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73화
제 173화
‘아버지야 이미 홀로 강하시고, 어머니는…… 무공은 결단코 싫다고 하시니.’
때문에 황석후는 서시의 호위에 누구보다 신경 쓰고 있었다. 실제로 그런 서시에게 위협이 닥친 적은 여태까지 단 한 번도 없었다.
‘서연이는…….’
황서연은 황준우의 무공 수련 방식을 누구보다 적극적으로 따랐다. 다소 괴로울 수도 있는 고단한 수련 여정이었는데 조금도 양보하지 않고 집요할 정도로 힘을 낸 것이다.
그 결과 놀랍게도, 그녀는 얼마 전 조화경에 올랐다.
세간에 밝혀지지 않았지만, 방년(芳年)의 나이에 무림인 모두가 꿈꾸는 초인이 되어 버린 것이다. 누구 말마따나 하늘도 더러워서 침을 뱉을지도 모를 재능이다.
처음 황준우는 그 사실을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으려 했다. 심한 재능의 격차는 상대에게 박탈감을 불러온다. 함께 수련하는 이들을 배려해야 할 필요가 있다 생각한 것이다.
한데 경호와 홍산은 이미 그녀가 경지에 올랐음을 어렵지 않게 눈치챘다.
딱히 들킬 법한 일이 있던 것은 아니었다.
그저 황서연이 사용하는 내공이 평소와 달라졌다는 사실로 유추한 것이었다.
흑백쌍노와 사마정도 몰랐던 이를 알아챈 것은 기실 두 사람 역시 조화의 경지에 가까워졌다는 것을 의미했다.
다행스러운 점은 경호와 홍산 두 사람 모두 그런 황서연을 보고 박탈감을 느끼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그렇다고 의지가 더욱 불타오른 것 또한 아니었다.
마치 원래부터 그리될 줄 알았다는 태도랄까?
경호가 말하기는 이러했다.
“넘을 수 없는 벽을 한 번 보고 난 이후에는 어디에도 자격지심 따위를 느낄 틈이 없지요. 그냥 제 재능만큼 꾸준히 노력하면 될 일입니다.”
그때 황준우는 경호가 참으로 강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홍산은 조금 더 의지를 피어 올렸으나 경호와 다르게 생각하지 않는 듯했다.
스스로의 위치에서 우직하게 노력하는 모습이 참으로 그답다고도 느껴졌다.
그렇게, 시간이 흐른 만큼 모두가 성장하고 있었다.
무림맹은 구파일방의 연합체다.
여기서 말하는 구파라 함은 천하에서 가장 위상이 높은 아홉 개의 대문파, 그리고 일방은 거지들의 연합체인 개방을 뜻한다.
그렇다면 이들이 활협단과 같이 모두의 평등을 추구하느냐? 물론 겉으로는 그리 보일 수도 있다. 하나 내부의 실상은 분명한 서열이 존재했다.
가장 오랜 시간 그 첫째 자리에 군림한 문파는 다름 아닌 무림의 태산북두 소림이다.
소림은 언제나 무거웠다.
쉽사리 움직이지 않으니, 힘을 자랑할 일 또한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제일이었다.
소림이 가진 무게가 그들의 발목을 잡는 족쇄이자, 성장의 발판이었기 때문이다.
가장 공명정대하며 강력한 문파.
그런 이름으로 위치해 있던 소림이 칠야의 난, 불성의 죽음 이후 조금 주춤하였다.
대신하여 제일좌(第一座)의 자리를 꿰찬 것은 다름 아닌 무당파(武當派)다.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무림인 대다수가, 소림이 망한다면 그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문파로 바로 무당을 뽑곤 하였으니 말이다.
본래 평범한 도문(道門)에 속하였던 무당파는 고금 이래 가장 위대한 무인을 읊자면 꼭 뽑히는 장삼봉 진인 이후 무문(武門)의 길을 함께 병행하기 시작했다.
대다수의 도가 문파가 그러하듯, 도의 깨달음과 무의 깨달음은 일맥상통(一脈相通)이라. 무당은 어느새 소림과 함께 무림의 거성(巨星)이 되어 강호의 선도자 중 하나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그런 무당의 제일고수는 다름 아닌 검선(劍仙), 위자청이다.
우내십존 중에서도 몇 없는 존(尊)의 칭호를 탈피한 존재로서, 사실상 천외천. 모든 강호인들의 경외의 대상이자 천하제일에 가장 가까운 인물이 바로 위자청이었다. 무당에서는 언제나 그의 이름을 내세우기를 좋아했다.
천하제일에 가까운 무인이 아닌, 진정한 천하제일로서 위자청을 앞세우고 그들의 명분과 힘을 과시하는 것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위자청 본인은 세속의 위명에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것이었다. 어느덧 백수(白壽)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그는 무림의 일도, 심지어 무당파의 일조차도 더 이상 본인의 영역이라 여기지 않았다.
한때 누구보다 강해지기를 바랐던 욕망과, 이름 높은 무인이 되고 싶던 욕심은 여름 햇볕을 만난 눈 마냥 녹아 버렸다.
어느 순간 찾아온 큰 깨달음이 그로부터 무욕(無慾)의 경지를 이끈 탓이다.
그때 이후로 위자청은 진정한 신선(神仙)이 되기 위한 모든 준비를 끝마친 채 누구에게도 스스로의 모습을 보이지 않고 은거에 들어갔다.
한데 오늘 낮.
예상외의 손님이 위자청을 찾아왔다.
“그저 갈 때를 기다리는 안방 노인에 불과할진대…… 이리 찾아와서까지 괴롭히다니 못된 제자가 아닌가?”
말하는 바와 다르게 신선과 다를 바 없는 풍요로운 웃음을 짓고 있는 위자청의 얼굴은 그저 평온해만 보였다.
잠시 그를 조금 멍하니 바라보던 불청객, 위자청의 제자 진무영이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과연…… 스승님. 결국 도(道)를 얻으셨군요.”
“운이 좋았지. 이십 년 전 그를 보지 않았다면 평생을 무(武)에만 목을 맬 뻔했지 않느냐?”
“칠야무신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흘흘, 그가 아니면 누가 있어 당시의 나에게 무를 잊을 수 있게 하겠느냐. 오로지 그만이 유일했다. 오로지, 그 사내 하나만이 무신(武神)이었다.”
아련하게 과거를 떠올리던 위자청이 눈을 반짝였다.
“한데 이 잘난 제자 놈은 한동안 세속에 미쳐 있는가 싶더니, 또 갑자기 모든 것을 버렸더구나? 혹여 너도 무욕을 본 것이냐?”
“그리 보이십니까?”
진무영의 물음에 위자청이 고개를 내저었다.
그는 제법 진무영을 잘 알았다.
음흉하면서도 쉽게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 진무영은 그의 제자들 중 가장 독특하고, 위험했다. 첫 만남에서부터 그리 느꼈으면서도 그를 품에 안은 것은 그가 무당의 도에서 깨달음을 얻길 바랐음이라. 하나 역시 쉬운 일은 어디에도 없었다.
“아니지, 그럴 리가 없지. 아마 세속을 버렸다면 다른 것을 얻고자 시간을 썼겠지. 그러고 보니 네 무공이 일취월장했구나. 도사란 놈이 욕심을 가진 채 벽을 넘어서다니, 이 또한 기사(奇事)로다. 내 바람은 그저 네가 그 힘으로 모든 인과를 좌지우지하지 않으려 하였음 할 뿐이로구나.”
처음으로 위자청의 얼굴에 웃음 외의 다른 표정이 드러났다. 어딘지 모르게 안타까운 듯, 또한 기쁜 듯 한숨을 내쉰 그의 변화에 진무영이 더욱 진한 웃음을 그렸다.
“그럴 만한 일이 있었습니다.”
“그래, 과정이 없는 결과는 없는 것인지고. 하니 물으마. 네가 과정 없이 이곳에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 무슨 욕심을 부리고자 이 늙은 스승을 찾아온 게냐?”
눈은 웃고 목소리는 차분하지만 음성은 단호했다.
만약 진무영의 욕심이 과하다면 제자라 한들 이 자리에서 내쫓겠다는 의지도 느껴졌다.
“오해이십니다. 이 제자는 그저, 스승님이 우화등선하시기 전 마지막 바람을 이루셨으면 하여 찾아왔을 따름입니다.”
“마지막 바람이라? 하하!”
위자청이 어울리지 않는 대소(大笑)를 터트렸다.
“이미 무욕의 경지를 이루었음이라, 바람이 어디 있겠느냐? 그런 말장난으로 이 스승을 속이고자 한다면 썩 물러가거라.”
“스승님의 말씀은 틀렸습니다.”
“뭣이라?”
“정녕 무욕을 이루셨습니까? 아닙니다. 스승님은 그저 세속을 탈피하신 것뿐이지, 모든 욕심을 버린 게 아니지요. 만약 정녕 남은 미련이 하나도 없으시다면 어찌하여 아직 이 제자의 앞에 계신 겁니까?”
“…….”
웃기만 하던 위자청의 얼굴이 조금씩 굳어지기 시작했다.
냉정하리만치 차갑고, 눈빛은 매섭다.
이 모습이 바로 세간의 사람들이 아는 위자청이다.
진무영이 기억하던 그의 본모습이다.
그는 오히려 여태까지의 웃음이 어울리지 않는 사내였다.
“스승님께서 정녕 모든 것을 버리셨다면 이미 등선하셨음을 이 제자는 처음 마주친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미련 또한 무엇인지 알 수 있었지요. 무욕(無慾) 하셨다 하시면서 무욕(武慾)을 아직도 마음에 품고 계심이 아닙니까?”
진무영은 냉철하게, 위자청의 두 눈을 직시하며 말했다.
곧 그의 입가로 옅은 미소가 떠올랐다.
“건방진 제자로다.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냐?”
“다시 한 번 무신을 만나 보고 싶지 않으십니까?”
“무신은 죽었다.”
위자청의 눈이 다시 한 번 꿈틀거렸다.
“물론입니다. 한데 하늘은 늘 또 다른 재능을 내려 주는 것 같더군요. 그날의 무신에 못지않은 아니, 어쩌면 더 빛나는 우상을 만났습니다.”
진무영의 눈빛은 차분했다.
하나 목소리는 옅게 떨리고 있었다.
그가 상대에게 느끼는 감정이 어찌나 깊은지 위자청이 모를 수가 없었다. 의식하지 못했지만 그의 두 눈에는 어느새 자연스레 호기심이라는 감정이 깃들었다.
“네가 욕심을 그리도 가득 품은 채 벽을 넘어선 것이 그 우상이라는 존재 탓이구나. 새로운 재능이 너를 자극한 거였어.”
“그는 재능이라 하기에 이미 무섭도록 완성된 자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발전하는 인물이기도 합니다.”
“하나 재능이 무신을 만드는 것은 아니다. 네가 아무리 그토록 강해져도, 내가 아무리 욕심을 부려도 넘을 수 없는 그릇의 차이가 무신을 만드는 게지. 무영이, 이 고약한 제자 놈아…… 네가 그를 모를 리는 없으니…….”
혀를 차고, 한숨을 내쉰 위자청이 고개를 주억였다.
“진짜겠구나. 새로운 무신의 재능이 태어났어. 누구냐? 그는 어떤 사람이냐?”
“만금장 소장주 황준우.”
“만금장?”
위자청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예. 그가 바로 저의 우상이자, 스승님의 무욕을 채워 줄 천하유일의 인물입니다.”
“푸하핫! 상가의 자식이 무신의 인과를 타고났다 이건 게냐? 푸하하!”
그야말로 앙천대소가 터져 나왔다.
하늘이 떨리고, 땅이 울리는 거대한 웃음을 터트린 위자청은 곧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내가 직접 확인하겠다. 네가 정녕으로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르겠다만, 적어도 내 유일하게 남은 미련에 맞닿아 있는 진실을 꿰뚫었음은 사실이니…….”
위자청의 신영이 그가 가부좌를 틀고 앉아 있던 바위로부터 완전히 사라졌다.
“……어디 한 번 네 뜻에 맞춰 춤을 춰보자꾸나.”
남은 음성은 마치 메아리처럼 진무영에게로 돌아왔을 뿐이다.
지옥도(地獄道)란 것이 바로 이러할까?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풍경을 뽑으라 한다면 분명 손에 꼽힐 법한 장면이 마을 하나에 통째로 펼쳐지고 있었다.
피와, 시체가 난무하고 어둠과 비명이 소리친다.
부모가 자식을 윤간하며 자식이 부모의 심장을 뽑는다.
광기(狂氣)가 넘쳐흐르는 붉은 세상의 중심에 선 검은 장포의 사내가 입가로 잔인한 미소를 흘렸다.
“드디어…….”
마을의 중앙, 육망성에 차오르는 붉은 기운이 넘치는 모습을 확인한 사내가 머리까지 눌러쓰고 있던 장포를 벗어 던졌다. 비쩍 마른 몸에, 홀쭉한 볼,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보이는 검은 눈동자에는 마력이 넘실거렸다.
“나 장량, 마(魔)의 계약자로서 재앙의 약속을 모두 이뤘음이라. 옴 마니 즈바라 마하…….”
금강저를 든 대마술사, 장량의 손이 빠르게 인을 그려 형태를 이루고 바닥의 육망성과 맞닿았다.
“프라바를 타야 훔!”
육망성으로부터 검은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와 사방으로 얽힌다.
“끄아악!”
“캬아악-!”
지옥도에 갇힌 이들의 비명을 내지르며 춤을 추듯 몸을 꺾는가 싶더니 기이한 형태가 되어 육망성에 삼켜졌다.
놀라운 풍경 속, 수많은 사람을 마치 지옥의 아귀처럼 집어삼킨 육망성의 중앙으로 검은 기운이 올라와 하나의 신형으로 이루어졌다.
으적, 으적.
무언가를 과격하게 씹는 소리와 함께 들어난 얼굴은 평범한 이들에 비해 다소 욕심 많고, 비대해 보이는 형상이다.
덩치 역시 일반적인 성인 장성에 비해 두 배는 커 보인다. 장량과 같은 이는 어둠으로부터 비롯된 사내에 비하자면 넷이 있어도 모자랄 듯했다.
“오오, 오오오……!”
그런 사내를 바라보며 커다란 감탄을 토한 장량이 곧바로 절을 시작했다.
“마의 길에 정점에 앉았음에도 스스로 혹독한 길을 택하여 인세에 위대한 왕(王)이시여! 세상에 마의 씨를 뿌려 주소서!”
그 외침은 간절했고, 또한 깊었다.
때문일까? 무언가에 취한 듯 인육을 삼키고 있던 사내의 시선이 자연스레 장량을 향했다.
“아아, 네놈이 팔각마서에 그토록 먹이를 던져 준 놈이로구나. 덕분에 이렇게 세상에 나왔으니 고맙다고 해야겠군.”
검은 사내가 웃었다.
핏물이 뚝뚝 흐르는 입가로 진한 미소를 그린 그는 사람의 다리 한 쪽을 더 씹기 시작하며, 장량의 앞에 다가와 무릎을 꿇었다.
이후 핏물이 잔뜩 묻은 오른손으로 장량의 머리를 들어 올려 시선을 마주한다.
“네 이름이 무엇이냐?”
“장량, 장량이옵니다.”
“장량, 장가(張家)라…… 큭큭.”
한 손으로 입가를 가리며 웃음을 흘린 그가 고개를 주억이며 반 이상 뜯어져 흉측한 몰골로 변한 누군가의 다리 한 짝으로 자신의 가슴을 두드렸다.
“앞으로 이 몸을 잘 보필하도록 하여라, 마술사 놈아. 네가 원하는 것은 모두 이루어질 터이니. 이 몸은 마왕(魔王), 동탁(董卓)이다.”
장량의 얼굴 위로 진한 핏물이 튀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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