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74화 (174/373)

학사재생 174화

제 174화

2. 위자청

“세월의 흐름이 무상함이라, 이제 나도 슬슬 일선에서 물러날 때가 된 것 같구나.”

여느 때와 다름없는 식사 자리가 끝마쳐질 무렵, 시종이 내오는 찻잔을 보며 황석후가 읊조렸다.

“아직 정정하십니다.”

“아빠는 아직 건강해 보여.”

황준우와 황서연이 빠르게 눈빛을 교환한 후 하나가 된 듯 외쳤다.

“우후후, 아직 물러나실 때는 못 되나 봐요.”

서시가 입가를 가린 채 웃음을 흘리며 황석후를 바라본다.

“얘들아. 이 아버지도 이제 나이가 몇인데 조금 쉬면서 강호유람도 하고 해야 하지 않겠느냐. 어느덧 이렇게 장성한 자식도 둘이나 있는데…….”

“저 황준우, 아버지의 아들로 태어나 늘 공경하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아니라면 누가 제 아버지라고 할 수 있을까요. 아무리 제가 나이가 든다 한들, 아버지는 영원한 아버지입니다.”

황준우는 조금 고풍스럽게 돌려 말했다.

“맞아. 오빠 말대로, 나는 영원히 아빠 딸이야.”

황서연은 싱긋 웃으며 직설적으로 거절을 표현한다.

“……평소에도 그랬지만 둘이 오늘따라 더 잘 맞는 것 같은데, 내 기분뿐이오?”

황석후가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말하자, 서시가 부드러운 눈웃음을 그렸다.

“기분뿐이에요.”

물론 기분뿐일 리가 없었다.

웃음으로 감추고 있지만 서시의 두 눈에 깃든 감정이 엄연히 짓궂은 장난이라는 사실을 황석후도 알았다. 놀리는 거다.

그냥, 서시는, 그의 부인은 황석후의 이런 모습도 여전히 귀엽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알지만 그래도 억울하다.

“너무하시오!”

어딘지 모르게 상처받은 목소리로 외친 황석후가 찻잔으로 얼굴을 가렸다.

어째서인지 가족들 앞에서는 쉽게 드러나는 표정을 최대한 감추기 위함이다.

그런 행동이 먹힌 것일까?

즐거워 보이던 세 사람 사이에 잠시 어색한 기류가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찻잔을 내려놓은 황석후는 최대한 침울해 보이는 표정으로 입술을 달싹였다.

“그…… 갑자기 소리쳐서 미안하오. 나도 나이가 들다 보니 마음이 약해지는지…….”

흘낏 주변의 눈치를 보아하니 아직 그의 연기를 눈치챈 사람은 없어 보였다.

“큼……. 미안하오.”

슬며시 입가로 흘러나오려는 미소를 억지로 누르기 위해 헛기침을 한 황석후가 고개를 숙였다.

“아, 그게 아버지…….”

“됐다. 내가 쓸데없는 말을 했구나.”

“아빠아~”

“아니다. 아니야. 하긴 아직 정정한 내가 무슨 일을 쉰다고, 자식들한테 다 떠넘기는 그런 못난 아버지가 될 수는 없지.”

“가가…….”

“괜찮소. 내 어찌 시 매의 마음을 모르겠소. 그냥 잠시 마음이 약해진 것뿐이니…….”

사실 크게 상처받은 건 아니어서일까?

더욱더 미안해하는 가족들의 모습에 오히려 황석후의 마음 한편이 무안해져 간다.

‘슬슬 이쯤에서 풀어야…….’

애초부터 진심으로 던진 말도 아니었다.

이때쯤부터 던져 놔야 나중에 자식들에게 물려줄 때 편하겠지라는 생각으로 내뱉은 한마디였으니 말이다.

“음, 난 정말 괜찮소. 괜찮다, 얘들아. 뭐, 이런 자리에서까지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는 게냐. 자자, 차나 드십시다. 오늘 용정차 향이 아주 좋구려.”

고개를 든 황석후의 말에 세 사람이 눈짓을 주고받다가 고개를 주억이고는 함께 찻잔을 들어 올렸다.

평온해 보이는 풍경이었다.

식사 자리가 끝나고, 황준우와 황서연은 각자 볼일을 찾아 나섰다. 황석후와 서시 역시 식사 후 짧은 휴식 겸 함께 산책을 하는 중이었다.

“가가, 연기가 많이 어색하던데요.”

“……응?”

뜬금없는 서시의 말에 황석후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후 재빠르게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하, 이것 참. 내 그래도 평생 같이 산 아내의 눈을 속일 수는 없었구려. 그렇게 티가 많이 났소?”

“그럼요. 준우랑 서연이도 알면서 속아 주느라 얼마나 고생했는 줄 아세요?”

“…….”

서시가 아까 식사 자리에서와 마찬가지로 싱긋 눈웃음을 짓는다.

“노, 농담이 과하오.”

“어머, 가가는 제가 지금 장난치는 것 같나요?”

식당에서 보았던 짓궂은 웃음을 닮아 있지만 이번에는 두 눈에 장난기가 없었다.

“진짜로 다 알고 속아 줬다고?”

“네, 뭐. 아까 가가 고개 숙이고 있을 때 셋이서 서로 눈치 보며 어색하게 웃었잖아요.”

그런 기색은 느꼈다.

“이걸 어떻게 모른 척해 줘야 하나, 다들 그런 눈빛이었다고요.”

“그게 미안하고, 민망해서 한 게 아니었던 말이오?”

“뻔히 연기로 보이는데 미안할 게 어디 있겠어요. 민망이야 했죠. 이걸로까지 놀리면 진짜로 상처받을 것 같은데, 모른 척하려니 원…….”

황석후의 입 끝이 떨리고, 입술 사이로는 깊은 한숨이 쏟아져 나온다.

“휴우…….”

“쿡쿡.”

“웃지 마시오.”

“왜요. 귀엽기만 한데.”

팔짱을 낀 서시가 눈웃음을 지으며 황석후의 볼에 입술을 맞췄다.

“…….”

“우리 아가들도 가가의 기분을 배려해서 한 일이잖아요. 너무 속상해만 말아요.”

“큼, 큼.”

나이가 들며 제법 자라난 콧수염을 부드럽게 쓰다듬은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뭐, 애초부터 나도 당장 뭘 바꾸자고 한 건 아니니. 그래도 괘씸은 하니 언젠가 꼭 복수할게요.”

“푸후후. 그래요.”

“그때는 시 매가 내 편이 되어 주어야 하오.”

“물론이죠.”

“약속하시오.”

“약속.”

그 말과 함께 걸음을 멈춘 두 사람의 입술이 포개졌다 떨어진다. 이후 황석후의 입에서 자연스레 한숨이 흘러나왔다.

“한데 진짜 둘 다 가업에는 관심이 없고 무공에만 심취해 있으니, 이건 또 고민이오.”

“저, 아직은 가능성 있어요.”

황석후의 진중한 말에, 나이가 들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는 고운 얼굴을 한 서시가 양 주먹을 불끈 쥐며 말한다.

“응? 그 말은……?”

“힘내 보세요. 가가.”

황석후의 얼굴에 활짝 미소가 번졌다.

“물론이오. 내 최대한 힘을 내보겠소.”

“꺄악-!”

서시를 훌쩍 들어 품에 안은 황석후가 거친 콧김을 내뿜으며 큰 걸음을 옮겨 나간다.

여전히 평온한 만금장이었다.

이 년이라는 시간은 결코 짧지 않았다.

남기연합이 성장한 만큼, 수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을 짊어져 나갔듯, 황준우 역시 스스로의 시간을 살았다. 조급하지 않으나, 꾸준하게, 멈추지 않는 그 걸음은 문과 무, 술에 이어지기까지 모든 방면으로 이어졌다.

그 결과 근래 들어 황준우는 회시에 이어 진시까지도 생각해 보고 있었다.

이미 거인도 된 마당에 진사(進士)가 되지 말란 법도 없다고 생각했으니 말이다.

‘가는 김에 연하도 조금 보고.’

나이가 들긴 든 걸까?

아니면 곁에 있는 부모님의 금술이 워낙 좋은 탓일까?

요즘은 황준우도 성혼이라는 것을 가끔 떠올리고는 했다. 한 여자와 가정을 이루고 자식을 낳고 살아간다.

전생에는 꿈같은 행복을 지금은 원한다면 이룰 수 있다.

그를 쉽게 무너트리지 않기 위한 방비는 이미 남기연합이라는 결정체로 잘 드러나 있었다.

작금의 강호에서 남기연합은 누구나 인정하는 무림맹 다음 가는 세력이었으니 말이다.

“그런데 하필 떠오른 게 연하야?”

혼잣말을 문득 중얼거린 황준우가 피식 웃음을 흘렸다.

“공주님 말씀이십니까?”

옆에 서 자신의 검을 바라보며 생각에 빠져있던 경호가 화들짝 놀란 목소리로 물었다.

“아아, 너한테 이야기한 것 아니야.”

“그렇군요. 무슨 일이라도 있는 줄 알았습니다.”

“그냥…….”

잠시 주변에 황서연이 없나 살펴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했다.

“나도 성혼이란 걸 해야 되지 않나 싶어서 말이지.”

“좋은 생각입니다.”

경호가 그 어느 때보다 더욱 격렬하게 고개를 주억였다.

아마 최근 시녀들 사이 누군가가 암중(暗中)에 작성하고 있다는 ‘소장주와 호위무사의 이루어질 수 없는 슬픈 사랑’이라는 이야기에 대한 소문 탓일 터였다. 심지어 그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가 호평(好評)이란다. 황준우도 소식은 들었지만 기가 찰 일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로 인해 시녀들이 더욱 즐겁게 일한다면 막을 일도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말이다.

어차피 중요한 것은 언제나 진실이었다.

“아, 근데 그게 쉽냐고. 솔직히 쉬우면 우리 경호가 아직까지 총각인 것도 말이 안 되잖아?”

“그야 주변에 여자가 없지 않습니까. 저도 연애란 걸 하고 싶어도…….”

“오, 요즘은 조금 진지하게 생각하고 있나 보네?”

“제 나이도 조만간 불혹입니다. 이제는 노총각도 벗어나고 있다고요.”

“흐엑, 우리 경호. 벌써 그렇게 늙었어!?”

나이에 비해 제법 동안으로 보이는 편이기에 더욱 놀랐다.

“그래도 아직 성혼도 안 한 총각한테 늙었다가 뭡니까. 도련님도 정말…….”

“아냐, 생각해 보니 우리 경호는 하려고 마음먹었으면 이미 충분히 했지 않을까? 거기검 경호를 흠모하는 여성들이 남기 일대에 아주 수두룩하다던데…….”

황준우의 장난에 경호가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히며 벌떡 일어났다.

“저, 전! 제 육체만 바라보는 사람은 싫습니다! 정신으로, 마음으로, 진심으로 저 자신을 아껴 주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요!”

경호의 울먹이는 목소리는 제법 컸고, 두 사람이 앉아 있던 연무장 바깥까지 울려 퍼졌다.

바깥에서 그릇을 옮기던 시녀가 어딘지 모르게 아찔하게 달아오른 표정으로 그릇을 떨어트리는 것도 어쩔 수 없는 노릇이었다.

“경호, 너 또 사고 쳤다?”

황준우가 바깥을 곁눈질로 바라보며 말한다.

“아, 안 돼!”

다급히 경호가 뛰어나가려 했지만 이미 사태는 뒤늦은 후였다.

“꺄아악!”

“어쩜 좋아!”

“경 무사님 진심이 내 마음 여기에 콕 닿았어!”

한둘이 아니다.

접시가 깨진 것에는 아랑곳도 않은 시녀들의 목소리가 웅성웅성 퍼져 만금장 곳곳으로 나아가고 있었다.

“아, 안 돼…….”

절망적 상황에, 철푸덕 주저앉은 경호의 얼굴 위로 음영이 내려앉았다.

“까짓것, 덕분에 시녀들이 우리한테 더 신경 써 주잖아. 좋은 건 좋게 생각해 주자고.”

황준우가 어깨를 두들기자, 참을 수 없다는 듯 얼굴을 붉힌 경호가 눈을 부라리며 외쳤다.

“으헝헝! 그 소문 때문에 제가 더 성혼을 못하고 있는 것이란 말입니다! 이제 소주에서 여성분을 만나면 다 제가…… 그런, 그런 사람인 줄 안단 말입니다!”

그 절박한 외침에 깜짝 놀란 표정의 황준우가 한쪽 손으로 입을 가렸다.

“엑!? 정말!? 그러면 나도 소주에서 성혼은 물 건너간 거네?”

“그렇다니까요! 그러니까 이걸 어떻게 해서든 막아야…… 막아야 하는데…….”

“뭐 어쩔 수 있나. 다른 곳에서 만나면 되지. 천하는 넓고 여자는 많다.”

“으헝헝. 도련님 멍청이!”

문을 벌컥 연 경호가 눈물을 흘리며 뛰쳐나간다.

아직까지 떠나지 않은 채 문 앞에서 대기하고 있던 시녀들의 눈이 반짝 빛난다.

그 시선을 견디지 못한 경호는 경신술을 발휘하여 순식간에 모습을 감추었다.

짧은 정적이 흐르고, 시녀들 사이의 웅성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위기인가?”

“그럴 때도 됐지.”

“금단(禁斷)이란 언제나 시련을 거치는 법.”

“나쁜 도련님, 흑.”

누군가는 눈물을 찍어 내기도 했다.

그 소리를 듣고 있던 황준우 역시 이쯤 되면 진심으로 생각해 볼 수밖에 없었다.

‘성혼이라…….’

뒷머리를 긁는 황준우의 눈앞으로 주연하의 신영이 아른거린다.

“한 번 소개나 시켜 달라고 해 볼까.”

시간이 난다면 그렇게 해 보기로, 황준우는 작은 결심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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