 한 남궁세가의 무인들 오백여 명가량이 도착했다. 선두에는 검제 사망 이후 세가의 최고수라 볼 수 있는 원로원장(元老院長), 한때는 창천검(蒼天劍)이라 불리던 남궁윤이 보인다. 그들은 본래 열화궁의 뒤를 치기로 되어 있던 남궁세가의 매복조였다.

화염산의 등장으로 당황하고 있을 줄로만 알았던 그들이 생각보다 훨씬 빠르게 이 자리에 도착한 것이다.

그렇게 순식간에 남궁세가의 본진을 열화궁과 초원전사들이, 또 그들을 남궁세가의 매복조가 포위한 진풍경이 만들어졌다.

“이런…….”

주변을 둘러보며 상황을 파악한 바얀테무르가 깊은 한숨을 내쉰다.

‘대체 이게 어찌 된 일이란 말인가?’

반면 남궁호량의 머릿속은 의문으로 가득 차올랐다.

본래 남궁세가와의 일대 회전에서 바얀테무르의 목표는 본진의 괴멸이었다. 매복자들이 도착하기 전에 가주와 주요 인물이 모두 있는 본진 쪽과 승부를 본다면, 남은 인원은 아무리 수가 많아도 그야말로 쭉정이와 다름이 없다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나 오태악의 생각은 조금 달랐다.

그는 조금 더 완벽한 승리를 원했다.

이 회전에서 일거에 남궁세가의 뿌리 자체를 불태우기를 바랐다.

때문에 오태악은 대다수의 바얀테무르의 계획에 동의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매복자들의 섬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않았다.

결국 바얀테무르는 여기서 한 수를 접어주었다. 매복 병력에게도 소규모 정예를 꾸려 급습하는 쪽으로 새 방안을 낸 것이다.

오태악은 아주 흡족해하였고, 하후령을 비롯한 폭렬단 정예 병력을 뽑아 매복조의 기습을 노렸다.

사실 작전은 성공적이어야 했다.

초원전사들과 폭렬단은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행동하여 남궁세가의 눈과 귀를 제대로 가렸으니 말이다. 실제로 그들은 본진의 싸움에서 남궁세가를 훌륭히 속였다.

다만 단 한 명, 사마정의 눈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사마정은 두 세력이 마주한 전날부터 계속하여 혈안서를 풀어 적들의 동태를 살폈다.

그 와중에 보인 초원전사들의 순찰행위와 그를 묵인하는 오태악의 모습은 그저 당연한 수순으로만 보였다.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자연스럽게 본진으로 귀환하는 모습을 생각하자면 의아할 것은 더욱 없었다.

하나 사마정은 단 한 순간도 그들의 움직임에서 눈을 떼지 않았다. 회전이 시작되기 전에 전쟁의 승패는 결정된다. 군략과 병법에 대해 잘 모르는 사마정이었지만, 본능적으로 그러한 사실을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드디어 회전이 시작되었다.

오태악이 불을 붙였고, 광제산은 화염산이 되었다. 계획은 남궁세가의 의도대로 흘러가는 것처럼 보였다.

하후령을 비롯한 폭렬단원 몇몇이 자연스럽게 대열을 이탈하는 모습을 보게 된 것 역시 그때였다.

‘적들이 매복조를 눈치챘구나!’

사마정은 순식간에 상황을 이해했다.

갑작스러운 산불과, 초원전사들의 우회 이동.

그리고 폭렬단 병력의 분산까지!

오태악이 가진 무력에 대한 절대적인 신뢰, 초원전사들이 가진 기동력의 우위, 열화궁의 자신감이 느껴지는 파격적인 행보였다. 물론 사마정의 입장에서야 그대로 당해줄 이유가 없었다.

곧장 천조회의 이름으로 마을 곳곳에 숨어 있던 남궁세가의 매복조를 모았다.

회전의 시작에 언제든지 급습을 준비하고 있던 남궁세가의 매복조가 모여든 것은 순식간이었다. 이후 그들은 아무것도 모르는 하후령과 폭렬단의 정예를 급습하여 포로를 사로잡았다.

사마정이 바라던 바였다.

“포로는 우리에게 있어 유용한 구명줄이 될 수도 있소. 특히 폭렬단주는 폭존이 유달리 아낀다고 하니 꼭 사로잡아야 하오.”

기실 쉽지 않은 일이었다. 안 그래도 거친 폭렬단의 정예다. 거기에 하후령은 그들 중 최고수였다. 어지간한 희생이 없다면 불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나, 다행히 매복조에는 창천검 남궁윤이 있었다.

어느덧 나이가 칠순(七旬)이 넘은 그는 언제나 세가의 이인자였다. 하나 남궁윤은 단 한 번도 불만을 표시한 적이 없었다. 자신을 알아달라고 목소리를 높이지도 않았다. 검제 남궁천의 그늘에 묻혀 비교적 뛰어난 솜씨에도 주목을 받지 못하던 그는 나이가 들어 일선에서 물러나 원로원에 들어가기 전까지도 무거운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리고 하후령을 상대할 때에야 남궁윤은 자신을 보여 주었다. 말이 아닌 검으로, 무공으로 그가 완연한 초인(超人)의 경지에 있음을 선보이며 하후령을 사로잡은 것이다.

남궁세가의 그 누구도, 심지어 가주인 남궁호량조차도 모르던 사실이었다.

남궁윤의 활약으로 남궁세가의 매복조는 손쉽게 폭렬단의 정예를 제압하고, 하후령까지 사로잡는 데에 성공했다.

그 모습을 확인한 직후 사마정은 흑백쌍노를 통해 오태악에게 서신을 전달했다. 폭렬단 정예를 비롯한 하후령을 인계받고 싶다면 대화를 하자는 짧은 내용이었다.

빠르게 움직인 흑백쌍노가 때마침 도착했을 때에는 본진의 뒤를 지키고자 분전(奮戰)하고 있던 남궁호욱과 그를 따르는 무인들이 처참하게 타오르고 있던 순간이었다.

오태악은 흑백쌍노가 전한 소식에 분노했으나, 결국 손을 더 쓰지 못한 채 등을 돌렸다.

그리고 지금 이 자리에 사마정을 비롯한 흑백쌍노, 그리고 창천검 남궁윤을 비롯한 매복조가 모두 모였다.

서로가 서로를 포위한 형태.

무거운 긴장이 전장을 감쌌다.

당장에라도 손에서 불을 뿜으며 달려나갈 것 같은 오태악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사마정을 무시무시한 눈으로 노려본다.

“마지막 경고다. 하후령을 내놓아라.”

“대화가 우선이지 않습니까?”

“더 이상 본좌를 우롱한다면 네놈들 모두를 죽일 것이다.”

하후령의 죽음도 아랑곳하지 않겠다는 그 거친 기세에 사마정이 난감한 웃음을 흘렸다.

‘정말 엄청나게 강렬하구나.’

무거운 전장의 분위기, 그 중심에 선 것은 작금 엄연히 오태악이었다. 그는 홀로 전장의 흐름을 뒤바꿀 정도의 강자였다.

아무리 흑백쌍노가, 사마정이, 남궁호량이 분전한다 한들 오태악을 막지 못할 것이다. 그나마 가능성이 있는 것은 남궁윤 정도다. 하나 남궁윤이라 하여도 오태악을 막아설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기세의 무게 자체가 다르다.

같은 초인의 영역에도 급이 있다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아는 사마정이었다.

오태악은 그런 초인들 중에서도 명백히 최상위에 위치한 괴물이다.

그런 그가 정녕 폭주하여 날뛴다면 어찌 어찌 희생 끝에 승리한다 하여도 남궁세가의 피해는 어마어마할 터였다.

‘어떻게 해야 합니까. 소장주.’

사마정은 웃음을 흘리면서도 혼란을 느꼈다.

빠르게 움직여 위험한 상황은 막았지만, 그의 거래 감각은 그리 뛰어나지 않았다. 정보를 수집하고, 모아서 그를 정리하는 것과 상대와의 거래에 능숙해지는 것은 엄연히 다른 일이다. 하나 지금 이 자리에는 누구 하나 기대 의지할 곳이 없다.

“후우…….”

한숨을 내쉰 사마정의 시선이 문득 하후령을 향했다.

봉두난발로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녀가 어느새 눈을 부릅뜨고 있었다.

하나 아무런 말을 하지 않는다.

그 흔한 살려달라는 말, 자신을 무시하고 싸우라는 말조차 하지 않는다.

스스로를 내던지는 말조차 오태악에게 짐이 될까 입을 닫은 것이다.

“대단한 여자로군.”

짧은 감탄을 토한 사마정이 다시금 오태악을 직시했다.

그는 참고 있었다.

최후의 인내심까지 발휘해 자신을 억누르며 사마정의 생각을 기다려주고 있었다.

시간을 오래 끌지는 못한다.

결국 사마정은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내당주를 먼저 넘겨주시지요.”

오태악은 말없이, 피투성이가 된 남궁호욱의 몸을 들어 허공으로 내던졌다.

“내당주!”

다급히 허공으로 뛰어오른 남궁호량이 그의 몸을 받아 들었다.

피투성이에 눈두덩까지 크게 부풀어 오른 그가 쓴웃음을 흘리며 입술을 읊조린다. 목소리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지만 그 입 모양만은 분명히 뜻을 전했다.

‘미안…… 하오.’

그를 알아들은 남궁호량의 두 눈에 붉은 핏줄기가 더욱 크게 치솟았다. 코끝이 빨개진 것도 눈에 선명히 보였다.

‘이걸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남궁호욱이 자신의 위험을 느끼면서도, 본진에까지 위험이 닿을 수 있다는 생각에 폭존 오태악을 맞아 끝까지 물러서지 않았다는 사실을 전해 들었다. 평소 그의 성정을 떠올리자면 이해할 수 없는 일이나, 또 이런 것이 남궁세가라는 생각도 들었다.

오랜 세월 뿌리를 내린 명문의 힘이란 것을 사마정도 새삼스레 체감한 것이었다.

“본좌는 참을성이 좋지 않다. 서왕이여.”

남궁호량을 곁눈질로조차 쳐다보지 않은 오태악이 사마정을 향해 또 한 번 경고했다.

아마 이번이 진짜 마지막.

그리 생각한 사마정이 고개를 주억였다.

흑노가 하후령을 들어 올려 오태악과 마찬가지로 허공으로 던졌다.

순식간에 허공을 난 오태악이 하후령을 받아든다.

“죽여…… 주십시오. 궁주.”

죽어가지만, 엄연히 살아 있는 그녀의 목소리를 전해 들은 오태악이 고개를 주억였다.

“벌은 전쟁이 끝나고 나서다.”

이후 지면으로 내려서 하후령을 폭렬단원에게 넘긴 오태악이 정면을 바라보며 이를 드러냈다.

“각오는 됐겠지?”

긴말은 없었다.

화르르륵-!

오태악의 온몸에서 뜨거운 화염이 치솟았다.

동시에 기다렸다는 듯 매복조가 뛰어들고, 남궁윤의 검이 오태악의 머리를 내리쳤다.

강기와 열기가 부딪치며 폭음이 울려 퍼졌다.

오태악이 사마정을 향해 뛰어나갔고, 남궁호량이 본능적으로 반응하여 앞을 막아섰다.

또다시 움직인 남궁윤과 남궁호량, 두 사람의 검이 오태악을 막아선다.

“쿠에엑-!”

핏물을 한 움큼 쏟은 남궁호량의 신형이 비틀거린다.

“적을 짓밟아라. 뜨거운 대지의 용사들이여!”

폭렬단이 매복조와 대립하며 전장에 열기를 더한다.

바얀테무르가 이끄는 기병들과 남궁세가의 격돌이 또다시 이어졌다.

전장에 불이 붙어 순식간에 두 번째 회전이 시작되었다. 대체로 지친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분전하며 균형을 이루는 듯했으나, 문제는 달리 있었다.

“모두 죽여주마!”

거칠게 움직이는 오태악의 열기가 대치한 남궁윤을 포함한 주변의 남궁세가 무인들을 일거에 휘감는다.

비명이 울려 퍼지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견디지 못한 남궁윤의 입가에도 가는 핏줄기가 흘렀다.

폭렬단과 초원전사도 강했다. 하나 폭존 오태악은 그야말로 지나치게 강했다. 그는 전장의 폭군이었다. 지배자였으며, 포식자였다.

이 전장의 그 누구도 오태악을 막지 못했다.

“커억-!”

결국 남궁윤마저 핏물을 쏟으며 허공을 날았다.

오태악의 시선이 자연스럽게 사마정을 향했다.

하나 사마정은 그를 바라보고 있지 않았다.

기대했던 좌절 역시 비추지 않았다.

“오셨다.”

그 짧은 음성에는 힘이 가득했다.

신뢰가 담겨 있었다.

시야에 보이는 짧은 평야를 지나 작은 언덕 위로, 천하제일의 부(富)를 상징한다고 볼 수 있는 황금팔마(黃金八馬)의 깃발이 펄럭인다.

만금장이다.

그 선두에는 소장주 황준우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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