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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85화 (185/373)

학사재생 185화

제 185화

기관이 작동하고 황준우는 함정에 빠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화이는 불안함을 감출 수가 없었다.

“도대체 뭘 믿고 있는 거지?”

바닥이 무너지는 순간, 기이하게도 황준우는 곧바로 바닥으로 떨어지지 않았다.

표정에는 여유가 가득했다.

“젊은 놈의 혈기지 뭐가 더 있겠느냐. 천하가 저를 추앙하니 본인이 무신이라도 된 기분이겠지. 큼큼.”

노인, 여화이의 사부이자 전대 하오문주 백관오가 천천히 몸을 일으키며 헛기침을 토했다.

그 이야기를 들은 여화이는 가볍게 고개를 주억였다.

납득이 가는 이야기고 충분히 논리적인 이야기다.

무인이란 본디 패기와 만용을 구분하지 못해 때론 그것이 어떠한 결과를 가져올지도 모르고 지옥 불을 향해 제 몸을 던지기도 한다. 한창 피가 끓는 젊은 무인이라면 말할 것도 없을 터였다.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비밀을 지켜 왔던 하오문의 본단까지 찾아왔으니 자신감은 더욱 하늘을 찌를 터였다.

그러니 홀몸으로 이 자리까지 찾아와 협박을 가하는 오만방자한 행동도 보였을 테고 말이다.

여화이의 어깨를 백관오가 가볍게 두들긴다.

“네가 직감에 의존한다는 사실은 잘 알고 있다만, 너무 걱정하지 말거라. 저 안이 어떤 곳이냐? 정말 무신이라도 재림하지 않는 한 결코 빠져나올 수 없다.”

자그마치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만든 하오문 최후의 보루. 그를 만들기 위해 쏟아부은 돈만 억만금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힘이 없기에 오히려 더욱 이런 일에 치중할 수 있던 것이다.

“그렇……겠죠.”

그 사실을 알고, 고개를 주억이면서도 여화이의 표정은 여전히 좋지 않았다.

‘사부의 말은 곧 칠야의 무신이 돌아온다면 우리의 보루도 의미가 없다는 뜻 아닌가요?’

입 안에 감도는 말이 있었지만 바깥으로 흘러나오지는 않았다.

믿고 싶지 않기에 외면하려 한 것이다.

“예민한 거겠죠.”

스스로를 안정시키기 위해 헛된 말을 흘린 여화이가 자리에 앉으려는 순간이었다.

거대한 폭음과 함께 바닥의 일부가 와르르 무너졌다.

“아아…… 만년한철은 확실히 제법 단단하네.”

느긋한 음성을 흘리며 뒷목을 접고 걸어 나오는 이는 황준우다.

백관오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눈을 화등잔만 하게 뜨고, 검지로 그를 가리키며 붕어처럼 입을 벙긋거렸다. 너무 놀라 목소리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반면 이쯤 되어서야 오히려 여화이의 마음이 한없이 차분해졌다.

“괜한 불안이 아니었구나.”

흘러나오는 음성에는 저도 모르게 체념이 배었다.

“그나저나 배짱도 좋네. 도검산림(刀劍山林) 꾸미듯 창, 칼을 엄청나게 숨겨 두고 찔러 대는 건 그렇다 쳐도 말이야. 발밑에 저런 끔찍한 독물(毒物)을 끼고 살아가면 불안하지도 않아?”

황준우가 여화이를 향해 빙긋 웃으며 묻는다.

“그 독물이 당신처럼 만년한철을 부수고 올라올 리는 없으니까요.”

“하지만 내부에 가득 뿌려 둔 무형지독(無形之毒)이 새어 올라올 수는 있겠지. 대단해. 무형지독은 당가의 독왕도 일 년에 만들 수 있는 양이 얼마 되지 않는다고 들었는데 사방에서 빗줄기처럼 뿌려 대더군.”

“그 정도로 허술하게 만들지는 않았으니까요.”

여화이는 황준우의 표현은 과장되었다고 생각했다.

무형지독은 천하에서 가장 무서운 독, 또는 궁극의 독이라 불리며 독중지왕(毒中之王)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실제로 무형지독은 초인조차도 중독 당하는 순간 일곱 걸음 안에 죽는다고 하여 전설의 칠보살독(七步殺毒)을 떠올리게끔 하기도 했다.

하나 무형지독의 진짜 무서운 점은 그런 위력에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 이름처럼 아무런 형체도 없고, 느껴지는 바도 없다. 냄새를 맡을 수도 없는 순간에 중독되어 상대를 죽음으로 몰아가기에 무형지독의 가치는 더욱 올라가는 것이다. 하니 빗줄기처럼 뿌려 댄다는 표현은 어울리지 않는다.

설령 눈치챘다고 하여도 그를 느낄 수 있었을 리가 없었으니 말이다.

“못 믿는 눈치로구먼. 난 진짜 느껴지는데 말이야. 어쨌든 돈을 장강 물 끌어다 쓰듯 퍼부은 것 같은데 허술하게 만들면 안 되지. 생각해 보니 하오문에는 이런 기관 장치를 잘 다루는 양반들도 많겠네. 흠…….”

짧은 생각에 빠진 듯 신음을 흘린 황준우가 맨손으로 옷자락을 성의 없이 툭툭 털었다.

치이익-!

이후 갑작스럽게 멀쩡하던 방바닥마저 녹아내리며 고약한 향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그를 조금은 멍하니 바라보던 여화이는 고개를 내저으며 자리에 앉았다.

“굳이 그렇게 더 보여 주시지 않아도 돼요. 당신이 소문 이상 아니, 상상 이상의 존재라는 건 충분히 이해했으니까요.”

“응? 이거 보여 주려고 하는 것 아닌데? 자그마치 무형지독이잖아. 아무리 나라고 해도 완전히 산화시킬 수는 없다고. 아, 여기가 방 안이라 문젠가?”

만독불침.

독이 전혀 들지 않는 수준의 황준우라면 모를까 여화이나 백관오의 입장에서는 무형지독의 잔재만으로도 위험할 수 있다.

그리 생각한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고 모습을 감추었다.

“……어디 간 거죠?”

바라기는 했지만 그냥 떠났을 리는 없다.

“그, 글쎄다. 대체 저 젊은 놈은 뭔지…….”

“무신의 재림이라도 되나 보죠.”

짧은 대화가 끝난 순간이었다.

다시 방 안으로 황준우가 돌아왔다.

그 유령 같은 움직임에 여화이는 속으로 몇 번이고 혀를 내둘렀다.

‘저건 알아도 막을 수 없겠구나.’

본인은 아니라고 하지만 지금 황준우의 움직임 하나, 하나가 모두 여화이에게 있어 위협 혹은 시위로 다가왔다.

애초부터 스스로 함정에 빠지고 그를 탈출한 행위 자체가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나름의 자비이자 최후의 권고와 다름이 없었다.

이 정도 차이를 보고도 허튼수작을 부리겠다면 차라리 하오문이라는 이름을 역사에서 지워 버리겠다는 뜻이다.

말도 안 되는 것 같지만, 눈앞의 사내라면 능히 이루어 낼 수 있다.

섬뜩한 감각이 가슴 한편에 차오르는 것을 느낀 여화이와 황준우의 눈이 마주쳤다.

습관적으로 눈웃음을 그리는 여화이를 향해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이며 자리에 앉았다.

“음…… 분위기를 보아하니 이제야 제대로 대화할 준비가 된 것 같네.”

“굳이 권주(勸酒)를 마다하고 벌주(罰酒)를 마실 정도로 어리석지는 않으니까요.”

“좋은 생각이야.”

황준우가 다시 한 번 웃어 보였고, 백관오도 더 이상 감정을 표출하지 않았다.

직감은 여화이가 더 좋은 편일지 모르나, 그 역시 오랜 시간 하오문주 직위를 행하며 배운 것이 있다.

‘보는 눈도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어리석어서야.’

백관오는 눈을 질끈 감고 두 사람의 대화를 외면했다.

오늘 그의 실수로 인해 하오문이 사라질 뻔했다.

은퇴를 결심하기를 잘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좋아요. 원하시는 대로 하오문을 남기연합에 편입…….”

조용하게 말하던 여화이가 아랫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단어 선택을 묘하게 돌린 순간 황준우의 눈에서 터질 듯한 이채가 쏟아져 나왔다. 모든 것을 꿰뚫어 버리는 것 같은 그 빛을 여화이는 감히 마주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더 이상은 마지막 자존심을 지킬 생각도 들지 않는다. 인정해야 했다.

작은 전투가 있었고 그녀는 패배했다.

패자(敗者)는 언제나 승자 앞에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

“복속……시킬게요.”

“좋은 생각이야. 다만 천조회와 성격이 닮아 있어 마찰이 생길 수도 있겠지. 거기에 대해서 정리가 필요할 것 같은데…….”

“제가 뜻을 말한다면 들어주실 건가요?”

“처음부터 솔직하게 말해 줬다면 그랬을지도 모르지.”

“뜻대로 하세요.”

지친 듯한 미소를 지은 여화이가 몸을 늘어트렸다.

이제부터 그녀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고 동의하는 것뿐이다.

모든 결정권은 황준우에게 있었다.

이후 황준우가 한 말은 명령이었다.

또한 승자의 폭력이었다.

첫째, 하오문은 이름을 유지하되 천조회의 하위조직으로 칭한다. 하오문주는 천조회 중급 간부와 동격의 자리를 보장한다.

둘째, 하오문의 정보는 천조회 혹은 남기연합이 원할 때 언제든, 무조건적으로 열람할 수 있다. 천조회 혹은 남기연합은 그에 순응하는 소정의 대가를 지불할 의무가 있다.

셋째, 하오문의 본단을 소주로 옮기며, 기한은 반년 이내로 한다.

몇 없는 간단한 제안 같지만 그 실상은 하오문의 입장에서는 너무나 끔찍한 일이었다.

천하에서 두 손가락에 꼽히던 정보단체가 순식간에 신규 세력에 불과한 천조회의 하위 세력으로 편입되었다.

심지어 하오문주는 천조회주와 동격의 취급은커녕 중급 간부로 편성되었다.

한 문파의 장이라 볼 수 있는 여화이가 천조회의 상급 간부만 보아도 머리를 숙여야 되는 상황이 된 것이다.

특히 두 번째 조항.

무조건적인 하오문의 정보 열람 권한은 그야말로 악독했다.

정보란 단순히 현재 혹은 미래의 사건을 두고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인과 혹은 어떠한 사연에 의하여 현재와 미래가 펼쳐질 확률이 높기 때문이다. 때문에 백 년이 넘는 시간 동안 쌓인 하오문의 정보가 가진 값어치는 억만금으로도 살 수 없을 만큼 귀하다고 할 수 있었다.

황준우는 무조건적이라는 조건으로 이를 너무나 간단하게 강탈해 버렸다.

소정의 대가라는 우스운 말로 말이다.

심지어 본인 제한도 아니었다.

남기연합과 천조회, 양측 모두에 해당되는 이야기라는 것이 더욱 분했다.

이 조항까지 듣는 순간, 여화이는 모든 것을 포기했던 마음에 다시 한 번 불을 붙일 뻔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웃음만을 흘렸지만 본래 그녀는 꽤나 다혈질에 속했다.

황준우의 말도 안 될 정도의 승자 폭력에 저도 모르게 가슴 한편에서 불끈 감정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막을 수는 없던 탓이다.

천하 곳곳의 다방면에 사람을 두고 있는 하오문은 방대하고, 그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깊다.

고작 본단 하나를 무너트린다고 사라질 문파가 아닌 것이다. 때문에 결사항전을 택한다면 남기연합 입장에서도 골치 아파질 수 있는 것이다.

그를 생각하며 마지막 배짱을 부려 볼까 했지만, 옆에서 손을 꽉 쥐는 백관오의 모습을 보며 참았다.

아마 백관오 역시 황준우가 단순히 무공만 강한 무인이었다면 한 번 멋대로 해 보라며 소리를 질렀을 터였다.

제 목숨이 아까운 줄 모르는 위인이니 말이다.

하나 상대는 그런 평범한 무인이 아니었다.

천하제일의 금력을 가진 만금장 소장주.

하오문은 만금장이 밝혀진 것보다 더한 힘과 금력을 가지고 있음을 어느 정도는 예측하고 있었다. 그 사실만으로도 부담될진대, 이제는 그보다 더욱 무거운 이름으로도 불린다.

남기연합의 수좌, 만금검존 황준우.

이 명성에서 알 수 있다시피 황준우는 단순한 남기연합이 가진 무(武)의 상징이 아니었다.

처음 남기연합이 형성되고, 많은 사람들은 남궁세가주 남궁호량이 이 거대한 힘을 주도할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결과는 달랐다.

남궁호량은 만금장에게 한발 양보하며 이선(二先)으로 물러났다. 호사가들은 깜짝 놀라면서도 이 행동을 굉장히 정치적이라며 칭찬하기도 했다.

애초부터 남기연합은 맹주를 선출하지도 않았으며, 따로 본단을 만들지도 않았다. 하니 굳이 이권도 없는 자리를 따지며 싸우느니 한발 물러나는 모습을 보여 주변의 호감을 사고 자신의 가치를 높이는 것이라고 본 것이다.

암중에 더 많이 활동하는 천조회주는 스스로 삼선(三先)으로 물러난 것과 다름이 없으니 자연스레 수좌의 이름에는 황준우의 이름이 올랐다.

누군가는 허울뿐인 직책이라 말할지 몰라도 사실 그 이름이 가지는 힘은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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