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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사재생-217화 (217/373)

학사재생 217화

제 217화

“내 이름. 모른다며.”

노파의 눈이 가늘어진다.

황준우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시선에는 복잡한 감정이 어렸다.

“할머니도 최근에 연하하고 연락한 적 없어?”

“지 오고 싶으면 오고, 가고 싶으면 가던 년인데 내가 어찌 알아. 지미럴.”

더 이상 대화는 나누고 싶지도 않다는 듯 휘적휘적 걸어 다시금 객점 중앙 식탁에 앉은 노파가 한숨을 푹 내쉰다.

“가뜩이나 손님도 없는데 비는 오질 나게 오는구먼. 응?”

쏟아지는 빗물 외에 무엇도 보이지 않던 객점의 입구로 검은 인영 둘이 다가왔다.

달칵, 객점 문이 열리고 두 사람이 내부로 들어선다.

자연스럽게 황준우의 시선이 움직였다.

사내 둘이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노인과 중년인 한 명.

주연하 본인은 아니지만, 어떠한 소식을 전하기 위해 온 사람들일 수도 있다.

하나 기대는 기대에 불과한 듯했다.

마찬가지로 짧게 황준우에게 시선을 둔 두 사람이었지만 대수롭지 않게 곁을 스쳐 지나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황준우는 두 사람에게서 곧장 시선을 떼지 못했다.

정확하게 말하자면 객점의 빈 식탁에 등을 돌리고 앉은 노인을 계속해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남루한 옷에, 서글서글한 인상을 하고 있는 그는 결코 범상한 인물이 아니었다.

‘분명 어디서 본 것 같은데…….’

제법 오랜 시간 기억 너머를 지나쳐 보니 노인의 얼굴에 다른 인상이 겹쳐졌다. 지금에 비해 비교적 젊어 보이며, 눈빛에 힘이 어린 때의 모습이다.

곧 황준우는 그의 이름을 떠올릴 수 있었다.

‘풍혁기!’

황궁제일고수, 금의위 대영반 풍제라는 별호로 더 유명한 그는 황준우가 기억하던 시절에 비해 많이 유약해진 듯했다.

인상도 그러했으며, 실제 내력도 많이 줄었다.

무존 서문지언과 풍제 풍혁기가 비슷한 연배의 무인들이라는 점을 감안할 때 이처럼 두 사람의 기세에 큰 차이가 나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그대는 세월을 이기지 못했군.’

황준우의 입가로 쓴웃음이 흘렀다.

본래 무인의 전성기란 것은 약관을 넘어 불혹까지 이른다. 대다수의 무인은 이 나이 때에 가장 강한 무력을 자랑한다. 비록 내력은 조금 부족할 수 있으나 넘치는 체력과, 강인한 육체, 젊은 정신은 강력한 무기인 것이다.

불혹을 넘어 지천명에 가까워질수록 그러한 무기들은 하나둘씩 날을 잃고 유약해져 간다.

이순(耳順)이 되어 갈 때쯤에는 무인으로서의 생명이 다하였다고 보아도 과언이 아니었다.

하나, 내공을 수련한 무림인 중에는 때론 이러한 한계를 돌파하여 여전히 전성기를 구가하는 이들이 존재한다.

바로 초인이라 불리는 무인들이다.

풍제 풍혁기 역시 초인이었으며, 그중에서도 상당한 강자에 속했다.

덕분에 칠순(七旬)을 넘어서까지도 정정함을 유지하고 있었지만 이제 그도 끝을 향해 다가가고 있는 것이다. 초인이라 하여도 영원히 고수로 남을 수는 없다. 천년만년은커녕 백수(白壽)까지조차 버틸 수 없는 것이 일반적인 정론이다.

물론 평범한 양민들에 비하자면 훨씬 더 건강한 삶을 살 터였다. 무공 역시 어지간한 절정고수를 압도할 수 있다. 하나 결국 무인에게 있어 세월의 힘이란 때론 그 어떤 검날과 악의보다도 무섭다. 늙은 육체는 유약해지며, 강대하던 내력을 감당하지 못해 쌓인 힘을 토해내기 시작한다.

자연으로의 회귀다.

어찌 보자면 당연한 이 결과는, 그야말로 인간으로서의 한계를 보여주는 일일지도 몰랐다.

초인이라고 하여도, 결국 인간의 범주에 속하는 것이다.

‘아쉽군. 그래도 당시에는 제법 즐거웠는데.’

풍혁기를 만난 것 역시 황준우가 중원강호에 나선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였다. 처음 본 순간 두 사람은 서로에 대한 호승심을 느꼈고, 무인답게 망설임 없이 실력을 겨루었다. 결과적으로는 황준우가 승리하였지만 쉽지만은 않은 싸움이었다.

다만, 역시 천재의 영역이랄까?

그 다음 날 벌어진 두 번째 대련에서는 압도적으로 승리할 수 있었다. 첫날에서의 고생 끝에 얻은 깨달음이 황준우를 또 한 번 성장시킨 탓이다.

‘어쨌든 많이 아쉽군. 그래도, 어디 아픈 데는 없어 보이니 다행이야.’

속내로 입맛을 다시며, 나름의 반가움을 삼킨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 창밖을 향했다.

쏟아지는 빗줄기에 옛 추억이 지나가며 현재로까지 거슬러 오른다.

‘살다 보니 또 전생에서의 악연과 많이도 부딪쳤네.’

신경 쓰지 않고 살려고 했는데, 뜻대로 만은 되지 않았다.

인생이란 역시 알 수 없는 일이다.

‘최근 흑백이 녀석들도 힘이 많이 빠지는 것 같던데. 벽을 넘어내려나.’

초인인 풍혁기와 비슷한 세대인 흑백쌍노 역시 근래 들어 점점 더 기세가 약해지고 있었다. 이 상태가 지속된다면 앞으로 삼 년 안에 은퇴를 떠올려야 할 것이다.

짧은 감상이 지나고 나니 다시금 주연하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걱정이 많은 탓일까?

근래 들어 이럴 때가 잦았다.

다른 생각을 하다가도 눈앞에 주연하의 얼굴이 나타나는 것이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양반이면 연하 소식을 좀 알려나?’

황준우의 시선이 다시금 객점 식탁에 앉아 방금 전 나와 따뜻한 김이 오르는 소면과 만두를 바라보고 있는 풍혁기에게로 향했다. 아무런 주문도 받지 않은 채 나온 음식이었지만 풍혁기의 모습에는 전혀 불편함이 보이지 않았다. 오히려 어딘지 모르게 훈훈함까지 느껴진다.

젓가락을 들어 소면 한입을 먹고, 만두까지 삼킨 풍혁기가 뜨거운지 고개를 들며 입김을 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얼굴에는 웃음기가 가득했다.

“이곳 음식은 여전히 맛있군요.”

“지미럴. 헛소리하기는. 맛있는데 손님이 없냐.”

“참, 할머니도 변한 게 없으십니다.”

“시끄러. 밥이나 처먹고 가. 한참을 안 찾아오더니 뒈질 때가 됐나. 왜 여기까지 와서 지랄이야.”

“그냥 그리워서 왔습니다. 그리워서. 어허허.”

제법 친분이 느껴지는 두 사람의 대화에 마주 앉은 중년인이 의아한 시선을 흘린다.

황준우 역시 다소 의아함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데?’

하나 정확하게 의문점을 짚어낼 만한 점이 떠오르지 않았다. 어째서인지 머릿속이 뿌옇게 흩어지는 느낌도 들어 곧장 무심하게 놓고 있던 상단전을 활성화시켰다. 생각에 안개가 끼듯 뿌옇게 변하던 감각은 사라지고 순식간에 머리가 맑게 개인다.

‘누가 장난질을…….’

저도 모르게 눈빛이 예리해졌지만 범인으로 짐작되는 이는 보이지 않았다.

동시에 밥을 먹던 풍혁기와, 투덜거리던 노파의 시선이 황준우를 향했다.

“음…….”

짧은 신음을 흘린 황준우가 손을 들어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하하, 실례.”

가벼운 말에 제법 예민하게 생긴 중년인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네놈은…….”

“그만. 괜찮네. 자리에 앉게.”

“니미럴. 남의 가게에서 시끄럽게 떠들지 말고 밥이나 처먹고 가. 아니면 비싼 술을 시키던지.”

“그거 좋군요. 비싼 술 하나 주십시오.”

“지미럴, 비싼 술이 한둘이냐? 이름을 말하란 게다.”

“그냥 객점에서 제일 비싼 거 내주시면 됩니다.”

“어이고. 그래, 먹고 죽어도 때깔이 제일 좋을 것 같은 놈으로 골라다 주마.”

투덜거리면서도 제법 기분이 좋은지 콧노래를 흘린 노파가 주방 안으로 사라졌다.

자연스럽게 객점 내부에는 침묵이 흘렀다.

‘아, 그러고 보니 저 양반도 어디서 본 것 같다 했더니…… 그때였나.’

가짜 진시황릉에 숨어들 당시, 황준우를 놀라게 했던 고수.

실력이 보통이 아니었지만 인상이 흐릿했는데 이제 확연히 기억이 났다.

아마 상단전을 활성화시킨 덕이 클 터였다.

‘그나저나 연하에 대한 소식을 어떻게 물어본담?’

지금 주연하, 정확하게 말하자면 황궁의 소식은 그 어느 때보다도 예민하고 위험한 측에 속할 터였다. 자칫 잘못 물었다가는 큰 오해를 살 수가 있다.

고민이 깊어지고 있을 무렵, 주방에 들어갔던 노파가 맑은 청색의 술병을 들고 나왔다.

“비싼 술 나왔다.”

내던지듯 건넨 술병을 받아든 풍혁기가 병뚜껑을 따고는 놀란 표정을 지었다.

“술 향이 참 좋군요. 이름이 뭡니까?”

아닌 게 아니라 그저 뚜껑을 땄을 뿐인데 술 향이 은은하고도 맑게 객점 전체를 휘감았다. 사람의 기분을 좋게 만드는 향이다.

술을 끊겠다고 결심한 황준우조차 저도 모르게 시선을 한 번 돌렸을 정도였다.

“그딴 것 없어. 내가 빚은 거다.”

“직접 말씀이십니까?”

“그래, 이놈아. 대신 값이 비싸. 그거 한 병에 금화 백 문이다.”

“무슨 말도 안 되는!”

중년인이 다시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소리쳤다.

그럴 만도 했다.

사실 금화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만금장쯤 되니 이곳저곳 넘쳐나는 것이지, 일반적인 양민 기준으로 한 달 생활비가 은화 한 문에서 최고 세 문 정도까지 쓰인다.

그리고 금화 한 문이면 은화로 오십 문이 넘는다.

따지자면 금화 하나의 가치는 한 가정이 몇 년을 벌어야 모을 수 있는 돈인 것이다.

한데 저 작은 병에 담긴 술 하나가 금화 백 문이란다.

일반적으로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인 게 당연했다.

“먹기 싫으면 꺼져. 누가 억지로 판다고 했냐?”

“익…….”

“무호. 경거망동하지 말게. 내 기분 좋게 술 한잔하러 오자고 하지 않았나.”

“하나 대영반……!”

“어허.”

평소 말투와 다른, 다소 엄하게 느껴지는 풍혁기의 음성에 무호라 불린 중년인이 아랫입술을 잘근 깨물며 자리에 앉았다.

두 눈에는 여전히 불만이 가득 담긴 채였다.

“사내새끼가 소심하게 술값에 절절매기는 쯧쯧.”

“…….”

무호를 발끈하게 하는 도발이었지만, 이번에도 풍혁기의 손짓이 빨랐다.

진정하라는 그의 손길에 무호는 혀를 차면서도 화를 삭여냈다.

“클클. 내 이 속 시끄러운 꼴 보느니 들어가서 잠이나 한숨 퍼질러 자야겠다. 다 먹고 나면 값만 식탁 위에 놔두고 가.”

그사이 콧방귀와 함께 웃음을 흘리는 기묘한 신기를 보인 노파는 다시금 주방으로 사라졌다.

동시에 두 사람의 주변으로 얇은 강기의 막이 형성된다.

자연스럽게 고민에 빠져 있던 황준우의 눈이 반짝 빛났다.

‘오랜만에 보네. 풍막(風膜).’

풍혁기의 진신무공 중 하나인 풍신공(風神功)으로 만든 강기의 막은 조화의 경지에 오른 순간부터 일반적인 호신강기와는 전혀 다른 역할이 가능했다. 그중 하나가 내부의 소리를 외부로 흘리지 않고 가두어 버리는 것이다.

결국 소리란 것도 주변의 대기를 타고 흐르니, 내공심법 중에 독특하게 바람을 다루는 풍신공만이 가능한 기술이다.

어지간한 이들은 풍막을 보지도 못하며, 당연히 함부로 열 수도 없다.

‘하지만 조율을 통해 살짝 틈새를 만들 수는 있지.’

풍막을 펼친 풍혁기조차도 눈치채지 못할 정도의 얇은 막을 만들기 위해서는 최소 조율의 경지에 올라야 한다.

결국 현 강호에서 저 막을 뚫을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는다고 볼 수 있었다.

그런 풍막을 펼치고 할 이야기가 별것도 아닐 리는 없다.

기대감을 품은 황준우는 두 사람의 입에서 나오는 말을 향해 귀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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