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69화
제 169화
“진화옥의 봉인이 해제되고, 불이 꺼졌군요.”
살랑살랑.
느린 손짓으로 하얀 백우선(白羽扇)을 흔드는 사내의 음성에 맞은편에 앉은 여인이 어이없는 음성을 흘렸다.
“진화옥? 그런 걸 다른 사람한테 줬단 말이야?”
“사연이 있어서 말이지요. 후후…….”
“너란 녀석은 정말 무슨 생각인지.”
여인은 답답한지, 자신의 가슴 한가운데를 두어 번 두들기고는 눈을 빛냈다.
“한데 그 불을 껐다고? 대체 누가? 아, 설마…… 그 녀석인가?”
그 말은 타인을 향한 질문이라기보다는 스스로 답을 찾아 나가는 과정이었다. 가는눈을 길게 늘이며 웃음 지은 사내는 부채로 입가를 가리며 고개를 주억였다.
“그가 아니면 살아 있는 인간 중에 누가 그 불을 끌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대단하네요. 그새 또 성장한 것이란 말이지요. 후후후.”
“어이구, 마치 제가 가르친 것처럼 말한다?”
“전혀 없는 말은 아니지 않습니까?”
“잘나셨네요. 그런 식으로 치자면 나도 한몫 거들었거든. 막혀 있는 길에 나아갈 수 있는 방향을 제시해 줬으니…… 야!”
말을 하는 동안 사내는 흔들고 있던 백우선을 향해 입김을 후후 불었고, 그 모습을 확인한 여인이 얼굴을 붉히며 외쳤다.
“그거 내 거거든! 네 건 어디 놔두고 남의 물건으로 지랄이야!”
“아무리 그래도 지랄이라니요. 세상 사람들이 들으면 기겁합니다. 천하의…….”
“시끄러! 이 빌어먹을 놈아!”
작은 방 안, 한바탕 폭풍 같은 소란이 오갔다.
전장, 폭존 오태악의 죽음은 조용했다.
하나 그 파급이 적은 것은 아니었다.
전장 모두를 떨게 하였던 폭군은 대지조차 녹여 버린 거대한 불의 벽까지 세웠으나 졌다.
패배했다.
조금 거리를 벌려 사태를 지켜보던 폭렬단원들은 믿기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조용한 군주의 죽음을 따르듯 모두가 말을 잃은 채였다.
“으아아…… 아아…… 아악!”
그 틈새를 비집고 날카로운 고성(高聲) 하나가 뛰쳐나왔다.
하후령이다. 이미 흑백쌍노에게 당해 처참한 몰골이 된 그녀는 산발이 된 머리카락이 얼굴에 모두 눌어붙을 정도로 고개를 내저으며 손을 내뻗는다. 앞으로 뛰쳐나가려는 듯 다리에 힘을 주지만 의미가 없었다. 무릎이 바닥에 질질 끌리다가 제자리에 무너져 내릴 뿐이다.
“아아……!”
길게 내뻗은 손이 처량하게 오므라들고 펴지기를 몇 번이고 반복하다 이내 힘없이 꺾였다.
마치 떨어지는 한 떨기 꽃처럼 대지에 완전히 드러누운 그녀를 안아 든 폭렬단원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그만하시오, 단장. 우리가 졌소. 궁주께서는 죽었소.”
눈물을 쏟아 내지만 목소리는 덤덤하기 그지없다.
하후령은 그런 그를 찢어 죽일 듯 노려보았다. 하나 당장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도 없었다.
사마정과 흑백쌍노에게 당한 심각한 내상이 그녀를 좀먹고 있었다. 격렬한 외침도 사실상 위험한 수준이었다.
결국 그녀는 다음 목소리를 내지조차 못한 채 의식을 잃었다.
그보다 멀리 떨어진 거리에서, 말 위에 앉아 그런 오태악의 죽음을 바라보던 바얀테무르는 몇 번이나 손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표정 역시 쉴 새 없이 일그러지고 펴졌다.
“대장…….”
곁으로 다가온 부관이 조심스러운 목소리를 흘렸다.
“가자. 우리가 졌다.”
이 전장은 본래 그들의 싸움이 아니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패배를 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또한 적은 그를 납득할 수 있게끔 할 정도로 강했다.
아니, 너무 압도적으로 강했다.
바얀테무르는 그 사실을 머릿속에 새기며 말 머리를 돌렸다.
그 뒤를 살아남은 초원전사들이 따랐다.
“무술(武術)이라…….”
죽은 오태악을 바라보며 황준우가 작게 읊조렸다.
무술이란 무도의 기술을 뜻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방금 전 황준우가 보인 무공과 술법의 조화 역시 이런 갈래에 속할 수 있다는 것이다. 술법에는 재능이 없으니 무공으로 밀어붙이자고 한 생각이었는데, 제법 잘 먹혀들었다. 누군가가 보았다면 무식한 놈이라며 손가락질했을지도 모르지만 아무렴 어떤가, 결과는 훌륭했다.
‘전왕 녀석 또 칭찬해 줘야겠는걸.’
가볍게 던진 한마디와 만류귀종이라는 말이 황준우에게 이와 같은 생각을 하게 했다.
진화옥과 공명하여 황준우의 상단전을 크게 개방하였던 늠군의 관은 또다시 잠잠해졌다. 덕분에 이전과 같은 해방감이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아무렴 상관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황준우는 분명 그 감각을 느꼈고, 사용했다.
결국 기억하고 있다는 뜻이다. 망망대해와 같던 바다 위로 확실한 목적지를 가리키는 표지판이 세워졌다.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남은 일은 시간이 해결해 줄 터였다.
“자, 그러면 마무리를 지어 볼까.”
무릎을 꿇은 자세 그대로 숨을 거둔 오태악에게서 시선을 거둔 황준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는 지친 얼굴을 한 폭렬단과, 믿을 수 없는 장면을 목격하여 어찌할지 모르고 있는 남궁세가의 무인들이 보였다.
“무, 무신(武神)…….”
그런 남궁세가의 무인들 중 누군가가 저도 모르게 읊조리듯 말하였고 가볍게 몸을 떨었다.
지금의 무림에 있어 마치 금기(禁忌)처럼 지정된 단어를 꺼내 들었다.
그 이름은 전 무림에 있어 치욕이었으며, 공포였고, 또한 숭배였기 때문이다.
누군가 말도 안 된다고 소리를 칠지도 모른다. 그의 멱살을 잡고 내동댕이쳐버릴 수도 있다.
현재 무림에서 무신이라는 이름이 가진 값어치는 그런 것이었다.
심지어 상대는 여태껏 남궁세가와 적대해 왔던 만금장의 소장주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무신…….”
“정녕…… 무신이…….”
마치 전염병처럼, 모두에게 금기된 언어가 자연스럽게 스며들고 파고든다.
그 정점은 검을 높이 뽑아 든 남궁호량의 외침이었다.
“만금장의 무신이 우리를 위해 검을 들었고, 적을 물리쳤다!”
남궁세가의 가주가 무신의 이름을 칭했다.
마치 거대한 파도가 덮친 듯 잠시 남궁세가 전체가 술렁였다.
하나 말 그대로 파도가 지나가는 것 같은 짧은 시간이었을 뿐.
곧 누군가가 용기를 내어 목소리를 높였다.
“만금장의 무신이 승리했다!”
무신이 재림하였다.
“우내십존이 죽었다!”
천하에서 가장 이름 높은 무인 중 하나가 목숨을 잃었다. 그는 이름이 아깝지 않을 만큼 강했고, 무시무시했던 그들의 적이었다.
함성이 터져 나왔다.
“우리, 남기가 승리했다!”
남궁호량이 내공을 실어 외쳤고 모두가 함성을 터트렸다.
오늘 날, 남기는 우리가 되었다.
6. 남기연합
수많은 아픔과 기쁨이라는 여운을 남기고 오대세가 중 하나인 남궁세가와 중립제일세력으로 이름 높은 열화궁의 전쟁이 종식되었다.
승자는 모두가 예상했던 대로 남궁세가였다.
하나 그 누구도 예측지 못한 일도 있었다.
폭존 오태악의 상식을 뛰어넘는 무위와, 그를 쓰러트린 신성(新星)의 등장.
만금검존(萬金劍尊), 황준우.
무림에 이름을 떨치자마자 곧장 우내십존의 위(位)에 이름을 올린 만금장의 소장주는 이제 고작 약관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작금의 무림에 많은 현실을 시사(示唆)해 주었다.
우선 가장 중요한 것은 전쟁의 판도였다.
무림의 전쟁은 역시 군부의 전쟁과 다르다.
직접 전장에 있던 당사자들의 이야기를 들어 본 결과, 열화궁은 강했다고 하였다. 적은 수로 훨씬 더 압도적인 병력을 가진 남궁세가를 압도했다.
어찌하여 그들을 도왔는지 모를 초원의 전사들 또한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놀라운 무예 솜씨를 보여주었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도 그들만으로 남궁세가를 뛰어넘을 수는 없었다.
가장 큰 위협은 다름 아닌 폭존 오태악이었다.
우내십존의 일좌(一座)로 이름 높은 그는 단신으로 전장에 군림한 괴물이었다.
남궁세가에 숨겨져 있던 또 다른 초인, 창천검 남궁윤이 분투하였지만 결국 십존의 이름을 넘어서지 못하고 피를 쏟았다. 가주 남궁호량도 다르지 않았다.
단 한 명의 고수가 전장을 지배했다.
그리고 그런 지배자 역시 또 다른 고수의 검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무림의 전쟁이란 결국 고수의 수와, 경지에 의해 좌지우지될 수밖에 없다.
그 경지가 십존쯤 되는 고수라면 그 파급력은 감히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였다.
많은 호사가들이, 무림문파가, 세가가 그 사실을 깨달았다. 고수의 숫자가 중요하다. 전통의 남궁세가는 승리했지만 결국 신성 만금검존이 없으면 패배했을지도 모른다. 때문에 누군가는 이 승리를 남궁세가의 행운이라며 비웃음을 비추기도 했다.
그런 만큼 황준우의 이름은 강호에 더욱 빛을 뿌렸다.
만금검존.
기껏해야 후기지수라 불려야 될 나이에 무림의 정점에 이름을 새긴 것은 의미가 깊다. 아니, 그 정도를 뛰어넘어 역사적으로 전례가 몇 없던 일이다. 고작 약관이라는 나이에는 최초다.
때문에 호사가들은 만금검존이 다음 대의 무림제일고수라고 공공연히 떠들고도 다녔다.
물론 반발하는 무리도 있었다.
대다수가 우내십존이라는 이름을 가깝게 두고 있던 각 지역의 최고수들이었다.
그들이 외쳤다.
고작 약관의 애송이일 뿐이다.
만금장이 돈으로 만든 과장된 소문이다.
상가의 자손을 무림 족보에 집어넣다니 치욕이라며 분을 참지 못하고 남기까지 쫓아가겠다며 나선 이들도 제법 많았다.
그리고 당당하게 승자가 되어 새로운 우내십존의 이름으로 돌아온 이는 아무도 없었다.
이제는 소주대인의 이름만큼이나, 강호무림에서는 그보다 더 만금검존 황준우의 이름이 높아졌다.
그런 황준우가 내뱉은 한마디 선언은 현재 중원강호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다.
“누군가가 말했듯 이 전쟁은 남궁세가의 승리가 아니다. 바로 우리 남기의 승리다.”
남궁세가의 가주 남익덕, 남궁호량이 그 말에 동의했다.
하오문을 짓누르고 새로이 강호에 수위를 다투는 정보단체로 이름 높은 천조회주가 지지를 표했다.
이러한 일련의 사건이 가지는 의미는 너무나 컸다.
그리고 그를 인정하듯 남궁세가는 곧장 정의회에서 탈퇴를 선언했다. 같은 식구의 위기를 나 몰라라 한 이들과 한배를 탈 수는 없다는 명분이다.
정의회의 입장에서는 남궁세가를 향해 무슨 말도 할 처지가 되지 못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남궁세가가 정의회를 빠져나왔다.
최근 들어 만금장과 남궁세가, 그리고 천조회의 만남이 잦아졌다는 것은 남기 내에 모르는 이가 없는 소문이었다.
남기는 화합(和合)이라는 이름으로 새로운 미래를 준비해 가고 있었다.
“그래서, 열화궁 측은 금자 이십만 문을 배상하고 이십 년 봉문을 약속했다고?”
황준우의 물음에 남궁호량이 고개를 주억였다.
“예. 충분히 납득할 수 있는 조건입니다.”
전쟁의 패배는 싸움에서 흘린 피로 모든 것이 끝나지 않는다. 패배자 측은 어떻게 해서든 승자가 흘린 피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
이는 군부, 무림 모두 다를 것이 없었다.
때문에 패배는 가혹하고, 잔인하다.
봉문을 선언해야 하는 열화궁의 입장에서 금자 이십만 문이란 그런 잔인함의 상징과 다름이 없다. 아마 열화궁은 밑바닥 장판까지 뜯어 남궁세가에 보상을 마련해야 할 것이다.
당연하게도 열화궁은 그 정도까지 양보하고 싶지 않았겠지만, 듣자하니 남궁호량이 열을 내다 못해 피까지 토하며 목소리를 높였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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