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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07화 (207/373)

학사재생 207화

제 207화

‘정녕 그 정도였단 말인가?’

믿고 싶지 않았지만 부정할 수도 없었다. 본인이 보고 느꼈다. 다만 그 깊이를 짐작하지 못했을 뿐이다. 때문에 궁금했고, 무각대사에게 이러한 정답을 듣기를 바랐다. 다만 아직 마음의 준비가 덜 되었었나 보다.

‘이러면 안 되거늘…… 지금은 대사가 조금 얄밉구려.’

막사 내에 만근의 철보다 무거운 말을 던져 놓은 무각대사는 눈을 반개한 채 염주 알을 몇 번이나 굴리고는 다시금 입을 닫아 버렸다.

결국 운백은 이 힘든 상황을 누구보다도 먼저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가 다른 자리도 아닌 무림맹주의 직위에 있기 때문이다.

“이 자리가 이토록 무겁게 느껴진 것은 처음이구려.”

깊은 한숨을 내쉰 운백의 입술이 마른 침으로 달싹인다.

“우선 나 역시, 무각대사의 생각이 틀리지 않았다고 보고 있소. 남천맹주는 무신이라는 별호가 아깝지 않을 만큼 강하오.”

“본 사태도 동감해요.”

힘겨운 운백의 말을 지명사태가 재빨리 거들었다.

마찬가지로 제법 충격에 빠졌던 지명사태였지만, 운백의 힘겨운 첫 마디에 빠르게 마음을 다잡은 것이다.

“고맙소.”

감추지 않고, 자신의 감정을 보인 운백이 살짝 고개를 숙였고 지명사태가 웃으며 고개를 주억인다.

“말도 안 되는…….”

“그 어린 남천맹주가!”

“하늘은 어찌하여 이런 시련을 우리에게…….”

또다시 소란스러워진 장내를 침착히 바라보던 운백이 땅을 거세게 밟았다.

무거운 기운이 막사 내부에 번져나갔다가 빠른 속도로 사그라진다.

놀라운 내력운용으로 다시금 장내를 침묵시킨 운백이 목소리를 내질렀다.

붉어진 얼굴로 목에 핏대를 세운 운백의 검지가 좌중을 길게 훑었다.

“지금 이게 뭐하는 추태요!? 무엇을 하고 있냐는 말이오!? 믿기 힘드시오? 시련이라고 하였소?”

다시 한 번 운백이 발을 굴렀다.

그 순간 내력이 약한 자들은 제 자리에서 휘청거리며 쓰러지거나, 안색을 굳혔다. 그 수가 자그마치 막사 내에 모인 인물들 중 절반이나 되었다.

처음과 달리 이번 발 구름에는 의도적일 정도로 과한 내력이 실려 있었다고 하여도 우스운 일이 아니었다.

“내 직접 검을 뽑지 않아도 이 중 절반에 가까운 이들쯤은 마음대로 할 수 있겠구려.”

명백한 조소를 보인 운백이 당당히 고개를 들었다.

“인정합시다. 남천맹주도 강하지만, 우리 무림맹도 많이 약해졌소. 왜? 바로 우리 때문에. 나 같은 무능한 맹주와 여기 모인 각 문파의 장로들이 욕심만 부리느라 무(武)를 게을리했기 때문 아니오?”

“맹주 말이…….”

“말! 말! 말! 그놈의 말!”

이번에는 진각이 아닌 음성을 통해 기운이 떨쳐나갔다.

“으윽!”

“우아악-!”

그러자 제자리에 서 있던 무인들 중 또다시 절반이 비명을 내지르며 엎어지고, 쓰러진다.

“그 말만 하다가 우리가 이 꼴이 되었소. 천마신교 하나를 막지 못해 군부와 연합하고, 힘이 부족하여 남측의 호랑이까지 불러들였소. 무림맹은 무슨! 언림맹(言林盟)이라는 이름이 더 어울리겠구랴!”

운백의 일갈에 할 말을 입 안 가득 담았던 이들의 얼굴마저 붉게 달아올랐다.

그 이름이 뜻하는 바가 무엇이던가?

무림문파.

그들이 속한 근본은 또 무엇에 닿아 있던가?

“우리는 무(武)로 시작되어 무로 끝나야 되는 존재요. 언제까지 세치 혀의 유혹에 빠져 있을 생각이란 말이오.”

운백의 말은 그들의 가슴을 어딘지 모르게 뜨겁게 달구었다.

아무리 오랜 시간 고여 썩은 물이 되었어도 근원조차 모르지는 않는다.

다만 그 근원을 쫓는 것이 득보다 해가 많기에 외면할 뿐이다. 세간의 시선이, 시대의 흐름이 그렇게 그들을 바꾸어버렸다.

언젠가는 그들도 가슴 한편에 뜨거운 웅심을 품었던, 무인(武人)이었음은 분명했으니 말이다.

“곧 천마신교가 다시 진군해올 것이오. 정녕 전쟁 이후의 남천맹이 두렵다면, 이번 싸움에서 이 자리에 모인 여러분을 비롯한 모두가 스스로 증명해야 할 것이오. 아직 우리도 무(武)를 잊지 않았음을, 무인(武人)의 무림맹을 보여줍시다.”

“따르겠습니다! 맹주님!”

늦은 나이, 스스로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열기 가득한 말을 운백이 내뱉은 후에야 무림맹의 마음은 하나로 엮였다.

무림맹 측이 다음번 방어에 대해 열의를 불태우는 사이, 남천맹 간부들이 모인 막사 내에서는 공격을 염두에 둔 계획을 떠올리고 있었다.

애초부터 방어한다는 경우 자체가 황준우의 머릿속에는 존재하지 않는 탓이었다.

“하면 선발대의 인원은 총 백 명이 어떻겠소?”

서문지언의 말에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백도 많아. 상황이 꼬이면 오히려 짐이 될 뿐이야.”

“하면 오십…….”

반이 잘려나갔지만 이번에도 황준우는 손을 내저었다.

“삼십. 그 정도가 적당할 것 같아.”

“음…….”

오만의 대군 중 삼십.

그야말로 미약한 숫자다.

일개 검대(劍隊)의 수준밖에 되지 않는 것이다.

하지만 그 하나, 하나를 채울 얼굴들은 결코 우습지 않을 터다.

황준우가 어떤 전쟁을 그리는지 머릿속에 떠올린 서문지언이 두터운 입술을 쓰다듬었다.

“맹주의 생각은 이해했소. 다만 실패할 경우 너무 큰 반동이 돌아오게 되어 있지 않소?”

“실패하지 않아. 아니, 우린 지지 않는다. 대호법.”

황준우의 말에 눈을 가늘게 뜬 서문지언이 한참 동안 할 말을 입안에서 곱씹다 집어 삼키고는 긴 한숨을 보였다.

“휴…… 맹주의 자신감은 정말 부럽구려.”

그리 말하는 서문지언의 입가에도 정작 진한 미소가 떠올라 있는 채다.

“하면 그 삼십의 이름은 아까 처음 이백을 말했을 때에 첫 번째에서 서른 번째까지로…….”

“그러면 돼.”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황준우가 자리에서 일어난다.

이제는 말보다는 행동에 나설 때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우리 본진에서 고수의 숫자가 너무 비게 되지 않을까요?”

일에서 삼십.

그 숫자는 남천맹의 실력자들을 줄지어 세워놓은 수였다.

그야말로 최정예 병력이 단숨에 빠져나가는 상황.

작은 공격 따위는 아랑곳 않는 천마신교의 급습이 이어진다면 오히려 역으로 위기를 맞이할 수도 있었다.

“연합군이잖아. 무림맹과 군부도 멍청이들만 모인 건 아니라고. 무림맹주도…….”

잠시, 오랜만에 만난 운백의 얼굴을 떠올린 황준우는 고개를 주억였다.

칠야의 난 당시 그는 아직 젊은 고수였다.

그때나 지금이나 인상에서 느껴지는 감정은 비슷하다.

“얄밉기는 하지만 능력 있는 양반이야. 나름대로 무인의 자긍심도 높고 말이지. 여태껏 패전해왔다고 우습게 볼 필요 없어.”

“동감하오. 무림맹주는 쉽게 무너지지 않을 거목이지.”

서문지언까지 동의하자 더 이상 반발을 하는 이는 없었다.

최고 권력자인 맹주 황준우와, 그 뒤를 잇는 서열이라 볼 수 있는 서문지언이 동의했다.

이미 머리에서 결론이 났다면, 몸통과 팔다리가 제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그를 따라 최선의 결과를 만들기 위해 바삐 움직이는 것이 옳다.

“혹시 아주 위험하면 연락할 방법이 없는 것도 아니고.”

황준우가 사마정을 보며 믿음직하다는 듯 어깨를 두드린다.

급박한 전장에서도 그와 혈안서라면 충분히 소식을 전할 수 있을 것이다.

“자, 그러면 전왕 네가 무림맹 측에 소식을 전해. 우리 남천맹이 선공을 가해서 적의 머리를 단숨에 친다. 그때까지 최대한 버텨라. 도착했으니까, 전쟁을 길게 끌 필요는 없단 말이지.”

짧은 회의는 끝났다.

남천맹이 최정예 삼십 명의 인원과 함께 출진했다.

소식을 접한 무림맹이 왈칵 뒤집혔다.

군부 측에서도 경악한 반응을 보였다.

그들은 적에게 강력한 사술을 부리는 마술사가 있다는 사실을 말하며 선발대에게 돌아올 것을 종용하라고 이야기했다.

사마정을 통해 그 이야기는 황준우에게 전해졌다.

물론 선발대가 물러설 리는 없었다.

“대마술사, 역시 이곳에 있는 것 같네. 곤란한 상황은 없겠지, 신아?”

황준우의 물음에, 좌측에서 말없이 함께 달리던 어린 소녀가 고개를 주억였다.

“물론이지. 이번에야말로 놈을 확실히 잡아 죽이겠어.”

제법 과격한 소녀의 말에 같은 동선에 선 서문지언의 두 눈에 잠시 경악이 스쳐지나간다. 하지만 그 감정은 빠르게 추슬러졌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마냥 편한 것은 또 아니었지만 말이다.

‘정말 적응이 안 되는 조합이로군.’

북진하는 남천맹의 군세에 황준우가 뒤늦게 합류했을 때, 처음 황서연을 본 서문지언은 어이없는 헛웃음을 흘려야만 했다.

아무리 같은 핏줄이라지만 어린 동생마저 상식을 벗어나는 무위를 이룩했을 줄은 정말 몰랐다. 게다가 그 기개가 어지간한 사내 못지않으니 향후 여중제일고수 아니, 또 다른 시대를 이끌어갈 새로운 무림지존 중 하나가 되리라는 사실이 명백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헛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는데, 중간에 갑작스럽게 군영에 난입한 기척을 쫓아 만나게 된, 황서연보다 두 배는 어린 소녀는 더욱 놀라웠다.

내공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변의 자연지기가 자연스럽게 따르는 것 같은 어린 소녀는 그의 손속을 두 번이나 피하고는 날카롭게 노려보며 황준우를 만나러 왔다고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황하는 사이 황준우가 도착했고, 두 사람이 인연이 있다는 것을 깨달아 더 이상 다툴 일은 없었지만 아직도 그때의 일이 믿기지 않는 서문지언이었다.

‘신아라고 하였던가? 저 어린 소녀가 내 무공을 두 번이나 피했다는 말이지.’

대체 무슨 기이한 능력을 사용하는지는 몰라도 머릿속에 은근슬쩍 은퇴를 떠올릴 만큼 충격적인 일이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었다.

“안 되는데. 나도 대마술사 녀석한테 빚진 게 하나 있어서 말이지.”

“대표두 놈 이야기라면 살았다고 하지 않았느냐?”

“너도 죽진 않았잖아.”

“시끄럽다!”

“도련님!”

두 사람이 떠드는 사이, 정면만 바라보고 있던 경호가 외쳤다. 멀지않은 곳에서 조금씩 진군해오는 천마신교의 군세가 두 눈에 보이기 시작한다.

초고속으로 움직이는 삼십 인의 최정예 입장에서는 호흡 몇 번이면 닿을 거리.

웃음을 보이며 나누던 잡담을 멈춘 황준우가 긴장한 표정으로 뒤를 따르는 황서연을 바라보았다.

“네가 스스로 무인이라 하였으니, 직접 겪어 봐. 전장이란 곳이 어떤 것인지…….”

다소 차가운 말에 매영검을 뽑아든 황서연이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난 네가 이런 전장을 평생 몰랐으면 했다.’

나오려는 뒷말을 억지로 삼킨 황준우도 더 이상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다소 위험할 수도 있겠지만, 이런 전장에서 제 한 몸 건사해야 하는 것도 무인으로서 당연히 해야 할 일이다.

언제까지고 곁에서 지켜 주기만 해서는 온실 속 화초로 끝날 뿐이다.

‘네가 진짜 무인이 되고 싶다면, 이겨내고, 강해져라.’

그녀는 스스로를 무인이라 하였지만 황준우의 기준에서는 아직 멀었다.

이제 막 세상맛을 알게 된 애송이에 불과하다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무인이 되겠다는 동생을 말릴 순 없으니, 이제 그가 오빠로서 해줄 수 있는 일은 하나였다.

믿고 응원하는 것.

‘잘 해내야 한다. 내 동생.’

어느새 눈앞으로 다가온 천마신교 마인의 목을 일검에 베어버린 황준우가 소리쳤다.

“가자! 남천맹의 용사들아! 오늘 이 자리에서 우리가 무림의 정의를 세우는 것이다!”

“우와아아-!”

용사라 불린 삼십 무인의 고함은, 삼십만의 함성과 같이 크게 전장을 뒤흔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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