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196화
제 196화
하나 황준우에게는 닿지 않은 듯했다.
“협의와 도리. 그 잘난 말 그쪽은 얼마나 잘 지키고 살았는데.”
차가운 조소를 흘린 황준우가 지루하다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제법 노력하는 것 같아서 여기까지 들어줬지만, 결론은 이미 정해져 있었어.”
“정녕 강호의 수많은 동지들을 외면하겠다는 게요?”
여상욱이 두 주먹을 불끈 쥐며 몸을 떤다.
그를 묵묵히 지켜보던 황준우의 입가로 웃음이 떠올랐다.
“아니. 아쉽게도, 네가 말한 협의까지는 몰라도. 도리라는 것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한다고 배운 녀석이거든.”
“하, 하면…….”
“도와줄게. 대신 조건은 우리가 정하고.”
“……무리한 부탁은 들어줄 수 없소.”
“무리한 부탁도 아니야. 그냥 제안? 이참에 깔끔하게 정리하자는 거지. 이번 천마신교와의 싸움이 끝나면 우리도 비무 한 번 하자고.”
“비무라 함은……?”
“무림맹과 남무림. 이미 한 번 봤잖아?”
황준우가 살짝 웃었다.
여상욱의 눈이 거칠게 떨렸다.
“그런 가벼운 방법으로 맹의 중대사를 결정할 수는 없는 법 아니겠소?”
“오…….”
당혹스러운 감정이 섞인 음성에 황준우의 눈이 전왕을 향했다.
“저거 우리 들으라고 하는 말이지?”
“그런 것 같습니다. 주공. 엄연히 남기연합과 정의회를 무시하는 단어였지요.”
“그 무슨……!?”
“우리보고 가벼운 방법으로 중대사를 결정했다고 비판하는 것 같던데.”
말실수를 했다.
우스운 꼬리잡기이지만 여상욱은 정치 싸움에서 이 유치한 행위가 얼마나 까다로운지 잘 알고 있었다.
“오해요. 단지 말씀드렸다시피 무림맹의 중대사를 결정할 때에는 일단 의결이 진행되어야 해서 확답을 못 드린다는 뜻이었을 뿐이오.”
“그래서?”
황준우가 다시 고개를 돌려 여상욱을 보고는 빙긋 웃는다.
여상욱은 결국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맹에 의견은 제안해보겠소.”
“좋아. 한데 뭐, 우리 때처럼 모든 걸 걸고 하자는 건 아니야. 너무 가혹하잖아. 적당히 양보할 수 있는 선에서 한 번 조율해보라고.”
“음…… 그렇다고 한다면 더 쉬울 것 같소.”
여상욱이 고개를 주억였다.
내심으로는 쓴웃음이 흘렀다.
결국 기껏 마음을 다스린 의미가 없이 이 자리에서 내내 황준우에게 끌려다니며 감정을 터트리고, 당황하고, 고개를 주억이게 됐다.
나름대로 많은 사람을 상대하며 제법 적지 않은 경험을 쌓았다고 자부했거늘 이렇게까지 일방적으로 당할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좋아, 그러면 이건 이렇게 결정 난 걸로 하고. 잘 부탁해. 용두방주.”
황준우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입안이 어딘지 모르게 쓰다고 느낀 여상욱 역시 미소를 그렸다.
그 시간에도 천마신교의 진군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호사가들에게 강호제일로 평가받는 단체와의 전쟁을 눈앞에 두었지만 마왕 동탁의 군세에는 조금의 두려움도 없어 보였다.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자면, 긴장감이란 것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동탁의 군세에는 매일이 축제의 연속이었다. 땅 아래로 술이 흘러 고였으며, 고기가 넘쳐났고, 신음과 교성이 가득했다.
그 양이 부족할 일은 없었다.
막힘없이 진군하는 마왕의 군세는 무림인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적으로 공격했다.
부족하면 빼앗고, 다시 채우면 그만이다. 그리하다 보면 성을 공격할 수도 있고, 왕을 넘어 황제의 귀에까지 그들의 포악이 전해질지도 모른다.
하나 동탁과, 그를 따르는 군세는 그 역시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무엇도 망설이지 마라. 무엇도 참을 필요 없다. 언제나 탐욕하고, 욕심을 부려라. 빼앗고, 취하고, 먹고, 마셔라. 그것이 바로 마왕의 군대다!”
동탁의 거침없는 목소리는 매일 같이 군영 전체를 강타했다.
“천인공노할 무림인 놈들! 하늘이 어찌나 무서운지 모르는 것 같으니 우리가 직접 알려주겠다.”
그 거친 움직임을 참지 못한 군대가 움직였다.
이미 피해를 입은 감숙을 비롯한 섬서의 성주들이 하나로 힘을 모아 천마신교를 공격한 것이다. 하나 잠시 발걸음을 더디게 했을 뿐, 그들 역시 곧 끔찍한 풍경 속에서 비명을 내지르고 혼비백산하여 도주했다.
소문으로만 듣던 불사(不死) 군단과의 조우에 성주를 비롯한 군부의 무인들 모두가 기겁을 했다.
그야말로 파죽지세.
조금의 양보도 없는 동탁의 군세는 진군하여 드디어, 드높은 화산을 눈앞에 두고 무림맹과 군부의 연합이라는 대병력과 평야에서 마주했다.
쿠구구구-!
무거운 진동과 함께 산 전체가 크게 울음을 토한다. 당장에라도 와르르하고 무너져 내릴 것 같은 아슬아슬한 풍경이 지나가고,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봉우리 위에 앉아 가부좌를 틀고 있던 두 남녀가 동시에 눈을 떴다.
“올해도 고생했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여인 측이 웃으며 말을 건넨다.
적지 않은 거리에서 건넨 말이었지만 사내의 귀에는 똑똑히 들렸다.
“별말씀을. 오히려 제가 감사를 드려야지요.”
사내 측은 가는 눈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근래에는 제법 수월하네.”
“그날 이후로 보수를 제법 단단하게 했으니까요.”
“하긴, 그렇게까지 신선들이 많이 동원된 적도 오랜만이었지.”
백우선을 활짝 펼쳐 얼굴의 반 이상을 가린 여인 역시 남자를 닮은 눈웃음을 지었다.
제법 감추었지만, 그 가려진 얼굴에 지어진 불쾌한 표정을 읽은 남자의 입에서 짧은 한숨이 흘러나온다.
“그렇게까지 안 했다면 천하는 이미 몇 번이고 뒤집어졌을 겁니다. 그날의 작은 틈새로도 지금 이만큼이나 시끄럽지 않습니까?”
“알고 있어. 고맙게 생각하고 있다고?”
고개를 돌린 여인의 까다로운 목소리에는 여전히 불만히 가득하다. 어깨를 으쓱한 사내는 더 이상 그런 그녀의 불만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았다.
시선은 저 멀리, 서쪽 어딘가를 바라본다.
“마왕의 군세가 점점 강해지고 있군요.”
“막을 자가 없으니까.”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량, 당신은…….”
놀란 듯한 어투로 물은 주제에,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사내를 곁눈질로 본 여인이 코웃음을 쳤다.
“지금 당장이란 뜻이야. 아직 그는 남쪽에 있잖아?”
“후후…….”
웃음을 흘리며 부채를 편 사내가 고개를 주억였다.
“믿으실지 모르겠지만 당신만큼이나, 어쩌면 더, 저 역시 그에게 기대를 걸고 있답니다.”
사내의 말에 여인의 몸이 잠깐 떨린다.
하나 곧 돌아온 음색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부질없어.”
“정말 그렇게 생각하셨다면 기대도 안 하셨겠지요. 량, 말 안 해도 아시겠지만 당신은 참 모순(矛盾)적입니다.”
“네놈만 할까.”
“아하하.”
쏘는 어투에 큰 웃음을 터트린 사내 역시 무거운 엉덩이를 들며 몸을 일으킨다.
“쓸모없는 논쟁입니다.”
“불리한 말은 다 피해가는구먼.”
“그럴 리가요. 저는 단지…….”
제법 가벼운 어투로 말하던 사내의 몸이 흠칫 떨린다.
시선이 빠르게 어딘가를 훑고 지나간다.
여인은 그런 사내의 눈짓을 놓치지 않았다.
“무슨 일이야?”
“아니, 아닙니다.”
“장난치지 마. 날 바보로 아는 거야?”
“설마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천하의…….”
“됐고, 대답이나 해.”
“…….”
잠시 사내의 말문이 막혔다.
입술이 달싹이고, 닫히기를 몇 번이고 반복한다.
그러기를 한참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은 사내가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
“묘한 점이 없지 않아 있긴 합니다만. 일단 보이는 바대로 말하자면…….”
“말하자면?”
여인이 채근하듯 물었고, 다시금 입을 닫을 뻔한 사내의 말이 결국 끝마무리에 달했다.
“아마도, 황제가 죽은 것 같습니다.”
“뭐……?”
여인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자금성, 건청궁(乾淸宮).
천하의 주인인 황제가 기거하는 침소(寢所)의 비단 자락 위로 붉은 핏물이 흘러내린다. 자신의 목울대에 단검을 찔러 넣은 채, 시선도 마주치지 못하고 바닥을 바라보며 눈물을 흘리는 사내를 향한 노인의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스쳐 지나간다.
노인은 팔을 무겁게 들어 올린다.
힘겹게, 사내의 어깨까지 올라온 손이 무겁게 떨어졌다.
어깨에 닿는 감촉에 사내는 저도 모르게 바닥을 향했던 시선을 들어 올렸다.
그곳에는 노인이 희미한 웃음을 흘리고 있었다.
많은 사람들은 그런 노인의 흐릿한 웃음이 무섭다고 하였다. 피의 역사를 건너 황위에 오른 독사의 정체 모를 웃음이라며 공포에 떨기도 했다.
결국 그 웃음은 황제의 위엄이었다.
한때는 사내, 주고치 역시 그 웃음이 무서웠던 적이 있었다. 아니, 사실 지금 이 자리에 서기 전까지만 하여도 주고치는 그 웃음을 마냥 두려워만 했다.
하나 지금은 아니다.
마지막으로 남긴 그 흐릿한 미소에는 황제의 위엄 같은 것은 필요치 않았다.
애초에 이 자리에 권위란 것은 어디에도 없었다.
결국 그 웃음의 의미는 하나뿐이 남지 않는다.
“아버…… 지.”
힘겹게 내뱉는 목소리가 크게 떨린다.
핏물이 가득 묻은 손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형용할 수 없는 슬픔이 가득 차올랐다. 다리에는 힘이 하나도 들어가지 않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하나 주고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물은 투명하게 시작하여, 끝자락에 닿아서는 붉게 물든다.
아랫입술을 강하게 깨물어 입가에 가득 차는 비릿한 혈향을 몇 번이고 씹어 삼킨 이후, 흐르는 눈물마저 훔친 주고치가 당당한 발걸음으로 침소의 문을 열어젖혔다.
드르륵-!
무릎을 꿇은 채 침묵을 지키고 있던 수십의 대신들이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핏물이 가득 묻은 손을 바라보는 그들의 눈에는 기대가 가득하다.
주고치는 자신을 우러러보는 듯한 시선이 마치 승냥이떼와 같다고 생각했다.
입가로는 저도 모르게 비릿한 조소가 어린다.
주고치는 그 시선의 가장 끝자락, 건방지게도 자신의 앞에 무릎 꿇지 않은 채 건청궁의 기둥에 기대어 선 사내와 시선을 마주했다.
불쾌할 법한 일이건만, 어째서인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았다. 오히려 사내만이 유일하게 그를 승냥이와 같이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생각에 가슴 한편이 뻐근해질 정도였다.
주고치는 그 시선의 소용돌이 속에서 호흡을 한껏 머금었다.
차가운 밤공기가 폐부를 가득 채운다.
“이제부터는 짐이 황제다.”
내뱉은 말은 짧았지만, 너무나 무거웠다.
이후 주고치는 망설임 없이 혈향이 가득 배인 황제의 침소 문을 거칠게 닫아버렸다.
늦은 밤, 붉은 피로 칠한 건청궁 내에 소리 없는 함성이 터져 나왔다.
침소의 방문이 닫히고, 방을 밝히던 불빛마저 갑작스럽게 꺼진 이후였다.
“흐음…….”
짙은 혈향이 가득한 방 안에서, 가늘고 여린 신음이 흘렀다.
신음의 주인은 작은 기척을 흘리며, 교태롭게 움직여 싸늘하게 식은 전(前) 황제의 시신 옆에 무릎을 꿇고 앉는다. 그 앞에서 손을 휘젓고 죽은 눈을 까뒤집어 보는 행동을 몇 번이고 반복한 검은 인영이 불만스럽게 좁힌 작은 입술을 달싹였다.
“죽어버렸네. 죽기 싫었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을 텐데, 곤란하게 됐잖아.”
내뱉는 말과는 달리, 조금도 곤란하지 않은 기색을 비친 인영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래도 일은 제법 재미있게 돌아가고 있어서 다행이야. 기대되는걸. 꺄르륵.”
코 안을 훅 하고 파고드는 혈향이 제법 기분 좋다 느꼈는지 저도 모르게 웃음을 터트린 검은 인영이 마치 바람처럼 방 안에서 사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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