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학사재생-197화 (197/373)

학사재생 197화

제 197화

항주, 향화루는 언제나 그렇듯 시끌벅적하다.

사내들의 과장 섞인 호방한 웃음소리와 기녀들의 간드러지는 교태로운 목소리가 어우러지는 사이로 떨어진 사내의 목소리는 너무나 작았다. 때문에 향화루의 기녀, 예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다시 한 번 물을 수밖에 없었다.

“……뭐라고요?”

“…….”

하나 사내의 목소리는 여전히 작았고, 예화는 속에서 터져 나오는 한숨을 억지로 누르며 귀를 더 가까이 가져다 댔다.

“더 크게 말해 봐요. 오늘따라 유독 주변이 시끄럽네!”

“내 팔 말이야. 우습지 않아?”

그제야 들리는 사내의 목소리에, 예화의 눈동자에 황당함이 비쳤다.

처음 그가 기루에 들어와 자리에 앉았을 때, 곁눈질로 오른쪽 소매가 허전하다는 사실은 알았다.

다만, 그래서 뭐 어쩌란 말인가? 고급스럽지는 않지만 저렴한 가격과 기녀를 많이 보유해 이름 높은 향화루에서 일하다 보면 그와 같은 손님을 보는 것은 별로 생소한 경우가 아니다.

“글쎄, 난 괜찮은데? 나름대로 멋지잖아. 사내가 한쪽 팔을 잃을 정도의 각오로 무언가를 했다는 뜻 아니야?”

속마음과 달리 예화의 말엔 사내를 절로 우쭐하게 만드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진한 분이 칠해진 눈이 초승달처럼 휘자 어쩐지 지쳐 보이던 사내의 표정이 눈에 뜨이게 밝아진다.

‘하여간에 사내들이란…….’

내심 비웃음을 흘리면서도 겉으로 그를 표현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기분이라는 듯, 살짝 몸을 앞으로 기울여 은은하게 가슴골을 내비친 예화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되물었다.

“그래서 어쩌다 그렇게 된 건데? 혹시 군인이었어? 아니면 무림인?”

이런 자리에 와서 저런 표정으로 이야기를 하는 사내의 대다수는 사실 넷 중 하나다. 흑도의 삼류 왈패, 낭인 그리고 이미 말한 바 있듯 군인과 무림인. 낭인과 무림인을 나누는 게 이상할지도 모르지만 예화의 기준에서 적어도 그 둘은 달랐다.

사내들이 받아들이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낭인이라는 말은 싫어하지만 무림인 혹은 무인이라는 말에는 어깨를 당당히 편다.

참고로 말해 이런 질문에 자신은 흑도 왈패였다고 말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무림인이었어.”

“과연…….”

처음으로 속내와 말을 일치시킨 예화가 크게 고개를 주억였다.

“운이 안 좋았나 봐? 아니면 생사대적이라도 만났었어?”

“그런 건 아니고…….”

사내가 묘한 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우울해 보이던 얼굴 어딘가에는 작은 자부심이 피어난 것도 같았다.

“전쟁을 했거든.”

“전쟁? 그건 군인들이나 하는 것 아니야? 아…… 설마!”

예화는 곧 박수를 치며 눈을 반짝였다.

“무림대전 말하는 거구나?”

무림인들 간의 전쟁은 흔치 않았다.

설령 몇 번 있었다고 하여도 일반적인 양민들에게까지는 깊게 전해지지 않는다.

하나 무림대전과 같은 큰 사건은 달랐다.

“맞아. 난 무림일차대전에 참전했었거든.”

“일차대전? 어…… 뭐더라?”

“천마신교와의 대전이었지. 그땐 정말 끔찍했거든.”

“아아, 나도 들었어. 그때는 정말 최악이었다지?”

애초에 무림대전이라고 이름 붙여진 만큼 끔찍하지 않은 일이 어디 있겠냐만은, 예화는 또 한 번 말을 돌려 사내의 상황을 더욱 부풀려주었다.

“하하!”

과연 사내에게서 드디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예화는 가는 눈으로 계속 질문했다.

“그러면 무신도 봤겠네?”

“당연하지. 난 아직도 그날을 잊지 못해. 무신께서 직접 말도 걸어주셨는걸.”

하다하다.

저도 모르게 튀어나올 뻔한 말을 직업 정신으로 꾸역꾸역 삼킨 예화가 제자리에서 깡총 뛰었다.

“정말? 그러면 대화도 해 본 거네?”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쑥스러운 듯, 남은 한쪽 손으로 볼을 긁적인 사내가 술잔을 들어 올렸다.

“지금은 비록 이런 꼴이 됐지만, 그래도 나에게도 그런 때가 있었다는 사실을 되새기는 추억의 열쇠 같은 것이랄까.”

“꽤나 시적인 표현이네. 오빠, 말 잘한다.”

“하하…… 그래?”

또 한 번 웃음을 보인 사내가 주절주절 자신의 이야기를 늘어놓기 시작한다.

몇 번이고 겪었던 상황과 말들.

예화는 지루한 얼굴 위에 흥미 가득한 가면을 씌우고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목을 잘라버려!”

“사지를 다 끊어버려야 돼!”

“죽여야 한다!”

잔인한 고함과 끔찍한 비명, 그리고 신음이 울려 퍼진다.

전장의 한복판.

찌르고 베어도 다시금 일어나는 천마신교의 무인들과 맞서는 이들의 얼굴에는 절망이 차오르고 있었다. 그들은 목숨이 하나일진대, 적의 숨은 끊어질 줄을 모른다.

아무리 용맹한 마음을 품고 있다 하여도 마음이 꺾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힘을 내세요. 무림맹의 용사들이여! 적이 계속해서 일어난다면 다시금 대지를 디딜 수 없게 아주 풍비박산을 내어버리면 그만입니다!”

거대한 외침과 함께 비호처럼 전장에 나타난 비구니가 일장을 내지르자, 그 말은 현실이 되어 눈앞에 펼쳐졌다.

폭음과 함께 방금 전까지 붉은 눈으로 날뛰던 천마신교의 무인의 육체 전체가 살 조각으로 화해 허공으로 흩어진다.

이는 시작일 뿐이었다.

“하앗-!”

기합을 내지르는 비구니의 일장이 이어질 때마다 폭음과 함께 죽지 않는 적의 군대가 산산조각으로 찢어져 형체조차 남기지 않고 사라져버린다.

그들에게도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다.

“과연 여중제일고수…….”

“권후(拳后) 만세!”

누군가의 읊조림을, 큰 목소리가 받아낸다.

절망에 허우적거리며 무너지기 직전이었던 무인들의 사기가 다시금 차오른다. 혈전은 계속해서 이어졌다.

그 와중에 누구보다 가장 힘을 내고 있는 이는 아미파의 권후, 지명사태였다.

짧은 무력시위로 기세를 끌어 올렸지만 그녀가 쓰러진다면 모두 물거품이 된다.

주변에 모인 무인들의 기세가 그녀를 중심으로 모여들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언제까지…….’

지명사태는 여중제일고수, 복호권의 달인으로 이름 높은 초고수다. 여자라는, 다소 우스운 이유 탓에 우내십존의 좌에는 이름을 올리지 못했지만 실력만큼은 결코 그 아래가 아니라는 것이 세간의 지평. 실제로 지명사태 본인 역시 그리 생각하고 있었다. 하나 그런 지명사태라 한들 끊임없이 복호권을 절정으로 전개하여 싸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곧 한계야.’

내력이 바닥을 보이고 있다.

미간이 절로 찌푸려졌다.

시신조차 남기지 않게 적을 산산조각 내기 위해서 끊임없이 힘을 쥐어 짜냈지만 고작 서른 정도를 죽였을 뿐이다.

심지어 그들 중 마두라 불릴법한 고수는 어디에도 없었다.

평범한 마졸 서른을 잡기 위해 전력을 쏟았다.

스스로가 우내십존에 버금간다고 자신하는 지명사태의 입장에서는 자존심이 상할 일이다.

하나 그렇다고 하여 다른 사람들의 목숨마저 걸 수는 없었다.

늦은 나이까지 여장부 소리를 듣는 당찬 그녀였지만, 마음이 독하지만은 못했다.

‘물러나야 한다.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어찌 우리에게 이런 시련을 주시나이까.’

큰 호흡을 몰아쉰 그녀가 또 한 번 목소리를 높이려는 때였다.

큰 북소리가 두 번 허공에 울려 퍼졌다.

후퇴 신호다.

“권후, 이만 물러나시지요!”

“후퇴 명령입니다!”

의지를 불태우고 있었지만, 지명사태의 기세가 점점 줄어들고 있다는 것을 체감하고 있던 무인들이 재빨리 외쳤다.

물론 천마신교의 무인들이 그 틈새를 놓칠 리는 없었다.

또 한 번 폭음이 울려 퍼졌고, 복호권을 펼친 지명사태가 외쳤다.

“먼저 가십시오! 본 사태는 가장 마지막에 물러날 겁니다!”

“하나…….”

“부처님의 가호가 저를 지켜주실 것입니다. 아미타불!”

무언가를 말하려던 무인들은 곧 등을 돌려 빠르게 달아나기 시작했다.

당장 이 자리에서 떠나는 것이 그녀를 돕는 거라는 사실을 느낀 탓이다.

북소리가 또 한 번 울려 퍼졌고, 전장에는 여전히 비명이 가득했다.

핏물이 사방으로 튀어 오르고 시체가 쌓여간다.

“이곳이 곧 지옥이로구나.”

끔찍한 풍경의 한가운데에 선 지명사태의 마음속에 거대한 돌이 쿵 하고 떨어졌다.

“아미타불. 부처님이시여. 우리를 지켜주소서.”

하늘은 유난히 어둡기만 했다.

천마신교의 무인들은 불사의 군대가 되었다.

어찌 단 한 명도 빠지지 않고 그리되었는지는 모르지만, 이는 기정사실이었다. 직접 싸워 본 이상 모를 수가 없는 것이다.

패배하여 반강제로 떠밀리듯 물러나 무림맹과 합류한 군부의 군인들과, 무림맹의 무인들.

힘을 합쳐 싸운다면 결과를 낼 수 있으리라 믿었지만 또 한 번 물러나게 된 두 집단 사이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적은…… 우리의 예상보다 훨씬 강하오.”

그 사이로 힘겹게 말문을 연 이는 매화검존, 운백이다.

무림맹주.

무거운 직위를 어깨에 멘 그는 꽤나 지친 얼굴로 말을 이어나갔다.

“인정할 수밖에 없지 않소. 천마신교가 어떤 마술을 부렸는지는 모르겠지만, 우리만의 힘으로는 그들을 막을 수는 없소. 다소 비겁한 일이 될지 모르나, 시간을 끌며 전력을 보존하는 것이 현재 우리의 최선일지도 모르오.”

운백의 시선이 이 자리에 모인 군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한 인물에게로 향했다.

제법 젊은, 아직 이립도 되지 않아 보이는 청년인 그가 연식 높은 무관들을 제치고 대표로 뽑힌 것은 단순히 도독동지라는 아버지의 후광만은 아니다.

운백은 이미 몇 번이고 대화를 겪어보며 청년이 굉장히 사리에 밝고 영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무인, 군인 모두에게 자존심이 상할 수 있는 그의 말 역시 어렵지 않게 받아들여 줄 것이다.

“무림맹주님의 말씀에 저 역시 동의합니다. 우리의 힘이 부족하다면, 더 힘을 모으면 됩니다. 무리해서 피를 볼 이유는 어디에도 없습니다.”

청년, 초호서가 고개를 주억이며 말하자 다소 불만 가득하던 군인들의 얼굴에도 어쩔 수 없다는 납득이 떠올랐다.

“해서, 황궁은 어째서 조용한 게요? 아직도 연락이 닿고 있지 않은 게요?”

반발은 무림맹 측에서 튀어나왔다.

초호서에 못지않은 젊은 청년이다.

자연스럽게 운백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운백은 그가 청성삼십이검 중 하나이자, 청성파에서 기대하고 있는 기재라는 사실을 잘 알았다.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아 어린 시절부터 제법 건방지게 컸다는 이야기도 들었지만, 나설 자리도 구분하지 못하는 얼간이일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 했다.

자연스레 날카로운 눈초리는 청성파를 대표하여 이 자리에 온 인물에게로 향했다.

“자리에 앉아라. 표천.”

“장로님. 저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습니다. 어찌 적을 두고 무인이 등을 보인단 말입니까!?”

젊은 청성의 기재, 표천의 말에 청성파의 장로, 호재익의 눈이 뒤집혔다.

표천은 지금 자신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도 모를 것이다. 당장에라도 검을 뽑을 것 같은 기세의 운백을 보았다면 더 떠들지 못했을 터다.

하나 표천은 생각보다 눈치가 없었다. 이어진 잠깐의 침묵이, 자신의 의견을 지지하는 일이라고 생각한 표천의 얼굴에는 더욱 큰 자신감이 어렸다.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