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14화
제 214화
삼 일 전 첫 방문 때는 제법 정신없이 바쁘던 차라 소식만 전해 들었는데, 이렇게 마주하니 제법 반가운 기분을 느낀 황준우가 얼떨떨해하는 초호서의 어깨를 가볍게 두들겼다.
“놀라긴, 자식이. 간이 그렇게 작아서야 사내놈이 어따 쓰겠냐?”
“혀, 형님!?”
“…….”
“형님!”
황준우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대충 그런 마음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형님이라는 말이 좋게만 들리지는 않는다.
“누가 네 형님이야?”
자연스레 반가웠던 기색은 사라지고 목소리에 바늘 같은 날카로움이 어렸다.
“형니임!”
“그만해, 이 자식아!”
지치지도 않고 들러붙는 초호서에게서 거리를 벌린 황준우가 어이없는 표정으로 혀를 찬다.
“어떻게 너는 변한 게 없는 것 같다.”
전장에서 보았을 때는 그래도 제법 장군다운 기세가 어려 있어 많이 성장했구나 싶었는데, 막상 바깥에서 마주하니 당시의 기세는 어디에다가 팔아먹었는지 조금도 보이지 않는다.
솔직히 같은 사람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사람이 갑자기 변하면 죽을 때가 다 된 거라고 들었습니다.”
“갑자기는 아닌 것 같은데, 우리가 처음 봤을 때가 보자…….”
황준우가 고민에 빠져 고개를 갸웃거릴 때였다.
“정확하게 4년 됐습니다.”
“너 기억력 좋구나.”
“어찌 그날을 잊을 수 있겠습니까. 첫사랑을 찾았고, 마지막 사랑을 잃었습니다. 지금 생각해도 바보 같던 당시의 제가 너무나 밉군요.”
“추억 회상하지 말고, 4년이나 됐으면 갑작스럽게 변할 건 없네.”
“지난 4년간 변한 것 없이 살았으니 지금 바뀌면 큰일인 겁니다.”
황준우의 눈이 가늘어졌다.
“말도 제법 잘하네.”
“제 직책이 도독첨사 아닙니까. 옆에서 첨언을 하려면 이 혀도 제법 잘 굴려야 합니다.”
“난 말 잘하는 놈들이 싫어. 보통 그런 녀석들이 여자 울리거든.”
“제 혀를 자르겠습니다.”
초호서가 당장 제 혀를 빼내는 시늉을 했다.
그리고 짧은 침묵이 흘렀다.
“뭐해, 안 자르고? 혹시 알아? 자르면 내가 감동이라도 할지?”
“……잔인하십니다.”
다시금 혀를 쏙 집어넣은 초호서가 억울한 표정으로 말한다.
“잔인은 무슨. 네가 자른다고 했지, 내가 자르라고 했냐.”
짧은 웃음을 보인 황준우가 검지로 초호서의 한 손에 들린 꽃다발을 가리켰다.
“근데 그거, 진짜 서연이 가져다주려는 거야?”
“아, 예! 마지막 사랑을 잃고 큰 슬픔에 빠져 있던 저에게, 그날의 만남은 그야말로 운명과 같았습니다. 잃어버렸던 사랑을 다시 되찾은 기분을 혹시 아십니까?”
“아쉽게도 사랑에는 큰 관심이 없어서.”
“예? 제가 듣기로는 형님께서도 사랑하는 분이 계신다고…….”
“응? 누가 그래?”
“몇몇 시녀분들이 속닥이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자세히는 못 들었지만, 굉장히 이루기 힘든 사랑을 하시고 있다고…….”
황준우의 턱이 조금씩 벌어졌다.
‘설마 만금장에서 떠돌던 소문이 여기까지 닿은 거야?’
이루기 힘든 사랑.
의심 가는 바가 곧장 떠오른 탓이었다.
아닐 거라고 믿고 싶지만, 황준우를 돕겠다며 남천맹으로 자진해서 쫓아온 만금장 시녀 몇몇이 있다고 들었다.
‘그녀들이 범인이구나.’
아찔해지는 생각에 머리를 부여잡은 황준우의 신형이 휘청였다.
쉽게만 보고 있었는데 어찌 점점 사태가 커지는 기분이다.
“얼마나 사랑이 깊고 고달프시기에 머리가 어지러우실까. 오호통재로다. 형님 정도 되는 분이 그런 힘든 고민을 하실 정도라면 상대가 굉장한 분이시겠지요? 호, 혹시…… 왕녀 마마나 황녀 마마십니까? 하긴 그쯤 된다면…….”
“시끄러.”
아찔해지는 정신을 간신히 부여잡은 황준우가 손을 내저었다.
“시끄럽고, 어쨌든 난 허락 못 한다.”
“어째서!?”
“너 같으면 서연이처럼 예쁜 여동생 시집 보내고 싶겠냐?”
“어떤 놈팡이 같은 놈이! 죽여 버릴 겁니다!”
“그게 내 심정이야.”
“…….”
초호서가 할 말을 잃고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런 초호서의 곁으로 다가간 황준우가, 귓가에 조심스럽게 나지막한 음성을 흘린다.
“너, 나 누군지 알지?”
“형님…….”
“죽는다?”
“형님…….”
“나 무신이야. 무신 황준우. 죽음이 두렵지 않아?”
“설령 죽음이 우리를 갈라놓는다 한들 한 번 형님은 영원한 형님이십니다.”
기가 죽은 와중에도 할 말은 다 하는 초호서다.
“이미 한 번 갈라졌던 마음, 이제 다시는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제가 이곳에 도착할 때까지, 그리고 도착한 이후로까지 고민하여 얻은 결론입니다. 더 이상 제 사랑은 그 무엇으로도 막을 수 없습니다.”
초호서가 의지로 활활 타오르는 눈동자로 황준우와 마주한다. 그를 조금은 홀린 듯 바라보던 황준우가 결국 웃음을 흘렸다.
“정말 용기 하나는 가상하구나. 좋아, 한번 멋대로 해보렴.”
“저, 정말이십니까?”
“물론이지.”
황준우가 밝은 웃음을 보이며 초호서의 어깨를 잡는다.
“형님, 드디어 제 마음을 알아주셨군요!”
“글쎄다…….”
여전히 미소를 입가 가득 머금은 황준우가 초호서의 어깨를 잡은 손을 번쩍 든다.
너무나 자연스럽고 허망하게, 이끌리듯 허공으로 떠오른 초호서의 눈동자에는 의문이 깃들었다.
“형님?”
“고민한 시간이 짧은 것 같아서, 조금 더 생각해보고 오라고.”
“……!!”
“나중에 또 보자.”
직후 초호서를 장원 멀리까지 단숨에 던져버린 황준우가 손을 털었다.
“우아아악-!”
하늘 높이 비명이 울려 퍼졌지만 걱정은 되지 않았다.
다칠 정도로 던지지도 않았고 아니, 사실 어디 한군데쯤은 부러질 수도 있지만 초호서의 무공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쯤은 감수해도 될 터였다.
“사랑은 무슨. 감히 누굴 넘보려고.”
콧방귀를 뀐 황준우가 등을 돌렸다.
남천맹의 성장세는 가히 고금을 통틀어 비교할 대상을 찾기 힘들 정도다.
그에 대응하듯, 무림맹 역시 고금을 통틀어 최악의 상황에 처해 있었다.
운백은 그런 무림맹을 바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기본적으로 뿌리부터가 잘못되었다.’
예로부터 고인 물은 썩는다고 하였던가?
칠야의 난을 제외하고는 큰 분란이 없던 지난 무림사에 있어 무림맹의 권력자들은 대다수가 바뀐 것이 없었다.
매일 보던 얼굴이, 매일 같은 일을 수십 년째 이어가고 있는 것이다. 아무런 일을 하지 않아도 권력이 집중되고, 아래에서는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내지 못한다.
이 상태라면 향후 수십 년이 지나도 결코 무림맹은 남천맹을 넘어서지 못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무림맹이라는 이름이 긴 강호 역사에서 완전히 자취를 감출지도 모른다.
따지자면 그것은 무림 전체에 있어 커다란 손해이기도 했다.
남천맹은 그 이름처럼, 또한 여건상 강남에 기반을 두고 있다.
따지자면 남무림(南武林)의 패주라고 볼 수 있었다.
반면 무림맹은 오래도록 강북에 뿌리를 내려왔다.
북무림(北武林)의 패주 역할을 맡고 있는 것이다.
그런 두 패주 중 하나가 상대에 비해 완벽하게 뒤처진다.
아마 그 대상, 그러니까 힘을 잃을 쪽은 무림맹이 될 터였다.
이후의 미래는 불 보듯 뻔했다. 북무림의 무인들은 남무림의 무인에게 어깨를 펴지 못하고, 강호의 평가에서도 크게 밀려날 터였다.
자연스럽게 북부림의 무인들 가슴속에는 자신감이란 것이 사라지고, 자격지심이 자리 잡게 된다. 모두가 그러란 법은 없지만 주변의 분위기가 그러하다면 대다수의 인간이란 그에 휩쓸릴 수밖에 없다.
스스로의 마음을 다스리는 것 역시 무공의 올바른 역할이란 점에서 그런 분위기는 북무림을 전체적으로 죽일 수도 있는 칼이 되는 것이다.
자연스레 무림의 균형이 어긋난다.
어쩌면 북무림 전체가 사마외도의 길에 들어서게 될지도 모를 터였다.
‘나 역시 잘한 것은 없지만, 그래도 미래의 씨앗은 남겨두어야 하지 않겠는가? 역시 그러려면 이 썩은 물을 모두 퍼내어야만 해.’
운백은 본인 역시 고인, 썩은 물이라고 생각했다.
그 또한 무림맹주의 자리에 앉아 제법 많은 권력을 휘둘렀다. 친척, 인척, 가까운 사람, 중심을 잡고자 하였지만 한 번 부탁이라는 말에 휩쓸리고 난 뒤로는 걷잡을 수 없이 쓸려 다녀야만 했다.
무림대전이 일어나기 직전에는, 그로 인해 큰 위기까지 겪었다.
당시에는 가슴이 섬뜩할 정도로 두려웠지만 지금은 달랐다.
한 번의 전쟁 속에서 운백은 많은 것을 깨달았다.
깨달았다면, 시행해야 한다.
그는 얼마 남지 않은 자신의 마지막 삶을 부끄럽게 보내고 싶지 않았다.
“많이 시끄러워질 겁니다. 아미타불.”
늦은 밤, 갑작스러운 기별로 맹주전까지 불려와 맞은편에 앉은 지명사태가 걱정 어린 표정으로 말했다.
현재의 무림맹은 조용하다.
하나 그것은 겉모습일 뿐, 속내로는 격동의 준비로 바쁘게 몰아치고 있다.
마치 폭풍전야(暴風前夜)와 같다.
“하나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오.”
운백이 고개를 끄덕이며 눈앞에 놓인 서책을 바라보았다.
서책에는 아무런 제목이 적혀 있지 않았다.
내용 역시 별것 없었다.
다만 사람의 이름이 있을 뿐이다.
그중 대다수는 현재 무림맹의 중심이라 할 수 있는 권력자들이다.
책장을 펼쳐 그 이름을 바라보는 운백의 눈에 음산한 살기가 스쳐 지나갔다.
“정말 이들을 모두 쳐내실 겁니까?”
“이미 뿌리기둥까지 썩어버렸소. 다소 휘청인다 한들 억지로라도 잘라내지 않는다면 무림맹이라는 거대한 나무 자체가 죽어버릴게요.”
“하지만 뿌리 없는 나무도 결국 죽기 마련입니다.”
“빠르게 새 뿌리를 기르면 됩니다. 나는 이미 그 준비를 모두 마쳐두었소.”
운백의 눈에는 다소 슬픈, 하나 확실한 자신감이 엇비쳤다.
“아미타불. 아미타불.”
“무조건 살생을 벌이겠다는 뜻만은 아니오. 충분히 결정할 수 있는 여유를 줄 것이고, 그에 반한다면…….”
“어쩔 수 없다는 뜻 아니십니까. 아미타불.”
운백이 무겁게 고개를 주억인다.
“도와주시오, 지명사태. 이 일은 나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요.”
“허어…….”
철혈의 권후, 여중제일고수로 이름 높은 지명사태의 눈이 크게 떨렸다. 염주를 굴리는 손길에서는 마음의 흔들림이 느껴진다.
“아미타불…… 맹주께서는 대체 무엇을 남기고자 이런 일까지 하시려는 겁니까.”
“난…… 이 일을 끝내고는 화산으로 돌아갈 생각이오. 불타버린 내 고향 역시 되돌려 놔야 하지 않겠소?”
“아미타불, 그 말씀은…….”
“난, 미래를 남기고 싶소. 이 얼마 남지 않은 짧은 삶을 모두 희생하더라도 그리해야 된다고만 생각하오. 그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유일한 속죄이자, 후회뿐인 삶에 마지막으로 남길 수 있는 본인의 의미요.”
운백의 마지막 말이 끝나는 순간, 하늘에서부터 거대한 천둥소리가 울려 퍼지며 번개가 번쩍였다.
잠시 고개를 돌려, 맹주전 바깥에 번쩍이는 불빛을 바라보았던 지명사태의 눈이 감겼다가 떨어진다. 입가에서는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내 오랜 시간 맹주를 지켜봤습니다. 그 의지가 이리 깊으면 말려도 소용없겠지요. 또한 그 의미가 결코 사이하지 않으니…… 이 보잘것없는 힘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리하겠습니다.”
“오오!”
감격한 표정의 운백이 주먹을 움켜쥐며 탄성을 흘리는 순간이었다.
또 한 번 천둥소리가 들려오고 불빛이 번쩍였다.
쏴아아-!
곧이어 귀를 강렬하게 두드리는 장대비가 쏟아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