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76화
제 176화
“표정이 제법 바뀌어서 처음에는 몰라 봤는데, 눈빛이랑 기질마저 감출 수는 없거든. 지금 영감, 굉장히 어울리지 않는 가면을 쓴 느낌인 것 알아?”
“……제자 놈에 이어 이제는 상가의 어린 아해마저 나를 꿰뚫는가. 허허!”
“어울리지 않는 웃음은 집어치우라니까. 슬슬 역겨워지려고 하잖아.”
“고얀 놈!”
눈을 부라린 위자청의 손바닥이 황준우의 목덜미를 향해 매섭게 날아든다.
무당파가 자랑하는 최고의 절기 중 하나인 십단금(十段錦)이다. 조율의 경지, 그중에서도 검선이라 불리던 인물의 손속답게 그 자체만으로도 상당히 날카롭다.
손에 검이 없어도 검을 쥔 것과 다를 바 없으니 그야말로 무검지경(無劍之境)이라는 표현이 아깝지 않은 실력이다.
황준우가 그 십단금에 맞서 빼든 것은 투박한 주먹이었다.
뭉툭하기 그지없으나 천하의 그 무엇보다 단단해 보이는 주먹과 무엇이든 벨 것 같은 기이한 손바닥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콰드득-!
기와 기의 충돌이 주변의 대기를 일그러트리고 지면마저 무너트린다.
놀란 얼굴을 한 위자청을 향해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발이 길게 내뻗어졌다.
“이런 곳에서 싸우다가는 다 부셔 버리겠어.”
복부에 내지른 강렬한 발차기에 밀리듯 떠오른 위자청의 신형이 다시 태호 위로 되돌아갔다.
“호오, 그사이에 힘을 흘렸나? 영감 진짜 많이 늘었네.”
황준우는 그를 빠르게 따라붙어 다시 한 번 주먹을 내질렀다.
하나가 아홉이 되어 반짝이는 그 모습을 확인한 순간 헛바람을 집어삼킨 위자청이 또 한 번 십단금을 펼쳤다.
폭음과 함께 태호의 강물이 하늘 높이 치솟은 후 거센 빗방울처럼 떨어지며 두 사람의 머리를 두들겼다.
눈을 부릅뜬 채, 붉어진 얼굴을 한 위자청이 황준우를 보며 이를 간다.
“구벽신권! 남궁세가 놈들이 아주 돈에 미쳐 제 영혼마저 팔아넘겼구나!”
제법 성난 목소리를 내지른 위자청의 얼굴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두 눈에서는 겨울의 한기마저 뛰어넘을 차가운 바람이 몰아친다.
“아, 이제야 조금 영감 같네. 한데,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것 아니야?”
“이런 허접한 무공 따위를 굳이 내가 남궁세가한테 돈 주고 샀을 것 같아?”
피식 웃은 황준우가 말아 쥐었던 주먹을 펼쳤다.
이후 넓게 펼친 손바닥을 정면으로 보인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슬슬 이것도 감이 잡히는데 말이야.”
위자청이 차가운 조소(嘲笑)를 흘렸다.
“어리석은 아해야. 지금 네가 흉내 내려 하는 것이 무엇인 줄 모르는 게냐? 구벽신권 따위와는 비교도 안 되는…….”
“시끄러워.”
짧게 읊조리는 황준우의 넓은 손바닥에 날카로운 예기가 열 십(十)자 모양으로 솟아나 단숨에 위자청의 머리를 뒤덮는다.
“십단금!”
경악하며, 또 한 번 같은 십단금으로 맞선 위자청의 얼굴이 이제는 터질 듯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와 혼란, 충격 속에 방황하는 것이 분명한 그 얼굴을 지긋이 바라보던 황준우가 살짝 물러났다. 거대한 기운이 충돌하며 힘을 부딪치고 있던 상황이라기에는 믿기지 않을 정도의 자연스러운 후퇴에 위자청의 표정이 다시 한 번 변했다.
“정녕…… 정녕 무신인가? 이제 약관을 조금 넘어 보이거늘…….”
믿을 수 없는 현실이었지만, 충격은 빠르게 사그라졌다.
위자청은 이미 무욕의 경지를 이룬 바 있는 무당의 거두(巨頭)였다.
실상 천하제일이라는 이름에 가장 가까운 사내이기도 했다. 들끓던 마음이 순식간에 가라앉고 두 눈은 진실을 꿰뚫는다.
“어리다고 우습게 보아서 미안하구나. 제자 녀석의 눈이 높다는 사실을 훤히 알면서도 장난 정도로 여겼으니 모두 내 업보다. 네놈은 정녕 다음 대 무신의 위(位)를 이을 자격이 있을지도 모르겠구나.”
어느덧 그의 표정은 잔잔해진 태호의 강물만큼 고요해졌다.
하나 이전처럼 선해 보이는 웃음만이 가득한 것 또한 아니었다.
한편으로는 서늘해 보이는 표정을 하였으며, 두 눈에는 총기가 번쩍인다.
물러서지 않는 용기와 패주(?主)로서의 위엄이 전신에서 번쩍인다.
스르릉-!
차가운 울음소리와 함께 이십 년 만에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검 한 자루를 뽑는 순간에는 그야말로 무엇으로도 허물 수 없을 것 같은 태산(泰山)이 섰다.
맨손으로 십단금이나 펼칠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기세다.
“검이 없는 경지라 한들, 내 본질은 결국 검에 닿아 있으니. 내가 검이고, 곧 검이 나임을 잊지 않았다. 어찌, 검선의 춤에 한 번 어울려 보겠느냐?”
그 질문에 황준우는 밝게 웃어 보였다.
지금까지 보아 왔던 가짜와는 격이 다르다.
위자청은 검을 뽑음으로써 진정으로 자신이 이룬 완성을 보여 주었다. 황준우 역시 우습게 그를 대할 생각은 없었다.
허리춤에 대충 메어 있던 수왕검을 뽑아 든다.
우우웅-!
이때를 기다렸다는 듯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는 울음소리에 위자청의 얼굴로도 차가워 보이는 미소가 번졌다.
“그대 역시 검으로 종사(宗師)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황준우를 어린아이 취급하던 말투는 사라졌다.
동시에 위자청의 검이 무겁게 강을 갈랐다.
잠깐이지만, 베였다고 느낀 순간 황준우의 수왕검이 번쩍이며 움직였다.
파바밧-!
태호가 수십, 수백 갈래로 갈리며 물방울을 흩날린다.
황준우의 이마 위로 작은 식은땀이 흘렀다.
‘이것 봐라……, 조금만 늦었어도 진짜 베일 뻔했어.’
베였다고 느꼈던 것은 너무나 현실과 닮은 착각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이미 예정되어 있던 미래와 다름이 없었다. 황준우가, 수왕검이 그를 강제로 흐트러트리고 끊어 놓지 않았다면 진짜 베였을 것이라는 뜻이다.
조율을 이용해 검의 흐름을 조정하고 있다.
황준우가 자연지기와 소통해 그를 다루는 것과는 전혀 다른 느낌이었다.
‘아무래도 조율에도 각자 차이가 있는 것 같지?’
마치 특징이 다른 강기처럼 말이다.
그 사실을 황준우는 지금 눈앞에서, 몸소 확인하고 있었다.
“벗어나려 하지 마라. 함께 춤을 추자고 하지 않았더냐.”
위자청이 그야말로 검무(劍舞)를 추듯 몸을 흔들며 검 끝을 잡아당기는 시늉을 하자 황준우의 몸이 앞으로 기울어졌다.
황준우가 다루는 자연지기의 기준에서 보자면 풍(風)의 기운을 이용해 등을 떠미는 행위로 흉내를 낼 수 있을 터였다. 하나 지금 황준우를 잡아당기는 힘은 그런 것과는 완연히 달랐다.
‘인력(引力)인가.’
위자청 본인을 기준점으로 두고 목표한 대상을 잡아당긴다.
이런 식으로 할 수 있다면 반대도 가능할 것이다.
“어디 한 번……”
웃음을 보인 황준우의 검에서 황금빛 뇌전이 번쩍이며 앞으로 쏟아져 나갔다.
“흥……!”
콧방귀를 뀐 위자청이 검을 길게 내뻗자 뇌전이 바깥으로 밀려 태호의 중앙으로 떨어져 폭발한다.
다시 한 번 태호가 폭발하며 굉음이 일었다.
‘척력(斥力). 자연기조차도 밀어낼 정도란 건가?’
하긴 그쯤 되지 않으면 같은 조율이라 말하기도 부끄럽다.
“재미있네.”
어느덧 눈앞에 다가온 위자청의 검을 본 황준우가 웃으며 말했다.
카가강-!
두 자루 검이 부딪치며 불꽃을 튀기고 대기를 찢고 호수를 갈랐다.
태호의 물길이 갈라져 밑바닥을 몇 번이고 드러내는 검무가 연이어지며 두 사람은 어느새 어딘가 모르게 닮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살기가 날뛰는 목숨을 건 대결이 아닌 친한 친구가 어울려 노는 것 같은 정겨운 모습이다.
그렇게 한참을 수십, 수백, 수천 합이나 주고받던 위자청이 끝내 먼저 뒷걸음질을 쳤다.
가쁜 숨을 가다듬으며, 여유롭게 선 황준우와 마주한 위자청의 눈과 검, 입술이 떨렸다.
“휴우…….”
한숨과 함께 떨리는 입을 연 위자청이 고개를 들어 황준우를 직시했다.
“미안하구나. 이게 내 한계니, 더 보여 주고 싶어도 보일 게 없구나.”
“조금은 거짓말이 섞여 있는 것 같지만, 믿어 주지.”
위자청을 향해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마지막 한 수까지 모두 보인다면, 만약의 경우 무당에 누가 있어 그대를 막을 수 있겠나. 늙은이의 욕심이라 하여 너무 구박하지는 마시게.”
“구박할 자격 정도는 있잖아. 기껏 장단 맞춰 놀아 줬더니 혼자만 즐겁고 말이야.”
“끙…….”
언뜻 보면 두 사람이 함께 어울린 듯했지만, 분명 양보를 한 측은 황준우였다.
위자청도 그를 부정할 수는 없었다.
또한 아직까지 그의 무욕(武慾)이 모두 채워졌음도 아니다.
부탁하는 입장에서 끝까지 상대에게 배려만을 바랄 순 없다.
“휴우…….”
몇 번이고 한숨을 내쉬고, 고민하던 끝에 위자청이 품에서 하나의 패를 꺼내 황준우에게 던졌다.
가벼운 동작으로 그를 받아 든 황준우가 위자청을 바라본다.
“이게 뭐야?”
“무당의 검주(劍主)를 상징하는 패지. 언제고 무당에 도움을 청할 일이 있으면 그를 보여 주시게. 단 한 번에 한해서는 무당의 명예를 걸고 무엇이든 도와줄 터이니, 그를 받고 이 늙은이의 욕심에 조금 어울려 주는 건 어떤가?”
“영악하네, 영감. 내가 정말 세상 모르는 어린애라고 생각하는 거야?”
조소를 보인 황준우가 그 자리에서 곧장 받은 패를 태호의 강물 위로 집어 던졌다.
“이딴 패를 이용해서 나와 무당의 사이를 엮어 보겠다? 죽어도 사문(師門)이라 이거지?”
도움을 요청할 수 있는 패를 가지고 있음에 황준우가 무당을 적대할 이유는 적어진다.
마치 선물처럼 던져 준 패가 그를 묶는 족쇄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은 뻔히 보였다.
“끙…… 너무 눈에 훤히 보였나?”
“그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 누구를 닮았나 했더니, 영감을 닮았던 거군. 장난치지 말고 차라리 전력을 다해 덤벼. 어차피 진무영 그놈이라면 영감이 남긴 것 이상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는 것 알잖아?”
“역시 그대도 무영이를 알고 있구나.”
“그래. 하니 다 보여 달라고. 영감이 조율하는 세상의 궁극. 지금 내 관심사는 오로지 그것 하나뿐이야.”
“음…….”
“거참, 누가 늙은이 아니랄까 봐 답답하게 구네. 영감, 이미 댁의 시대는 끝났어. 남은 일은 뒤의 인물들에게 남겨 두라고. 그 결과가 어떻든 그것이 순리고, 이치인 게야.”
“아……!”
황준우의 말은 투박하고 거칠었지만 이치를 꿰뚫고 있었다.
그로 인해 위자청은 자신의 발목을 잡고 있던 진정한 모든 것을 되돌아 볼 수 있었다.
단순한 무에 대한 욕심뿐만이 아니었다.
아주 어린 시절 처음 스승의 손을 잡고 입산(入山)하던 날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이후 자신감에 가득 차 산문을 박차고 나가 시작했던 강호행이 눈앞을 번쩍이며 스쳐 지나간다.
그 젊은 청년은 어느덧 어린 시절 자신을 쏙 빼닮은 제자와 함께 무당이라는 이름의 현판을 바라보고 있더라.
시간이 더욱더 흐르니, 땟물이 가득 했던 어린아이들이 어느덧 청년의 모습이 되어 자신감 가득한 미소를 비춘다.
‘아아, 자랑스럽구나.’
또한 걱정이 되더라.
그래도 훌륭한 제자들이었다.
때로는 차가운 그에게 눈물을 쏟게 하고, 가슴을 두드리게 하며, 불같은 화를 쏟게도 했지만 소중한 무당의 아이들이었다.
그들이 이제는 늙은 중장년이 되어, 또 자신들의 어린 시절의 모습과 닮은 아이들의 손을 잡고 위자청의 앞에 선다.
젊은 시절과는 다른 부드러운 웃음으로 인사를 한다.
여전히 마음고생만 시키는 막돼먹은 제자도 있지만, 그래도 좋다.
그 모든 것이 시간의 흐름 속에 남은 흔적들이기 때문이다.
삶이라는 말이다.
이제야 위자청은 그를 깨달았다.
무욕이라 말하였지만 그는 여태껏 무엇도 버리지 못했다.
평생 그가 그토록 가지길 원했던 모든 것은 결국 단 하나에 맞닿아 있었다.
“아아, 그래. 내 인생(人生)은 그야말로 무당(武當), 무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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