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75화
제 175화
짧은 소란이 있었지만 지금의 만금장에 있어서는 평소와 다름없는 날이었기에 곧장 일상이 돌아왔다.
황준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경호가 사라진 연무장에 가부좌를 틀고 앉아 상단전의 성장을 조금씩 이루어 간다. 이 년 전, 폭존 오태악과의 대전 당시 상단전의 무궁무진한 가능성을 직접 확인한 황준우였다.
조화경 역시 그러했지만 조율의 경지라고 하여 다 같은 수준이 아니다. 오히려 상단전의 개방도와 활용성에 따라 그 폭의 차이가 엄청났다.
일반적인 강호의 무인이 하단전에 내력을 쌓는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천하에 산재하는 모든 기, 그 자체와의 소통을 이끌어 내는 것이 바로 상단전의 개방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몰랐다.
다행히 황준우에게는 그러한 상단전의 발전을 크게 도와줄 수 있는 보물이 하나 있었다.
바로 늠군의 관.
품에서 한시도 떼어 놓지 않은 이 물건은 값진 보패라는 것을 몇 차례 증명했다.
오태악과의 대전에서는 괴이한 공명으로 황준우에게 한 차원 이상의 높은 경지를 엿보여 주었고, 지난 이 년간 그 길을 빠르게 걸을 수 있도록 등을 떠밀어 주기까지 했다.
덕분에 지금의 황준우는 특별한 현상 없이 당시와 같은 상단전의 힘을 상시적으로 사용할 수도 있었다.
‘솔직히 내가 생각해도 지금의 나, 거의 괴물 수준인데.’
손짓을 할 필요도 없이 시선만으로 이기어검을 펼칠 수 있으며, 그 시전 거리가 배 이상인 삼십 장까지 늘었다.
거기에 이어 일반적인 내공으로 치자면 몇 갑자에 해당할 힘을 상단전의 개방으로 마음껏 끌어다 무한히 사용할 수 있다. 그야말로 마르지 않는 샘 아니, 호수를 계속 퍼 올릴 수 있는 것이다.
뿐만이랴?
상단전이 확장되며 술법적인 면에도 적지 않은 성장을 거뒀다.
일전 괴정산에서 놓쳤던 영소라 한들 지금이라면 확실히 쫓을 수 있다는 자신감도 있었다.
이쯤 되면 진정으로 고금제일이라 불려도 될지 모르겠다.
스스로 그렇게 생각한 황준우는 곧, 코웃음을 쳤다.
‘그러면 뭐 해. 멸망인가 태고인가 하는 새 한 마리 어떻게 할 수 없을 처지일 텐데.’
자만할 틈도 없다.
그렇게 생각하며 눈을 뜬 황준우의 눈앞에 어느새 붉은 눈을 빛내는 적안서 한 마리가 다가와 있었다.
입에 물린 전통은 매일같이 사마정이 보내오는 천하의 동향에 관한 보고서다.
이를 살피고 앞으로 남기연합의 방향을 결정하는 것 역시 황준우의 몫이다.
공식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지만 실제 남기연합의 주인이라 할 수 있는 이가 황준우 본인이었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전통을 열어, 안에 말린 두루마리를 펼쳐 내용을 읽는 황준우의 눈에서 이채가 쏟아져 나왔다.
“호오, 이것 봐라. 정의회에서 드디어 움직이기 시작한 건가.”
큰 움직임은 아니었다.
오히려 은밀한 편에 속했다.
삼대세가에서 이름 높은 주요 무인들과 무력대가 뿔뿔이 흩어져 어딘가 목적지를 향해 움직이고 있다.
전왕에게 물을 것도 없었다.
황준우의 눈에도 그 목적지가 뻔히 보였다.
“참을 수 없었겠지.”
한때는 무림맹과 함께 무림이강(武林二强)이라 불리던 오대세가의 연합체였으나, 이 년 전 있었던 남궁세가와 제갈세가의 탈퇴 선언, 거기에 더한 정의회의 가장 큰 조력자인 하오문과 천조회의 다툼이 더해져 큰 위기를 맞은 정의회는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물론 이는 대외적인 입장이었을 뿐이며, 그 속내는 커다란 변화의 바람에 떠밀려 어찌할 줄 모르고 방황하는 이들의 탁상공론(卓上空論)이 가득 차 있었다.
그런 시간이 자그마치 이 년이었다.
“오히려 이만큼이나 참은 게 용하다고 해야 하나.”
물론 탁상공론에 빠져 있던 이상론자들을 의미하는 말이 아니었다.
이대세가가 빠졌어도, 정의회에 남은 삼대세가 역시 만만치 않은 가문들이다.
때문에 아직까지도 정의회가 무림맹, 남기연합과 함께 무림삼강(武林三强)이라는 이름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오히려 실제 대다수의 호사가들은 아직까지는 남기연합보다 정의회가 우위라고 생각하고 있기도 했다.
그런 힘을 가지고도 언제까지나 탁상공론만을 할 리가 없다.
보는 것이 답답하여 참지 못하고 당장에라도 뛰어나와 전쟁 혹은 전투를 바라는 과격파들도 분명히 존재했다.
그 첫째 목표가 무엇이겠는가?
남기연합? 물론 아니다. 남기연합은 신생이지만 이미 무림의 제일을 다투는 세력 중 하나로 뽑히고 있었다.
그런 남기연합과 싸우는데 은밀한 소수의 병력만을 움직인다는 것은 어불성설(語不成說)이다.
그야말로 큰 전쟁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아마 일부 과격파 측에서는 그를 원했을지도 모르나, 자신들의 권위와 지위가 희생되길 바라지 않는 이들은 그를 격렬히 반대했을 것이다. 한 번의 싸움으로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도박은 좋지 않을 테니 말이다.
그렇다고 하여 과격파의 불만을 언제까지 눌러놓을 수만도 없다.
고이기만 하면 내부에서 폭발하니 외부로 쏟아낼 필요가 있다.
“그래서 제갈세가.”
황준우의 머릿속에 천하의 지도가 흐릿하게 떠올랐다.
완벽하지는 않지만 대체적인 주요문파와 가문의 위치가 별빛처럼 반짝이듯 떠오른다.
그중 정의회에 속한 삼대세가.
‘사천당가, 황보세가, 서문세가.’
정의회가 발호하며, 강남으로 본가를 옮겨 가면서까지 똘똘 뭉친 세 개의 별에서부터 빛이 흘러나와, 각기 다른 방향에서 제갈세가를 향한다.
시간은 제법 남아 있었다.
은밀하다 보니 움직임이 빠르지 않았다.
정의회의 머리 꼭대기에 앉은 욕심 많은 이들 역시 그들의 움직임을 제한할 것이 눈에 뻔히 보였다. 그들은 사소할 수도 있는 이 전쟁을 되도록 오래 끌고 싶은 것이다.
새롭게 변화하고 있는 정의회에 자신들의 위치를 공고히 할 때까지 대신하여 검을 맞고, 시간을 끌어 줄 상대로 제갈세가를 택했으니 말이다.
웃음이 나올 일이다.
“그 여자를 너무 얕보고 있군.”
황준우는 직접 제갈세가를 보았다.
그들이 다른 오대세가와는 다른, 신비의 영역을 개척하고 다루고 있다는 사실을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한 것이다.
일평생 무공의 관점에서 모든 것을 생각해 온 나머지 삼대세가가 그런 제갈세가를 우습게 보며 움직이고 있다.
비록 그 세력의 격차는 크다지만 제갈세가가 질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어쩌면 제갈량은 이런 상황을 예지하고 탈퇴를 선언했을지도 모르겠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번 싸워도 한 번을 물러서지 않음이라.
제갈량은 이미 스스로 처한 가문의 상황과, 적의 동태를 모두 읽고 있었음이 분명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사실이라면 그 이름이 아깝지 않겠지.’
황준우는 짧게 생각을 정리하며 연통을 접었다.
마지막 문구에는 우선은 지켜보겠다는 사마정의 의견이 있었다.
“생각대로 하라고 전해. 어차피 지금은 우리가 나서야 할 명분도, 이유도 보이지 않으니까. 필요한 부분이 생기면 제갈세가 측에서 먼저 연락해 오겠지. 지켜보자고.”
황준우의 말을 들은 적안서가 작은 울음소리를 흘리는 것 같더니 등을 돌려 빠르게 멀어진다.
다시 한 번 무림의 판도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 작은 바람이 춘풍(春風)에서 그칠지, 아니면 매서운 동풍(凍風) 혹은 여름에 찾아오는 거친 태풍(颱風)이 될지는 아직은 그 누구도 몰랐다. 물론 그런 거친 바람을 만든다면 당사자는 남기연합이 될 것이다.
지금 황준우는 굳이 이 싸움에 참가해야 할 이유가 없다고 했지만, 사실을 따지자면 조금은 달랐다.
‘전왕하고 상의를 해서 그림을 또 하나 그려 봐야겠어.’
흡족한 얼굴로 고개를 주억이던 황준우의 몸이 갑작스럽게 벌떡 일어났다.
“조율경?”
흔히 사용하던 무공의 경지를 지칭하는 말이 맞다.
다만, 황준우는 본인 이외에 이와 같은 경지에 달한 이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었다.
괴이한 보물과 기물로 강해진 적들은 제법 있었지만 실로 홀로 강한 무인은 단 한 명도 없었다는 뜻이다.
한데 방금, 소주 인근으로 순수한 무공으로 조율의 경지에 달한 무인이 나타났다.
저도 모르게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킬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하나 황준우는 곧 얼굴에 새겨졌던 당황을 지우고 미소를 그렸다.
“어떻게 인간 중에는 적수가 없겠다고 자만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타나는 거지?”
물론 거듭 말해 조율경도 다 같은 조율경이 아니다.
하지만 이전에 속하는 조화경과는 비교도 되지 않음 역시 사실이었다.
심지어 기운의 느낌이 제법 익숙했다.
“진무영 그 녀석이 드디어 벽을 넘은 건가?”
그리하여 자신감에 차서 황준우를 찾아왔는가?
그렇다면 잘됐다.
처음 만났을 때와는 상황이 달랐다.
지금의 진무영은 황준우의 인식 속에 확실한 적이다.
적은 오래 살려 둘수록 좋지 않다는 사실쯤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황준우였다.
“기대되는군.”
짧게 읊조린 황준우의 신영이 연무장 내에서 순식간에 사라졌다.
무당산을 벗어난 위자청은 주변을 조금도 돌아보지 않은 채 곧장 강소를 향했다.
어차피 그에게 남은 욕심은 단 하나뿐이었다.
그 어떠한 아름다운 풍경도, 가슴 아픈 사연도, 아름다운 여인, 심지어 강한 무인조차 그의 발목을 잡을 수 없었다.
“무신.”
오로지 두 글자, 한 단어만이 위자청의 가슴과 머리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그 걸음이 강소에 닿아, 일위도강으로 거대한 태호를 넘어, 저 멀리 소주, 그 중심에 위치한 만금장을 바라보고 있을 때 하나의 기척이 벼락 치듯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가볍게 보법을 밟아 뒤로 물러서 공격을 피한 위자청은 태호의 강물을 밟은 채 뒷짐을 지고는 웃음을 흘렸다.
“거친 환영 인사로다. 네가 그 만금장의 어린 무신이로구나.”
입은 웃고 있었지만 가슴은 떨렸다.
눈에서는 폭발할 듯한 이채가 터져 나왔으며 머리는 흥분으로 가득 찼다.
“환영 인사는 그쪽이 더 거칠었지. 누구라도 자기 집을 향해 그렇게 무섭게 기운을 쏘아내면 불쾌하다고.”
“흐으…… 내가 만금장을 보고 있음을 알았더냐?”
“그러면 보고도 모르고, 듣고도 아니라 할까.”
피식 웃은 황준우의 눈이 위자청을 천천히 훑었다.
‘진무영이 아니고 검선이었나.’
설마하니 이 노괴가 아직까지 살아 있을 줄은 황준우도 몰랐다.
심지어 조율경의 벽까지 닿았을 줄이야.
하긴, 재능으로만 치자면 원공조차도 넘어서던 위인이었다.
몇 번이고 황준우와 검을 맞댔고, 패배하며 배운 것도 있을 테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늙었으면 얌전히 순리를 따라 하늘로 갈 것이지. 왜 아직까지 살아서 못 볼 꼴 보려 그래.”
짧은 시간 동안, 전신에 차오르는 흥분을 억누르고 있던 위자청이 깜짝 놀란 시선으로 황준우를 바라본다.
“호오, 아해야. 이 영감을 알고 있느냐?”
이미 무당파 내에서도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이가 극소수다. 한데 만금장, 전혀 상관도 없는 상가의 어린 친구가 마치 그를 잘 알고 있다는 듯 대한다.
호기심이 절로 피어나는 기이한 경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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