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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71화 (171/373)

학사재생 171화

제 171화

주제는 하나 된 남기였고, 주체가 남기연합이었다.

합비 남궁세가 본가 입구에서 치러진 성명 발표는 만금검존 황준우와, 남궁세가주 남궁호량, 정체를 감추고 있던 천조회주가 공개 석상에 나와 서로의 손을 맞잡는 모습을 보임으로 남기연합의 출범(出帆)은 공식적으로 중원 천하에 울려 퍼졌다.

특이한 점은 그들은 무림맹이나 정의회와 같이 하나 된 공동 거점을 만들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남기연합에는 본단(本團)이 없다.

그들은 남기에서 살아가는 모두를 위하고 지키기 위해 하나 된 이름으로 뭉쳤을 뿐이라 말하며 어떠한 강요도 변화도 요구하지 않았다.

또한 남기연합의 이름을 알리는 행사 또한 열지 않았다.

규모에 비하자면 작다고밖에 말할 수 없는 성명 발표 하나만으로 남기연합을 구상했고, 일상으로 돌아온 것이다.

남기연합은 그러한 자신들의 행보를 무림인이 가지는 자유를 뜻한다고 하였다.

현재의 무림에 군림하는 대다수가 코웃음을 쳤지만, 젊은 무림인들에게는 다르게 들렸나 보다. 그들은 무림의 낭만, 무림인의 자유라는 말에 무언가에 홀린 듯 제 발로 남기연합을 찾아가기 시작했다.

정체되어 있던 무림이 거친 풍랑을 맞은 듯 마구잡이로 흔들리고 있었다.

이 엄청난 사건에, 활협단이 다시 한 번 모였다.

“오태악이 죽고, 열화궁은 무너졌소. 정의회에서는 남궁에 이어 제갈이 빠졌고, 우리가 딱히 손쓸 도리는 없어 보이니…… 더 이상 무림은 우리 활협단의 손에 있지 않은 것 같구려, 선장.”

차무열이 혀를 차며 진무영을 향해 말했다.

그가 대표를 표방해 입을 열었을 뿐, 이 자리에 모인 대다수의 심정이 같을 터였다. 진무영을 바라보는 눈에는 여태까지와는 다른 불신과 분노가 가득했다.

“그래서 백수궁주께서는 어찌하기를 바라시는 겁니까?”

진무영이 웃는 낯으로 차무열을 향해 물었다.

저도 모르게 그 시선을 피해 눈을 돌렸던 차무열이 입술을 깨물며 목에 핏대를 세웠다.

“선장의 대안을 말해 보시오. 만약 어떠한 방도가 없다면, 우리는 더 이상 이 모임에 참가할 수 없소.”

“재미있는 말장난을 하시는군요. 백수궁이 아니라 우리라 하셨습니까?”

진무영의 시선이 빠르게 주변을 훑었다.

대다수가 흠칫하며 시선을 피했지만 곧 어깨에 힘을 주며 고개를 주억인다.

‘이미 제가 오기 전에 이야기는 끝내 놓은 상황이라는 겁니까.’

오태악의 패배 이후, 진무영 역시 나름대로 바쁜 활동을 해 왔다. 진화옥의 발현과 그를 쓰러트린 황준우, 남기연합의 결성. 모든 현실이 그를 바쁘게 했다. 또한 기쁘게 했다. 그 중심에 있는 이름이 눈에 훤히 보였던 탓이다. 그를 위태롭게 하는, 힘들게 하는 이름을 바라보며 기뻐하는 자신을 바라보는 기분은 참으로 묘한 느낌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그만큼 자신이 상대를 갈구한다는 사실을 더 처절하게 깨달을 따름이었다.

‘지금 이대로는 그대를 가질 수 없습니다.’

진무영은 오태악과 황준우의 싸움에서 제 역량 부족을 깨달았다. 당장에 그를 손에 넣는 것은 불가능하다. 감정적 호소는 먹힐 리가 없다.

‘감정싸움은 원래 먼저 끌리는 쪽이 지는 법이지요.’

이성적인 대화?

이미 황준우는 존재 자체로 완전에 가깝게 다가가고 있다.

때문에 진무영은 그에게 달아오르는 것이었다.

역량 부족이니, 강압적인 방법 역시 불가능하다.

현재로서는 어떠한 수를 써도 황준우를 손에 넣을 수 없다는 간절함조차 지금의 진무영에게는 기쁨이었다.

다행히 그에게는 나쁘지 않은 패가 제법 모여 있었다.

몇 가지 계책과 시간이 주어진다면 황준우를 낚아 올릴 수도 있을 듯했다. 상상 이상의 경우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는 사실이 어려웠지만, 그래도 해낼 생각이었다.

“흐흥…….”

혼자만의 생각에 빠져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흘렸다.

“……그래서 우리의 바람은…… 선장?”

누구보다 앞장 서 목소리를 높이던 차무열이 얼굴을 와락 일그러트렸다.

그를 지지하듯 뒤편에 서 눈을 빛내던 이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우리 이야기를 듣고 있소, 선장?”

“아아, 아무렴요.”

진무영이 빙긋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지금 장난치는 게요? 우리의 말이 선장에게는 아주 가볍고, 쉽게 들리나 보오?”

차무열은 의도적으로 화를 냈다.

진무영은 그것이 자신을 따르는 활협단 내의 조직들로부터 차익을 얻어 가기 위한 얄팍한 수작이라는 걸 알았다. 굳이 귀담아 듣지 않고 즐거운 생각을 한 이유도 어차피 뻔한 이야기를 들어줄 필요가 없어서였다.

“그래서, 제가 쓸 만한 아니지, 여러분이 만족할 법한 대안을 내놓으지 않으면 선장 직에서 물러났으면 한다 이것인가요?”

“책임을 질 수 없다면 자리에 있으면 안 되겠지.”

참으로 우아한 정치적 발언이다.

아마 진심은 아니었겠지.

때문에 진무영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좋습니다. 물러나지요. 음, 그리고 하는 김에 이 자리에서도 빠지겠습니다.”

“……!!”

차무열의 이야기에 동의해 기세를 더하거나, 목소리를 흘리던 모두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앞으로 나서 대표로 발언하던 차무열 역시 크게 다를 바는 없었다.

“왜요? 책임을 지지 못하는 대표라면 물러나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만한 벌도 있어야 하니 활협단 내에서도 사라져 드리겠다는 것이지요.”

그 말과 함께 진무영은 더 이상 미련이 없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느린 걸음으로 선실의 바깥을 향했다.

“정녕!”

차무열이 목소리를 높였다.

“정녕! 떠나신단 말이오!? 그리 되면 우리 모두가 선장 아니, 진무영 당신을! 무당파를 좌시할 것 같소!?”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그저 선실의 문이 열렸고, 다시 닫혔다.

장내에서는 사람 하나가 사라졌다.

그뿐인데 공기 자체가 변했다.

“정말 선장이?”

“무당이 활협단에서 빠진단 말이오?”

“하면 중원의 미래는…….”

소란이 커지기 시작했다.

고개를 내젓고는 주변의 눈치를 보며 슬슬 자리에서 일어나는 사람들도 보였다.

몇 번이고 선실의 문이 닫히고 열리기를 반복했다.

이것이 진무영이 가진 존재감이었다.

그가 이끌던 활협단이었다.

강경하게 말한 차무열조차, 진심으로 진무영이 선장 직에서 내려오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다. 범 천하적인 무림단체인 활협단을 이만큼이나 오랜 시간 유지해 온 데에는 진무영의 수완이 크다는 사실은 그 역시 알고 있었으니 말이다.

눈앞에서 그러한 사실을 증명하듯 변화가 일고 있으니 부정할 도리도 없었다.

“백수귀존, 지금이라도 가서 선장을 다시 모셔 오는 게…….”

그런 차무열의 뒤에서 눈치를 보고 있던 장년인 한 명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닥쳐!”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 작태에, 몸을 떨며 분노를 삭이던 차무열이 거칠게 외치며 눈을 부릅떴다. 동시에 말을 건넸던 장년인의 표정이 차가워졌다.

“아무리 백수귀존이라 하여도 말이 심하시구려? 지금 말씀은 백수궁이 대(大) 화산파 아니, 무림맹에게 선전포고로 보아도 무방하겠소?”

차무열과 장년인, 이름 높은 화산파의 장로 연휘제의 사이로 불똥이 튀겼다.

그 끝에 먼저 시선을 거둔 것은 차무열이었다.

“빌어먹을. 실책이었소.”

백수궁이 열화궁과 함께 중립세력 중 가장 각광받는 문파라고는 하지만 화산파에 비하면 한 수 밀릴 수밖에 없다. 하물며 구파일방의 연합체인 무림맹에 댈 수는 없는 노릇이다. 지금까지 같은 활협단의 이름 아래 동등하였지만 이제부터도 그럴 수는 없었다. 진무영은 예정되었다는 듯 선장 직을 내려놓고 활협단을 나갔다. 그리고 더 이상 활협단을 이끌 인물도 보이지 않았다.

“실책? 그게 말이면 다요? 백수궁주께서는…….”

“아, 연 장로인 줄 몰랐소. 내 깊이 사과드리는 바이오.”

차무열은 고개를 깊숙이 숙인 후 곧장 등을 돌려 바깥을 향했다.

연휘제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지만 굳이 떠나는 그를 잡지 않았다. 애초에 사태가 이렇게 된 데에는 차무열뿐만이 아니라 그들 모두의 책임 또한 있었다. 과하게 밀어붙였다가는 오히려 화살이 화산파로 돌아올 수 있었다.

“건방진 놈.”

혀를 찬 연휘제 역시 자리를 떠나고, 남은 이들은 침묵 속에 한 가지 명확한 사실을 깨달았다.

활협단이 붕괴되었다.

고작 진무영 하나를 잃음으로써 말이다.

차가운 한파를 몰아내고 따뜻한 계절이 찾아왔다.

“한데 어찌 이 붉은 지붕 아래만은 이리도 황량하고 차갑단 말이더냐. 참으로 가혹한 궁이로다.”

“화, 황녀전하. 누가 듣사옵니다!”

연무장에 서 검을 쓰다듬는 주연하의 짧은 독백에 고개를 숙인 채 뒤를 걷던 소하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말했다. 시선을 이곳저곳으로 돌리는 그녀의 두 눈동자에는 옅지만 걱정이 어려 있었다.

그를 담담한 눈으로 바라보던 주연하가 작은 미소를 흘렸다.

“내 궁에서 하고 싶은 말조차 하지 못하면 답답해서 어찌 살겠으며, 설령 듣는다 한들 바뀔 것이 무에 있겠느냐?”

“하지만…… 중요한 때이지 않습니까.”

소하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진시황릉의 사건 이후 황궁의 권력이 크게 이동했다.

가장 큰 이유는 단연 황자 주고치의 실종이었다.

갑작스러운 황자의 실종은 조심스럽게 이어지던 황권 다툼에 큰 파문이었다. 가장 강력한 황권 계승자였던 주고치를 지지하던 이들은 실 잃은 연이 되어 방황하며 헤맸다.

주연하는 그때 황위계승자 다른 누구보다 앞서 그들에게 손을 내밀었다.

스스로의 능력을 선보이며 황손으로서의 위엄을 자랑했다. 발군은 한 달에 한 번 있는 황족모임인 사냥의 날, 갑작스러운 암습을 받은 그녀가 보인 무예 솜씨와 암살자를 일거에 처단하는 결단력이었다.

은연 중 황녀가 아닌 공주이기 때문에, 또는 고작 여자일 뿐이라며 그녀를 무시하던 이들의 시선이 단숨에 뒤바뀌었다.

망설이던 권력자들이 그녀를 향해 줄을 대기 시작했다.

그녀가 암살자를 향해 비춘 칼날이 자신에게 향할까 봐 두려움을 느끼거나, 그 순간 비춘 위엄에 감동을 느낀 이들이 대다수였다.

주연하는 그렇게 한때 자신을 비하하거나, 무시했던 이들 마저 한 품에 안았다. 작은 불협화음이 있었으나 그조차 조율하는 주연하의 지도력은 가히 종사(宗師)라 부르기에 부족함이 없어 더욱 많은 권력자들이 그녀와 함께 하기를 바랐다.

제일 계승권자인 주고치가 있을 당시에는 아무도 알 수 없던 그녀의 빛이 그제야 황궁에 퍼진 것이다.

주연하가 계승권자 중 제일의 세력을 가지게 된 것은 그야말로 시간 문제였다.

그녀는 현재 황궁에서 가장 아름답고, 고귀하며, 황위에 가까이 이른 인물이었다.

“황자 전하께서 복귀하신 것이 그리도 마음에 걸리더냐?”

“아무래도…… 폐하께서 가장 총애하시던 분이 아니셨습니까? 실제로 어제 육부(六部)의 좌시랑(左侍郞)과 국자감의 제주, 동창의 제독께서도 황자 전하를 찾아가셨다고 합니다. 단순히 무사 귀환을 축하하기 위해 가셨다고 보기에는…….”

“소하.”

“예, 황녀전하.”

“만약 그들이 다시 황자 전하의 품으로 돌아간들 바뀔 것은 무엇도 없단다.”

“예? 어째서 그렇게 말씀하신단 말입니까?”

육부의 좌시랑, 국자감의 제주, 동창 제독.

어느 하나 무시할 수 없는 자리를 가진 권력자들이다.

그런 이들이 순식간에 주연하에게서 등을 돌렸다.

바뀐 것이 없다고 보기에는 너무나 큰 영향이었다.

“황자전하께서 복귀하신 지 하루도 되지 않아 부리나케 쫓아간 사람들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겠느냐? 소하. 나는 애초에 얻지를 않았으니 잃은 것도 없겠구나.”

“하나 전하…… 저는…….”

망설이던 소하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사람 마음을 마치 정해진 해답처럼 여기지 않으면 쉽게 알 수 있는 일이다.”

가볍게 웃으며 검을 내뻗은 주연하의 눈빛이 서슬 퍼렇고 차갑게 변했다.

“또한 이제 와서 그리한들 크게 달라질 것이 없다는 말 역시 사실이지.”

주고치의 복귀는 또 다른 큰 파장이지만, 이미 그가 자리를 비운 시간 동안 황궁은 많은 것이 변했다.

그간 그녀가 얻은 것은 많았다.

말했듯 애초에 얻지도 않았다면 모를까, 얻은 것을 놓아 버릴 정도의 바보는 되지 않는다.

황자 주고치의 귀환은 분명 그녀의 인생에 있어 새로운 막(幕)을 여는 일일지 모르지만 개의치 않았다. 언제나 그렇듯 그녀는 스스로의 신념과 정의를 지키며 나아갈 뿐이다.

여전히 주연하는 이 험난한 붉은 지붕 내에서 가장 고귀한 여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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