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02화
제 202화
그들은 굳이 위험을 감수하는 복건, 광동 지역을 약탈하는 대신 조금 돌아가더라도 절강까지 해적질을 하러 갔다. 그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입은 곳은 다름 아닌 주산군도와 그 인근의 해역을 끼고 살아가는 어촌이었다.
황서연이 목격한 광경은 그러한 해적들에게 약탈당하여 가족과 마을을 잃은 사람들이 눈물을 쏟는 모습이었다.
어찌 보자면 천하 어딘가 또 다른 장소에서도 빈번히 일어나고 있을 법한 일이었지만, 그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것과 직접 겪는 일은 다르다. 황서연은 그들의 눈물에 마음 아파했고, 해적들의 횡포에 분노했다.
함께 그 자리에 있었던 경호와 홍산, 두 사람 역시 적지 않은 분노의 감정을 느꼈다.
하지만 황서연과 다르게 순수하게 그 분노에 몸을 실을 수만도 없었다.
해적이란 것이 단순히 한 무리를 잡는다고 해서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당장이야 세 사람이 해적들이 가장 자주 출몰하는 늦은 오후에서 새벽까지 해안가를 순찰하고 있다지만, 평생을 그리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이 작은 선의도 언젠가는 고작 동정 정도로 끝이 나고, 마을 사람들에게 또 다른 피해로 돌아올 수 있다.
근본적인 해결책을 마련해 줄 수 없다면 나서지 않는 것이 좋다. 경호와 홍산 둘 모두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협의지심을 불태우는 황서연을 막지는 못했다. 마치 빛이 나는 것만 같은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면, 막막한 상황에서도 정말로 해결책을 찾아낼 것 같은 기분도 드는 탓이다.
때문에 세 사람은 며칠째, 늦은 새벽에 한두 번씩 보이는 해적들의 배를 공격하여 쫓아냈다. 물론 홍산이 말한 소탕(掃蕩)과는 거리가 멀었다.
해적들은 하루, 또는 이틀 걸러 매일 같이 해안가에 지치지도 않고 나타났다.
이 상태로는 결국 좋지 않은 결론을 맞이할 수도 있다.
어찌 보자면 영왕의 해군이 다시 본래의 안정을 찾을 때까지만 이렇게 지켜주는 일이 최선으로 보이는 상황. 하지만 황서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분명 해적들을 이끄는 누군가가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리고 이틀 전 밤.
사로잡은 해적 중 한어(漢語)를 할 줄 아는 이를 만나, 실제로 배후가 있음을 알아냈다.
“해적왕(海賊王)이라니…….”
장강에 자리 잡은 수로왕이 들었다면 당장에 쫓아왔을지도 모를 별호를 떠올린 경호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진짜 그런 녀석이 있다면 저 배에 타고 있겠군요.”
어두운 밤바다 너머, 여태껏 보았던 해적선에 비하자면 세 배 이상은 커 보이는 규모의 범선이 해안가로 들어오고 있었다.
돛에 그려진 흑룡(黑龍)의 모습은 고의적으로 수로왕을 자극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이 아닐까 싶을 정도다.
“거 봐요, 내가 오늘은 만날 것 같다고 했잖아요.”
해안가의 어둠 속.
형형한 눈으로 검은 바다를 바라보던 황서연이 들뜬 음색으로 말했다.
“아직 확신은 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건 사실이잖아요. 가보자고요!”
점점 가까워지는 범선을 보며, 검을 뽑아 든 황서연이 단숨에 앞으로 뛰어나간다.
“거 참, 계획쯤은……!”
놀란 경호가 소리쳤지만 이미 황서연은 그 목소리가 들리지도 않을 거리에서 수면을 박차고 있었다.
“도련님의 나쁜 점을 더 닮아가고 있어.”
“이럴 게 아니라 쫓아갑시다.”
한숨을 내쉬는 경호와, 고개를 내젓는 홍산이 그 뒤를 쫓는다. 황서연만은 못하지만, 초절정의 극에 이른 실력이 아깝지 않은 수상비(水上飛)다.
그런 세 사람의 움직임을 발견했는지 거칠게 앞으로 나오던 범선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짧은 침묵이 흐른다.
이후, 벼락이 쳤다.
범선의 정면에서 뿜어져 나온 귀를 때리는 소리와 연기구름에 경화와 홍산 모두 경악을 토했다.
“화포!?”
“폭약이라니!”
범선에 가장 가까이 다가갔던 황서연이 목표임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아슬아슬한 상황이었지만 황서연은 공중으로 떠올라 허공을 마저 박차며 범선 위로 올라선다. 경호와 홍산은 각자의 무기를 뽑아 들며 얼굴을 굳혔다.
상대가 폭약까지 쓴 이상 일반적인 해적이라 보기에는 무리가 많았다.
무엇보다 두 사람은 황서연처럼 물길 위에서 포탄을 피할 자신이 없었다.
걸음이 자연스레 빨라질 수밖에 없었고, 덕분에 두 사람은 다음번 포탄이 발사되기 전에 배 위로 올라설 수 있었다.
“흠…….”
경호가 짧은 신음을 흘렸다.
주변의 풍경은 그야말로 삭막했다.
흉악한 인상에, 거친 표정을 한 사내들이 각자의 병장기를 뽑아 들고는 살기를 잔뜩 뿜어내고 있다.
그 수가 어찌나 많은지 자그마치 수백에 가까워 보인다.
심지어 대다수가 무공을 익히고 있는 듯했다.
세 사람은 순식간에 배 위에서 해적들 사이에 포위된 것이다.
“생각보다 더 많은데. 제 예상대로 이 배에 해적왕이 있을 것 같죠?”
황서연이 신이 난 듯한 목소리로 다시금 물었다.
“아무래도 그런 것 같습니다.”
엄청난 크기의 범선에 화탄, 거기에 무공을 익힌 이가 대부분인 선원들, 마지막으로 그런 선원들의 가장 후미에 황금 의자에 앉아 다리를 꼬고 있는 강렬한 기세의 사내까지. 이쯤 되는 환경에선 부정하기도 힘들다.
홍산의 주억임에 황서연이 매영검에 강기를 피어 올렸다.
“어차피 중요한 건 머리니까, 숫자에 쫄지 말라고요.”
“저 해적왕이라는 사내, 아무래도 제법 고수로 보이는데요.”
경호가 쓴 목소리로 말했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자세를 한 사내는 실제로 초인의 경지에 가까운 기세를 뽐내고 있었다.
적어도 해적왕이라는 이름에 아깝지 않은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음, 내가 더 강해. 경호 아저씨는 저만 믿고 따라와요!”
“그거 왠지 도련님이 하실 것 같은 말…….”
“간다!”
여전히 기다리지 않은 황서연이 앞으로 훌쩍 뛰어나갔다.
물론 주변을 둘러싼 해적들이 그를 두고만 보고 있지는 않고 사방에서 각자의 병장기를 휘둘러왔다.
카가가강-!
마치 춤을 추듯 가볍게 몸을 놀려 그를 모두 쳐낸 황서연이 코웃음을 친다.
“흥, 졸개들은 비키라고!”
검을 휘두르자, 뭉쳐 있던 강기가 꽃잎처럼 흩날리기 시작했다. 경악스러운 일이었다.
얇고, 작지만 그 하나, 하나가 강기라는 점을 생각한다면 결코 우습게 볼 수 없다. 그 증거로 수십의 해적들이 강기의 꽃잎에 발목, 혹은 다리가 베여 바닥으로 우르르 무너졌다.
마치 대나무를 베듯 간단하게 눈앞의 적들을 쓰러트렸지만, 아직도 해적왕으로 추정되는 사내에게 가기까지는 한참이나 남은 상황.
황서연이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시 한 번 외쳤다.
“경호 아저씨, 그거 해줘요, 그거!”
“네!?”
“거기 검!”
“…….”
“뭐해! 아, 배 통째로 자르면 안 돼요!”
황서연의 재촉에 본래 뽑아 들었던 검을 집어넣고, 근래 들어 더 자주 애용하게 되는 청홍검을 뽑은 경호가 울분에 찬 표정으로 내력을 뽑아냈다.
“으어아-!”
“우는 건지, 웃는 건지…….”
우우웅-!
괴성에 가까운 외침 속에, 홍산의 안타까운 목소리가 섞여들고 거대한 강기의 검이 정면으로 내뻗어졌다.
그 상상치 못한 공격에 공격을 감행하던 해적들은 물론, 자리에 앉아 흥미롭게 상황을 지켜보던 해적왕마저 깜짝 놀란 표정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콰과광-!
배의 갑판 일부와 선두가 날아가고 해적왕이 앉아 있던 황금 의자까지 일거에 날린 경호가 황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됐습니까!?”
“최고, 경호 아저씨! 사랑해요!”
“도련님이 들으면 저 맞아 죽…… 그만 좀 덤벼들어!”
청홍검의 엄청난 위력에 놀랐을 턴데도 불구하고 계속해서 달려드는 해적들을 향해 경호의 손이 다시 바삐 움직였다.
그사이 황서연은 경호 덕분에 넓게 형성된 길을 빠르게 달려 해적왕의 코앞까지 도달해 매영검을 휘두른다.
강기와 강기가 부딪치며 주변으로 강렬한 기파가 퍼져 나갔다.
“역시 제법 강하잖아.”
“…….”
웃음을 보인 황서연과 해적왕, 초인의 영역에 오른 두 사람의 강기가 불꽃을 튀기며 제자리에서 순식간에 수십 합을 오간다.
그 강렬한 기세에 바닷물이 일어나 파도가 되고 거대한 범선이 출렁인다.
“우아악-!”
무공이 낮은, 혹은 균형 감각이 좋지 않은 해적들이 비명을 내지르며 배 밑 바다로 단숨에 떨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두 사람의 기세는 조금도 줄어들지 않고 점점 더 부풀어만 갔다.
그 싸움에서 먼저 뒷걸음을 친 쪽은 황서연이었다.
조금 거리를 벌려, 호흡을 가다듬은 그녀가 상큼한 웃음을 그렸다.
“후우…… 이렇게 해선 끝이 없겠네. 진짜 세잖아. 생각보다 더. 뭐야, 해적 주제에…….”
그녀의 투덜거림에 굳은 표정으로 검집에 검을 밀어 넣은 해적왕의 입술이 달싹였다.
“그대야말로…… 어린 소녀 주제에 과할 정도로 강하구나.”
“어? 한어를 할 줄 알아?”
“이름이 무엇이냐?”
대답 대신, 오히려 질문을 건넨 사내가 눈을 빛낸다.
“황서연. 예쁘지?”
“……본 왕(王)은 나가사와 에이지다.”
“뭐야, 그게. 동영의 이름은 다 그런 식인가? 웃기네. 푸흡.”
웃음을 보이는 황서연을 보며 묘한 시선을 한 사내, 에이지가 물었다.
“마지막 기회를 주마. 본 왕의 첩(妾)이 되어라. 그리한다면 목숨만은 살려주겠다.”
“……뭐라고?”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에이지의 말에 황서연이 황당한 음성을 흘렸다.
“본 왕은 본래 두 번 묻지 않는다. 너는 특별하니 기회를 한 번 더 주도록 하마. 첩이 될 기회를 주겠다. 그리하면 너와 네 노예의 목숨들까지 모두 살려주마.”
“이…… 늙은 중년 아저씨가 어디서 헛소리야! 난 그런 취향 없거든!”
“아쉽군.”
입을 다문 에이지의 몸에서 조용한 기세가 피어올랐다.
그를 확인한 황서연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냥 해적도 아니고 변태 해적 주제에 심상지기까지 쓴다고?”
심상지기.
초인 중에서도 일정 이상의 깨달음을 얻은 고수만이 사용할 수 있다는 절기를 바라본 황서연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그럼 어디 나도 해볼까?’
황준우로부터 그 존재를 듣고, 그녀 역시 이미 심상지기 수련을 행하는 중이었다.
물론 쉽지는 않았다. 실질적으로 그녀의 경지가 아직 심상지기를 온전하게 펼칠 수준이 못 되는 탓이다.
그래도 꾸준히 노력한 결과, 빛나는 오성이 발하고 매영검이라는 보물의 힘 덕에 어설프게나마 흉내는 낼 수 있게 되었다.
강기는 강기로만이 상대할 수 있다.
마찬가지로 심상지기는 같은 심상지기가 아니면 막지 못한다.
황서연은 그 흉내의 위력이 어느 정도나 될지 시험해보고 싶었다.
“좋아.”
짧게 중얼거리며 결심을 한 황서연의 내력 역시 낮게 갈무리 되며 마음속 깊이 빨려들기 시작한다.
그를 확인한 에이지의 눈이 또 한 번 이체를 발했다.
“놀랍군. 여기까지 따라오다니…… 정말 흔치 않은 일이다. 한 번만 더 묻겠다. 지금이라도 내 첩이 되겠다고 말해라. 그렇지 않으면…….”
“시끄러. 이 변태 해적아! 너 진짜……!”
“죽고 싶어 환장한 건가?”
황서연의 말을 이어, 어두운 바다 위로 북해의 한설(寒雪)보다 차가운 목소리가 흘렀다.
그 무게는 만근의 철과 같아 그 누구도 움직일 수 없었다. 두 초인의 격돌 와중에도 이어지던 해적들과 경호, 홍산의 싸움마저 멈춘 범선의 높은 곳.
팔짱을 낀 채 허공에서부터 내려선 청년을 본 황서연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오빠!”
여선위의 흔적을 쫓아 동해를 뒤지던 황준우의 등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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