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재생 215화
제 215화
“아미타불, 비가 오는군요.”
고개를 돌려 문 너머 바깥 정경을 바라보던 지명사태의 눈이 화등잔만 하게 커졌다. 비가 쏟아지는 문밖으로 검은 인영이 마치 유령처럼 서 있다. 놀라운 것은 여중제일고수로 이름 높은 지명사태 본인이나, 한때 우내십존으로 이름 높았던 운백 모두 그 기척을 전혀 느끼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 앞, 지척에 다가올 때까지 말이다.
인영은 곧바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두 사람이 자신을 눈치챘음을 깨달았을 터인데 말없이 문 앞에 서 있을 뿐이다.
운백과 지명사태가 시선을 주고받았다.
이후 미간을 찌푸린 운백이 조심스럽게 입술을 달싹였다.
“혹여…… 무영인 게냐?”
지명사태가 또 한 번 놀랐다.
“진무영 말씀이십니까? 그 검선께서 길렀다는…….”
혀끝까지 튀어나올 뻔했던 ‘괴물’이라는 뒷말은 삼켰다.
만약 본인이라면 결코 듣기 좋지 않은 이야기일 터니 말이다.
“맞습니다. 맹주님. 저 무영입니다.”
문 바깥에서부터 기다렸다는 듯 음성이 돌아왔다.
드르륵-!
그때서야 방문이 열렸다.
동시에 두 사람은 속으로 신음을 삼켜야만 했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중앙에 있으면서도, 옷자락 끝마저 조금도 젖어 있지 않다. 하늘에서 쏟아지는 비가 마치 진무영만을 거부하듯 몸에 부딪힌 순간 다시 허공으로 튀어 오른다.
자연의 섭리를 제 한 몸에나마 거부하고 있는 그 무공이 어찌나 고강할지는 굳이 겪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호의 이름 높은 최고 서열의 고수인 두 사람이라 한들 작금 진무영의 모습을 흉내조차 낼 수 없을 터니 말이다.
“빗물이 거세군요.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눈웃음을 짙게 지은 진무영은 운백이 고개를 주억이기도 전에 방 안으로 들어섰다.
“폐관에 들었다는 소식은 들었었네.”
운백이 눈을 가늘게 뜨며 한시도 옆에서 떨어트려 놓은 적 없는 검 손잡이를 더듬었다.
분위기가 기묘하다. 명확하게 말할 수 없는 무인의 직감이란 것이 그의 경계심을 마치 고슴도치의 가시처럼 한껏 날카롭게 세웠다.
“마치고 나온 지는 제법 되었습니다.”
“그래, 보아하니 원하는 바를 제법 이룬 것 같구먼그래. 축하하네.”
“목표까지는 아니더라도 근접에는 다가갈 수 있었지요.”
조금씩 다가오던 진무영의 걸음이 방의 중앙 직전에서 멈추었다.
‘한 걸음.’
운백의 마음이 조급해졌다.
단 한 걸음만큼의 거리가 더 있다면 운백의 검이 진무영에게 닿을 수 있다.
그 간절함은 곧 살의가 되어 방 안을 휘감는다.
자연스레 무거운 침묵이 장내를 감돌았다.
“뭘 그렇게 긴장하십니까.”
입가에 웃음을 머금은 진무영이 발걸음을 더 내딛기 시작했다.
‘벨 수 있다.’
더 가까워진다.
‘더 잘 벨 수 있다.’
세 걸음째.
이제는 지근거리다.
운백은 그 순간 저도 모르게 탄식을 터트렸다.
“아……!”
그의 눈앞, 정좌를 한 채 염주를 쥐고 있던 지명사태의 목이 비스듬히 기울어 바닥으로 떨어진다.
빗물 내음이 섞인 비릿한 혈향이 방 안을 가득 채웠다.
언제 죽었는지도 보지 못했다.
‘벨 수 있다고?’
참으로 자만 가득한 착각에 불과하다.
“내 검은…… 네게 닿지 못하는구나.”
“예. 하니 긴장을 하실 필요도 없으시지요.”
진한 웃음을 보인 진무영이 지명사태의 시신을 지나쳐 운백의 바로 앞에 섰다.
“개인적으로 맹주님을 싫어하지 않습니다.”
“자네가 싫어하는 사람이 있나?”
운백의 말에 진무영의 몸이 흠칫 떨렸다.
“자네는 그 누구도 싫어하지 않아. 반대로 말해 누구도 좋아하지 않지. 아니, 애초에…… 감정이란 것이 있는지조차 의문이군.”
“큭큭…….”
진무영에게서 차가운 웃음이 터져 나왔다.
운백의 단언은 제법 그럴싸했다.
하나 아쉬운 점도 많았다.
“과연 맹주님. 눈썰미가 좋으십니다. 하지만 변명을 하나 하자면, 저도 사람입니다. 감정이란 것이 없을 리가 없지 않습니까? 호감을 넘어서는…… 존경, 그리고 공경, 아름다움에 대한 찬사.”
마지막 말을 내뱉는 진무영의 눈빛은 꽤나 먼 곳을 바라보는 듯했다. 몽롱하고, 어딘지 모르게 깊게까지도 느껴진다. 그 섬뜩할 정도로 진한 감정의 여운에 운백 역시 헛웃음을 흘렸다.
“그것참…… 놀랍군. 제법 자네를 잘 안다고 생각했는데 말이야.”
“하아…… 원래 누구에게나 비밀 하나쯤은 있는 법 아닙니까.”
어딘지 모르게 달뜬 신음 섞인 한숨을 흘린 진무영이 운백의 눈을 직시했다.
떨림 없는 그 눈동자는 고요하다.
마치 그의 스승을 보는 듯도 했다.
“다시 말씀드려, 전 맹주님이 싫지 않습니다. 그래서 기회를 드리고 싶군요.”
“베게.”
운백이 단호하게 말했다.
“하시던 일을 계속하시면 될 뿐입니다. 다만 제가 필요할 때 몇 가지 부탁을 들어주시면 될 뿐이지요.”
“그 검으로 직접 베지 않는다면, 내 스스로 목숨을 끊지.”
진무영의 눈이 짙은 호선을 그렸다.
“과연, 그러실 줄 알았습니다.”
“네가 무엇을 원하는지는 모른다. 하나 장담하건대 결코 내 뜻이…….”
천둥 번개가 다시 한 번 내리치고, 번쩍였다.
비릿한 혈향이 가득한 방 안에 선 진무영은 혀끝으로 마른 입술을 축였다.
“드디어 밑그림을 다 그렸군요. 조금 아쉽긴 해도, 이 정도면 채색을 해보아도 나쁘지 않겠지요? 우후후후.”
누구도 듣지 않는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진무영의 두 눈에는 광기의 폭풍이 몰아쳤다.
“황제가 죽었다고?”
“예. 확실한 소식입니다.”
늦은 밤, 다급히 찾아온 사마정이 전한 소식에 황준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얼마나 된 것 같아?”
“정확하게는 모르겠지만 근래에 일어난 일은 아닙니다. 아마 무림대전 전후가 아닐까…… 죄송합니다. 자금성 내의 정보는 아직 접근하기가 힘듭니다.”
“아니, 괜찮아. 자그마치 황제가 그때쯤 죽었어. 한데 아직까지도 바깥에 아무런 소식이 없단 말이야. 아마 그쪽에서도 최대한 정보를 차단하고 있겠지.”
무엇보다 자금성은 황제를 비롯한 황족과 왕족들이 기거하는 궁전이다. 마음만 먹는다면 천하 그 어떠한 곳보다 폐쇄적일 수 있는 공간이니 천조회라고 하여도 접근하기가 쉽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어째서지? 왜 황제가 죽었는데 조용한 걸까?”
황준우가 머리를 빠르게 굴렸다.
몇 가지 가정을 도출해보았지만 결국 정답이라 생각되는 경우는 단 하나뿐이었다.
“황제의 죽음에 모종의 음모가 끼어 있는 게 분명하네.”
“확실합니다.”
사마정 역시 같은 생각을 하였는지 고개를 크게 주억였다.
“그렇다면 다음 황제를 선출하는 문제로 속사정이 더 시끄러울 테고…… 연하, 주연하에 대한 소식은 좀 있어?”
첫 황제의 서거 소식을 접한 이후 가장 먼저 떠올렸던 이름을 내뱉은 황준우의 모습이 조심스럽다. 눈빛에는 감출 수 없는 걱정이 가득했다.
“따로 알아보았지만, 조용합니다. 겉으로는 아무런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그럴 리가 없겠지.”
자연스레 황준우의 생각이 얼마 전의 해적사건으로 이어졌다.
‘주산군도 인근은 영왕 전하가 다스리는 지역이야. 그곳에서 해군이 갑작스럽게 위축되었고…….’
어떻게 생각해 보아도 황제의 죽음과 연관이 있어 보였다.
“천조회 전체 아니, 남천맹의 모든 힘을 쏟아도 좋아. 가장 먼저 주연하의 상황에 대해 알아봐 줘. 그리고…… 가능하면 접선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 수 있으면 좋겠군.”
지금 상황에서 주연하 아니, 그 어떤 왕족과의 접촉도 위험하다. 자칫 잘못 꼬였다가는 삼족 아니, 구족이 멸해지는 처사에 처해질지 모른다. 하나 사마정은 아무런 반문을 표하지 않고 고개를 숙였다. 잘못 꼬이면 위험하지만, 결국 들키지만 않는다면 아무런 문제가 없다.
“최대한 은밀하게, 빠른 시일 내에 장소를 만들어보겠습니다.”
사마정의 차분한 목소리에, 잠시 그를 흔들리는 눈빛으로 바라보던 황준우가 고개를 돌렸다.
“그러면 물러나겠습니다.”
“어, 그리고…….”
고개를 돌린 황준우가 뒷말을 덧붙인다.
“고마워. 큰 힘이 되고 있어. 사마정.”
마지막 목소리는 작았다.
하나 분명히 사마정에게 전달되었다.
“당연한 일을 할 뿐입니다.”
늘 굳어 있기만 하던 사마정의 얼굴에 활짝 핀 미소가 어렸다.
천둥 번개가 내리치며 장대비가 쏟아지는 밤, 창문을 통해 자금성의 풍경을 바라보는 주연하의 눈빛은 마치 얼음처럼 차갑기만 하다. 단지 눈빛만이 아니었다.
그녀를 비롯하여 주변을 감싼 모든 것이 얼어붙어 있는 듯했다. 근처로 다가가기조차 힘든 그 냉막한 분위기에, 누구보다 그녀를 가까이서 지켜봐 왔던 소호의 표정 역시 점점 어두워졌다.
‘어떻게 하니. 우리 착한 황녀 마마, 우리 어여쁜 황녀 마마, 어찌하여 하늘은 우리 마마께 이런 시련을 내리신단 말입니까. 참으로 야박하세요. 너무 고약하십니다.’
기척도 없이 볼 위로 흐르는 눈물을 말없이 찍어낼 때였다.
그녀의 투덜거림이 내키지 않는다는 듯, 하늘이 꾸짖음 같은 일갈을 내뱉으며 바깥 풍경이 번쩍였다. 동시에 검은 옷을 입은 암습자들이 창문 앞으로 솟아올랐다. 놀란 소호가 비명을 내지르기도 전, 허리춤에 차고 있던 검을 뽑아 든 주연하의 몸이 춤을 추듯 움직였다.
주변에 혈화(血花)를 피어내는 검무(劍舞)에는 일말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그녀의 주변을 지키고 있던 호위무인들 역시 빠르게 모습을 드러내 암살자들과 격전을 이어갔다. 몇 번의 공방이 오가고, 혀를 찬 암살자들이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기 시작한다.
“생포.”
무겁게 닫혀 있던 주연하의 입이 열리고, 호위무사들이 달아나는 암살자들을 생포하기 위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대다수가 붙잡힌 순간 입안에 숨기고 있던 독단(毒丹)을 깨물어 자결을 택하였지만, 몇몇 솜씨 좋은 호위무인들의 손길이 날렵하게 움직여 입안에 틀어박힌 덕에 자결하지 못한 이들의 눈빛에는 옅은 공포가 떠올랐다.
황궁에서는 죽는 바가 차라리 사는 것보다 나은 경우가 많은 탓이다.
“복면을 모두 벗겨라.”
주연하의 호위무사들, 금화대(禁禍隊)의 대주 자곡의 명이 떨어졌다.
사로잡힌 암살자 다섯의 복면이 거칠게 벗겨지고 그들의 민얼굴 드러난다.
쏟아지는 빗물에 흠뻑 젖으면서도 느긋한 걸음으로 그들의 앞으로 다가온 주연하가 그들을 바라본다.
곧 이어진 금화대의 발길질에 무릎을 굽힌 암살자들이 이를 갈며 주연하를 올려다보았다.
“우, 우린 아무것도 대답하지 않을 것이다.”
공포 섞인 의지가 전해진다.
“반역자. 네년이 황제 폐하를 죽였음을 모를 줄 아느냐!”
절규와 같은 원망과 비난이 심장을 때린다.
“생에 미련은 없다. 죽여라! 이 마녀야!”
거친 음성이 마음을 뭉그러트린다.
하나 주연하의 눈빛은 흔들리지 않았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음이다.
단지 그들의 얼굴 하나, 하나, 눈빛과 감정을 모두 머릿속에 새겨 넣듯 바라본 그녀는 곧 고개를 돌렸다. 눈앞에는 공수를 취하며 고개를 깊게 숙이는 자곡이 있다.
“이들은 황족을 암살하려 하였으며 능욕하기까지 하였다.”
아니, 대역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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