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95화 (195/373)

학사재생 195화

제 195화

때문에 처음 남무림을 향할 당시, 여상욱은 자신만만했다.

용두방주라는 직위에 있는 그가 나선 이유는 이번 임무가 그만큼 막중하기도 하지만, 이로 인해 한 세대에 한 번 있을까 말까 한 전 무림연합을 일구어낸다는 큰 성취가 남기 때문이다.

한데 예상했던 협상의 상대가 바뀌었다.

처음, 두 사람의 손속이 부딪치는 것을 보았을 때 혹시나 하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정말로 어린 상가의 자식이 승리해버릴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아니, 이젠 상가의 자식이라 할 수도 없지.’

처음 황준우가 무명을 알렸을 때, 그를 바라보던 이들의 시선 대다수에는 만금장이라는 배후가 먼저 보였다.

상가에서 저만한 고수를 배출했으니 막대한 황금의 지원과, 부풀리기가 있으리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나 이제는 그 누구도 이와 같은 생각을 하지 않는다.

깎아내리기 좋아하는 바람잡이들이야 비슷한 말을 하고는 하지만, 어디에서나 무시당할 뿐이다.

이제는 만금검존 아니, 남쪽의 무신이라 불리는 황준우의 배후를 보는 이는 누구도 없었다.

여상욱이라고 해서 다르지는 않았다.

“얕보고 싶어도 얕볼 수 없다는 말이지.”

약속된 객점에 들어가, 텅 비어버린 실내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쓴웃음과 함께 작은 목소리를 흘린 여상욱에게로 어린 점소이가 다가왔다.

“무신께서 초대하신 손님이시지요? 이리로 오세요. 헤헤.”

양손을 싹싹 비비는 소년 점소이의 안내를 따라 식당 중앙에 엉덩이를 붙인 여상욱이 웃으며 말했다.

“내 보다시피 거지 놈이라 네게 더 베풀 것은 없겠구나. 이해해 주겠느냐?”

“어휴, 무슨 이해까지나요. 이미 품삯은 무신께서 가득 주셨답니다.”

아닌 게 아니라 소년 점소이의 얼굴에는 행복한 웃음꽃이 가득 피어 있었다. 주방에서 슬쩍 얼굴을 내밀어 여상욱의 얼굴을 확인한 숙수와 객점 주인의 표정 또한 당연하게도 밝았다.

여상욱의 입가로는 또 한 번 쓴웃음이 떠올랐다.

‘무림인 중 제대로 값을 치르고 건물을 빌리는 경우가 오죽 없으면 무신이 원가를 지불한 것만으로도 이리 기뻐할꼬.’

속에서 내뱉는다는 혀 차는 소리가 객점 안까지 가득 찼다.

괜한 감정을 드러낼 필요 없다 생각한 여상욱은 흠칫 놀라며 재빨리 마음을 정리했다.

표정에는 평온이 찾아온다.

그렇게 일각.

‘제법 늦는군.’

애초에 약속 시간보다 조금 빨리 왔으니 이상한 일은 아니다.

그렇게 생각할 무렵, 객점 문이 열렸다.

젊은 청년과, 그 뒤를 따르는 두 사람.

그중 한 명의 경우는 여상욱에게도 낯이 익은 인물이었다.

‘서왕……! 역시 사실이었구나.’

새로이 혜성처럼 등장해 하오문까지 접수한 정보집단의 거두(巨頭), 천조회의 수장이 누구도 거둘 수 없는 쥐라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 놀라운 소식에 개방 역시 전력을 통해 천조회주의 정체를 파악하려 하였고, 그 결과 서왕이 분명하다는 결론에 다가가고 있는 중이었다. 그리고 방금 개방의 용두방주인 여상욱의 눈으로 분명히 그 얼굴을 확인했다.

‘본래 쥐는 주인을 가져선 안 되거늘…….’

서왕이 가진 수많은 유력 인물들에 대한 비밀은 너무나 위험하다. 때문에 무림삼계명에 쥐는 주인을 가질 수 없다는 법칙이 있는 것이다. 한데 그 규율이 깨졌다.

본래라면 모두가 합심하여 규율을 어긴 이를 공격하여야 했겠지만, 불가능하다.

상대는 이제 천하의 절반이라 볼 수 있는 남쪽 무림의 절대자다.

그 기세가, 위엄이, 등장한 순간부터 어깨를 짓누른다.

여상욱은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으며 입가에는 미소를 매달고, 공수를 취했다.

“이름 높은 남쪽의 무신을 뵙게 되어 반갑소이다.”

처음에 스스로를 다잡기 위해 떠올렸던, 나이 어린 애송이에 불과하다는 생각은 삽시간에 지워졌다.

잔잔한 눈길로 그를 바라보는 황준우의 모습은 이미 천하를 논하기에 부족함이 없는 절대자라는 것을 여실히 증명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나도 반가워, 용두방주.”

다소 오만하게 보일 수 있는 하대를 대수롭지 않게 건넨 황준우가 먼저 자리에 앉았다.

“앉지그래.”

짧게 고개를 끄덕인 여상욱이 반대편에 마주 앉는다.

황준우의 하대가 이상하거나, 불쾌하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당연한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느낌이다.

때문에 여상욱은 더욱더 마음속 깊이 황준우를 인정할 수 있었다.

‘무릇 절대자라 함은 세월에 굽히지 않는 위엄이 있어야 하는 법이지. 참으로 대단하구나. 만금장. 도대체 이런 괴물을 어떻게 키운 게냐.’

마음속에서는 또 하나의 갈등이 일었다.

과연 이 어린 절대자를 무림맹의 일에까지 끌어들이는 것이 옳을까? 늑대를 피하고자 범의 아가리에 머리를 들이미는 꼴이 될지도 모른다.

“휴…….”

“눈빛이 다채로워서 무슨 말을 할까 기대하고 있었는데 첫 마디가 한숨이네.”

저도 모르게 내뱉은 한숨에 흠칫 놀란 여상욱을 향해 가볍게 손을 내저은 황준우가 말했다.

“아아, 괜찮아. 급하게 이야기할 필요는 없어. 배도 고프잖아? 소청!”

“네! 무신님!”

황준우의 부름에 처음 여상욱을 맞았던 어린 점소이가 후다닥 뛰어왔다.

“준비한 음식들 부탁할게.”

“넵. 오늘은 황 숙수께서 최고의 솜씨를 발휘하셨다고 하셨어요.”

“오 여기 숙수님 성이 황 씨야? 나랑 같네?”

“헤헤, 그러게 말입니다. 잠시만 기다리세요.”

헤실거리는 웃음을 흘린 점소이가 주방으로 뛰어갔다.

객점 이곳저곳에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상황을 지켜보던 다른 점소이들도 그 뒤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고, 곧 상 위로 다채로운 음식이 화려하게 펼쳐졌다.

“오, 여기 숙수 솜씨가 제법 좋다더니 냄새부터 죽여주잖아.”

음식이 나오기 전까지의 짧은 침묵을 지운 황준우가 코를 킁킁거리며 젓가락을 들어 올렸다.

“자자, 먹읍시다. 용두방주, 전왕, 사마정. 세 사람 모두.”

“알겠습니다.”

“따르겠습니다.”

삽시간에 식사 시간이 시작되었다.

애초부터 때를 맞춘 것이니 당연한 일이었지만, 본론도 꺼내기 전에 상황이 흘러가고 있는 셈이다. 여상욱은 당황스러운 한편, 마음이 편안해지는 감정을 동시에 느꼈다.

‘과연 무겁기만 한 인물은 아니란 건가.’

좌중을 아우르는 위엄이 있지만 그 느낌이 무겁지는 않다.

젊고, 신선한 느낌이다.

적어도 여태껏 여상욱이 보아왔던 무림군주들과는 엄연히 다른 느낌이었다.

덕분에 식사를 하는 동안 여상욱은 복잡해지려는 생각과 마음을 여유롭게 정리할 수 있었다.

“아, 잘 먹었다.”

황준우의 가벼운 한 마디와 함께 식사가 끝나고, 따뜻한 차가 상 위에 새로이 올려졌다.

잔을 들어 올려 가볍게 목을 축인 황준우가 여상욱을 바라본다.

“이제 조금 이야기할 준비가 된 것 같네.”

“덕분에…… 여유를 줘서 고맙소.”

“별말씀을.”

어깨를 으쓱한 황준우가 차분한 시선으로 여상욱의 다음 말을 기다린다.

“후우…… 숨길 게 뭐가 있겠소. 나는 무림맹의 사자(使者)로서 남기연합 아니, 남무림 전체의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 왔소.”

“무림맹의 동맹으로서 천마신교와의 대전에 참가해 달라?”

“물론이오.”

“흐음…… 맨입으로는 아니겠지?”

황준우의 입가로 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속내를 알 수 없는 알쏭달쏭한 느낌이다.

여상욱으로서는 알 수 없는, 황준우가 어린 시절부터 마주한 속내를 읽을 수 없는 수많은 인물들과의 대화에서 얻어낸 능력이다.

“무림맹 차원에서 들어줄 수 있는 일이라면 되도록 들어주려 하오.”

그 모습에 다급함을 느낀 여상욱이 빠르게 말했다.

“거 참 묘한 말이네. 들어줄 수 있는 일 중에서 되도록이라니, 정확한 조건을 가지고 온 건 없는 거야?”

“물론 있소. 황금 이십만 문, 거기에 더불어 남무림의 지존인 무신께 무림맹 영주(領主)의 자격을 주겠소.”

“무림맹 영주?”

“그렇소이다.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무림맹 내에서 큰 사태의 결정은 투표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있소. 각 문파를 대표하는 장로들을 비롯한 맹주와 총군사, 당주까지 동등하게 한 표를 행사하여 중대사를 결정하는 게요.”

“그래서?”

“영주는 그런 의결안에 홀로 두 표를 행사할 수 있는 막강한 권한을 가진 직위요. 뿐만이 아니라 필요할 때면 무림맹의 무력십대(武力十隊)중 하나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권한도 있소.”

“재밌네.”

피식 웃은 황준우의 시선이 전왕을 향했다.

“어떻게 생각해?”

“굳이 묻지 않으셔도 아시지 않습니까?”

“그럼 내가 느낀 대로 말해서…… 왜 도움을 청하러 와서까지 치졸하게 장난질이야?”

시선이 이번에는 다시 여상욱을 향했다.

여전히 잔잔하다.

하나 날카롭다.

또한 그 무게가 이전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여상욱은 삽시간에 어깨를 짓누르는 정도가 아니라 숨이 턱 막혀오는 기분을 느꼈다.

“그, 그건…….”

“제법 있어 보이는 척 떠들었지만 결국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허울뿐인 직책에, 당주급의 권한을 양도하겠다는 것 아냐? 아, 황금도 있었지. 근데 미안. 나 돈은 이제 진짜 엄청 많거든.”

“당주 급이라고 하기에는……!”

“무력십대 중 하나를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것은 무림맹 삼당(三黨) 당주들에게 있는 권한이잖아.”

“하나 맹주와 총군사라 하여도 십대 이상의, 삼당은 함부로 움직일 수 없소. 때문에 의결권을 행사하는 것이고 말이요. 영주라는 직위는 결코 허울뿐인 농락이 아니오.”

“아, 그러니까 그 의결권 말이야. 내가 무림맹까지 직접 가야 되는 것 아니야?”

“…….”

“설마하니 뭐, 남무림에 있는 내가 없는 자리에서는 의견이 도착할 때까지 결정하지 않고 무림맹 내에 얌전히 앉아 기다리겠다, 이런 건 아닐 거잖아?”

“이미 과반수로 의결이 난 경우에는 어쩔 수 없지 않겠소.”

말을 하는 여상욱의 목소리가 떨린다.

그 역시 지금 하는 말이 고작 변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나를 우습게 보는 거야? 아니면 준비해 온 게 그렇게까지 없는 거야? 만약 서문가주가 이 자리에 있었다면 같은 말을 했을 거야?”

“그렇소.”

“이건 진짜인가 보네. 흔들림이 보이지 않아.”

“…….”

“아마 그 뒤에는 서문가주를 흔들려고 했겠지만 말이야. 그 성격을 보니, 무림이 피로 물드는 건 못 볼 테고 적당히 명분으로 내세울 방금 전과 같은 조건을 주면 못 이기는 척 도우러 나설 수도 있겠지.”

여상욱은 눈을 질끈 감았다.

상대는 여러모로 그의 머리 꼭대기에 서 있었다.

어중간한 말장난은 통하지 않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못 이기는 척이 아니오. 왜 모르시는 게요? 천마신교가 계속 이대로 진군한다면 무림맹 다음은 남무림이오.”

“차라리 다른 이야기를 해. 난 천마신교가 하나도 무섭지 않으니까 말이야.”

“아무리 우리 서로 다른 곳에 몸담고 있다 하나 사해가 동도 아니오! 같은 무림에 몸을 담고 있을진대, 어찌 동지들이 허망하게 죽어 가는 것을 지켜만 보겠단 말이오!? 무신에게는 협의와 도리라는 것이 없는 게요?”

여상욱이 흥분하여 목소리를 높이며 감정을 폭발시켰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