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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192화 (192/373)

학사재생 192화

제 192화

“달리 더 이상 정의회라는 허울에 욕심이 나지는 않지만…… 그래도 나를 따르는 이들이 지키려 했던 것 아닌가. 최선은 다해봐야겠지.”

“미리 말하지만 중간에 깨달음 얻고 등선하려 하기 없기다.”

“……노력해보지.”

“어째서인지 등선하도록 노력해보겠다는 말로 들리는데.”

“아쉽게도 도사는 아니라서…….”

“마음가짐 좋네.”

조금씩 두 사람의 기운이 부풀어 오르기 시작한다.

어쩌다 보니 제법 마음이 맞은 두 사람이지만 그렇다고 여기까지 온 이상 웃고 넘길 수는 없었다.

“독존은 죽여선 안 되었어.”

“죽여야 될 놈은 죽여야지.”

“당가가 가만히 있지 않을 거야.”

“천하의 무존도 독은 무섭나 보지?”

“화합의 문제일세. 이 강호는…… 언제까지고 피로만 역사를 써야 하는 겐가?”

잠시 황준우의 몸이 떨렸다.

새삼 서문지언이라는 인물을 더 잘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얼굴에는 미소가 떠오른다.

“듣던 소문하고 다르네. 뭐, 예전부터 그런 기색이 있었지.”

황준우는 칠야무신 시절 마주쳤던 서문지언의 얼굴을 떠올렸다.

강호의 위기에 우내십존이라는 이름으로 같은 자리에 섰지만, 어딘지 모르게 한 걸음 물러나 있는 듯 그의 행보는 소극적이었다.

실제로 황준우가 위험했던 상황에 반쯤 의도적이다시피 길을 열어주었던 적도 몇 있었다.

당시에는 무슨 꿍꿍이인지 알 수 없다 생각했으나, 이제는 짐작이 되었다.

그러고 보니 몇 번인가 무공을 부딪치며 대화를 하였을 때에는 피를 쏟으면서도 그만 멈추라는 말을 반복하기도 했다.

여러모로 죽은 원공 대사하고 닮은 면이 많은 인물이다.

“모순(矛盾)적인 것까지 닮았네. 피의 역사가 싫다고 하면서, 결국 이 자리에서 물러나지는 못하지.”

“짊어진 업보일세.”

“확실히 도사 될 팔자는 아니겠네. 이번에는 부처가 되려나? 자, 준비된 것 같으니 시작하자.”

농담 아닌 농담을 흘린 황준우가 선공을 가했다.

물리적인 공격은 아니었다.

서문지언의 주변으로 몰려들던 자연의 기운이 황준우의 조율에 엮여 헤쳐지고 찢어진다.

최대한 붙잡아보려 했지만, 황준우의 조율은 서문지언의 그것을 완벽히 뛰어넘고 있었다.

그 생각지도 못한 압도적인 행사에, 서문지언이 눈에 띄게 당황했다.

동시에 몸이 움직였다.

오랜 시간 끝에, 몰려든 자연지기를 모두 잃게 된다면 이 승부는 보나 마나인 것이다.

주먹과 주먹이 부딪쳤다.

즉각적인 폭발은 없었다.

짧은 침묵 속에서 공간이 일그러지듯 압축되었고, 잠깐의 시간이 흐른 후에야 팽창하듯 터져버렸다.

꽈앙-! 콰지직-! 쿠드득.

폭발과 함께 주변에 위치한 나무가 무너지고 거친 돌풍이 주변을 휘감았다.

서문지언은 멈추지 않았다.

연속해서 황준우의 빈틈을 찾아 헤매며 손과 발을 빠르게 휘둘렀다.

찌이익-!

하얀 옷자락이 거칠게 대기를 찢었다.

무존이라 불리는 서문지언은 검, 도, 창을 비롯한 십팔반병기 전반을 다룬다.

하나 가장 자신 있는 무기는 본인의 육체라고 늘 말했다.

여러모로 황준우와 닮았다.

실제로 작금 그가 펼치는 공수(攻守)는 전생의 황준우를 제법 닮아 있었다.

어떤 면에서는 오히려 전생의 그를 넘어선 부분도 없지 않아 많았다.

‘여기까지 보패나 명력이 깃든 무기에는 의지하지 않은 건가?’

스스로의 노력과 각고의 고심 끝에 성장했다.

전생 황준우가 보였던 무공의 그림자를 쫓아 순수하게 혼자만의 무를 이끌어냈다.

수십, 수백 초가 반 각도 되지 않아 빠르게 오갔다.

황준우는 그동안 손발을 섞으면서도 서문지언의 틈을 찾지 못했다.

자연스레 감탄이 나오고, 기쁨이 번졌다.

“그 무존이라는 별호 탐났는데, 함부로 뺏을 수가 없겠네.”

이런 인물이라면 능히 무존이라 불릴 만하지 않은가?

이십 년도 전, 그가 겪었던 어설픈 우내십존은 더 이상 어디에도 없었다.

무존 서문지언과 손발을 섞으며 강호가 변한 사실을 명확히 체감한다.

성장했다.

어딘지 모르게 고여 썩어가던 강호는 어느덧 크게 흐르고 있었다.

시대가 모두를 이끌고 있는 것이다.

재미있는 점은 그러한 시대의 개문(開門)이 모두 황준우 본인으로부터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칠야의 난은 강호 무림인들의 자부심을 무너트리고, 스스로의 노력을 불러일으켰다.

젊은 천재, 만금검존 황준우의 등장은 새 시대의 서막을 알리고 있었다.

황준우는 생각했다.

‘만약 운명이란 게 있고, 진짜 신이 있다면 괘씸할 정도로 날 제멋대로 이끌고 있지 않은가?’

검선 위자청과, 무존 서문지언의 등장은 마치 그런 현실을 황준우에게 깨닫게 하기 위한 자극 같았다. 실제로 황준우는 서문지언과의 격전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알아버렸다.

하지만 이게 끝이 아니다.

이 싸움이 끝났을 때, 그 결과는 만천하에 알려질 것이다.

황준우 혼자만이 깨달은 사실을 천하 전체가 인지하게 된다.

우내십존의 시대는 끝이다.

군림하던 무림군주들의 면면도 바뀌게 될 테다.

개천(開天)!

그야말로 새 하늘이 열리며 새로운 시대가 찾아오는 것이다.

‘대체 무엇을 위한 새 시대인가?’

단순한 시대 교체의 때?

그렇게 보기에는 강호의 변화가 너무나 격심하다.

흐름의 중심에 선 황준우마저 절실하게 체감할 정도로 큰 변화다.

고심하는 황준우의 눈앞으로 번쩍이는 기운이 또 한 번 폭발했다.

서문지언은 몸을 두른 극소량의 자연지기를 제외하고는 모든 조율을 놓아버렸다.

그에게는 지금 이 정도가 최선이었다.

절망적인 상황이지만 두 눈빛은 조금도 죽지 않았다.

싸워서 이긴다는 스스로를 의심하지 않는다.

그 강함에, 의지에 황준우는 민망함과 미안함 또한 찬사를 느꼈다.

‘눈앞에 무인을 두고 무슨 짓을 한 건지…….’

말로 하는 사과는 의미가 없었다.

이제부터는 전력을 다해 서문지언을 쓰러트린다.

그 결과가 꽤나 뼈아플 수도 있겠지만, 괜찮았다.

서문지언이라는 사내는 고작 그 정도로 쓰러지지 않을 테니 말이다.

항주, 정유객점.

밝은 얼굴의 여아와, 그 맞은편의 사내 둘이 대화를 나눈다. 객점의 한구석, 두터운 죽립을 눌러쓴 채 그 모습을 어딘지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짓고 바라보던 사내의 표정이 순식간에 뒤바뀌었다.

‘마기?’

방금 전, 항주 일대에 거대한 마기 하나가 뜬금없이 나타났다.

주변이 소란스럽지는 않은 것을 보니 딱히 과격한 행동을 보이지는 않는 듯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특히 지금은 무림맹이 천마신교의 공격을 당하고 있던 시점이 아니던가?

목적이 불분명하다.

심지어 그 걸음이 지켜보고 있는 아가씨와 자신이 위치한 정유객점으로 향하고 있다는 것도 문제였다.

‘아가씨께 피해가 오기 전에 따로 처리해야겠군.’

생각을 정리하며 몸을 일으킨 거구의 사내, 여선위가 식탁 위에 동전 몇 문을 떨어트린 후 바깥을 향했다.

마기를 풀풀 풍기는 상대의 위치를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객점을 나서서 얼마 지나지 않아, 눈앞에 칙칙한 도포를 눌러쓴 사내를 곧장 마주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이건…… 나를 쫓아온 건가?’

전장을 떠난 지 어언 삼십 년.

목숨의 위협을 받은 적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하나 이토록 노골적으로 그를 쫓는 존재는 또 오랜만이었다.

여선위의 입가로 자연스럽게 불쾌한 미소가 떠올랐다.

“나를 찾아왔나?”

작은 물음이었다.

하나 상대의 귀에는 명확히 닿았을 터였다.

내력을 이용해 수많은 사람들을 지나쳐 명확하게 상대에게 전달했으니 말이다.

쉽지 않은 수다.

어지간한 초인이라 하여도 불가능한 일.

“아마 그렇게 된 것 같군.”

상대 역시 같은 수로 응답한 듯, 여선위의 귀에만 명확히 음성이 전해졌다.

‘아니, 내공이 아닌가?’

잠시 의문을 느낀 여선위였지만 개의치 않고 웃음을 보였다.

황준우와 편한 사이가 된 이후, 가끔 대련과 대화를 하며 적지 않은 깨달음을 얻었다.

정체되어 있던 무공이 크게 진일보하고 있는 도중이다 보니 자신감도 꽤나 차오른 상태였다.

‘어떤 종자인지는 모르겠지만 호락호락하지는 않을 게다.’

여선위는 주변을 빠르게 훑었다.

항주 도시 한복판에서 소란을 일으켜서는 좋을 게 없다.

많은 사람들이 다칠 것이다. 또한 한참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황서연에게도 방해가 될 테고, 만금장의 이름에도 누가 된다.

“나도 소란스러운 장소는 좋아하지 않아서 말이야. 따라오게. 후후.”

마침 상대측에서 제안을 먼저 해왔다.

여선위는 꺼릴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고 두 사람의 신형은 순식간에 항주를 벗어나 바닷길을 내달렸다.

짧지 않은 시간을 달려 바다의 짠 내음이 코끝을 자극하고 작은 어촌마을을 몇 개나 지났을 무렵, 한적한 모래사장의 공터에서 두 사람이 동시에 걸음을 멈추었다.

“이 정도면 딱 좋을 것 같군.”

여선위가 눌러쓰고 있던 죽립을 벗어던지며 얼굴을 보였다.

칙칙한 도포를 깊게 눌러써, 얼굴까지 가리고 있던 상대도 조심스럽게 얼굴을 드러냈다.

새하얀 피부에, 흐릿한 검미, 유난히 짙어 보이는 적갈색 눈동자가 인상적인 사내다.

“햇볕이 뜨겁군.”

첫 마디는 꽤나 평온하게까지 느껴지는 말이었다.

마기가 코를 찌를 정도로 지독하게 느껴지는 인물답지 않은 말이었다.

때문에 여선위는 아무런 말없이 등 뒤, 긴 장포로 감싸고 있던 방천화극을 풀어 양손에 쥐었다.

“호오…… 역시…….”

잠시, 방천화극을 바라보는 사내의 눈에 음험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 곧장 공격을 가하지는 않았다.

“오해가 조금 있는 듯한데, 난 굳이 싸우려 이 자리에 온 게 아닐세. 음, 우선 내 소개를 하지. 난 장량이라고 하네.”

“싸우지 않을 거면 썩 꺼져라.”

여선위의 대답은 냉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내, 장량의 행동에는 여전히 여유가 가득했다.

“싸우러 오지는 않았지만, 필요한 물건은 있어서 말이야. 그 물건, 혹시 내게 양도할 수 없겠나?”

“무기는 무인의 생명이다. 헛소리를 하는군. 또 한 번 괴상한 말을 늘어놓는다면 목을 베겠다.”

“끙…… 내가 그 방천화극을 찾아 얼마나 헤맸는지 자네는 모를 걸세. 하니 이리 부탁하지. 내게 건네게. 그 대가로…… 목숨만은 살려 줄 테니 말일세.”

여선위의 신형이 날듯이 뛰어올랐다.

거대한 방천화극이 단숨에 장량의 몸을 두 쪽으로 가르는 듯했다.

하나 검은 모래가 되어 허공으로 흩어진 장량에게는 그 어떠한 비명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

생각지도 못한 상대의 모습에 놀란 눈을 한 여선위의 뒤편으로 흩어졌던 검은 모래가 하나로 합쳐져 다시 장량의 형체를 갖춘다.

“쯧, 굳이 권주를 마다하고 벌주를 마시겠다 하는구먼.”

짧은 읊조림과 함께 장량의 도포 밑으로 검은 마기가 뱀처럼 기어 나와 여선위의 발목을 묶는다.

콧방귀를 뀐 여선위의 방천화극이 발목을 휘감는 마기를 일격에 잘라낸다.

“조금이지만 자연지기를 다룰 줄 아는군. 생각보다 곤란하게 되었어.”

놀란 표정의 장량의 신형이 다시 한 번 흩어졌다.

“같잖은 사술을 부리지 말고 정당하게 싸워라!”

여선위가 내력을 섞은 거대한 외침을 내질렀고, 일시적으로 검은 모래가 사방팔방으로 떠올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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