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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84화 (184/373)

학사재생 184화

제 184화

전왕이 보았다면 천하를 보는 안목이 더욱 늘었다며 기뻐했을 일이었다.

바쁜 황준우의 걸음은 향락의 도시 항주 내에서도 손에 꼽는 큰 장원 중 하나로 향했다.

“전화상단…….”

만금장과 함께 천하십대상단 중 하나로 이름 높은 상가의 정문 앞에 선 황준우의 입가로 묘한 웃음이 떠올랐다.

“이 인연이 또 이렇게 이어지나.”

전화상단과는 과거 작다면 작고, 크다면 큰 악연이 있었다.

‘아마 경정산에 오르기 전이었지?’

황서연의 소원에 의하여 강호행에 나섰을 때, 요괴 영소의 사건에 휘말린 표두 유지량이 본래 속해 있던 곳이 전화상단이었다. 당시 벌어졌던 다소 불미스러운 일은 황준우가 가지고 있던 자금을 일부 풀어 깔끔히 정리한 기억도 있었다. 전화상단 입장에서도 만금장과 정면으로 부딪치는 것은 불편한 상황이었으니 협상 과정은 어렵지 않았다.

“한데 그 전화상단이 하오문 본단이라…….”

거듭 말해, 등잔 밑이 어두운 줄도 몰랐던 셈이다.

헛웃음을 흘리는 황준우는 당당히 정문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정문을 지키는 호위무사들이 길을 막아섰지만 딱히 어려울 것도 없었다.

“음…… 상단주를 만나러 왔는데…….”

“만금검존!”

본인은 크게 인지하지 못하고 있지만 이미 황준우의 명성은 만금장의 휘광을 등에 업지 않아도 될 정도로 높아진 상태였다.

특히 소주가 위치한 강소 일대의 젊은 무인들 사이에서는 그의 얼굴과 이름을 모르는 이가 더 적을 정도였다.

약관이 이제 막 지난 나이에 우내십존의 위에 속해 있으며, 남기연합의 수뇌부.

그야말로 젊은 무인들의 우상이라 할 수 있는 입장이었으니 말이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다소 격양된 표정을 한 우측의 호위무사가 바로 옆에 위치한 후임을 향해 눈짓을 했다. 비슷한 심정으로 황준우를 바라보면서도 선임의 등쌀에 못 이겨 내쫓긴 좌측의 호위무사가 빠르게 안으로 뛰어들어 갔다.

전화상단의 반응은 빨랐다.

반각도 되지 않아 안으로 뛰어들어 갔던 호위무사와 함께 꽤나 고급스러운 옷을 입은 중년의 사내가 헐레벌떡 뛰어나온다.

“반갑습니다. 만금검존, 저는 상단의 총관직을 맡고 있는 염호입니다. 이름 높은 젊은이들의 우상을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거친 콧김으로 내뱉은 염호가 공수를 취했다.

다급히 달려온 느낌이 그대로 전해지는 모습이다.

자연스레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연기력은 제법이네.”

“굳이 과하게 그럴 필요 없다고. 날 시험해 보고 싶은 거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

다소 과하게 숨을 내뱉던 염호의 호흡이 순식간에 안정되고 얼굴은 붉게 달아올랐다. 그는 상단의 총관이자 일류의 경지에 오른 무인이기도 했다.

이류에 속하는 호위무사마저 평온한 안색을 금방 되찾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거친 숨결을 내뱉는 것 자체가 애초에 의도된 과장인 것이다.

“큼, 큼. 안으로 드시지요. 상단주님께서 기다리십니다.”

황준우는 말없이 고개를 주억이고는 앞장선 총관의 뒤를 따랐다.

걸음을 옮기는 곳곳에서 표사를 비롯한 시종, 시녀들의 시선이 황준우에게로 향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표사는 그렇다 쳐도 시종과 시녀 사이에도 무인들이 제법 많다는 것이었다. 질적으로는 만금장에 못 미칠지 모르나 수는 부족하지 않다.

전화상단 역시 과할 정도의 무인을 보유하고 있다는 뜻이다.

애초부터 제갈량이 거짓 정보를 넘겼을 리도 없지만 이로써 전화상단이 하오문과 연관되어 있을 확률은 지극히 높아졌다.

“여기입니다.”

거대한 장원을 크게 가로질러, 제일 후미에 위치한 전각까지 안내한 염호가 짧은 헛기침을 한 후 목소리를 높였다.

“단주님, 손님을 모셔 왔습니다.”

내부에서 느껴지는 기척은 둘.

음과 양이 각 하나씩이며 무공 수위도 비슷하다.

‘어느 측이 단주일까?’

황준우가 즐거운 호기심을 마음에 품고 있는 사이 대답이 돌아왔다.

“네, 들어오세요.”

높고 가느다란 목소리.

여인 측이다.

드르륵-!

곧장 문이 열렸고 내부의 풍경이 드러났다.

넓은 방에는 방 끝에 놓인 단상 앞에 앉은 중년의 여자와, 그 바로 옆에서 책을 펼치고 있는 노인이 보였다.

“드시지요.”

염호와 함께 방 안으로 들어서고, 방문이 닫혔다.

‘경계심이 장난 아닌데?’

겉으로 보기에는 넷뿐이 없는 방이었지만 주변이 인기척으로 가득 차 있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한 것이 분명한 상황에 황준우의 입가로 짧은 웃음이 흘렀다.

“아까는 나를 시험하는 것 같더니, 정작 준비는 철저히도 해 놨군. 이게 몇 명이야. 백도 넘겠다.”

혼잣말과 같은 그 이야기에 여인의 표정이 살짝 굳어졌다.

하나 입가에는 곧 미소가 흘렀다.

“과연 만금검존…… 소문은 과장이 아니었군요. 대단하네요.”

여인이 박수를 쳤고, 주변 가득하던 기척이 하나둘씩 물러나기 시작하더니 이내 완전히 사라졌다.

“불쾌하셨다면 죄송해요. 하지만 일개 상인의 입장이다 보니 어쩔 수 없음도 알아주셨으면 하네요. 처음 뵙겠습니다. 전 전화상단의 상단주, 여화이라고 해요.”

“여화이…….”

황준우는 그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 놓으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마치 제집 안방을 찾아온 것 같은 자연스러운 태도다.

“미리 말하지만 난 둘러가는 걸 좋아하지 않아. 그리고 내 적에게 굳이 예의를 보이지도 않지.”

“…….”

황준우의 거친 언사에 여화이의 미간이 깊게 패였다. 화가 난 것이 아닌 곤란하다는 느낌이 가득해 보이는 표정이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우리 전화상단이 만금장 아니, 남기연합을 비롯한 만금검존과 굳이 적이 되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요?”

“있지. 차고도 넘치지. 아직도 모르겠다면 지금부터 잘 생각해봐. 그리고 솔직하게 말해줬으면 좋겠어. 난 나를 속이는 사람들을 가장 싫어하고, 인내심도 좋지 않거든. 반대의 경우에는 자비심을 발휘하기도 하지.”

“…….”

짧은 침묵이 흘렀다.

그사이 여화이의 눈이 몇 번이고 흔들리고 가라앉기를 반복한다. 워낙 짧은 순간에 벌어진 일이라 쉽게 눈치채기 힘든 수준이었지만 황준우의 시선마저 피할 수는 없었다.

“휴우…….”

그 끝에, 여화이의 입에서 나온 것은 긴 한숨이었다.

“이해가 안 되는군요. 대체 만금검존께서 우리 전화상단에 와서 왜 이런 행패를 부리는지…….”

“뭐, 좋아. 아직은 대화할 생각이 없다는 말이지?”

눈을 가늘게 뜬 황준우가 천천히 몸을 일으킨다.

동시에 옆에서 책을 보며 깊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노인도 허리를 폈다.

“어린 친구가 이름이 높다 하여 세상 무서운 줄 모르고 건방지게 날뛰는군. 여기가 어딘 줄 모르는가? 이곳에서 자네를 지켜 줄 것은 무엇도 없네.”

“없어도 상관없어. 내 한 몸 정도는 스스로 지킬 수 있거든. 그리고 여기가 어딘지 왜 몰라? 전화상단 아니, 하오문 본단이잖아?”

황준우는 들으란 듯이 느긋하게 말했고 동시에 화들짝 놀라며 책 밑에 감춰져 있던 장치를 이용해 기관을 작동시키려던 노인의 멱살을 빠르게 움켜쥐었다.

“사부!”

놀란 여인이 다급하게 목소리를 높였고 황준우의 눈에 이채가 어렸다.

‘어느 쪽이 하오문주인가 했더니…….’

아무래도 양측 다인 것 같았다.

다만 선대와 당대의 차이 정도랄까.

움켜쥔 옷자락이 숨을 조여 벅찬지 컥컥거리며 괴로워하는 노인을 들어 올린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여화이를 바라보았다.

“이제 조금 대화할 생각이 들었나? 하오문주.”

여화이는 다급한 표정으로 손을 꼼지락거렸지만 이내 아무런 행동을 하지 못하고는 몸을 축 늘어트렸다. 무슨 기관을 작동하기도 전에 그녀 역시 제 사부와 다름없이 제압되리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이었다.

“알겠어요. 알겠다고. 그만 사부를 놔줘요.”

노인의 안색이 점점 붉다 못해 퍼렇게 변하고 있었다.

더 오래 목을 조였다가는 당장에라도 숨이 넘어갈 것 같은 모습이었다.

“케엑! 켁! 웨에엑-!”

황준우가 손에서 힘을 푼 순간 바닥에 엎어지듯 쓰러진 노인에 헛구역질을 하며 괴로운 기침을 흘렸다.

“사부…….”

곁으로 달려오고 싶지만, 앞에 선 황준우 탓에 어떤 행동도 하지 못하는 여화이는 발만을 동동 굴렀다.

“말했잖아. 난 날 속이는 사람들을 매우 싫어해.”

“……당신이, 당신이 어떻게 안 거죠?”

여화이는 아랫입술을 피가 날 정도로 깨물며 눈을 부릅떴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누구도 알아채지 못한 하오문의 본단이다.

천하에서 정보로 치자면 가장 첫 번째로 꼽는다는 개방조차 찾지 못했는데 어찌 황준우가 이리 쫓아왔단 말인가?

그녀는 도저히 이 상황을 이해할 수 없었다. 때문에 마지막 순간까지도 피어오르는 의심을 부정하며 현실을 감춘 것이다.

“다 아는 방법이 있지. 그나저나, 그게 중요해? 이제부터는 우리가 적이라는 사실이 확실해졌지 않나? 내가 네 사부를 놔주었다고 해서 관계가 갑자기 개선되고 그런 건 아니잖아.”

“……원하는 게 뭡니까.”

여화이는 결국 한 수를 접을 수밖에 없었다.

눈앞의 상대는 만금검존.

천하에서도 수위를 다투는 고수다.

심지어 행동이 과감하며 빈틈조차 찾기 힘든데 인질마저 잡혀 버렸다. 무공이 뛰어나지 못한 그녀와 하오문의 입장에서는 달리 도리가 없어 보이는 상황인 것이다.

“나, 난 괜찮다. 화이야. 이놈을 당장……!”

숨이 제법 돌아왔는지 붉어진 눈을 한 노인이 다급하게 외친다.

황준우는 그런 그를 굳이 막지 않았다.

어차피 판단은 여화이의 몫이다.

그리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한 그녀가 제 사부를 쉽게 버릴 것 같아 보이지도 않았다.

‘이러니까 내가 무슨 악당이 된 것 같기도 하고…….’

물론 현재 상황은 명백히 위협 행위를 하는 악당에 가까웠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약해져 대충 할 생각은 없었지만 말이다.

“뭐, 어려운 제안은 아니야. 어차피 거리도 멀지 않은 곳 사이좋게 지내보는 건 어떻겠냐는 거지.”

“남기연합에 하오문이 복속되길 바라는 건가요?”

“복속. 그것도 좋지.”

황준우는 웃으며 말했다.

“우리가 어떻게 지킨 하오문이더냐! 그럴 순 없다. 화이야, 나는 신경 쓰지 말고 어서……!”

기운을 더 차린 노인이 힘껏 목소리를 높였다.

“이건 사부로서의 명이다!”

다급한 음성이 터져 나왔고, 황준우의 입에서는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렇게 절박하게 외쳐서야 수작이 뻔히 보이잖아. 거기, 하오문주.”

황준우의 부름에 망설이던 여화이의 몸이 흠칫 떨렸다.

“할 수 있는 것 있으면 다 해 봐. 그 뒤에야 대화가 조금 더 편할 것 같으니까.”

“발악해 보라고.”

다소 도발적인 언사를 던진 황준우는 입가로 조소를 그린 후, 뒤에 위치해 있던 노인을 들어 올려 여화이에게로 던졌다.

놀라운 사실은 허공을 난 노인이 곡선을 그리며 부드럽게 지면으로 떨어졌다는 것이었다.

당황하는 두 사람을 향해 황준우가 검지를 까딱거렸다.

“뭐 해, 지금이 아니면 기회는 없어.”

“후회하게 해 드리죠.”

여화이는 더 이상 망설이지 않았다.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제 책상을 들어 올려 장치를 발동시킨 것도 순식간이었다.

황준우의 발밑 발판이 갑작스럽게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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