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4화
제 194화
그렇게 된다면 이 이야기를 전해 들은 누군가는 또 용두방주와 남무림 지존의 자리를 두고 저울질을 시작할 터였다.
또 누군가는 그 저울질에 어린 황준우가 무림맹의 위용에 겁먹어 용두방주에게 한 수 접어주었다는 말을 더 얹을 것이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이해도 되지 않고, 어이가 없는 경우다.
하지만 세간의 시선, 말장난이란 것이 그렇다는 전왕의 말을 무시할 수도 없었다.
적어도 이런 방면에서는 황준우보다 전왕이 몇 수는 앞서 있었으니 말이다.
때문에 용두방주, 여상욱이 방문 요청을 한 지 이틀이 지날 동안 황준우는 딱히 할 일이 크게 없음에도 불구하고 만남을 지체했다.
적당한 시기를 재며 만남의 때까지 뜸을 들인 것이다.
“유시(酉時)쯤 저녁이나 한 끼 하자고 하는 게 좋겠네.”
“그리 전하겠습니다.”
무슨 대화를 나눌지, 어떠한 것을 원할지에 대해서는 딱히 의논할 필요 없었다.
눈앞에 훤히 그 목적이 보인 탓이다.
‘대답도 정해져 있고 말이지…….’
황준우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생각은 정의회와의 비무전이 끝난 지 얼마 안 된 이후의 밤, 갑작스레 찾아온 밤손님과의 만남으로 이어졌다.
“값을 치를 때가 왔다.”
뜬금없는 방문이었고, 밑도 끝도 없는 첫 마디였다.
하나 어두운 밤, 들려오는 헛기침에 창문을 열어 준 황준우는 크게 당황하지 않았다.
“무슨 요괴라도 나타났나 보지? 이 년이나 말없이 있어서 설마 잊어먹었나 했지. 하암.”
자다 깬 복장의 황준우가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바깥에 둥실 떠올라 있는 소녀, 신아를 향해 손짓했다.
“일단 들어와. 안에서 이야기하자고.”
짐짓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인 그녀가 창문을 통해 방문 안으로 들어왔고, 뒤꿈치를 들어 낑낑거리며 손끝으로 창문을 닫았다.
‘제법 귀엽네.’
속은 아니란 걸 알지만, 겉모습이 어린 소녀의 그것과 다를 바 없는지라 제법 감성적으로 바라본 황준우를 향해, 다급한 표정으로 시선을 돌린 신아가 다시 입을 열었다.
“마왕이 나타났다.”
“음…… 그 마왕이 내가 생각하는 그런 인간다운 녀석은 아니겠지?”
“겉모습이 어떠할지언즉 그 속내는 인간다움이라고는 일말도 찾아볼 수 없는 끔찍한 악마(惡魔)가 바로 마왕이다. 놈이, 천마신교를 정복하고 중원으로의 진군을 선언했다.
“아, 잠깐. 잠깐. 그러니까 지금 천마신교를 끌고 나왔다는 녀석이 천마나 뭐 그런 녀석이 아니라 마왕이라고?”
“그렇다, 마왕 동탁이다.”
신아가 진중한 눈빛으로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동탁?”
“그렇다. 동탁이다.”
“내가 아는 그 동탁? 후한(後漢)의?”
“아무래도 그가 맞을 것이다.”
“시체가 돌아다닌다는 소문이 있던데, 고대의 괴물까지 살아나서 움직이는 건가? 대체 무슨 강시술이 그래? 아니, 그럴 수가 있나?”
신아의 갑작스러운 방문에는 태연하던 황준우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납득되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 머릿속은 복잡하게 뒤엉켰다.
“강시술 따위가 아니다. 고작 그런 잡다한 마술(魔術)로 어찌 유계의 마왕을 불러오겠느냐. 분명 그놈이다. 그때 놓친 대마술사가 팔각마서로 마왕과의 계약을 해낸 게 분명해.”
“팔각마서!”
한동안 잊고 살았던, 신아가 위험성을 똑똑히 강조했던 물건을 떠올린 황준우의 표정이 조금씩 침착하게 굳어졌다.
“그러고 보니 팔각마서는 일종의 보패라고 했지. 대충이지만, 납득은 가네.”
물론 심정적으로 여전히 의문은 많았다.
아무리 보패라고 하여도 그토록 고대의 인물을 함부로 되돌릴 수 있는가? 또한 그렇게 부활한 인물이 정말 인간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네가 궁금해하는 모든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우선 마왕을 이해해야 한다. 다행히 이 부분은 어렵지 않게 말할 수 있겠구나.”
또다시 복잡한 과정이 엮여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입을 닫고 있던 황준우가 큰 눈으로(@눈을 크게 뜨며) 신아를 바라보았다.
“과정 자체는 복잡하지만, 보패를 이해하고 있으니 설명은 간단하다. 명력이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이더냐?”
“그야 이름값이라고 했잖아.”
“하면 보패는?”
“그 명력의 물건들 중 특수한 몇 개의 기물이…….”
말을 하던 황준우의 눈에 황당한 빛이 스쳐 지나갔다.
“잠시만, 그러니까 악행으로 인한 악명이 쌓여서 저런 마왕이 탄생한 거야? 죽은 뒤의 세계에서?”
“전반적으로는 옳다. 그 외로도 심성이 극한까지 악에 물들어 있어야 한다거나, 몇 가지 조건이 더 있지만 동탁의 경우는 그에 상당히 합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구나.”
“말하지 않아도 알 것 같아.”
동탁은 후한 말 시대 최악의 정치가이자, 폭군으로 이름이 드높았다.
인간으로 살아 있던 당시에도 마왕이라는 칭호를 붙이기에 부족함이 없는 존재였던 셈이다.
“팔각마서가 불러낸 것은 인간 동탁이 아닌 마왕 동탁. 따지자면 놈의 존재는 마선(魔仙)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게다.”
“전에 네 설명을 떠올리자면 그쯤 되는 존재가 함부로 인세에 개입할 수는 없을 테고, 때문에 팔각마서를 이용해 이쪽으로 불러왔다는 거군.”
“바로 그 이야기다. 지상으로 나오기까지 거치는 과정은 더 복잡하지만, 막상 도달할 수만 있다면 일반적인 신선보다 제약이 없는 놈들이 마왕이란 존재다. 어지간한 인간이 그를 막을 수 있을 것이라고는 생각이 들지 않는구나. 지선인 나라고 하여도…… 그의 발끝에 미치기도 힘들겠지.”
신아는 황준우의 두 눈을 직시했다.
머릿속에 의문이 가득한 상태로 전장으로 밀어 넣고 싶지는 않지만, 부탁이 조급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놈을 계속 놓아둔다면 천하가 큰 혈란(血亂)에 휩싸일 것이야. 하니 부탁이다. 놈을 막아다오.”
“뭐, 어차피 빚은 갚아야 하니까. 근데 마왕쯤 막으면 대여료가 제법 상환되나?”
“제법 상환되다 마다. 마왕을 막는다면 아마 앞으로 일 년은 더 네가 가지고 있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을 게다.”
황준우의 긍정적인 반응에 신아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이곳까지 찾아오면서도 혹시나 거절을 하면 어쩌나 걱정을 한 듯했다.
“고작 일 년 더?”
“너도 느꼈지 않느냐. 늠군의 관은 값어치를 매길 수 없는 보물이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너무 짜네. 아, 그러고 보니 신선들은?”
“곤륜 내에서 나름대로 선계로 대화를 요청하고 있지만 쉽지가 않다. 또한 대화가 이루어진 후에도 신선이 직접 강림하기까지는 절차가 복잡하니, 너무 오랜 시간이 필요해.”
“거 참, 더럽게 불편하네. 당장 천하가 어찌 될지 모른다는데 그렇게까지 하는 거야? 그래서 신선이랑 인간이 다를 게 뭐야?”
평소였으면 노발대발하며 신선을 모욕하지 말라며 소리쳤을 것 같은 신아의 얼굴 위로 어딘지 모르게 씁쓸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러게 말이다.”
흘러나온 목소리에는 제법 체념이 어려 있다.
“그래도, 내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해 너를 돕겠다.”
“너 혼자? 곤륜은?”
“그 나름대로의 일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마당이라…….”
“뭐, 그 선계와의 대화 같은 것? 됐다, 됐어. 그만해도 돼.”
“……미안하게 됐구나.”
“아니, 뭐. 기대했던 것보다 더 허술한 지원이기는 해도 어쩔 수 있나. 이미 받은 게 있는데.”
황준우가 가슴 한편, 늘 품에 안고 살아가고 있는 늠군의 관을 두드렸다.
“같은 무인을 상대로 사용하지 않으려 해서 그렇지. 나 팔괘술도 제법 늘었다고. 이참에 마음껏 사용해보지 뭐.”
“고맙구나. 정말 고마워.”
황준우의 대수롭지 않은 말에 신아의 두 눈이 감격으로 차오른다.
“좋아. 그러면 지금 바로 가도 될까?”
“그럴 수 있다면 좋겠다만…….”
“또 무슨 문제가 있는 거야?”
“마왕이란 존재는 단순히 죽인다고 해서 영원히 사라지지 않는다. 다시 유계로 돌아가 때를 기다릴 뿐이지. 이미 지상의 맛을 본 놈이니 기회가 된다면 누구보다 먼저 돌아올게다. 그때가 되면 아마 지금보다 더 곤란하게 움직이겠지.”
“거 무지 까다로운 녀석이네.”
황준우가 혀를 찼다.
“놈을 유계로 가지 않고 잡아두는 방법은 봉인구(封印球)뿐이다. 이후 곤륜의 성소(聖所)에서 정화 의식을 시도한다면 완전히 소멸에까지 이르지.”
다행히 방법은 없지 않다.
그렇게 말한 신아가 웃음을 보였다.
“봉인구는 지금 내가 제작 중에 있다. 때문에 이곳까지 오는 데에 시간이 더 걸렸지만…… 조만간이면 완전히 완성할 수 있을 게다.”
“그러면 봉인구가 완성되는 순간이 움직일 때가 되겠구나.”
“바로 그거다. 완성이 되는 대로, 내가 연락을 취하도록 하마.”
“오늘처럼 뜬금없이 찾아오겠다는 거야?”
“……달리 방법도 없으니 말이다.”
“뭐, 좋아. 기다리고 있을게.”
시원한 웃음으로 답하는 황준우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던 신아가 가볍게 고개를 주억이며 무인의 공수(拱手)를 취했다.
“다시 한 번 말해, 어려운 일에 선뜻 나선다고 말해 주어 정말 고맙구나. 이 빚은 내 개인적으로라도 꼭 갚도록 하겠다.”
“별말씀을.”
황준우는 어깨를 으쓱였다.
드디어 약속이 잡혔다.
이틀이라는 시간은 짧지 않은 기다림을 요구했지만, 용두방주 여상욱은 되도록 침착하려 노력했다.
새로이 남기연합, 아니 이제는 남무림의 지존으로 자리 잡은 남무신 황준우가 정치 감각이 조금이라도 있는 인물이라면 이런 방식을 택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한 지속되는 무림맹의 독촉에 타들어 가는 속내를 감추기 위한 연기이기도 했다.
태연스러움을 가장하지 않았다면 그는 이미 몇 번이고 황준우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자고 소리쳤을 터였다.
“후우, 침착하게. 차분히 설득하는 거다. 놈이 아무리 강하고 영악해 봐야 약관의 애송이에 불과하다.”
여상욱은 부담되는 심리를 덜기 위해 다소 과장된 말로 스스로를 달랬다.
그도 그럴 게, 이번에 그의 어깨에 짊어진 임무가 제법 묵직했다.
자그마치 남무림 전체를 천마신교와의 전쟁에 끌어들이는 것.
당장 피를 볼 이유가 없는 안정 된 남무림에서 무림맹을 돕기 위해 그리해야 할 이유가 조금도 없음을 알지만, 해내야 한다.
아직 다들 크게 짐작하지 못하고 있는 듯하지만, 몰아치는 천마신교의 기세가 범상치 않았다.
이대로라면 정말로 무림맹이 몰락하거나,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될지도 모른다.
놀랍게도 이것이 바로 현재 무림맹 내에서 내려진 결론이었다. 그만큼이나 작금의 천마신교는 강하고 무서웠다.
범인들은 상상도 못 할 끔찍함이 가득한 것이다.
때문에 다소 손해를 보더라도 남무림을 끌어들이자는 결론을 내렸다.
어렵긴 하지만 가능하다고 생각했다.
‘그 상대가 서문지언이라면 분명히…….’
무림 호사가들에게 알려지길 서문지언은 단호하고, 패도적이라는 소문이 대다수였지만 실상은 조금 다르다.
서문지언은 공명정대하며, 균형을 중시하는 인물이다.
그만큼이나 평화라는 단어를 굉장히 좋아했다.
심하게 보자면 집착으로까지 보이는 그 행동은, 천마신교의 이념과는 엄연히 반대되었다. 특히 지금과 같은 말도 안 되는 천마신교라면 더욱 설득이 쉬울 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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