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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12화 (212/373)

학사재생 212화

제 212화

자신만만한 황준우의 음성에, 그를 곁눈질로 흘긴 신아가 작은 목소리를 흘린다.

“당한 줄 알고 걱정했지 않느냐.”

“조금 난감하긴 했지만 당할 리가 없잖아. 나 황준우라고. 무신 몰라? 흐흐.”

“입이 멀쩡한 걸 보니 쓸데없는 걱정이었구나.”

당장이야 웃으면서 말하고 있었지만, 사실 신아 역시 먼 거리에서 쩌렁쩌렁 울리는 황준우의 비명소리에 걱정을 했던 차였다. 한데 이렇게 멀쩡히, 완전히 동탁을 제압한 상태로 나타나니 절로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온다.

“네놈들……. 감히, 마왕을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인 게냐?”

“못할 것도 없지.”

피식 웃은 황준우가 성큼 한 걸음을 내디뎠다.

단숨에 좁혀진 거리에 미간을 찌푸린 동탁이 어깨를 당당히 폈다.

“그 검으로 나를 벤다 한들 네놈은 결국 나를 죽이지 못한다. 설령 육체의 삶이 끝을 맺어도 내 혼은 결코 네놈을 잊지 않을 터이니…… 어디 한 번 뜻대로 해보아라.”

이미 퇴로는 막혔다.

무엇보다 그의 근원이라 할 수 있는 팔각마서를 가진 장량이 붙잡혔다.

때문에 동탁은 이번 기회를 포기했다.

하나 기회가 있다면 언제든 또다시 틈을 파헤쳐 인세(人世)로 돌아올 자신이 있었다.

죽은 자가 유계(幽界)와 인계 사이의 벽을 넘나드는데 가장 어려운 때는 처음이다. 두 번째부터는 인계에 남긴 흔적을 통하여 작은 간섭을 행할 수 있기에 강림이 훨씬 더 쉬워진다.

마왕에게 있어 죽음이란 영원한 끝을 의미하지 않는다.

또 다른 시작일 뿐이다.

“이거 한 번에 죽지 않는다고 제법 막말하네.”

당당한 동탁을 보며 조소를 흘린 황준우가 신아를 바라보았다.

“어차피 육체는 중요하지 않다는 건 들었고, 어때? 지금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이미 제압된 마왕이라면 큰 어려움이 없다.”

비슷한 웃음을 지은 신아가 품에서 제법 커다란 백옥(白玉)을 꺼내 든다.

그를 확인한 동탁의 두 눈이 크게 떨렸다.

“서, 설마…….”

“우리 곤륜은 오래 전부터 마왕과의 싸움을 염두에 두었다. 네놈들의 혼이 유계로 되돌아가 벌일 수 있는 끔찍한 일들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지.”

작게 중얼거리는 신아의 손에 잡힌 백옥으로부터 하얀빛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그를 확인한 동탁이 조금씩 뒷걸음질 치기 시작한다.

“아, 안 된다. 그건……!”

“마왕 동탁의 혼은 유계로 돌아가지 못한다. 영원히, 삼라만상의 흐름이 끝을 맺을 때까지 봉인의 백옥에 갇혀 억겁의 괴로움에 빠지거나, 선계에 도달하여 완벽한 소멸을 맞이하겠지.”

“이이…… 미친 것들이! 감히, 감히 이 동탁을! 마왕을……!”

“그만 안식을 취하여라. 마왕이여.”

신아가 들고 있던 백옥을 허공으로 던지며 뒤로 물러섰다.

“으아아악-!”

강렬한 빛이 사방을 뒤덮고, 동탁이 괴성을 내지르며 몸을 마구잡이로 흔들었다. 어떻게든 백옥이 흘리는 빛의 영역에서 벗어나려 하였으나 그의 온몸을 뒤덮은 빛의 그물을 빠져나갈 수는 없었다.

“아아악……!”

조금씩, 옅어지는 음성과 함께 동탁의 육신이 흩어져 백옥으로 빨려 들어가기 시작한다.

스스슥-!

차 한 잔 마실 짧은 시간이 흐르고 마왕의 혼을 완전히 흡수한 봉인옥(封印玉)이 신아의 손으로 되돌아왔다.

“흑옥(黑玉)이 됐네?”

처음 보았을 때와 달리 상이한 검은빛으로 뒤덮은 봉인옥을 본 황준우가 물었다.

“마왕의 마기를 온전히 봉인하였으니, 제 형상을 유지하는 것은 불가능할 수밖에 없지.”

“그렇군.”

가볍게 고개를 주억인 황준우의 다음 시선은 허망한 표정의 장량을 향했다.

“네놈이지? 대표두를 죽이려 한 게?”

“…….”

장량은 아무런 음성을 흘리지 않았다.

그저 짙은 검은 눈에는 안타까움을, 입가로는 조소를 머금은 채 황준우를 직시할 뿐이다.

“대답하지 않아도 알아. 네놈밖에 없거든.”

수왕검이 높게 들어 올려졌다.

하나 곧장 검이 떨어지지는 않았다.

“이놈…… 죽이면 또 도망가는 것 아니야?”

마술사들의 육체전이술은 까다롭다.

이미 두 번이나 같은 수에 당한 황준우가 혹시 하는 표정으로 신아를 바라보았다.

“놈은 마술사 중에서도 특출 난 편이다. 아마 미리 준비해둔 육체가 하나 더 있다고 해두어도 이상하지 않겠지.”

“곤란하네.”

“걱정할 필요 없다. 내가 마지막으로 남기려 하였던 육체는 이미 네놈들이 봉인하지 않았더냐?”

대답을 한 것은 장량이었다.

“네놈의 검이 이 목을 벤다면, 나 장량의 생이 여기서 끝난다는 말이다.”

“갑자기 뭐야.”

황준우의 눈에 의심이 깃들었다.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는 장량의 말을 쉽게 믿을 수 없는 탓이다.

“후후…… 이미 뜻한바 무엇도 이루지 못하고, 잃기만 하였거늘 더 살아서 무엇하겠는가. 다만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역시 그녀를 잃은 것이다.”

“그녀?”

“큭큭, 내가 아니더라도 곧 하늘 아래 땅은 검게 뒤덮일 것이다. 한 치 앞밖에 보지 못하는 신선들과 인간이여, 이 세계는…….”

말을 채 끝맺기도 전 수왕검이 장량의 목을 갈랐다.

허망하게 그의 얼굴이 지면으로 떨어지고, 어떠한 기운의 변화도 없음을 확인한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진짜 죽었네.”

“유언 같던데, 끝까지 들어주지 그랬느냐.”

“그러다가 괜한 저주 같은 것을 남기면 어쩌려고.”

“호오…… 마술에 대해 제법 알고 있는 것 같구나?”

실제로 경지에 오른 몇몇 마술사들은 죽음 직전 자신의 혼을 불태워 저주를 흩뿌린다.

물론 황준우는 그런 사실을 몰랐다.

“그냥 느낌이 좋지 않았어.”

“음…….”

“어쨌든, 저주를 사용할 수 있다는 걸 알면서도 유언을 끝까지 들어주란 건 뭐야.”

“아무것도 아니다.”

신아가 흑옥을 품에 감추며 고개를 돌렸다.

“삐진 것 같은데.”

“……이번에는 내 몫이라고 하지 않았느냐.”

은근슬쩍 입술을 삐죽이며 불만을 토한 신아의 말에 황준우가 헛웃음을 흘렸다.

“너 얘한테 쌓인 게 많았구나?”

“아무렴, 그놈 때문에 본산에도 돌아가지 못하고 얼마나 지상을 떠돌았거늘…….”

“곤륜에서는 산 아래를 다 지상이라 하는 거냐?”

“크흠, 알 것 없다.”

헛기침을 한 신아가 총총걸음을 옮기다 말고 황준우를 돌아본다.

“한데, 빨리 가보지 않아도 되겠느냐? 아직 저쪽에서는 싸움이 한창인 것 같다만.”

“그렇지. 마무리해야지.”

고개를 주억인 황준우가 천천히 허공으로 떠오른다.

허공을 날아 곧장 전장의 중앙으로 떨어지려 함이다.

신아는 그런 황준우를 따르지 않았다.

“본녀는 곧바로 곤륜으로 돌아갈 생각이다.”

“볼일 다 봤다 이거지?”

“틀린 말이라고는 못 하겠구나. 지상에 강림한 마왕도 봉인했고, 마술사 녀석들도 처단했다. 크게 신경 쓰였던 일들을 모두 끝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렇다고 정 없이 바로 가냐.”

“……미안하다. 하나 일이 많았던 만큼 전해야 할 이야기도 많은 내 사정을 이해해다오.”

“음…… 또 그렇게까지 말할 건 아닌데. 어쨌든, 반가웠어. 이번에도 이 녀석 덕 돈독히 봤으니까. 섭섭한 건 없던 걸로 하자.”

황준우가 품에 숨긴 늠군의 관을 두드리며 말하자, 웃음을 보인 신아가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리해준다면 정말 고맙겠구나!”

“은근히 귀엽기는.”

“뭐, 뭐라고 했느냐!?”

“아니, 됐다. 그만 가 봐. 나도 간다.”

“아, 저기……!”

신아가 말을 끝맺기도 전 황준우의 신형이 허공을 날아 멀어졌다.

그 뒷모습을 조금은 멍하니 바라보던 신아가 얼굴을 붉히며 크게 소리쳤다.

“고맙다는 말 정도는 듣고 가야 할 것 아니냐! 이 건방진 인간 놈아!”

목소리는 먼 거리까지 닿을 만큼 우렁찼다.

신아의 마지막 인사를 듣고는, 미소를 지은 황준우의 신형은 단숨에 전장에 도달했다. 죽지 않는 천마신교의 군세를 상대로도 기세를 일으키며 밀리지 않던 남천맹, 무림맹, 군부의 연합군은 이제 보란 듯이 적들을 베어 넘기고 있었다.

마왕의 봉인 이후, 절반 이상 무너진 천마신교의 군세는 더 이상 그들의 적수가 되지 못했다.

“이거 뭐, 내가 손 쓸 것도 없겠는데?”

이미 승세가 완전히 기울은 전장이다.

괜히 많은 힘을 쓸 필요가 없었다.

결국 황준우는 첫 계획과 달리, 목숨이 위험해 보이는 무인 몇몇을 도와주거나, 손을 잡고 일으켜 준 후 웃음을 보였다.

“거의 다 이겼으니까, 조금 더 힘내라고.”

누군가의 어깨를 다독여주고.

“죽지 마. 고향에서 기다리고 있을 누군가를 생각하라고.”

위로의 말을 건네며 남천맹 본진으로 되돌아온다.

제법 지친 안색을 한 전왕이 그런 황준우를 확인하고는 깜짝 놀라 소리쳤다.

“주공!”

“여어. 아직 살아 있었구먼.”

“저야 직접 전장에까지는 안 나서지 않습니까.”

“주공은 죽을 둥 살 둥 싸우고 왔는데 말이지.”

“걱정돼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진심 가득한 전왕의 말에, 가볍게 어깨를 두들겨 준 황준우가 웃음을 보였다.

“이미 다른 사람한테도 한 번 말했는데, 걱정 마. 조금 고생한다 한들 무슨 일이나 있겠어. 나 무신이야. 무신 황준우.”

“그렇지요. 주공은 무신이시지요.”

안도의 미소를 지은 전왕은, 문득 생각났다는 듯 빠르게 전장을 둘러보고는 외쳤다.

“맞습니다. 무신!”

“주공, 어서 큰 것 하나 보여주십시오!”

“……뭐?”

“최대한 화려하고 압도적이어야 합니다.”

“그러니까 무슨 말이야?”

“주공이 전장 뒤에서 어떤 싸움을 했는지 아무도 모르지 않습니까!?”

“너 설마…….”

“설마가 아닙니다. 남측의 무신이 아닌, 무림의 무신으로서 확실히 인정받기 위해서는 해야만 될 일이라고요.”

“아니, 굳이 이긴 전장에 내가…….”

“무신이 남천맹에 있다는 것만으로 우리가 무림맹에 비해 유리해지는 고점이 얼마나 많은 줄 아십니까? 그만 투덜거리시고, 시간이 없습니다.”

전왕의 강경한 말에 눈을 날카롭게 뜬 황준우가 고개를 주억였다.

“알겠어, 알겠다고. 그렇다고 투덜거린다고까지 할 건 뭐냐.”

“힘내십시오, 주공.”

“예전에는 심장이 약해서 문제더니 이제는 아주 간이 부었어.”

“주공을 위해서라면 심장이 터져도 상관없습니다.”

“낯부끄러운 녀석.”

한숨을 내쉰 황준우가 다시금 허공으로 떠올랐다.

“어찌 됐든, 큰 거 한방이라는 거지.”

전왕의 말마따나 투덜거리기는 했지만, 필요한 일이고, 시작한 일이라면 제대로 보여주는 것이 좋다.

“굳이 죽음으로 보일 필요는 없겠지.”

제정신을 찾고 달아나기 시작하는 천마신교의 군대 가장 후미를 바라본 황준우의 몸에서 두터운 기운이 물줄기가 역행하듯 허공으로 치솟았다.

이후 그 기운은 하늘 어딘가에 자리 잡은 거대한 검의 형상이 된다. 마치 작은 산과 같은 규모에 전장에 자리 잡은 모두의 시선이 움직였다.

“저, 저게 뭐야!?”

“검!?”

경악하는 이들의 음성에 제법 흡족한 시선으로 자신이 만든 거대한 기의 검을 바라본 황준우가 웃음을 보인 후 몸을 날려, 거대한 검의 손잡이를 쥐었다.

‘어차피 기운을 움직이는 것이니 이런 짓은 안 해도 상관없지만…….’

보여주기용이라 하지 않았는가?

하니 검을 움켜쥐고, 크게 내려친다.

쿠아아-!

대기를 가르는 소리가 무겁게 울렸다.

지면 위, 천벌과 같이 떨어지는 검을 바라보는 이들의 몸이 모두 굳었음에야 말할 것도 없었다.

폭음이 일었고, 퇴로에 속하던 지면에 검의 흉터로 거대한 협곡을 만들어버린 황준우가 가장 후미로 내려서 수왕검을 겨누었다.

“지나갈 자신 있는 놈만 나서고, 그럴 생각 없으면 무기 버려.”

타다다당-!

전장 곳곳에서 병장기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길었던 전쟁이 끝을 맺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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