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7화
제 167화
전장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봉우리 위.
차분한 시선으로 남궁세가의 분투와 오태악의 등장, 사마정의 한 수까지 지켜보고 있던 진무영이 저도 모르게 입을 크게 벌리며 하품을 할 때였다.
전장을 넘어선 먼 언덕 뒤편, 조용하지만 강렬한 기세가 높은 파도처럼 차오른다.
그리고 황금팔마의 기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드디어……!”
안력에 내공을 집중해 나부끼는 깃발을 확인한 진무영이 큰 감탄을 토한 후 곧장 몸을 움츠렸다. 이후 기척을 더욱 죽이며 숨조차 내쉬지 않는다. 짧은 시간, 정적이 흐른 끝에야 안도의 미소를 흘린 진무영이 홍조 띤 얼굴로 고개를 주억였다.
“아아, 드디어 왔군요. 드디어. 너무나, 너무나 기다렸습니다.”
최대한 은밀해야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감출 수 없는 감정과 감탄이 쏟아지듯 터져 나온다.
당장에라도 눈을 돌려 기다렸던 이의 얼굴을 보고 싶다.
하나 그럴 수는 없었다.
상대는 시선이 닿는 것만으로 그의 존재를 눈치챌 수도 있었다. 모르는 척, 아닌 척, 멀리서 그의 존재감을 느끼고 전장의 분위기를 살펴야 한다. 진무영은 생에 처음으로 가슴 한편이 설레는 감정을 느꼈다. 누군가에게 한 번쯤은 있을 조심스러운 접근조차 그에게는 처음이라는 새로운 자극일 뿐이다.
언덕 위, 선봉에 서 있던 황준우가 기수의 깃발을 뺏어 들며 앞으로 돌진하는 것이 느껴졌을 때에는 활짝 피는 미소가 지어졌다.
‘과연, 그림 같은 등장이지 않습니까. 내 영혼의 우상(偶像)이여……!’
만금장의 도착은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을 정도로 빨랐다.
“흑아의 소장주가 오셨다!”
“백아의 소장주다, 소장주!”
흑백쌍노가 가면 아래 활짝 미소 지으며 서로를 바라본다.
오태악의 위세에 눌려 무겁던 공기가 단숨에 풀어지는 것 같은 느낌이다.
등장만으로 격렬하게 날뛰던 전장의 흐름이 멎었다.
오태악을 비롯한 폭렬단원과 초원전사들, 그리고 남궁세가 또한 저도 모르게 시선을 만금장의 깃발로 돌린 것이다. 모습을 드러낸 황준우가 기세를 흘렸고, 은연중에 전장의 모두가 그에 자극받은 탓이었다.
‘물자보다 먼저 움직이겠다고 하시더니, 위기를 직감하셨는가.’
사마정은 얼마 전 황준우에게 전달받았던 서신을 떠올리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때문에 전황이 불리해진 순간, 가능하면 황준우가 올 때까지 시간을 끌고자 하였는데 오태악의 거친 성정과 빠른 회전 진행에 휩쓸려 버렸다. 자칫 오태악이라는 거대한 화산을 막지 못해 무너질 뻔했던 위기였다.
황준우가 가진 무서울 정도의 날카로운 예감이 전장의 흐름을 뒤바꾸었다.
“고작 상가 따위가 무림의 일에 연관하겠다는 겐가.”
자신이 어찌하여 시선을 돌렸는지 명확한 이유는 모르지만, 본능적으로나마 기세에서 밀렸다고 생각한 오태악이 곧장 기운을 더욱 강하게 끌어올려 앞으로 양손을 크게 휘저었다.
거대한 화염의 벽이 순식간에 사방(四方)으로 퍼져 나가며 정확하게 남궁세가의 무인들만을 관통한다.
“끄아악-!”
“커억-!”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다루기 힘들다는 열양강기를 자유자재로 부리며, 일수(一數)에 수십이나 되는 남궁세가의 무인을 학살한 오태악이 목소리를 높였다.
“기껏해야 일백도 안 되는 상가의 애송이들에 불과하지 않은가? 뜨거운 대지의 용사들아, 우리가 마실 붉은 술과 따뜻한 고기가 더욱 늘어났을 뿐이로다!”
고작 일백.
시선을 돌리고 저도 모르게 긴장을 하고 있던 폭렬단 무인들과, 초원전사들의 눈에 드디어 만금장의 모습이 확실하게 보였다.
그야말로, 많아 봐야 고작 일백 내외다.
심지어 상가의 무인들이다.
순간적으로나마 흐름이 뒤바뀌었다는 느낌을 받았지만 착각에 불과했다.
“우와아-!”
함성이 또 한 번 울려 퍼졌고, 주먹을 허공으로 내뻗은 오태악이 크게 외쳤다.
“싸워라! 죽여라! 적에게는 피를! 아군에게는 승리를!”
“새로운 우내십존이라고 했던가, 저 녀석.”
흔들렸던 기세에 순식간에 불과 기름을 동시에 부어 버린 오태악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에 짧은 감탄이 스쳤다.
“구시대의 유물보다 낫군.”
그 짧은 시간 사방으로 날뛰는 듯하던 오태악이 순식간에 사마정을 노렸고, 흑백쌍노가 힘을 합쳐 그 앞을 막아서는 모습이 보였다.
전투가 아직 이어지고 있다.
“먼저 가야겠다. 빨리 쫓아와.”
“깃발을 들고 가야 합니다, 소장주!”
황준우가 앞으로 뛰어 나가려는 순간 전왕이 외쳤다.
의문을 느끼면서도 황준우는 그의 말을 따라 기수의 깃발을 빼앗아 한 손에 들었다.
그리고 전방을 향해 뛰쳐나갔다.
마치 벼락과도 같은 그 움직임을 만금장 무인들은 누구도 따를 수 없었다.
늘 곁에 있던 경호와 홍산마저 잠깐이나마 정신이 멍해질 무렵의 그 순간.
“뭣들 하고 있습니까! 다들 빨리 소장주의 뒤를 쫓읍시다. 함성은 최대한 크게! 거기 홍 무사님께서는 내력을 섞어 만금장이 남궁세가를 지원하기 위해 왔다고 온 힘을 다해 외쳐 주십시오! 그리고 거기검께서는…….”
전왕이 외쳤다.
“와아아-!”
“만금장이 남궁세가를 지원하러 왔다!”
황준우가 펄럭이는 깃발을 들고 전장에 도착한 순간 뒤따르듯 만금장 무인들의 함성이 귀를 찌르며 울려 퍼졌다.
“내가 바로 거기검 경호다!”
뒤이어 터져 나온 것은 거대한 폭발.
엄청난 크기의 강기를 휘둘러 지면을 내려찍은 경호가 가장 선두에 서 외치는 목소리도 전해졌다.
전장 한가운데 솟아 있는 황금팔마의 깃발은 두어 배는 확대되어 전장 모두의 시선을 또 한 번 사로잡았다.
“만금장!”
누군가가 외쳤고, 황준우가 동의하듯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래, 우리 만금장이 왔다.”
이제야 전왕의 생각을 조금 알 것 같다 느낀 황준우가 다가오는 폭렬단 무인의 목을 가볍게 베어냈다.
동시에 황준우의 몸 주변으로 예리하고 날카로운 황금빛의 강기가 꽃잎처럼 피어올랐다.
“저, 저 무슨……!”
“저게 다 강기란 말인가!”
경악하는 무인들을 향해 고개를 끄덕인 황준우가 손을 휘저었다.
“비효율적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이런 허세가 조금 필요한 때인 듯해서 말이야.”
피어나는 꽃잎처럼 펼쳐졌던 강기가 허공을 날아 사방으로 흩어져 학살을 자행했다.
서거걱-!
섬뜩한 소리와 함께 말, 사람, 무기를 가리지 않고 모든 것이 잘려나간다.
황준우는 그 일수에 일백에 가까운 무인을 베어 넘겼다.
경악과 감탄, 혼란과 공포가 그를 중심으로 뒤엉키며 폭발하기 전의 화산처럼 꿈틀거린다.
“오랜만이야, 이런 감각.”
수백, 수천의 적에 둘러싸여 감정의 파도에 강제로 떠밀려 버린다. 살에 맞닿을 듯 다가오는 검보다도 무서운 그 악의는 사람의 정신을 순식간에 오염시키고, 피폐하게 만들어 버린다.
한때 황준우 역시 이 무거움에 짓눌려 괴로워하기도 했다.
지금 역시 마냥 마음이 편한 것만은 아니었다.
이 감정의 화산이 폭발하면…….
“괴물!”
“악마란 말인가!”
지금 전해지는 누군가의 외침처럼, 그런 끔찍한 존재가 된 듯한 기분이 들고도 하였으니 말이다. 하나 무너지지 않는다.
전생에는 죽지 않고 살아남기 위한다는 신념으로 버텨 냈다.
그리고 지금은 그런 어두운 감정의 혼돈 속에서도 황준우를 지켜 주는 든든한 버팀목이 언제나 등 뒤에 서 있었다. 실제로 이 자리에 없다 하여도 느끼고 들을 수 있는 그 목소리들은 황준우에게 있어 구원이자 희망이었다.
전생의 것보다 강한, 현생의 신념이었다.
생각해 보면 전생의 마지막, 백두산에서의 일전은 황준우가 그런 감정의 격류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지듯 폭발했던 때였다. 싸우고, 죽이고, 모든 것을 끝내 버리고 싶은 감정은 이성을 훨씬 압도하여 그를 짓눌렀으니 말이다.
아주 어쩌면 당시에는 알 수 없던 그의 이성은 누군가 스스로를 말려 주기를 바랐을지도 몰랐다.
물론 지금은 달랐다.
그때처럼 감정에 휩쓸려 자행하는 살육이 아니었다.
황준우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힘에 죽어 나가는 사람들의 면면을 똑똑히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네놈은 뭐냐!”
노호성과 함께 오태악의 열양강기가 황준우의 가슴 한복판까지 닿았다.
빠르고 강렬하다.
전생에 그의 손에 일수에 무너졌던 철호귀장과는 격이 다른 진짜 존(尊)의 이름이 어울릴 만한 실력이다. 격전 당시 순수하게 위력만으로 황준우를 감탄시킨 마교 오대마종 중 한 명이었던, 멸부조차 마폭기를 사용한 이후에야 오태악의 힘에서 느껴지는 것과 같은 위력을 만들어 냈었다.
황준우는 그 힘을 이번에는 지근거리에서 정면으로 받아 냈다. 뜨거운 불길이 활활 타오르는 오태악의 손을 말아 쥔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확실히 저릿하네. 힘이 좋아.”
얼마 전에 멸부의 힘은 막을 수 없다고 느꼈다.
막는다면 분명 적지 않은 반동이 찾아와 내상을 입었을 터였으니 말이다. 한데 이번에는 막았다. 그날 이후로도 황준우는 조금도 쉬지 않고 강해져 왔다. 비록 벽을 넘어설 정도의 압도적 성장은 없었지만, 정체되어 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황준우는 여전히 지금과 같은 중원의 상황에 이 힘이 가족을, 모두를 지킬 수 있다고 믿고 있었으니 말이다.
“……!!”
오태악은 경악에 잠긴 눈으로 황준우를 바라보았다.
하나 그 역시 우내십존이라는 이름을 거저먹기로 따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하듯 단숨에 다음 공격을 연계해 왔다.
화르륵-!
피어오르는 불이 오태악의 전신을 가득 뒤덮으며 황준우의 옷 앞섬을 불태우기 시작한다.
“열화궁이라더니, 그렇게까지 해도 본인은 뜨겁지 않나 보지?”
황준우는 헛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황금빛 강기가 발밑에서 장막처럼 치솟아 오태악을 덮은 것 역시 순식간이었다. 타오르던 불꽃이 황금빛 장막에 잡아먹히듯 삼켜지며 사그라진다.
“실전에 사용해 본 건 처음인데, 이것 제법 쓸 만하네.”
천마 용중호의 북명강기를 흉내 내어 만든 자신의 무공을 바라본 황준우가 뒤로 살짝 물러서며 흡족한 목소리를 흘린다.
그사이 오태악을 덮었던 황금빛 장막은 붉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이윽고, 콰직-! 거리는 소리와 함께 넘실거리는 화염이 황금빛 장막을 모두 집어삼켜 버렸다.
“크아아! 빌어먹을 놈이!”
오태악은 괴성을 내지르며 다시 한 번 황준우를 향해 사나운 들소처럼 돌진했다. 황준우는 그런 오태악의 공격을 흘려내듯 밀어낸 후 주변 전장을 바라보았다.
두 사람의 싸움이 시작되며 자연스럽게 전장이 이동하고 있었다. 그에 따라 전투가 느슨해지고 있음도 사실이었다.
‘그리고 저 녀석들은 빠지려는 건가?’
전장이 이동하며 흐름이 뒤바뀌고 있는 중심에는, 바얀테무르를 비롯한 초원전사들이 있었다. 얼핏 보면 괴성을 내지르고 싸움을 하고 있는 그들은 조금씩 전장에서 물러나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듯했다.
황준우의 입가로 짧은 웃음이 흘렀다.
“죽여 버리겠다!”
그를 조소로 생각한 오태악이 전력을 다한 열양기를 양손으로 모아 구(球)의 형태로 뭉쳐 황준우를 향해 내던졌다.
‘이건 뭐 염구(炎球)의 술(術) 아냐?’
거대한 열양강기의 집합체가 날아오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술법 중 하나를 떠올렸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염구의 술도 대단하지만 지금 오태악이 내던진 열양강기만은 결코 못 할 터였다.
“흥분했다고 해서 아무것도 가리지 않겠다는 건가? 과격을 벗어나 미쳤군!”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열양강기를 벤다고 하여도 그 폭발이 주변을 덮쳐 사방 일대에 피해를 끼칠 게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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