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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03화 (203/373)

학사재생 203화

제 203화

황준우는 애써 불안을 외면하려 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그의 직감은 잘 틀리지를 않았다.

‘확실해졌네.’

전투의 흔적이 남아 있는 백사장에 서, 흔적들을 쫓아 당시의 전투를 상상해 본 황준우의 머릿속에는 부정하고 싶은 정답이 떠올랐다.

상대, 대마술사의 움직임은 기괴하여 명확하게 읽기 힘드나 무인 측의 흔적만은 명확히 보였다. 직접 겪었던 바이기에 더욱 잘 알 수 있는 여선위의 무공이다. 그를 쫓아 바다 위로 떠오른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바닷속으로 떨어졌어.’

난감한 상황이었다.

아무리 황준우라고 하여도 파도가 치는 바다에 빠진 여선위의 흔적을 쫓는 것은 불가능하다. 물결을 헤쳐 흔적을 찾을 수는 없었으니 말이다.

자연스레 머릿속에 최악의 가정이 떠올랐다.

‘그럴 리는 없겠지만…….’

고개를 내저어 떠오르는 불쾌한 생각을 떨친 황준우는 주변을 훑었다.

달리 여선위의 기운이 느껴지지도 않으니 이제 그가 할 수 있는 방법은 몸을 움직여 직접 찾아내는 방법뿐이다.

“되도록 시간 내에는 찾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황준우의 바람에는 여러 의미가 담겨 있었다.

첫째는 신아가 도착하기 전에 해결해야 한다는 시간적 문제에 대한 염려였으며, 두 번째로는 가장 크게 걱정하고 있는 여선위의 생사에 관한 부분이었다.

아무리 여선위가 초인급 무인 중에서도 상위를 다투는 실력자라 한들 큰 부상을 입은 상태에서 바다에 빠졌다.

단련된 육체와 몸을 보호하는 내력으로도 버티는 데 한계가 있을 것이다.

어쩌면 이미 늦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지만, 무작정 포기하고 싶지는 않았다.

‘대표두가 이렇게 쉽게 죽을 것 같다는 생각도 안 들고 말이지.’

어찌 됐든, 아끼는 인물 중 하나가 이런 위협을 당했다는 사실은 불쾌했다.

‘대마술사라고 했던가?’

쓰이는 것보다 쌓이기가 어려운 황준우의 살생부(殺生簿)에 또 하나의 이름이 올라갔다. 그런 생각을 하는 와중에도 황준우의 몸은 날듯이 허공을 자유롭게 누비며 어딘가로 이어졌을 여선위의 흔적을 쫓았다.

시선 역시 끊임없이 사방을 훑었다.

하나 한 바퀴를 모두 둘러보아도 여선위의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젠장, 조금이라도 내력을 사용한 흔적만 찾아도 될 텐데.”

뒷머리를 긁적이며 신경질적으로 말한 황준우의 몸이 다시 바삐 움직이기 시작했다.

고작 주변을 한 번 둘러 본 정도로 포기할 수는 없다.

‘설마 이대로 고려나 동영까지 떠내려간 건 아니겠지?’

아주 가끔, 불안한 생각이 떠오를 때도 있었지만 곧장 고개를 내젓고 계속해서 탐색에 집중했다. 눈으로 보는 것과 기운을 느끼는 것만으로는 한계가 있다고 생각한 순간부터는 직접 사람들에게 수소문하기 시작했다.

절강의 동쪽에는 주산군도가 위치해 있기에 작은 섬들도 많고, 원주민들도 많다.

운이 좋다면 그들 중 한 명에게 발견되어 치료를 받고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리고 결과는 예상보다 빨리 찾아왔다.

“아, 그 가슴에서 피 철철 흘리던 아저씨, 나 기억해요.”

갑작스럽게 나타난 황준우의 물음에 성인 남녀가 모두 눈치를 보고 있을 무렵, 비교적 까무잡잡한 피부의 어린 소녀가 손을 번쩍 들며 외쳤다.

자연스럽게 시선은 소녀에게로 몰려들었다.

“엄마, 엄마. 그때 그 아저씨 아니야? 막 수염이 이렇게 나가지고, 얼굴도 되게 무섭게 생겼었는데…….”

혹시나 아이에게 해코지를 할까 걱정된 얼굴로 소녀를 품에 안은 중년 여인의 눈이 떨린다.

“걱정 마. 아무런 해코지도 하지 않을게. 오히려 지금 소녀가 말한 것이 사실이라면 보답을 해주고 싶은 심정이야.”

조심스러운 말에도 마지막까지 꺼림칙한 시선을 두던 여인과 황준우의 시선 교환이 반 각에 가깝게 이어진다.

“답답해, 엄마.”

그 끝, 참지 못한 소녀가 한마디를 더 읊조렸고 결국 주변의 눈치를 본 여인이 한숨을 쉬며 고개를 주억였다.

“맞아요. 우리 아이가 그분을 처음 발견했었어요.”

“발견했었다?”

“자세한 설명은 제가 하겠습니다. 한데 이 늙은이에게 낯이 익어서 그런데 존함을 물어도 되겠습니까?”

뒤를 이어 나타난 것은 마을에서 제일 나이가 들어 보이는 노인이었다.

‘촌장인가?’

젊은 남성들이 대부분 생업을 위해 바다로 나간 이런 섬마을에 있어 늙은 노인들은 마을의 질서를 수호하는 유지(有志)다.

특히 이런 때에 대표로 나서는 이라면 마을의 촌장이라고 보아도 무방했다.

“난 남천맹의 맹주, 황준우야.”

황준우가 우선 자신을 밝혔다.

하나 마을 사람들 중 누구도 그 이름을 들어 본 적이 없는 듯 고개를 갸웃거릴 뿐이다.

‘하긴 정식으로 발호한 지는 얼마 안 되었으니까.’

분명 천하를 아우를 거대세력의 주인이 되었음에도, 이런 때가 되면 역사라는 것의 중요성을 새삼 또 느끼게 되어 버린다.

“음, 만금장 소장주 황준우라고 하자.”

“만금장!”

“오오…… 소주대인의!”

그 말에 마을 여기저기서 감탄의 탄성과 함께 안도의 한숨이 동시에 흘렀다.

황석후가 이룩한 만금장의 명성이 이 작은 섬까지도 와 닿아 있는 것이다.

‘왠지 심술 나는걸?’

생각은 그렇지만 기분은 좋다.

어찌 됐든 이로써 가장 걱정되었던 여선위의 생사 확인은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말이다.

“여기까지 흘러 내려와서 발견됐으면 죽지는 않았을 테고, 어떻게 된 거야?”

“오오, 과연…… 열한 번째 생일 때 뵈었던 그 모습 그대로 자라셨습니다그려. 이리 또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소장주님.”

“영광입니다.”

동문서답(東問西答)이라 하였던가?

질문과 전혀 관련 없는 엉뚱한 답과 함께 촌장을 비롯한 주변 마을 사람들이 머리를 조아린다.

“이런 걸 원한 게 아닌데, 그나저나 내 열한 살 생일 때도 왔었구나. 미안, 그때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일일이 기억하지 못했어.”

“아닙니다. 아닙니다요. 그저 이렇게 훌륭히 자라주신 것만으로도 감사한 일이지요.”

어딘지 모르게 촉촉한 목소리로 말을 한 촌장은 헛기침을 흘린 후에야 첫 번째 질문에 도달했다.

“우선…… 찾고 계신 분이 아무래도 우리 마을에 계셨던 분은 맞는 것 같습니다.”

“흔치 않겠지. 사람이 그만한 덩치를 가진 경우도 흔치 않으니까.”

여선위는 팔 척에 가까운 장신에 단련된 근육으로 가득한 거인(巨人)이다.

게다가 겉에 어떤 옷을 껴입든 속에 늘 경장갑을 착용하고 다니는 특이한 취향까지 갖추고 있으니, 봤다면 분명 눈에 뜨일 수밖에 없는 인상인 것이다.

어떻게 보자면 그런 인물이 황서연과 경호, 홍산 등을 멀리서부터 은밀하게 지켜보고 있었다는 사실 자체도 대단한 일이었다.

그만큼이나 본인의 무공이 뛰어나기에 가능한 일이겠지만 말이다.

“처음 뵈었을 때…… 일반적인 사람이었다면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으실 상처를 입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질문을 하는 황준우의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가라앉는다.

다행히 촌장을 비롯한 마을 사람들은 그의 정체를 알고 난 이후 그런 사소한 변화에 크게 신경을 쓰지 않는 듯했다.

“아까 말씀드렸다시피 처음 발견을 한 것은 이 아이입니다. 하지만 우리 마을에는 의원도 한 명이 없고, 사정상 그런 상처를 치료할 여력도 되지 않는지라…….”

이쯤에 와서야 촌장이 조심스럽게 황준우의 눈치를 본다.

“계속 이야기해. 괜찮으니까.”

“마침 마을 청년들이 정기적으로 육지로 나가야 될 시점이었던지라, 응급처치만 한 후 곧장 떠나보내야 했습니다.”

“음…….”

작은 어촌 사람들의 응급처치란 것이야 수준이 뻔할 테니 여전히 위험한 상황이지만 당장 바다에 빠져 죽지는 않았다.

여기까지 들은 순간 황준우의 입에서는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렀다.

“됐어. 만약 그랬다면, 분명히 죽지 않을 테니까.”

불안과 안정 속을 오가던 직감에 또다시 확신이 섰다.

듣자 하니 상처가 제법 깊었던 것 같지만 당장 숨이 끊어지지 않을 정도라면 어지간해서 초인은 죽지 않는다.

주변의 자연지기가 호흡에 섞여 자연스럽게 육체의 재생률을 높여 주니 딱히 큰 치료 없이도 시간이 흐를수록 육체의 상태가 호전될 확률도 높았다. 초인이 괜히 초인이 아닌 것이다.

‘물론 바다에 빠져서 제 몸 보호하느라 기운이 다 빠져나갔다면 별개의 이야기였겠지만.’

어찌 됐든 살아서 육지로 나간 것이 아닌가?

그것이면 됐다.

“고마워. 덕분에 안심할 수 있겠어. 이 은혜는…….”

“부탁, 부탁이 있습니다.”

조금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바닥에 엎어진 촌장이 머리를 조아렸다.

“부탁? 말만 해. 무엇이든 다 들어줄 테니.”

다소 거만해 보이는 황준우의 말은 농담이 아니었다.

황금을 원하면 황금을 줄 수 있다. 무공을 원해도 가르쳐 줄 수 있다. 배가 필요하면 그 역시 구해줄 수 있다. 사람이 필요하다면 모아줄 수 있다.

만약 원한다면 육지로 삶의 터전을 이전시켜주는 것도 어렵지 않았다.

작금 황준우가 가진 거대한 힘에서 불가능이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 방금 말씀드렸던 청년들이 마을로 돌아오지 못하고 있습니다.”

“이건 또 무슨 소리지?”

황준우의 의문에 촌장이 다급한 얼굴로 상황을 설명했다.

갑작스러운 해적의 출몰과 그로 인한 주변 피해.

심지어 가끔씩 오가던 만금장의 배들도 근래 들어서는 왕복이 뜸하다고 하였다.

해적들의 성세가 워낙 강하고 기세가 흉흉하니 만금장이라 한들 쉽게 상선(商船)을 띄울 수가 없는 것이다.

이야기를 들은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아아, 그러고 보니 주변에 마을 몇 군데가 완전히 불타버렸던데 그게 다 해적 놈들 짓이란 거지?”

“맞습니다. 맞아요. 어째서 놈들이 갑작스럽게 이렇게까지 날뛰는 건지…… 하늘이 노하신 건가…….”

모든 일에는 이유가 있다. 그리고 인간의 일에는 또 그만한 인간의 사정이 있는 법이다. 하늘에 위치한 신선들이 이런 일에 관여할 일은 더욱 없고, 마왕이라고 보기에도 규모가 너무 작다.

때문에 속내로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한 황준우였지만 우선 고개를 주억였다.

“좋아, 들어줄게. 한데 보상은 따로 생각해 놔. 듣자 하니 우리 집안일하고도 연계되어 있는데, 이런 일 하면서 내가 보답이라고 말하기는 뭐하거든. 다녀올 테니까. 그동안 생각해두라고.”

놀란 표정의 촌장이 고개를 들었을 때에는 이미 황준우의 모습이 사라진 뒤였다.

마치 처음부터 이 자리에 없었던 것처럼, 유령처럼 사라진 황준우를 보며 마을 사람들 모두가 입을 떡하니 벌릴 무렵, 다시금 바다로 나온 황준우는 목표를 변경하여 해적선을 찾아 나서기 시작했다.

그 결과 늦은 저녁부터 두 척의 해적선을 침몰시키고, 살아남은 해적들을 사로잡아 관아에다 내동댕이쳐버렸다.

‘이 짧은 시간에 해적선만 두 척이라니. 진짜 너무하잖아. 해군에 무슨 문제가 생긴 게 분명한데…….’

인상을 찌푸린 황준우는 늦은 밤에도 다시 바다로 나섰다.

해적들이 가장 좋아하는 시간대야 뻔했으니 말이다.

그 와중에 느끼게 된 기운은 황준우에게도 반가운 이들이었다.

‘그리고, 해적치고는 제법인 양반이 하나 있네?’

아무래도 해적 중에서도 거물일 게 분명하다고 생각한 황준우의 몸이 자연스럽게 기운의 방향을 따랐다.

그리고 목표지에 도착하여 듣게 된 첫 한마디는 다소 좋지 않은 황준우의 기분을 또 한 번 뒤흔들어 놓기에 충분했다.

‘뭐? 첩? 처(妻)도 아니고? 아니, 이게 아니지…… 감히 내 동생한테?’

오랜만에 마음 한편에 불길이 일었다.

목소리에서는 뜨거운 감정마저 집어삼키는 차가운 감정이 흘러나왔다.

“죽고 싶어 환장한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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