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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16화 (216/373)

학사재생 216화

제 216화

본래라면 삼족멸문지화(三族滅門之禍)의 형에 처해져도 할 말이 없을 일이다.

하나 그녀를 모욕한 암살자들의 얼굴에는 그만한 두려움이 떠오르지 않았다.

현재 주연하의 상황에서 다른 누군가에게 그만한 형벌을 가하기가 힘들다는 사실을 잘 알기 때문이다.

“죽음이 나를 막을쏘냐!”

“하늘이 너를 용서치 않을 것이다!”

다소 조롱까지 느껴지는 그들의 음성과 시선을 묵묵히 받아들인 주연하가 고개를 주억였다.

“육시(戮屍)형에 처한 후 동창 제독에게 보내라.”

목소리를 높이던 암살자들의 몸이 짧게 떨렸다.

그들을 이곳까지 보낸 당사자를 주연하가 정확하게 짚어낸 탓이다. 애초부터 그녀는 암살자들에게 물을 것이 없었다. 이제는 황궁 안의 그 모든 잔인함이 훤히 보이거늘 굳이 캐물을 이유가 있겠는가? 단지 그녀의 적에게 보여주어야 할 뿐이다.

‘나는 무너지지 않는다.’

결코 적들이 원하는 만큼 아파하지 않을 것이며, 눈물 또한 보이지 않는다.

“듣고 있느냐?”

주연하의 물음에 걱정스러운 시선을 보내던 자곡이 고개를 주억였다.

“따르겠습니다.”

사실 달리 하고 싶은 말은 많았다.

너무 자극적이다.

언젠가의 밤 이후, 정치적으로, 그리고 실질적으로 완전히 궁지에 몰리게 된 작금 주연하의 입장에서 이와 같은 과격한 행보는 불리할 수도 있다고 생각했다. 하나 물 한 방울 스며들 것 같지 않을 만큼 단단하게 굳은 주연하의 표정이 그런 의견을 모두 틀어 막아버렸다.

“이미 물러날 곳이 없음이야.”

그런 자곡의 생각을 안다는 듯한 표정과, 묘한 말을 남긴 주연하가 등을 돌렸다.

“으아아-!”

“개 같은 년!”

등 뒤로 지독한 음성이 자욱하게 번져 나왔지만 더 이상 돌아보지 않았다.

그들의 얼굴, 표정, 원한 모든 것은 이미 뇌리에 깊게 각인되었다.

‘철혈(鐵血)을 원하면 철혈이 되리라. 내 그리해서라도…….’

차가운 시선으로, 비가 쏟아져 내리는 하늘을 바라보는 주연하의 볼 위로 물줄기가 타고 흐른다.

“황제가 되겠다.”

5. 흉수(兇手)

한 사내가 책 내음이 가득한 전각을 묵묵히 걷는다.

그 걸음은 다소 무겁게, 또는 애잔하게 전각 곳곳에 묻어난다.

‘어째서일까?’

사내의 뒤를 따르는 시녀는 자신이 어째서 그런 느낌을 받는지 영문을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따르고 있는 사내는 자금성 내 아니, 천하에서 가장 높은 자리에 오를 사람이다.

황태자 주고치.

평생을 탄탄대로나 다름없는 길에서, 흔들림 없이 지내온 그의 등에서 느껴지는 알 수 없는 외로움과 쓸쓸함의 연유는 무엇일까? 그녀로서는 몇 번을 생각하고, 평생을 고민해도 답을 찾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그렇게 말없이, 마치 천하에서 혼자만 남은 듯 외로이 걷던 주고치의 걸음이 어느 순간 멈추었다.

정면에는 기척도 없이 모습을 드러낸 장년인이 고개를 숙인다.

“황제 폐하를 뵙습니다.”

어딘지 모르게 간드러지는 목소리로 옅은 웃음을 흘린 그의 말에, 주고치의 미간이 옅게 패였다.

“아직 본인은 황제가 아닐세. 제독.”

“하나 황제가 되실 분이지요.”

“…….”

주고치는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당장이 아니라는 말을 제외한다면, 동창 제독, 모충기의 말이 틀린 바가 하나도 없는 탓이었다.

“요즘에 무루(武樓)와 문루(文樓)에 자주 들르신다고 들었습니다.”

“본래부터 서책을 좋아했네.”

“그러셨지요.”

동의하는 모충기의 말에 주고치의 미간이 더욱 깊게 패였다. 하나 찌푸려진 얼굴은 곧장 본래의 침착한 안색으로 되돌아온다.

‘제독을 탓할 일이 아니지.’

분명 주고치는 어린 시절부터 책을 가까이하고, 선조들의 가르침을 읊는 것을 좋아했었다. 때문에 누군가를 탓하기보다 감싸는 것을 좋아하였으며, 피를 멀리하였다. 죽은 황제는 그런 주고치의 유약함과 유순함을 좋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걱정도 많이 하고는 했다. 아마 본인이 그 누구보다 힘과 과감함, 또한 위엄으로 정치를 이어나갔기 때문일 터였다.

하나 지금의 주고치는 더 이상 책을 읽지 않는다.

특히 무루와 문루에 있는 책에는 손도 가져다 대지 않았다.

아마 모충기는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을 터였다.

문루와 무루에 있는 서책 모두가, 죽은 황제가 남긴 유산과 다름없는 문헌대성(文獻大成)이다. 그리고 주고치는 제 손으로 황제, 아버지를 죽였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노라고 스스로를 다독이지만 마음에 어린 탁기(濁氣)는 쉽게 가시지를 않는다.

잠자리에 들라고 하면 몇 번이고 꿈속에서 황제의 얼굴이 나타났다.

때로는 그를 엄하게 꾸짖었으며, 어떤 때는 어깨를 다독이며 괜찮다고 말하기도 했다.

‘모두 환상에 불과하다.’

다소 혼란스럽던 주고치의 눈빛이 변했다.

헛된 환상과 망상은 현재 자금성이 환난으로 어지럽기 때문에 발생하는 것이다.

비록 천륜을 어겼을지 모르나, 올바르게 자리를 잡고 천하를 바른길로 경영한다면 이 모든 것들이 사라지리라.

설령 사라지지 않는다 한들 속죄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라면 꼭 해야 될 일이 있었다.

“황제가 되고 싶네.”

다소 딱딱한 주고치의 음성에, 몸을 가볍게 떤 모충기가 고개를 숙였다.

“당연히 그리되실 겁니다.”

“되도록 빨리 권좌에 오르고 싶다는 뜻일세. 한데 한낮 천한 계집애 하나를 어찌하지 못하여 이리 떠돌고만 있구나.”

“폐하…….”

“거듭 말해, 본인은 지금 폐하가 아니다.”

“…….”

“제독.”

“예. 폐…… 전하.”

“아직도 대영반이 문제인가?”

황제를 제 손으로 죽였다.

이후 동창을 비롯한 많은 정치가들과 권력자들을 품으로 포섭했다. 주연하를 암살범으로 만들고 그녀와, 영왕 일족의 목을 효수하며 단숨에 황위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고만 생각했다.

한데 발 빠른 영왕의 대처와 더불어 예상외의 변수가 그들의 앞을 가로막았다.

금의위 대영반, 황궁제일고수 풍제.

중립을 지키는 것만 같던 그가 은연중에 주연하의 편을 들기 시작했다. 뿐만이 아니라 평소 그와 인연이 있던, 또는 영왕과 관련이 있는 군부의 인물들이 주연하를 지지하며 나섰다.

군부의 힘은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수준이 아니다.

하나 황제 암살이라는 거대한 명분 앞에서까지 그녀를 지켜줄 수는 없다.

결국 가장 큰 문제는 황궁 내에서 같이 움직이는 금의위였다. 황제가 죽은 지금 오롯이 대영반의 명령에만 움직이는 그들은 동창이 만들어내는 거짓 증거를 부정하거나, 파헤치고 있었다.

단숨에 황제의 위에 오르려던 주고치의 계획에 큰 차질이 생긴 셈이다.

“대영반을 치는 일에는 많은 준비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많이 기다리고 있지. 이런 때가 되니 그가 그립군. 다소 음흉하기는 해도 이런 일에는 적합이었는데…….”

주고치가 말하는 그를 떠올린 모충기가 재빨리 웃음을 보였다.

하나 그 속내는 완연히 달랐다.

‘그자는 위험하다. 더 이상 황궁의 일에 끼어들게 해서는 안 돼.’

사라졌던 황태자 주고치가 황궁으로 돌아온 날, 함께 궁으로 들어왔던 그 사내는 자신에 대해 무엇도 밝히지 않았다.

이름, 소속, 심지어 나이마저 알 수가 없다.

동창의 모든 정보력을 다해 그를 추적해 보아도 알아낼 수 있는 것이 전무하다.

그런 그를 주고치가 곁에 둔다는 사실 자체가 불안했다. 때문에 몇 번이고 이야기한 적이 있지만, 그때마다 주고치는 엄중한 모습으로 그를 감싸려고 하였다. 이후 모충기는 정체 모를 사내에 대한 감정을 최대한 숨기고 있었다.

괜한 불편함을 떠안고 싶지 않은 탓이었다.

그러던 차, 얼마 전 갑작스럽게 그 정체 모를 사내가 사라졌다.

되도록 감정은 숨기고자 하였지만, 신변을 알 수 없는 위험한 자를 가까이 두는 것이 신경 쓰여 지속적으로 뒷조사에 나서고 있던 그의 입장에서야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이었다.

때문에 모충기는 진심으로 그가 다시 궁으로 돌아오지 않기를 바랐다.

만약 돌아온다 한들, 그때쯤에는 그가 설 자리가 남아 있지 않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주고치의 입에서 지금과 같은 말이 나와선 안 된다.

“며칠만 더 말미를 주시지요. 은밀하게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있습니다. 오늘도 그를 말씀드리기 위해 찾아온 길입니다.”

“제독은 굳이 일이 없어도 찾아오지 않나.”

“후후…… 전하께 조금 잘 보여두어도 나쁠 것은 없지 않습니까.”

모충기는 이런 부분에 있어 자신의 속내를 크게 숨기지 않았고, 다행히 주고치는 그를 제법 잘 받아들였다.

“좋지. 하니 밉보이지 않도록 결과를 내오게. 내 제독을 믿고 기다리겠네.”

“걱정 마시지요.”

“이만 가보게. 혼자 있고 싶군.”

“예이~”

고개를 숙이며 뒷걸음질 치며 물러나는 모충기를 차갑게 바라보던 주고치의 걸음이 다시금 느긋이, 또한 쓸쓸히 이어졌다.

쿠릉-! 쏴아아-!

“비가 오는군.”

갑작스럽게 찾아온 천둥 번개와 함께 쏟아진 빗줄기가 바닥을 두들기는 소리에 눈을 감은 주고치의 입가로는 흐릿하게나마 조소(嘲笑)가 어렸다.

“나쁘지 않아.”

사마정으로부터 소식을 접한 이후 황준우는 곧장 북경을 향했다. 일의 중대사가 큰 만큼 홀로, 은밀하게 이어진 걸음이었다.

천조회는 지속적으로 주연하에 대한 소식을 알아보는 한편 은밀한 접촉을 시도했다.

다행히도 황준우가 북경에 도착한 지 며칠이 더 흘렀을 무렵에는 주연하의 직속 시녀와 접촉이 되었다는 소식을 받았다.

‘곁에 붙어 다니던 그 여우상 시녀인가?’

자연스레 소호의 얼굴이 먼저 떠올랐다.

아주 어린 시절부터 그녀의 곁을 지켰던 인물이니 믿을 수 있는 이라고 볼 수 있었다.

한데 또다시 며칠이 지나도 주연하와 만날 수가 없었다.

날씨가 뜨거워진다 싶더니, 장마가 시작된 것인지 벌써 며칠째 끊어질 생각 없이 이어지고 있는 빗줄기를 바라보는 황준우는 이름 없는 미명호를 옆에 낀 객점의 창가에 앉아 식탁을 검지로 두들긴다.

탁, 탁, 탁.

일정하게 이어지는 검지 가락에 맞춰 다소 부산스러운 빗줄기 소리가 섞이며 제법 소란스럽게 주변을 울린다. 손님 하나 없는 조용한 객점이기에 그 소리가 더욱 크게 들리는 듯도 했다.

객점의 식탁 어딘가에 다소 심술궂은 표정으로 앉아 있던 노파가 몸을 일으켰다.

“시끄럽다, 이 녀석아!”

“아, 실수.”

처음 보았을 때에 비하여 다소 늙은 노파의 얼굴을 향해 미소를 보인 황준우가 손을 들었다.

“에잉, 고얀 놈. 벌써 며칠째 와서 자리만 축내고 있는 겐지.”

“밥도 먹는데?”

황준우가 식탁을 치던 검지로 제 앞에 놓인 빈 그릇을 가리켰다.

“매일 와서 소면만 시키고 몇 시진을 죽치는 주제에 뻔뻔하기도 하구나.”

“그게 내 매력이야.”

히죽 웃은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금 창가를 향했다.

잠시 그 뒷모습을 괘씸하다는 듯 바라보던 노파가 다시금 말문을 열었다.

“연하를 기다리는 게냐?”

“건방진 놈. 네놈은 웃어른을 대하는 방법을 모르는 것 같구나.”

“모르진 않는데, 딱히 싫어하지 않는 것 같아서. 혹시 말을 높여드릴까요? 할머니라고 불러드릴 수도 있는데.”

창가에서 시선을 떼지도 않은 채 묻는 황준우의 말에 노파가 크게 콧방귀를 뀌었다.

“됐다. 이놈아. 이름도 모르는 놈이 할머니는 무슨!”

“황준우.”

나직한 황준우의 말에 쿵쿵거리는 걸음으로 제자리로 돌아가던 노파의 걸음이 갑작스럽게 멈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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