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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70화 (170/373)

학사재생 170화

제 170화

이만한 잔혹함을 견딜 수 없다면 봉문이 아닌 멸문(滅門)을 선택하라고 말했다던가?

‘납득할 수 있는 수준이 될 때까지 몰아붙인 거지.’

남궁호량은 자신들이 압도적 승자임을 자각하고 행동했다. 또 한편으로는 열화궁이 가진 무공에 대해서는 조금도 언급하지 않았다. 한계까지 몰아넣은 듯하지만 일말의 구멍을 남겨 두어 열화궁으로서는 결사항전을 선택할 수 없게 하였다는 뜻이다. 남궁호량이 가진 정치적 감각도 나쁘지 않은 편이다.

전장에서의 기질 역시 부족하지는 않은 수준이라니, 새삼스레 그가 왜 가주가 되었는지 또다시 느낄 수 있는 부분이었다.

‘적어도 단순히 검제의 꼭두각시만은 아니었다는 거지.’

나쁘지 않다.

그렇게 생각하며 황준우가 물었다.

“근데 봉문 이십 년은 과하지 않아?”

“그 조건은 열화궁 측이 원한 바에 가깝습니다.”

“열화궁 측에서?”

황준우가 고개를 돌려 전왕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 시간이 필요하다 생각했을 겁니다. 남궁가주께서 무공은 남겨 두셨으니, 그를 이용해 다시 성세를 회복해야 하는 입장인 열화궁은 괜히 무림에 이름을 남겨 다른 적의 검이 향하기를 바라지 않았겠죠. 물론 그렇다고 해도 주변에서 지켜만 보고 있지는 않겠지만…… 그쯤이야 알아서 할 일이지요.”

빚을 얹고, 자존심도 내던졌으며, 수많은 위험부담을 안게 된 열화궁의 입장은 처참한 정도다.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그 사실을 느꼈지만 굳이 입 바깥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들은 승자였다. 곧, 열화궁을 그렇게 만든 장본인이었다. 이제 와서 처참이니, 처량이니 등의 동정을 표하는 것은 위선(僞善)보다 못한 악행(惡行)이다.

“좋아, 그건 넘어가고. 다음은…….”

“제갈세가가 정의회 탈퇴를 선언했습니다.”

사마정이 말했다.

“제갈세가도?”

예상외의 소식에 황준우와 남궁호량의 고개가 동시에 돌아갔다. 전왕 역시 예상치 못했는지 입을 떡하니 벌렸다.

남궁세가가 가장 먼저 탈퇴하며 달리 오대세가 연맹이라 불리던 정의회가 한 번 흔들렸다. 위명이 많이 줄었다고는 하나 남궁세가는 중원 내에서도 비옥한 땅인 남기 전체에 영향력을 가지고 수입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리고 그중 제법 많은 양이 정의회를 지원하는 자금으로 쓰였는데, 그 돈이 일시에 빠져나간 것이다. 적지 않은 타격을 받은 정의회의 입장이었지만 명분이란 것에서 앞서는 바가 없기에 입을 닫았다.

그 밑바탕에는 아직 나머지 사대세가가 굳건하다는 자신감 역시 깔려 있었다.

정의회는 여전히 무림맹과 함께 무림이대세력이라 불리기에 부족함이 없었다는 뜻이다.

한데 제갈세가가 탈퇴를 선언했다.

순식간에 균형이 깨져 버린 것이다.

“제갈세가 측의 명분은 무엇인가요?”

전왕이 눈을 빛내며 물었다.

그가 아는 정치란 곧 명분이다.

아무런 이유 없이 제갈세가가 정의회를 탈퇴한다 그러면 나머지 삼대세가가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정의회 탈퇴와 같은 큰 상황에 정치적인 요소가 없을 리가 없다. 이러한 전왕의 상식은 너무나 허망하게 깨졌다.

“어차피 이름만 올리고 얻는 것도 없이 돈만 가져다 바치는데 신물 난다더군요.”

“…….”

사마정의 말에 장내에 짧은 침묵이 감돌았다.

“크흠…….”

잠시 헛기침을 한 남궁호량이 사마정을 바라보았다.

“진짜 그렇게 이야기했습니까?”

사마정은 음성으로 대답하는 대신 고개를 주억였다.

“뭐지, 대체 뭘 믿고 있는 거지?”

전왕은 혼돈에 빠진 듯 머리를 부여잡았다.

“아무리 제갈세가라고 하여도…… 어쩌면 다음 전쟁은…….”

남궁호량은 눈을 가늘게 뜨고 깊은 생각에 빠져든다.

잠시 그 모습을 바라보던 황준우가 손을 내저어 수(水)의 기운을 흩뿌렸다. 혼란에 휩싸인 듯했던 두 사람의 표정이 삽시간에 맑아졌다. 시선은 놀라움에 가득 찬 채 황준우를 향한다.

“물에는 안정과 회복, 청량함이 있지. 오행(五行)이란 재미있단 말이야. 어쨌든 말이지. 제갈세가의 일은 그쪽이 알아서 할 것 아니야? 지금 당장 우리가 고민한다고 해서 얻을 것도 없고 말이지.”

황준우의 말에 두 사람이 꿈에서 깬 듯 고개를 주억였다.

옳은 말이었다.

충격적인 소식이었지만, 제갈세가가 어떠한 행보를 밝히지 않은 이상 지금의 남기에는 큰 의미가 없는 말이다. 안 그래도 강호 활동이 거의 없는 제갈세가가, 그냥 하는 것 없이 돈만 나가서 싫다는 말로 탈퇴를 선언한 이상 의미를 추측하기도 힘들었다.

황준우의 말이 옳았다.

“자,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이야기로 넘어가자. 남기연합(南畿聯合)이라고 했던가?”

“예. 그 이름이 좋을 것 같다고 이야기 했었습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두 달 전 전쟁이 끝났다. 그리고 그 전장을 수습하며 이 자리에 모인 네 사람은 먼저 대화를 나눈 전적이 있었다. 그 중심 안건이 바로 정의회 탈퇴와 이 남기연합에 관련된 것이었다.

만금장과 남궁세가의 화합. 또한 천조회의 합류.

세간에서 이는 남기의 통일이라고까지 불리고 있었다.

전왕은 따로 떨어져 있기보다는 이를 하나로 묶을 이름이 필요하다고 하였다. 설령 겉으로 무언가 달라지는 바가 없더라도 그 하나의 이름이 남기에 속한 무림인 모두에게 소속감을 줄 테니 말이다.

“달리 이름 고민하기도 귀찮으니, 그건 그렇게 넘어가기로 하고. 남궁세가 측은 어때? 여전히 시끄럽나?”

열화궁과의 전쟁은 높은 절벽 사이에서 등을 돌리고 있던 남궁세가와 만금장이 서로를 바라보게 하는 역할을 했다. 하나 단지 그것만으로 오랜 시간 척을 져왔던 두 세력이 하하 호호 웃으며 무작정 손을 잡을 수 있는 건 아니다.

과정이, 그리고 시간이 필요했다.

“아시다시피 남궁윤 숙부를 제외한 몇몇을 제외하고는 원로 대다수가 반대하고 계십니다. 그 외로도 원로원에 줄을 댄 가문의 요직들도 탐탁지 않아 하고요.”

“고생이 많아. 요즘 욕 많이 먹는다며.”

사마정으로부터 대충 소식은 전해 들었다.

근래 가장 남궁호량이 많이 듣는 말은 만금장에 꼬리치는 강아지라고 하더라. 열화궁과의 전쟁 이후, 어째서인지 조금은 변한 듯한 남궁호량은 황준우의 그 말에 몸을 떨면서도, 가볍게 고개를 숙였다.

“과찬이십니다.”

“내당주 측도 고생이 많다지?”

황준우의 질문에 남궁호량의 표정이 또 한 번 묘해졌다.

그날의 전쟁 이후 바뀐 것은 일에 대한 적극성이나, 성격만이 아니었다.

남궁호량과 남궁호욱 두 사람의 관계도 오묘하게 개선되었다. 평생을 서로에게 척을 진 채 살아갈 줄로만 알았던 두 사람이 근래 들어서는 마음이 맞는 일이 제법 많아진 것이다.

겁쟁이라고 생각하였던 남궁호욱은 가문을 위해 후방에서 분투하며 폭존을 막아섰다. 피투성이가 되어 죽을 뻔하였던 그를 받아 들며 울부짖은 남궁호량의 모습 역시 누가 보아도 진심이었다.

그러한 사실들이 하나로 합쳐지며 두 사람의 관계가 조금은 바뀐 것이다.

물론 여전히 서로를 보고 으르렁거릴 때가 더 많기는 하지만, 이전과 같은 적대감은 없었다.

때문에 사마정은 걱정이 하나 늘었다.

두 사람이 다투어야지 황준우를 향한 복종을 요구하기 편하다. 한데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도 황준우 측에서는 달리 무슨 말이 없다.

‘소장주께서 이를 모르실 리는 없어 보이고…….’

걱정이 늘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우선 예정대로 중립을 표방하면서 원로원과 접촉을 자주 가지고 있습니다. 원로원 측에서는 어떻게 해서든 내당주를 한편으로 끌어들이고 싶겠지요.”

“그래야지만 어느 정도 수준이 맞을 테니까. 사실 반대가 있다고는 해도 압도적으로 상황이 유리하잖아?”

맞는 말이다.

원로원이 격한 반발을 보이며 가주 직까지 내려놓으라 외치지만 남궁호량과 그를 따라 하나 된 남기를 외치는 목소리는 오히려 높아지고만 있었다.

당시 전장에서 황준우에게 감명 받은 젊은 무인들을 위시로 한, 분가 무인들이 남궁호량을 위시한 친(親) 만금장의 편에 선 탓이다.

그리고 지금도 그 수는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젊은 무인들에게 있어 강한 무(武)란 숭배의 대상이다.

당시 전장에서 보여 주었던 황준우의 구원과도 같은 등장과 압도적인 강함은 감동과 경탄을 선물했고, 많은 젊은 무인들의 가슴에 불을 지폈다.

황준우가 그들과 같은 후기지수 또래라는 것도 한몫 거들었다.

오로지 나이든 자들의 강호가 아니다.

황준우는 아직은 어린, 젊은 무인들의 대표나 다름이 없었다.

남궁호량의 친 만금장 정책은 그러한 황준우와 맞닿아 있으니 젊은 무인들이 하나같이 그를 향해 몰려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예. 슬슬 천조회를 비롯해서 남기 연합의 이름을 발표해도 될 것 같습니다.”

남궁호량이 눈을 빛내며 전왕을 바라보았다.

그의 눈에는 무인이 아닌 자를 향한다고 보기에는 놀라울 정도의 감탄이 맴돌았다.

“어차피 반대파는 계속 반대할 테니 그대로 남겨 둔다.”

말을 하는 황준우의 시선은 전왕을 향했다.

남궁호욱을 중립의 입장에 놓아두고 그러한 반대파의 불만을 수용하게 하자고 말한 인물이 바로 그였다.

“아무런 잡음 없는 통합은 꿈과도 같다. 제법 명언이었어, 전왕.”

“헤헤…….”

전왕이 쑥스러운 듯 볼을 긁었다.

이 개월 전 대화에서 전왕은 잡음은 분명히 생길 테니 불만을 흡수할 장소를 만들어야 한다고 했다. 남궁호량과 남궁호욱, 세가의 양대 거두인 두 사람이 힘을 합쳐 남기의 화합을 외친다면 압도적으로 남기연합을 이룰 수 있을지 모르나, 당시 표출하지 못한 이들의 불만이 억눌려 있다가 어디서 터져 나오게 될지 모르게 된다.

통제할 수 없는 불안을 만드느니 차라리 그를 품에 안아 버리겠다는 생각이었는데, 정치 감각이 나쁘지 않은 남궁호량마저 자리에서 일어나 박수를 칠 정도의 묘안(妙案)이었다.

황준우가 생각했듯, 그가 가진 모사(謀士)의 재능은 천재적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전, 전왕은 황궁에 사직서를 내고 완전히 만금장에 자리 잡았다. 현재 그는 황준우에게 황궁 때 이상의 월봉을 두둑히 챙겨 받으며, 모낭(謨囊)으로서의 역할을 착실히 수행하고 있었다.

이런 자리에는 황준우가 언제나 그렇듯 전왕을 대동하였으니 말이다.

“네 생각에도 시기는 괜찮지?”

“물론입니다. 저도 지금쯤이 딱 좋다고 생각하고 있었거든요.”

“그럼 언제쯤이 좋을까?”

“칠 주야 뒤, 유시(酉時)로 시간을 공고하는 게 어떨까요?”

“좋군요.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왕의 말에 남궁호량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렇게 남기연합의 출범이 결정 되었다.

만금장 측에도 아무런 불협화음이 없지는 않으나, 대다수 황석후에 대한 신뢰로 고개를 주억였다.

어린 나이에 십존의 자리에 이름을 올린 황준우에 대한 기쁨으로 함께 박수를 쳤다.

황준우가 목표로 했던 남기의 대화합이 그림처럼 이루어지고 있었다.

만금장과 남궁세가, 천조회의 이름으로 칠 주야 뒤 공동성명을 발표하기로 하였다는 소문이 천하에 울려퍼졌다.

정확한 내용은 알려지지 않았다만, 그 성명이 어떠한 종류일지는 무림인 모두가 알았다. 심지어 일반적인 주민들도 예측할 수 있는 뻔한 일이었다.

속사정으로는 남궁세가 내에서 짧은 반발 시위가 일어날 뻔했지만, 어떻게 알고 있었는지 먼저 눈치를 챈 남궁호량이 기다렸다는 듯 제압하여 소란은 순식간에 제압되었다.

그리고, 약조했던 칠 주야 뒤에 남기연합의 이름으로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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