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83화
제 183화
“백아, 정말 당가 놈들하고는 싸우고 싶지 않습니다. 더럽고 치사한 게 똥만도 못합니다.”
“흑아도 싫습니다. 치사한 녀석들이 자꾸 독을 씁니다! 개똥보다도 모자란 놈들! 예전보다 더 지독한 것 같습니다!”
흑백쌍노가 성을 내는 모습을 즐겁게 바라본 황준우의 시선은 고민에 빠진 다른 두 사람을 향했다.
“경호와 홍산은?”
먼저 입을 연 측은 홍산이었다.
“무공이 뛰어난 건 아닌데 신법이 보통이 아닙니다. 게다가 아군을 피해 독을 푸는 솜씨도 일품이더군요. 중간중간 멋대로 몸이 굳어지거나 힘이 풀려 곤란했습니다. 솔직히…… 혼자나 둘이었다면 여기서 죽었을 것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저 역시 홍 무사님 말에 동감합니다. 독은 진짜 최악이더군요.”
경호도 질렸다는 듯 재빨리 고개를 내저었다.
적어도 황준우가 의도했던 대로 독에 대한 경계심 하나는 제대로 생긴 듯하다.
“일단 홍산과 경호의 경우는 착각하고 있는 게 하나 있어.”
“그렇습니까?”
홍산과 경호가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며 물었다.
“응. 당가의 무인들은 아군을 가려서 독을 풀지 않아. 아무리 하독 솜씨가 좋아도 그런 난전 중에 고작 넷밖에 안 되는 적을 향해 독을 쓰는 건 말이 안 되지.”
“그렇다면…….”
홍산의 눈이 반짝 빛났다.
말은 그렇게 하였지만, 본인도 이상하다고 생각하고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답을 찾은 것이다.
“당가의 무인들은 기본적으로 모두 독에 면역이 있는 거군요.”
경호도 빠르게 깨달아 뒷말을 덧붙였다.
“그렇지. 최소한도 수준이긴 하지만 말이야. 자신들이 사용하는 독은 스스로에게 피해가 오지 않게끔 훈련한달까. 물론 그래 봐야 한계가 있어서 위험한 독은 거의 못 쓰지만……. 독인쯤 되면 이야기가 달라지지? 애초부터 몸에 독을 품고 사는 애들이니까.”
“독인이라면…….”
모두의 눈이 자연스럽게 처참한 몰골이 되어 의식을 잃은 당문혜를 향했다.
순간적으로 그녀의 주변으로 독기가 폭발하는 것을 모두가 느꼈었다. 동시에 가슴에 찾아들었던 감정은 섬뜩한 죽음의 공포다.
이 자리에 황준우가 없었다면 누가 그녀를 막을 수 있었을까? 새삼 어린 나이의 여인이라고 하여 얕잡아 보았다가는 큰코다칠 수도 있다는 사실도 깨달을 수 있는 경험이었다.
“음…….”
그녀를 바라보는 모두의 시선에 잠시 쓴 감정이 흘렀다. 처참한 몰골이지만 동정은 들지 않았다. 사태를 정리한 후, 마을 사람들로부터 당가 무인들이 행했던 끔찍한 행태를 전해 들었다.
실제 마을 곳곳에 남아 있는 그 흔적들은 네 사람의 마음에도 분노를 일으켰다. 과거 악명이 높았던 흑백쌍노도 저항하지 않는 평범한 양민들을 이렇게까지 유린한 적은 없었다.
덕분에 저항하지 않는 당가의 무인들을 죽인 죄책감은 크게 남지 않았다.
살아남은 당가의 인물은 단둘뿐이었다.
첫째는 살아도 살아남은 것이 아닌 당문혜.
두 번째는 제법 멀쩡한 모습을 한 당절운이었다.
그렇다고 해봐야 당문혜와 마찬가지로 단전이 박살 나 바닥을 기고 있는 처지였지만 말이다. 어디까지나 죽은 이들, 혹은 끔찍한 몰골이 된 당문혜에 비하여 멀쩡하다는 뜻이다.
“도련님, 저자는 어떻게 할 겁니까?”
“돌려보내야지.”
“살려 두신다는 말입니까?”
“저게 살아남은 꼴은 아니잖아.”
황준우가 조소를 지으며 말했다.
실제로 단전이 파괴된 이후 당절운의 눈에서는 힘이 완전히 사라졌다. 저항할 능력이 없어 맥없이 당하였지만 단전은 대다수의 무인에게 있어 생명보다 귀한 내력의 기반이다. 그를 잃었으니 당절운과 당문혜 모두 앞으로 평생 내공을 익히지 못할 터였다.
심지어 당가는 실력 위주로 사람을 평가한다.
그런 상황에서 단전을 잃었으니 둘의 처지가 어찌 될지는 뻔했다.
“저 녀석은 책임져야 해. 협이라 불린 주제에 협의를 외면한 것. 그리고 위선의 가면을 쓰고 아무것도 책임지지 못한 것까지, 모두 다. 제 동생을 업고 가문으로 돌아가는 것도 그의 일환이지. 죄를 지었으면, 벌을 받아야 하잖아? 속죄란 그런 것이니까.”
황준우는 당절운이 들으라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겁쟁이지만 알량한 협의를 가지고 있다.
또한 그런 주제에 약하고 멍청하다.
이는 명가의 자제로서의 유능함과는 별개의 이야기다.
스스로의 자아(自我)를 지키지 못하고 헤매는 이상론자. 저런 이가 하는 최후의 선택은 불 보듯 뻔했다.
모든 것을 잃은 지금 자신이 집착하던 무언가에라도 매달리지 않으면 견딜 수 없게 된다.
예를 들자면 방금 황준우가 말한 ‘속죄’라는 단어 같은 것 말이다.
스스로를 가두는 죄책감을 이기지 못해 구원을 찾아다니는 것이다.
실제로 당절운은 황준우의 말을 듣고는, 흐릿한 눈으로 일어나 당문혜를 업고 말없이 어딘가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힘없는 걸음이지만 방향만은 명확하다.
황준우의 말마따나 속죄를 찾아 나선 것이리라.
“자, 그러면 우리는 할 일을 다 했고 제갈세가 측은 어쩌려나?”
때마침 황준우의 곁으로 혈안서 한 마리가 연통을 물고 다가온다.
과연 발 빠른 사마정이라 생각하며 서신을 확인한 황준우의 입가로 미소가 떠올랐다.
“역시…….”
서신에 적힌 내용은 간단했다.
제갈세가 대승(大勝).
보이지 않게 시작된 암쟁이 끝났다.
비록 그 규모는 작고, 알려지지 않았으나 이로 인해 피어날 파장마저 적지는 않을 터였다.
4. 역동(逆動)
제갈세가는 당가를 제외한 남은 이대세가를 그야말로 압살했다. 황보세가와 서문세가의 정예 무인들은 융중산에 들어서자마자 진법에 갇힌 채 방황하다, 어느 순간부터 서로를 향해 검을 내지르고는 자멸(自滅)하였다.
제갈세가는 그야말로 스스로의 손에 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채 대승한 것이다.
자세한 전황을 전해 들은 황준우는 내심 혀를 내둘렀다.
오십 년이 넘게 활동하지 않은 탓에 제갈세가가 가진 발톱이 어떠한 것인지 모르고 있는 이대세가의 방심이 컸다. 또한 예상대로 제갈세가의 진법은 소수보다 다수에 강했다.
아마 전쟁 상대로 만난다면 가장 귀찮을 적일 터였다.
“차라리 혼자 쳐들어가고 말지.”
그리 생각하는 황준우에게 제갈세가의 이름으로 전서구 하나가 더 도착했다.
제갈량이 직접 보낸 것으로, 약속했던 거래의 대상인 하오문 본단의 위치였다.
그를 확인한 황준우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하오문 본단이 항주에 있었어?”
항주라 함은 소주와 함께 강소에 자리 잡은 거대 도시다.
당연히 거리 차이도 얼마 나지 않았다.
등하불명이라더니, 정말 발밑조차 살피지 못한 셈이었다.
새삼스레 천조회가 발호하여 남기를 장악한 이후 하오문이 유독 맥없이 당한 이유도 이해가 됐다.
항주에 자리를 두고 있는데 안휘로의 길부터가 막혔다.
단순히 사마정의 운영 능력과 천조회의 시기가 좋았던 것만은 아니었다.
하오문에도 나름의 사정은 있었다는 뜻이다.
“한데 아직까지도 본단을 안 옮겼어?”
황준우는 어렵지 않게 이유를 짐작했다.
마음이야 움직이고 싶었을 터다.
다만 비밀리에 해야 되는데 남기 내에서 천조회의 눈을 피해 엉덩이를 들어 올리기가 쉽지 않아 애써 참고 있는 것이다.
어쩐지 모르게 웃음이 다 나왔다.
“이걸 사마정에게 맡길까, 아니면 직접 갈까.”
황준우의 결정은 간단했다.
나온 김에 집으로 돌아가는 길이라 생각하여 직접 처리하기로 한 것이다.
“하오문주 얼굴이 궁금하기도 하고 말이야.”
백두산까지 쫓겨 다니던 당시 황준우를 가장 곤란하게 했던 적 중 하나가 바로 하오문이다.
굳이 치자면 총 세 곳이 문제였다.
당가, 하오문, 개방.
당가의 경우 독이라는 특수성이 사람을 괴롭게 했다면, 하오문과 개방은 황준우의 위치를 집요하게 찾아내고 쫓아 붙었다.
정보 단체인 그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중원 무림이 연합하여 하나가 되어 황준우를 쫓을 수도 없었을 터였다.
당시의 하오문주와 지금이 같을지는 모르겠지만 한 번쯤 확인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황준우의 다음 목적지는 항주로 결정되었다.
정의회가 제갈세가와 황준우 일행에 의하여 크게 패하였지만, 천하는 조용했다.
자존심이 강한 정의회 측에서 발 빠르게 사실을 묻어 버리기 시작한 탓이다. 예상되었던 결과라 할 수 있었고, 우스운 일이었다.
어차피 언젠가는 드러나게 될 일이다.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는 없는 노릇이니 말이다.
남기연합의 입장에서는 좋은 일이니 이 과정은 천조회도 한 손 거들었다.
천하가 진실을 모른다는 것은, 무림맹 또한 모른다는 말이다. 남기연합은 이번 기회에 정의회를 통째로 집어삼키려 하는 입장이니 시간이 많을수록 좋았다.
무림맹은 더 이상 남기연합이 강해지기를 원하지 않는 입장이었고, 이런 움직임을 눈치챈다면 어떻게든 방해하기 위해 나설 테니 말이다.
아마 지금쯤이면 무림맹도 정의회와 제갈세가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음은 눈치챘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그들에게도 범천하적인 정보단체인 개방이 있다.
또한 눈앞의 이득에 속아 때로는 어리석은 선택을 하지만 기본적으로 무림맹 역시 천하에서 내로라하는 인재들이 모인 집단이다. 아무런 흐름조차 읽지 못할 리는 없었다.
아마 빠르게 남기연합의 움직임과 전쟁의 향방을 쫓고 있을 터였다.
하나 무언가를 알아채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워낙 소수가 움직였고, 암중에 끝내 버린 전쟁이다.
아마 당절운과 당문혜가 사천의 당가에 무사히 도착할 때쯤이면 모든 진실을 알지 않을까?
물론 그때쯤이면 모든 상황이 끝나 있겠지만 말이다.
때문에 황준우는 최대한 신속하게 움직였다. 일행 네 사람을 따로 이동하라 명한 후 혼자 먼저 항주로 움직인 것이다.
애초부터 개개인이 아무 데서나 얻어맞고 다닐 정도의 약자도 아닌 네 사람이니 큰 걱정은 없었다. 오히려 경호와 홍산에게는 이런 자잘한 강호 여정이 큰 경험으로 남을 것이라는 생각도 하는 중이었다.
쉬지 않고 자연지기를 받아 경신술을 운영하는 황준우의 발은 이전보다도 더 빨라졌다.
고작 보름의 시간도 되지 않아 호북에서 안휘를 넘어 강소의 항주까지 도착한 것이다.
만약 무림맹이 무언가를 알았더라도 막을 수 없을 정도의 속도다.
이미 상식을 한참이나 벗어난 수준이었으니 말이다.
“하오문을 흡수하면 정의회의 숨통은 더욱 막히겠지.”
갑갑한 상황에서 그나마 정의회를 유지하고 있는 것은 하오문이 건네는 외부 정보다. 헛소문이라도 그를 통해 내부의 질서와 균형을 유지하는 데에는 유용한 법이니 말이다.
한데 그 자체가 막혀 버리면 어찌 될까? 정의회는 고립된 섬과 마찬가지의 위치에 처하게 된다.
어떻게 해서든 외부로의 움직임을 보일 수밖에 없고, 그것은 남기연합에게 명분이 될 터였다.
직접 하오문 본단을 찾아가기로 결심한 순간 황준우의 머릿속에 이 모든 그림이 단번에 그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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