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79화
제 179화
제안이 오고 간 후, 제갈량은 올 때와 마찬가지로 신출귀몰하게 사라졌다.
‘단순한 술법이 아니네?’
황준우는 그 모습을 바라보고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처음과 달리 지금이라면 황준우 역시 어느 정도 술법의 흔적을 알 수 있다. 한데 제갈량이 신출귀몰하게 움직이는 모습에서는 술법의 흔적이 너무 적었다.
분명 술법의 종류이기는 한데, 이처럼 눈앞에서 갑작스레 사라지기에는 무리가 있는 수준이랄까. 마치 광구의 술을 만들 수 있는 수준의 자연기로 화구(火球)의 술을 펼친 것과 같은 느낌이다.
이제야 생각하지만 당시에는 몰랐던, 이와 같은 비슷한 기시감을 받은 경우가 있었다.
‘스승님도 갑작스럽게 나타나고 사라지시곤 했지.’
그중 몇은 무공의 수준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움직임도 있었다.
‘어떠한 보패의 영향?’
문득 두 사람 모두 부채 종류를 굉장히 사랑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그것에 의심이 갔지만 곧 고개를 내저었다.
지금 생각할 것은 이런 종류가 아니었다.
‘당가를 쳐야지.’
이미 정의회는 움직이고 있다.
그런 상황에서 거래는 성립되었고 주춤거릴 시간은 없었다.
최대한 신속해야 한다.
당연한 말이지만 빠르게 움직이기 위해서 대군은 필요 없었다.
꾀가 좋다지만 무공은 약한 전왕 역시 도움이 되지 않았다.
“경호, 홍산 그리고…… 흑백쌍노를 부르면 되겠군.”
본래 흑백쌍노는 천조회의 암중 무력 지원자이자, 사마정의 감시자였다.
기연합이 결성된 이때에 있어 무력 지원은 그렇다 쳐도, 사마정의 감시 역할을 하기 위해서는 함부로 뺄 수 없어야만 한다.
사마정을 믿는 것이 아닌 한, 꼭 그래야 하는 것이다.
머리는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황준우의 마음은 다른 말을 했다.
“두 녀석들이 너무 약하니까. 이참에 실전 경험을 더 시켜서 자극을 줘야지. 그리고 사마정 녀석. 설마 남기연합 아래에서 딴짓하겠어? 제 목숨 아까운 줄 아는 녀석이니까. 음음. 괜찮아.”
실제로 본래 경호와 홍산에 비교하자면 월등히 강했던 흑백쌍노가 지금은 두 사람에 비해 무공이 모자라다. 간단한 이유였다.
홍산과 경호는 강해지기 위해 노력했다면 두 사람은 젊어지기 위해 발악했다.
어떤 의미로는 그 누구보다 뜨거운 집념을 불태우던 두 사람은 말 그대로 회춘(回春)하여 이제는 장년의 나잇대로 보일 정도였다.
어이가 없는 것은 그쯤 되면 이제 만족할 만도 하련만 두 사람의 욕심은 아직까지 끝이 나지 않은 채 더욱 불타오르고 있다는 것이었다.
나름대로 스스로의 실력을 갈고닦기도 하며 병행 중이라지만 저런 자세여서야 당연히 후배에게도 따라잡힐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까 이번에 제대로 한 번 죽을 맛을 보여 줘야지.”
황준우가 원하는 것은 늘 완전한 승리다.
하지만 아군 모두가 하나도 고생하지 않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다.
황준우에 대한 의지로 나태함에 빠져 약해진다면, 아주 만약의 때에 스스로의 목숨조차 지킬 수 없게 되는 것이야 불 보듯 뻔했으니 말이다.
‘좋아, 그럼 이건 이렇게 결정.’
다섯 명뿐인 출진.
초라하다고 할 수도 있지만 그중 한 명이 황준우인 이상 제갈량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터였다.
애초부터 겉으로 드러나지 않을 암쟁인 만큼 쓸데없는 화려함은 오히려 독일뿐이다.
소주에서 셋, 합비에서 둘.
작은 출정(出征)이었다.
각기 다른 지역에서 출발한 두 무리는 배 위에서 만났다.
남기연합 측에서는 은밀히 강소에서 호북까지 가장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배를 지원했다. 황준우를 제외한 네 사람의 입장에서는 가장 빠르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다. 중경을 넘어 호북으로 들어선 사천 당가의 뒤를 역으로 쫓는 모양새를 만들 수도 있다는 장점 역시 컸다.
배는 정착지 없이 빠르게 장강을 가로질러 무한을 넘어섰다.
그간 황준우에 의한 반 강압 혹은 본인의 의지로 네 사람은 배 위에서도 쉴 새 없이 무공을 수련했다. 꾸준한 수련은 눈에 뜨이는 성과를 만들진 않지만 나아가는 방향을 향해 계속해서 발자국을 남긴다.
비록 느리다 한들 그 발자국은 언젠가 경계(境界)에 닿고, 또 넘어서게 된다.
때문에 경호는 언젠가의 깨달음 이후, 스스로의 재능을 한 번도 탓하지 않았다.
다만 그렇기 때문에 결코 쉬려고도 하지 않았다.
‘앞으로 이런 전쟁이 몇 번이나 더 있을지 몰라.’
경호의 마음은 차분하게 미래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어렸던 도련님은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호위 따위는 필요 없는 훌륭한 청년으로 자랐다. 또 눈을 몇 번 껌뻑이니 사람에게 무게가 생겨났다.
선두(船頭)에 서서 정면을 바라보고 있는 뒷모습에는 대 만금장의 소장주다운 위엄이 물씬 풍긴다.
성장하다 못해 거인(巨人)이 되었다.
동경, 그리고 감탄, 기쁨 등의 눈동자로 그런 황준우의 뒷모습을 언제나 바라봤던 경호였다. 누구보다 많이 미래를 생각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스스로가 호위무인으로서 부족하다는 사실을 잘 안다. 그를 어떻게 뒤집을 생각은 없었다. 다만, 황준우에게 폐가 되고 싶지는 않다. 앞으로 있을 전쟁에 있어 기왕이면 작은 도움이라도 되고 싶었다.
생각을 정리하며 다시 수련에 빠져들려는 찰나, 고개를 돌린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뭐 그렇게 또 혼자 궁상맞은 얼굴하고 있어.”
“그냥 생각 중이었습니다.”
“경호의 생각은 궁상으로 이어지는 건가.”
“그럴 리가 없지 않습니까!”
목소리를 높이면서도 입꼬리가 올라가는 사실이 어이가 없다고 생각한 경호의 머릿속에 문득 마음에 묻어 두고 있던 또 다른 고민 하나가 떠올랐다.
“아, 근데 정말 괜찮을까요?”
“응? 뭐가?”
“아가씨 말입니다.”
“아아…….”
황준우는 가볍게 턱을 쓰다듬었다.
사실 이번 전쟁 준비에 있어 가장 발목을 잡았던 점이 있다면 바로 황서연이었다. 딱히 무슨 폐가 된 것은 아니었다.
다만 그녀가 이 전쟁에 함께하기를 바랐을 뿐이다.
이해는 한다.
“무인이니까, 늘어난 무공을 시험해 보고 싶었겠지.”
“도련님께 도움이 되고 싶은 마음도 있었을 겁니다.”
“뭐, 그것도 그럴 테고. 그래도 말이야. 난 아직 내 여동생이 그런 끔찍한 전쟁터에서 날뛰는 모습을 보고 싶지는 않아. 이기적인 생각일 수도 있겠지만 말이야.”
“……뭐, 대충 심정은 알 것 같습니다.”
경호 역시 처음 황준우가 사람을 죽였다는 사실을 안 이후, 말만 안 했지 며칠을 마음 아파했다. 시대란 괴물이 어린 소년에게 가혹한 행위를 요구한다 생각한 탓이다. 그렇다 고해서 또 막을 수도 없다.
시대란 것은 정말로 괴물인지라, 한 사람의 인력(人力)으로는 어쩔 수 없는 흐름이 아니던가? 현재의 천하가, 세상이 피를 두려워하지 않는 이상, 무림에 몸담은 인물이라면 누구나 거쳐 가야 할 과정이다.
경호는 그를 말할 수도 있었다.
하지만 또 말할 수 없기도 했다.
그가 끼어들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몰래 따라오려다가 걸려서 삐졌지만, 어쩌겠어. 적어도 아직은 아니야.”
황준우는 고집스럽게 말한 이후 정면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이후 문득 떠올랐다는 듯 다시 시선을 돌려 꽤나 괴로운 얼굴로 가부좌를 튼 흑백쌍노를 바라보았다.
“이제 와서는 노(老)라고 하기도 그러네. 흰둥이, 검둥이. 일어나 봐.”
황준우가 말했지만 두 사람은 마치 못 들었다는 듯 꿈쩍도 하지 않는다.
배에 타자마자 한동안 수련을 도외시한 벌이라며 시킨 끔찍한 지옥 훈련이 두 사람의 뇌리에 각인된 탓이다.
경호나 홍산 때처럼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하지 않았지만, 어떤 의미로는 명확히 기억하는 때가 더 무서운 법이다. 황준우의 수련을 받을 수 있다며 즐거워하던 어린아이 같던 두 노인은 이제 어디에도 없었다.
“어차피 수련 안 하고 딴생각 하고 있는 것 다 알아. 셋 세기 전에 눈 떠.”
그 말을 마치고, 차마 ‘셋’이라는 단어를 입에 담기도 전이었다.
두 사람이 마치 짜 맞췄다는 듯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혹시 백아, 부르셨습니까?”
“흑아도 찾으셨습니까?”
외모는 변했지만, 속은 전혀 변한 것 없는 두 사람의 모습에 황준우의 입가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분명 뇌에 있던 문제도 거의 다 해결되어가고 있을 텐데 말이지. 왜 아직도 애 같은지.”
어린아이의 맑은 백지와 같은 두 사람의 정신 역시 황준우와의 만남 이후 조금씩 성장하고 있었다. 실제로 근래 처음으로 흑백쌍노를 만난 사람들은 그들의 어투에서 스스로를 지칭하는 명사를 제외하고는 큰 위화감을 못 느낄 때가 많다고 하였다.
한데 황준우의 앞에서 말하는 모습을 보자면 성장이라고는 회춘 빼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느낌이다.
영락없는 어린아이 상태 그대로인 것이다.
다행히도 처음에는 거슬리기도 했지만, 막상 그 모습을 보다 보니 나름 귀엽기도 하다고 생각하며 적응한 황준우였기에 사실 그 모습이 싫지만도 않았다.
“문득 든 생각인데 말이야. 너희 둘, 무공 말고도 할 줄 아는 게 있잖아?”
“백아는 이제 그런 나쁜 짓 안 합니다.”
“그거 소장주께서 하지 말라고 하셔서 흑아도 안 합니다.”
흑백쌍노.
과거 흑백쌍흉이라 불리던 두 노인은 뛰어난 무공보다는 사실 기이한 능력으로 더 악명이 높은 이들이었다.
바로 백노가 다루는 사술(邪術)과 흑노의 강시를 다루는 능력이다.
실제로 처음 황준우 일행을 습격했을 당시 두 사람은 각자의 그 특별한 능력으로 첫 공격을 시도했다. 물론 황준우에게 막혀 아무런 의미가 없었지만 말이다.
“알고 있어. 그냥 문득 궁금해서 말이야. 백아 잠시 나한테 그 정신지배 같은 것 시도해볼래?”
“안 됩니다. 하면 혼납니다.”
“안 혼낼 테니까 해 봐.”
“……정말입니까?”
“계속 반문하면 혼낸다.”
“백아, 반문 안 합니다. 바로 해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백아는 정말 곧장 사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두 눈은 새하얗게 뒤집어지고 몸에서부터는 검은 아지랑이 같은 기운이 피어오른다. 상당히 자연스럽고 빠르게 시전되는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만.”
박수를 친 순간 검은 아지랑이의 기운이 흩어지고 백아의 모습도 원래대로 돌아왔다.
“으으…….”
오랜만이라 그런지, 창백해진 안색에 어지럽다는 듯 머리를 짚은 백아가 괴로운 신음을 흘렸다.
“미안. 꽤나 괴로운 일이었나 보네.”
그 모습에 놀란 황준우가 곁으로 다가가 물과 땅의 기운을 흘려주었고, 백아는 곧장 평소와 같은 안색을 찾았다.
“으으, 예전에는 이렇게 힘들지 않았는데…… 백아 이제 하라고 해도 못 할 것 같습니다.”
칭얼대는 목소리에 웃음을 흘린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다시는 하라고 시키지 않을게. 고마워. 잘했네.”
황준우의 칭찬에 백아가 헤실거리는 웃음을 흘린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황준우의 눈에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역시…… 닮아있어.’
처음에는 두 사람이 마도(魔道)의 인물이니 자연스럽게 어떠한 마공서를 통해 익혔으리라 생각했다. 그 능력을 봉인시킨 이후로는 크게 신경도 쓰지 않았고 말이다.
한데 문득 떠오른 생각에 확인을 해본 건데 발동하는 모습이나 탁기를 풀어내는 것이 진시황릉에서 보았던 밀교의 마술사들의 모습과 제법 닮아 있었다. 딱히 주문을 외우지 않는다는 점을 빼고는 거의 완전히 같다고 보아도 무방한 수준이다.
이는 흑노의 강시술에도 밀교 마술사의 영향이 있을지 모른다는 뜻이었다.
“너희 둘 다 어디서 배운 거야?”
만약 밀교의 마술사에게 배웠다면 확인해둘 필요가 있다.
경우에 따라 약점이 될 수도 있을 테니 말이다.
한데 질문을 받은 두 사람의 표정이 기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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