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00화
제 200화
황준우를 대신하여 남천맹 무인들을 이끌 서문지언도 있으니 부족한 부분은 없었다.
그렇게 먼저 떠나가는 남천맹의 뒷모습을 확인하는 황준우의 입가로 절로 작은 미소가 번졌다.
“이제야 제대로 된 조직 같네.”
황준우를 대신하여도 부족함이 없는 상징성을 가진 서문지언과 정치적인 행보에 남천맹의 두뇌가 되어줄 전왕, 거기에 더하여 거대한 정보단체인 천조회와, 지금보다 미래가 더 기대되는 남궁세가가 얹어졌다.
“이제는 만금장의 이름을 빼도 부족함이 없겠구나.”
뒤편으로 다가온, 나지막한 목소리에 입가에 그려진 미소가 더욱 짙어졌다.
“에이, 무슨 섭섭한 말씀을. 아무리 머리가 컸다 하여도 근본을 잊어서는 안 되지요. 계속 지켜보고 계셨던 거예요, 아버지?”
“아들 녀석이 집에를 잘 안 들어오니 이렇게 직접 쫓아오게 되는구나.”
“음…… 이건 또 할 말이 없네요. 하하, 죄송해요.”
황준우의 곁으로 다가와 시선을 마주한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암, 죄송할 일이지. 아무리 장성한 자식이라 하여도 험난한 전쟁터에 가면서 이 아비에게 한마디를 해주지 않는 것이냐. 네 어머니도 걱정으로 마음을 졸이고 있다.”
“음…… 마찬가지로 할 말 없네요. 변명이지만, 정신이 없었어요.”
물론 서신은 보냈다.
하나 이 정도 일이라면 직접 찾아뵙고 말씀드리는 게 옳았다.
“나도 안다. 네가 어지간한 전쟁터에서 위험할 일은 없겠지. 허허…… 내 아들이 무신이라니, 상왕(商王)도 아니고…….”
“어느 정도 예측은 하셨으면서.”
“그래도 무신은 아니다, 이놈아. 과해. 어린 나이에 너무 과하단 말이다.”
사실 전생까지 따지자면 과한 성취는 아닐 수도 있었다.
‘아니지, 그래도 과한가.’
명실상부, 작금의 황준우는 가히 고금을 논할 고수였으니 말이다.
“그런 과한 힘이 아무런 업보 없이 따라올 리가 없지 않느냐.”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황석후의 두 눈에 조금은 걱정 어린 시선이 흘렀다.
“아버지의 언령과 마찬가지로요?”
“이것과는 다르다. 이건, 엄연히 대가가 있는 거래다.”
“거래? 누구하고요?”
“때가 되면 알게 될 것이다.”
오랜만에 황석후가 말을 돌렸다.
이런 때의 그는 입을 열지 않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에 황준우는 아쉬움 속에서도 고개를 주억일 수밖에 없었다.
“그나저나…… 신녀께서 찾아오셨다고 들었다.”
“아, 신아가 아버지도 찾아갔었나요?”
“바쁘다고 얼굴만 비치고 그냥 가셨지.”
천하의 지선과 맞먹는 자식을 보는 기분은 참으로 묘하다. 단순한 무지(無知)라고 생각하기에는 영민하게 빛나는 황준우의 두 눈동자는 마치 진리를 꿰뚫고 있는 듯도 했다.
“그분이 그리 다급하게 움직이시는 것을 보면, 이번 전쟁에도 흑막이 있다는 뜻이겠지.”
황준우는 그제야 황석후가 먼 합비까지 직접 쫓아온 이유를 알았다.
이 전쟁의 겉이 아니라, 이면(裏面)을 본 탓이다.
신아, 그러니까 곤륜이 연관된 일에는 일반적인 상식을 뛰어넘는 위험이 도사린다.
어지간한 일에는 꿈쩍도 안 하는 황석후의 엉덩이를 들어 올리게 할 만하다.
“별것 아니에요.”
“별일 아닐 정도의 일이면 내 선에서 해결됐을 게다.”
“…….”
황준우는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다른 사람도 아니고, 황석후를 속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탈해야 한다.”
황석후의 손이 황준우의 어깨를 두드렸다.
어린 시절 그의 마음을 안아주던 따뜻한 손길에 주름이 가득했다.
‘그러고 보니…… 많이 늙으셨네.’
너무 앞만 보고 살아왔던가?
아버지의 얼굴에 어린 세월의 흔적과, 지친 기색을 읽은 황준우는 마음 한편 어딘가가 뻐근해지는 감정을 느꼈다.
가슴이 아프면서도, 울컥하는, 또한 어째서인지 힘을 내게 되는 감정이다.
“걱정시켜드리지 않을게요. 무사히, 잘 돌아올 겁니다.”
“믿고 있다. 언제나, 어디서나, 넌 내 자랑스러운 아들이니 말이다.”
부자(父子)의 시선이 허공에서 끈끈하게 얽힌다.
“그럼, 다녀오겠습니다.”
황준우가 고개를 숙이며 공수를 취했고, 황석후가 고개를 주억였다.
황석후의 눈이 두어 번쯤 깜빡였을 때에는 더 이상 그의 시야에서 황준우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무공으로도 어디서 부족하다는 소리는 듣지 않을 황석후였지만, 감히 따라갈 엄두가 나지 않는 움직임이다.
“장주님. 대표두님이 실종되었습니다. 다행히 아가씨의 신변에는 문제가 없다고 합니다.”
등 뒤로 모습을 드러낸 흑표가 조심스레 말했다.
“결국…….”
그에 황석후의 미간 사이로 시름이 접혔다.
현재 황서연의 뒤를 쫓고 있던 여선위로부터 연락이 끊겼다. 아무 말도 없이 갑작스럽게 사라질 인물이 아닌지라 참고 기다렸지만, 걱정이 되어 따로 조사를 명령했다.
그 결과 여선위의 실종이 확정되었다.
많이 아끼던 인물이었던 만큼 마음속엔 심란함이 가득했다.
“흔적은?”
“제법 먼 거리까지 이어지고 있는 것 같아 추적 중입니다.”
“황궁은?”
“아무래도, 황제 폐하께서 승하하신 것이 사실인 듯합니다.”
“과연…….”
황석후의 눈이 크게 떨렸다.
범상치 않던 황궁의 움직임이 최근 어떠한 사건을 계기로 더욱 요동치고 있다.
그 내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라 아직 바깥까지 알려진 것은 없지만, 작지 않은 일인 만큼 곧 천하가 알게 될 터였다.
“본래 역천(逆天)의 행위에 가까운 만큼 천명(天命) 이상을 누린 분이니 예정된 결과라 할 수 있지만…….”
이 난세에는 좋지 않은 소식일 수밖에 없다.
“딸아이와 호위 무사들에게 천하의 정세가 범상치 않으니 최대한 주의하라 이르게. 기왕이면…… 집으로 돌아왔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말도 잊지 않고 전해주고.”
“알겠습니다.”
“허허…… 나이가 들면 심심해질까 걱정했건만, 다 필요 없는 생각이었군. 오히려 더 바빠지게 생겼어.”
“…….”
“가보세. 우린 대표두를 찾아야 하지 않겠나?”
흑표가 부복하며 고개를 숙였다.
황석후와 인사를 나눈 황준우는 주변을 돌아다니며 신아를 찾았다.
본래는 예정대로 그녀가 먼저 연락을 줄 때까지 기다리려 했으나, 북쪽의 정세가 너무 심각한 듯하여 준비가 끝나자마자 군대를 꾸려 출병을 거행했다. 사실 이 역시 생각보다는 오래 걸린 경우였다.
막상 모이고 보니 그 군세가 보통이 아니라 자칫하면 문제가 될 수 있다 싶어 지역을 다스리는 군왕인 영왕의 허가를 받아야 했기 때문이다.
무림맹과 같이 본래부터 오래도록 황실과 협력하여 온 무림단체라면 큰 문제가 없겠지만, 남천맹은 어디까지나 신규 무림 세력인 것이다.
그런 주제에 덩치는 어마어마한 편이고 말이다.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영왕이 별 어려움 없이 남천맹의 군대가 그만큼이나 모여 움직이는 것에 동의해 주었다는 사실이었다.
아무리 황준우와 주연하가 친구 사이고, 황석후와 영왕의 사이 역시 막역하다지만 쉽지 않은 일이었을 터인데 참으로 고마운 경우였다.
북무림 지역 역시, 이미 무림맹이 남천맹의 합류를 위해 허가를 요청해놓은 상태라고 하니 이 또한 문제없을 터였다.
결국 남은 문제는 신아의 부재뿐이었다.
“이쪽에서 연락할 수단을 전혀 남겨놓지 않으면 어쩌자는 거야.”
대충 인근에 있을 것이라 생각하며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신아의 흔적은 쉽게 발견되지 않았다. 아무래도 나름의 도술로서 자취를 감춘 듯했다.
‘아니면 애초부터 이 근처에 없었다던가?’
신묘한 도술을 이용하면 장거리에서 제가 눈앞에 있는 것처럼 대화를 하는 일도 불가능할 것 같지는 않았다.
“이걸 어쩌나……, 그냥 봉인이고 나발이고 혼자 처리해볼까?”
오래도록 찾아도 보이지 않자, 제자리에 주저앉은 황준우가 고민에 빠져 있을 때였다.
바로 눈앞, 공간이 접히듯 일그러지며 작은 신영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황준우의 입장에서는 반가운, 신아의 얼굴이었다.
“오, 찾았다.”
“말은 똑바로 해서 내가 널 찾은 게다! 불렀으면 얌전히 있을 것이지. 대체 어딜 그렇게 싸돌아다니는 거냐?”
입술을 살짝 내민 신아의 얼굴에는 고생의 기색이 역력했다.
듣자 하니 황준우가 하루 종일 돌아다닌 만큼, 그를 쫓은 것 같았다.
“내가 널 부르면 알 수 있어?”
“네가 늠군의 관을 가지고 있지 않느냐?”
“늠군의 관에 그런 기능도 있었군. 난 몰랐지.”
“흥, 본래 그 관을 가지고 있던 주인이 누군지 잊은 듯하구나.”
“곤륜의 보물이라고 했었잖아.”
“그래도 대다수 내가 가지고 다녔다.”
황준우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주억였다.
미리 말해주었다면 좋았겠다고 생각했지만, 기실 아무렴 상관없었다.
오히려 지금이라도 늠군의 관을 통해 필요할 때 신아를 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으니 되었다. 분명 그 능력도 필요한 순간이 다가올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쨌든, 만났으면 됐지.”
“목적만 달성했으면 그만이란 게냐?”
“당연하잖아.”
황준우가 제법 시원한 웃음을 보였다.
“큼큼. 녀석, 잘 크긴 잘 컸구나.”
그 모습을 보며 어째서인지 살짝 얼굴을 붉힌 신아가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다 들려. 뭐, 나 잘생긴 것 이제라도 알아서 다행이네.”
“시끄럽다!”
“쑥스러워하기는. 그래서, 본론부터 이야기하자. 만든다던 봉인구는 아직 멀었어?”
황준우의 물음에 어딘지 모르게 상기 되어 있던 신아의 표정이 단숨에 차가워졌다.
‘여자는 여우라더니, 지선쯤 되어도 다를 게 없다는 건가.’
그 빠른 변화에 황준우는 내심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완성 자체는 목전에 둔 지 제법 되었다. 다만 얼마 전 인근에서 대마술사의 기운을 느껴 그를 쫓느라 시간을 제법 허비했다.”
“대마술사? 팔각마서의 주인?”
“그래. 금방 떠나버려서 어째서 이곳까지 온 건지 이유는 찾지 못했으나, 놈이 분명했다.”
“아쉽게 됐네. 잡았으면 좀 더 쉬웠을 것 같은데.”
“여러모로 뒤끝을 걱정할 일도 없었겠지.”
“뭐, 어차피 놈은 마왕의 곁에 있을 수밖에 없는 것 아냐.”
신아가 고개를 주억였다.
“어쨌든 그래서 시간이 여태까지 미뤄졌다는 것이구먼. 성과는 없고?”
“끙……, 미안하게 되었구나. 내일쯤이면 완전히 완성할 수 있을 테니 조금만 기다려다오.”
“농담이야. 어찌 됐든 문제는 없다니 다행이다.”
“아, 그리고 성과가 없는 건 아니다. 놈이 해염현 인근의 백사장에서 누군가와 싸웠다는 흔적을 발견했으니 말이다.”
“싸웠다고?”
“아무래도 제법 애를 먹었는지 흔적이 많이 남았더구나.”
황준우의 눈동자 위로 의문이 떠올랐다.
뛰어난 지선인 신아조차 애를 먹인 대마술사와 전투를 벌이는 것은 어지간한 초인이라고 하여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고 보니 해염현 근처면…… 항주에 가깝나. 서연이가 그쪽 방향으로 갔다는 말은 들었는데.’
설마, 아닐 거다.
아무리 그녀의 재능이 뛰어나도 아직 황서연의 실력으로는 대마술사와 견줄 수 없다.
‘만약 있다고 한들…… 대표두?’
잠시, 섬뜩한 감정이 가슴을 스치고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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