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06화
제 206화
“자자, 일단 반길 준비를 합시다.”
운백의 말에 조금은 서먹하던 공기가 순식간에 환기되었다.
그러는 사이 남천맹의 펄럭이는 깃발은 점점 더 시야에 가까워졌다.
최전방에는 오래된 무림의 명숙들에게도 제법 낯이 익은 인물이 당당히 서 있다.
“무존.”
“직접 온다고 하더니 과연……!”
희뿌연 긴 머리를 흩날리는 야성적인 인상의 사내를 본 무림맹의 장로들 중 대다수가 감탄을 흘리며 고개를 주억인다. 얼굴에 걱정만이 가득하던 이들도 조금은 혈색이 돌아온다.
서문지언은 가문 외의 행사에 직접 나서지 않기로도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 활협단이 건재하던 당시에도 서문세가는 이름을 올렸을지언정, 서문지언이 직접 얼굴을 내민 적은 단 한 번도 없었을 정도였다.
누군가는 당연한 일이라고도 했다. 만약 서문지언이 그 자리에 나왔더라면 진무영이 가진 선장이라는 직위 자체가 무의미해질 수도 있는 일이었다.
쉽게 움직이지는 않지만, 한 번 떼는 엉덩이는 태산이 들썩이는 것과 같다.
우내십존 중 제일을 다툰다는 무존 서문지언의 존재감이란 그런 것이었다.
“무존이라…….”
반면 운백을 비롯한 그의 곁에 자리 잡은 현 무림맹 최고 간부들의 얼굴은 미묘했다.
“저 사람은 어찌 십 년 전과 비교해도 변한 것이 조금도 없어 보입니다. 아미타불.”
수많은 혈전을 두 주먹으로 헤치고 나온 지명사태의 말에 운백이 고개를 주억였다.
“그만큼이나 수련을 게을리하지 않는다는 뜻이지 않겠소.”
“어떻겠습니까?”
지명사태의 물음은 나지막했다.
또한 두서도 없었지만, 운백은 그 뜻을 이해했다.
“나 같은 게으른 늙은이보다 최소 두 수는 위요.”
지금 이 자리에 있는 무림맹 인물 중, 가장 직위가 높은 이는 말할 것도 없이 맹주 운백이다. 하나 제일의 고수는 아니었다. 운백 역시 우내십존 중에서도 상당한 실력자로 이름이 높지만, 우내십존 중에는 무존과 같은 규격 외의 인물이 몇 존재했었다.
생사(生死)조차 불투명한 무당의 검선과, 소림의 묵승(?僧) 무각대사였다.
지금 이 자리, 정확하게 운백의 뒤편에도 눈을 반개한 무각대사가 서 있었다.
운백과 지명사태, 두 사람 모두 실상 전음으로라도 무각대사와 현재 서문지언의 경지에 대해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하나 묻는다 한들 대답할 리가 없었다.
불존(佛尊), 무각대사의 또 다른 별호는 밝힌 바 있듯, 묵승이다.
스승 원공대사가 죽은 이후 이십 년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다는 그가 서문지언의 무공고하에 대하여 답변을 해줄 리는 없다고 보아도 무방했다.
“고갯짓이라도 해주시면 좋으련만…… 아미타불.”
다소 책망하는 듯한 지명사태의 말에도 무각대사는 묵묵히 정면만을 바라볼 뿐이다.
이윽고, 남천맹 군세와 연합군 간의 거리가 열 걸음 안팎으로 좁아졌다.
그때까지, 운백을 비롯한 몇몇 인물들에게 가볍게 눈인사를 건넨 서문지언이 먼저 말에서 내린다.
자연스레 그를 향해 움직이려는 인물들을 막아선 것은 운백의 손짓이었다.
“아직 아니오. 남천맹주는 서문가주가 아니지 않소.”
그 말에, 서문지언을 반기려던 이들 대다수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맹주께서는 정녕 그 헛소문을 믿으신단 말입니까?”
“남측에 무신이 탄생했다는, 아무래도 그는 과한 헛소문이거나 눈속임을 위한…….”
작은 술렁임이 일고 있을 때였다.
말 위에 올라탄 젊은 청년이 최전방의 기수 사이를 가르며 당당히 나선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뒤로는 몇 사람이나 되는 인물들이 함께였는데, 청년과 같이 말을 타지는 않았지만 보폭에는 당당함이 엿보였다.
개중에는 여인도 있었으며, 이 자리에 모인 이들이 그토록 견제하던 쥐의 왕도 존재했다.
그 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리고, 또 한 번 저들끼리 숙덕거림이 이는 사이 마찬가지로 앞으로 나서기 시작한 운백이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흘렸다.
“젊구나, 젊어.”
굳이 청년 하나만을 읊은 것이 아니었다.
그의 주변을 둘러싼 인물들의 대다수가, 남천맹의 기세가, 모든 것이 새파랗고 젊었다. 어딘지 모르게 뜨거운 열기마저 느껴졌다.
우습게도 운백은 그를 보며 이런 생각을 했다.
‘이들이야말로 진짜 무림 강호로구나.’
무림 강호라는 드넓은 세계에 선을 그을 것이 무에 있겠냐만 분명 운백은 그리 느꼈다.
운백이 걸어나가고 있음에도 아직도 말 위에서 내리지 않은 채 오연히 좌중을 둘러보고 있는 청년이 누구냐는 의문은 머릿속에 없었다.
세상에 어느 누가 말 위에 올라타 무존 서문지언의 옆을 지나칠 수 있을까?
게다가 운백은 보았다. 짧은 시간, 서문지언의 고개가 살짝 숙여졌다. 자존심 높고 고집스럽기로 유명한 서문지언이 저만큼이나 예를 표하는 경우는 황제의 앞을 제외하고는 존재할 수 없을 것이라 믿었는데, 완전히 틀려 버리고 말았다.
서로의 얼굴을 확연히 알아볼 수 있는 지근거리에까지 다가가서야 두 사람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말 위에서 가볍게 뛰어내린 청년과 시선을 마주한 순간 운백은 심장이 덜컹하고 떨어져 내리는 감정을 느꼈다.
상대가 너무 강해서, 그 기도에 압도당한 탓이 아니었다.
‘아무것도…… 읽을 수가 없다고?’
그래도 자그마치 매화검존이다.
화산제일고수의 칭호를 가진 우내십존.
한데 황준우에게서 그 무엇도 읽을 수 없다.
두 사람 사이에 놓인 벽이 감히 재단할 수도 없을 만큼 높다는 뜻이다.
그와 비슷한, 혹은 더한 심정을 느꼈는지 지명사태의 표정도 오묘하게 변했다.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과연…… 반갑소. 나는 무림맹주 운백이라 하오. 사해의 동도들은 과분하게도 매화검존이라는 별호로 불러주고 있소만…… 시대가 바뀌었는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구려.”
그와 똑 닮은 심정으로 양손을 모은 운백이 먼저 인사를 건넸다.
“남천맹주, 황준우다.”
무림을 양분하는 이대세력의 수장이 서로를 마주한 순간이었다.
“실제 합류 병력이 오만에 가깝습니다.”
“잘못 본 게 아니란 말이지.”
“하지만 대다수가 남천맹의 본래 소속이 아닌, 중간에 합류한 낭인들이라고 합니다.”
“그게 중요한가? 어찌 됐든 자발적으로 남천맹의 밑에 들어간 이들 아닌가?”
무림맹주와 남천맹주 혹은 남천맹주와 무림맹주.
어느새 무림천하라는 큰 판도를 놓아두고 제일 정상에 선 두 사람의 만남 이후 무림맹 진영의 막사는 더욱 떠들썩해졌다.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남천맹주는 너무 불손하오. 이제 막 맹주직에 오른 주제에 감히 우리 무림맹을 무엇으로 알고……!”
“하늘 높은 줄 모르고 날다 떨어져 봐야 세상 무서움을 알 상이오.”
어린 황준우의 오만한 태도를 비하하는 이들에서부터, 지금 합류한 남천맹의 오만 군세와 어떤 연계를 맺을지에 대한 이야기, 벌써 이번 전쟁이 끝난 이후의 관계에 대해서까지 수많은 목소리가 운백의 귀를 때렸다.
‘조금 낯부끄럽더라도 밀려날 때 자연스럽게 밀려났다면 더 좋았을까…….’
그 중심에 앉은 운백은 쓴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지금 그 숫자가 뭐가 중요하단 말인가?
멀지 않은 곳에 천하를 신음케 하는 적이 있다.
그의 고향, 화산을 불태운 악적들은 강하고, 무섭다.
결국 그들에게는 적이 있고, 우군이 도착한 것이다.
향후 미래의 관계?
“다들 눈뜬장님이지.”
저도 모르게 혼잣말을 육성으로 내뱉은 운백을 향해 시선이 잠시 몰려든다.
“아아, 혼잣말일세. 신경 쓰지 말고 계속 떠들게.”
조소를 보이며 손을 내저은 운백을 보며 각 문파의 수장 혹은 장로직을 맡고 있는 이들의 미간이 크게 찌푸려졌다.
“맹주님의 태도도 너무 안일했습니다. 첫 만남이었는데 그 젊은 놈에게 몇 수나 접어주시는 것 같은 모습을 보이셨지 않습니까? 이대로면 우리 무림맹의 미래가…….”
“몇 수나 접어주는 것 같은 모습이 아니라 몇 수 접혔네.”
계속해서 불만을 토하려는 이들을 향해 사실을 던져 놓은 운백이 계속해서 말을 해나갔다.
“내 이렇게까지 말하기 부끄러워 참고 있었으나, 이 중 남천맹주를 제대로 본 인물이 몇이나 되는가?”
“그게 무슨…….”
“장담컨대 다섯 사람도 되지 않겠지.”
무림맹은 거대한 집단이다.
구파일방을 제외하고서라도 중소방파 중 이름이 높거나, 소이 오대무관이라 불리는 곳도 무림맹에 속해 있다. 그만큼이나 엄청난 규모를 자랑하는 만큼, 사람도 많다. 각 문파에서 한자리한다는 사람들 한 명씩만 모아놓아도 그 수가 오십에 가깝다.
그중 십 분의 일도 제대로 황준우를 보지 못했다.
“맹주, 제가 말하겠습니다.”
다섯 중 한 사람에 속하는 지명사태가 한숨을 쉬며 말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녀가 보기에는 운백 역시 평소답지 않게 조금은 흥분한 듯 보인 탓이었다.
“남천맹주는…….”
그런 지명사태를 막아서는 목소리가 있었다.
낮고, 괴이하다.
다소 찢어지는 듯, 듣는 이의 입장에서 괴롭기까지 한 목소리였다. 천마신교의 마두들이 내지른 괴성이라고 하여도 믿을 듯한 끔찍한 음성이었지만, 목소리의 주인은 그와는 전혀 상반되는 인물이었다.
“불존…….”
“묵승이?”
이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단 한 번도 입을 열지 않던 불존 무각대사가 입을 열었다.
지난 혈전, 몇 번의 위기에서 그는 명성이 헛되지 않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경천동지(驚天動地)할 무공을 선보였다. 기실 그가 없었다면 지금 이 자리까지 누구도 남아 있지 못했을 거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었다.
특히 불사군대가 무너졌다고 착각했던 첫 전투, 기껏 선출한 정예 병력의 반수 이상을 적에게 빼앗겼을 때.
그야말로 인세에 도래한 나찰이 된 무각대사는 어제까지는 한편이었던 아군의 심장을 부수고, 아직까지 혼란스러워 하고 있는 동료들을 붙잡아 흔들어 깨우며 후미를 지켰다.
당시 전투에서 그가 홀로 막아선 정예고수만 일백이 넘었으며, 오대마종 중 둘이 속해 있었다.
그가 없었다면 무림맹은 그날 완전히 와해되었을 것이다.
권후, 지명사태 역시 이 자리에 남아 있지 못했을 터였다.
자연스럽게 무림맹의 모두가 무각대사의 실력을 인정하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마음 한편으로는 어쩌면 그가 새로운 천하제일인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은 이도 많았다.
무각대사가 보여 준 무위는 그만큼이나 압도적이었으니 말이다.
그런 무각대사가 입을 열었다.
이십 년이 넘게 묵언수행을 하던 무거운 입이 벌어진 이후 꺼낸 첫마디는 너무나 충격적이었다.
“남천맹주는…… 이 자리에 모인 모두를 합친 것보다…… 강하오.”
너무나 무거운 말이 좌중을 강타했다.
소란스럽던 천막에 침묵이 찾아든다.
눈동자를 굴리기 바쁜 와중에도 머릿속은 굉장히 복잡한 듯 보였다.
그 대다수가 또 쓸모없는 잔머리를 굴리거나 혹은, 개인의 욕심을 위한 선택에 대한 생각이 대부분이겠지만 말이다.
“허…….”
운백이 혀를 찼다.
어이가 없다는 감정이 담긴 것은 맞았다.
하나 분노라거나, 말도 안 된다는 심정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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