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80화
제 180화
“어…… 그게…… 백아는…….”
“흑아는…….”
“왜 그래?”
“그, 그게…… 그냥 원래부터…….”
“저도 처음부터 할 수 있었던 것 같은데…….”
“말이 돼?”
황준우의 질문에 두 사람이 입을 닫고 땀을 뻘뻘 흘렸다. 황준우는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조금씩 황당한 표정이 되었다. 과거 악명이 흉흉했던 둘인 만큼, 어쩌면 어떤 심한 악행을 감추기를 위해 모르는 척할 수도 있다. 처음에는 그리 생각하기도 했는데, 지켜보니 두 사람은 정말 자신들의 능력을 어떻게 배웠는지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는 듯했다.
“언제부터 그런 능력을 쓸 수 있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고?”
당연한 말이지만 어미 배 속에서부터 사술과 강시술을 배울 수는 없다.
두 사람에게도 시작은 있었을 것이다.
“……죄송합니다.”
“흑아도 기억이 나지 않습니다.”
스스로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서로를 바라보는 두 사람의 눈에 답답함이 가득하다.
애초에 황준우가 질문을 하기 전까지는 그런 능력을 어떻게 발휘하여 왔는지조차 전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지능이 조금 부족하다고 볼 수 있는 둘이라고 하여도 그런 상황이 이상하다는 사실쯤은 잘 알았다.
“어째서…….”
“이상합니다.”
두 사람의 눈에 평소와 다르게 진중함이 깃들었다. 그 모습을 묵묵히 지켜보던 황준우는 가볍게 손을 내저었다.
“잘 생각해 보고, 혹시 떠오르는 게 있으면 말을 해 줘. 당장 생각나는 것도 없는데 무리할 필요는 없고.”
“알겠습니다. 백아는 열심히 생각하겠습니다.”
“흑아도 노력하겠습니다.”
무리하지 말라고 했음에도, 대답을 한 직후 두 사람은 또다시 깊은 고심에 들어갔다.
스스로 생각해도 이상한 일인데, 희미한 단서조차 떠오르지 않으니 가슴 언저리에 무언가 턱 걸린 느낌일 터였다.
황준우는 시선을 다시 장강의 물길 위로 돌렸다.
말했듯 두 사람을 재촉할 생각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 외로도 의문은 많았다.
‘그러고 보니 요즘 장강이 조용하다더니…… 어쩐지 굉장히 평화로운 느낌인걸.’
장강뿐만이 아니었다.
회하를 비롯하여 황하 등 모든 물길에서 수적의 움직임이 줄었다고 들었는데, 실제로 나아가는 물길에 수적의 깃발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보통 이런 때에는 수적들 내부에서 문제가 생겼을 확률이 높았다.
예를 들자면 정권 교체다.
본래 군림하던 수로왕의 힘이 꺾이고, 세대교체의 때가 오면 수적들도 나름 내부 사정으로 바빠지는 것이다.
한데 작금의 수로왕은 여전히 건재하다고 하니, 아무래도 그런 경우로 보기는 힘들었다.
‘오히려 수로왕이 통제하고 있다고 봐야 되려나?’
하지만 왜?
이해되지 않을 일이다.
수적은 말 그대로 물에 사는 도적이다.
우스운 일이지만 그들에게 있어 약탈은 생업인 것이다. 그런 일을 수로왕이 통제하고 있다. 제 배가 허전해지는 것은 물론 밑에서 치고 올라오는 불만도 보통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수로왕이 약탈을 통제하고 있다.
어쩌면 가끔 있다는 약탈 행위조차 수로왕의 통제를 폭거라 생각하며 참지 못한 이탈자들일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실상 그 때문에 사마정이 바쁘게 알아보고는 있다고 들었지만 딱히 마음에 걸릴 만한 요소는 아직까지 보이지 않았다. 덕분에 전왕도 쉽게 추론을 하지 못하고 있었고 말이다.
세상이 변화하며, 수적들마저 바뀌고 있다.
“왜 나는 여기서 진무영의 냄새가 날까.”
재미있는 직감이다.
황준우는 어차피 여기까지 나선 김에 한 번 알아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물론 당장은 아니었다.
우선은 제갈세가와의 약속대로, 당가를 정리하는 것이었다.
현재 무림제일세력은 누가 뭐라 하여도 무림맹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 제갈세가가 자리 잡은 융중산의 위치는 참으로 기묘한 편에 속했다.
곧장 같은 지역에 남존(南尊)이라고도 불리는 무당이 위치해 있으며, 고개를 조금 돌린 하남에는 북두(北頭) 소림이 자리잡고 있다.
정의회와 무림맹.
겉으로나마 같은 목적을 가진 듯하여 크게 다툴 일은 없지만, 실제 결코 사이가 좋을 수 없는 두 세력 관계를 생각하자면 제갈세가의 위치는 굉장히 불리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실제로 정의회 측에서는 제갈세가의 본단을 옮기는 것을 몇 번이고 요청한 전례가 있었다.
물론 제갈세가는 그를 모두 거절하고 여전히 융중산에 자리 잡고 있었고 말이다.
정의회 측에서 조심스럽게 정예 병력을 따로 운용해 제갈세가 공격을 하게 된 이유도 바로 이러한 밑바탕이 깔려 있었다.
정식적으로 병력을 동원해 전쟁을 일으키기에는 조금 거리가 있는 소림은 그렇다 치고, 무당과 정면으로 부딪치게 된다.
현재 무림맹 제일 정점에 위치한 무당이 정의회의 그런 행위를 지켜만 볼 이유는 없었다.
오히려 어떻게든 명분을 삼아 약해진 정의회를 집어삼키려 할 확률이 높았다.
결국 정의회는 속전속결을 바라면서도, 여러모로 눈치를 보며 제갈세가를 공격할 수밖에 없는 입장이었다.
당연히 병력의 움직임에도 은밀함은 생명으로 취급되었다.
장강을 타고 호북으로 들어서, 융중을 향하는 와중에 무당파의 눈치를 보는 일은 쉽지가 않다.
성정이 꽤나 거칠고, 난폭한 편에 속하는 당가의 무인들에게 있어서는 인내와 고역의 시간이었다. 그렇다 보니 재수 없게 걸리게 된 이들은 법과 세간의 시선에서 벗어나 있는 이들, 주로 도적들과 화전민이었다.
도적들이야 상대를 못 알아보고 나타나 먼저 위협을 가했으니 죽는다 한들 할 말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화전민들까지 꼭 이렇게 죽여야 할까?”
당가 사람이라고는 보기 힘든 하얀 피부에, 처진 눈을 한 청년이 쓴웃음을 지은 채 말한다. 그는 바로 당가의 셋째 공자인 당절운이었다. 사천 내에서 불리는 그의 별호는 당협(唐俠)으로, 외세와 신강 인근에서 넘어오는 마인들을 많이 척결하며 얻은 명성이었다.
“셋째 오빠는 괴상한 말을 하네. 애초부터 이놈들도 제 욕심 채우려고 법의 보호를 포기하고 뛰쳐나온 것 아냐? 하나를 얻었으면, 다른 무언가를 잃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았어야지.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 알잖아?”
약간은 검은 피부에 양측으로 머리를 땋은 소녀가 입가에는 미소를 건 채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말한다. 날카로운 인상에 차가운 느낌이지만 누가 보아도 미녀라고 부를 만한 외모를 한 그녀는 달리 당가의 금지옥엽(金枝玉葉)이라 불리는 당문혜다.
이제 막 약관을 넘어선 나이에 독미호(毒美狐)라는 별호를 가진 그녀는 사천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이기도 했다.
다른 세가 혹은 문파와 달리 당가는 딱히 남녀의 차이를 가리지 않는다.
중요한 것은 실력, 그리고 자질이다.
그런 의미에 있어 당문혜의 자질은 다음 대 독왕(毒王)의 이름을 논할 수 있을 만큼 아주 뛰어났다.
많은 사람들이 당가의 무인들은 모두 독을 다룰 수 있는 독인(毒人)으로 안다. 실제로도 당가에 적(跡)을 둔 이라면 누구든 기본적인 독의 제조와 하독을 배운다.
하나 당가에서는 고작 그 정도의 무인을 독인이라 지칭하지 않는다.
당가 내에서 독인이라 불릴 수 있는 자격은 아무런 재료와 여건이 되지 않아도 오로지 순수하게 단신만으로 독을 쓸 수 있는 이들만이 가진다.
누구나 흉내 낼 수 있는 어설픈 독공(毒功)이 아닌 진정한 독의 달인.
한 세대에 있어 그러한 독인은 당가 전체에서도 많이 나와 봐야 열 명 내외다.
적을 때는 다섯도 되지 않는다.
독인이 되기 위해서 태생적인 자질과, 끔찍한 고통을 견딜 수 있는 정신력, 운까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자질을 가지고 있어도 독인의 연성 과정을 버티지 못한다면 정신이 파괴되거나, 목숨을 잃게 되는 탓이다.
당문혜는 그러한 과정에서 살아남은 몇 없는 독인이었다.
또한 무공에 대한 오성도 매우 뛰어나다.
독인이라면 누구든 다음 대 독왕이 될 수 있는 자격을 가지지만, 당가의 많은 이들이 그녀의 이름을 첫째 꼽는 데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때문에 당가의 금지옥엽이다.
당가는 힘없고 자질 없는 이를 아끼지 않는다.
당대의 독왕이자, 당가의 가주인 독존(毒尊) 당철은 제 자식인 두 사람을 이 자리에 보냈지만, 작전 결정권은 당문혜에게 주었다.
오빠인 당절운을 제친 행위다.
하나 당절운 본인도, 그리고 당가의 누구도 의아함과 불만을 가지지 않았다.
강자독식.
과격하다고 볼 수 있는, 마도에 가까운 이 공식은 당문혜가 언급한 ‘모든 일에는 대가가 있다’와 동일선상에 놓인 가문의 제일법령(第一法令)이었다.
때문에 당가는 천하에서 가장 은원(恩怨)관계에 투철한 집단으로도 유명했다.
독을 쓰는 데다, 난폭하고, 은원 관계마저 투철하다.
어지간한 마두 역시 당가와는 척을 지고 싶어 하지 않는 데에는 이유가 있는 것이다.
“그래도 난 이런 모습을 보는 게 괴로워.”
눈앞에 펼쳐진 풍경이 끔찍하다는 듯 시선을 돌리는 당절운의 말에 가는눈을 한 당문혜의 입가로 조소(嘲笑)가 어렸다.
“모순적이야. 오빠 같은 사람을 두고 위선자라고 하는 거겠지?”
“나는…… 그런 게 아니라…….”
당절운이 우물쭈물하며 입술을 오므리고 펴기를 반복한다.
당문혜의 미간은 더욱 크게 찌푸려졌다.
“머릿속에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겠어. 하지만 입 바깥으로는 내뱉지 않아 줬으면 좋겠어. 뭔가 스스로가 우리와는 다르다고 말하고 싶다거나 그런 것 같은데…….”
“그게 아니라……!”
“닥치고 들어. 셋째 오빠나 나나, 그리고 저기서 발정 나 벌거벗고 뛰어다니는 우리 가솔들이나 다를 게 하나 없다고. 지켜만 볼 주제에 입으로만 자기만 특별한 양 헛소리하지 마. 보기 역겨우니까.”
“…….”
당문혜의 말은 거칠고, 독했다.
그럼에도 한편으로는 당절운의 가슴을 크게 후비는 진실이 담겨 있었다.
정말로 그가 협객이라면, 머릿속의 이상을 펼치고 싶다면 이런 상황에 참아서는 안 되는 것이다.
당문혜에 비하여 주도권이 약해서? 무공이 모자라기 때문에? 아니면 가문의 일이라서? 모두 변명일 뿐이다.
“문혜야, 나는 네가…….”
“아아, 지겹다. 과거 일 연설 같은 것. 어디서 소설이라도 많이 봤나 봐? 시끄러우니까 그 구역질 나는 입 좀 다물어 줄래?”
침묵하는 당절운을 보며 콧방귀를 뀐 당문혜가 갑작스럽게 쌍심지를 켰다.
당절운을 향해 성을 낼 때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저 썩을 놈 봐라. 내가 독은 쓰지 말라고 했는데?”
제 딸이 윤간 당하자 분노한 아버지가 나무 몽둥이를 휘둘렀고, 그에 맞은 당가의 무인이 참지 못하고 소매에 감추고 있던 독을 풀었다.
몽둥이를 휘둘렀던 아버지는 눈과 피부가 붉어진 채 숨통이 막히는지 컥컥거리며 바닥으로 쓰러진다. 그 머리를 짓밟고 의기양양한 미소를 짓고 있는 당가의 무인 머리 위로 날카로운 암기 하나가 꿰뚫고 지나갔다.
머리가 터져 나가는 소리와 함께 제자리에서 쓰러지는 무인의 눈에 그를 향해 조소 짓고 있는 당문혜가 보였다.
덕분에 그는 자신의 죽음의 이유를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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